고속버스 10번 자리에 앉아 있다. 버스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면과 가장 맞닿아 있는 엉덩이, 다리에서부터 진동이 전해진다. 팔걸이에 걸쳐놓은 왼팔도 함께 떨린다. 주황색 가로등이 이어 서있는 고속도로를 지난다. 가로등이 잠시 없는 구간은 꽤나 깜깜하다. 버스 실내등도 꺼져 있어서 이 밤과 같은 어둠이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선 Peer Pressure가 흘러나오다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땡기지 않아서 넘기고 넘기고 또 넘겼다. 날개가 흘러나온다. 넘기려다 듣고 싶은 마음을 발견하고 내버려둔다. 지난 사람이 많이 생각나는 노래다. 다시 가로등불이 밝다. 주황색 빛, 빛들이 스쳐 지나가며 어둔 버스 안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훑고 지나간다. 언제였더라, 서울에서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던 새벽이 떠오른다. 그때 처음으로 밤의 고속버스에 홀딱 반했지. 무궁화호 입석 따위보다 안락한 고속버스가 너무 좋다. 무궁화호 입석을 타고 당일치기로 서울을 다녀오던 날 엉덩이가 무지 춥고 아팠던 걸 생각한다. 그 여파로 감기까지 걸렸었지. 기차도 좋지만 심야버스가 짱이다. 조용하다. 서로 눈 붙일 시간을 배려하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버스 달리는 소리만 들린다. 또 다음 곡으로 넘어갔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넘긴다. 이터널선샤인. 2014년의 내가 봤더라면 정말정말 좋았을텐데. 그래도 역시 좋은 영화였어. 시야가 깜깜하다. 멀리 주황색 가로등불이 드문드문 보인다. 밤바다가 보고 싶어. 부산 광안리 바다가 떠오른다. 나는 해운대보다 광안리를 좋아하지. 정면에 광안대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을 것 같아. 그 위로 달이 덩그러니 떠있었지. 누구와 있었더라.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둘중 누구여도 상관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상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죄책감이 일어난다. 참 여러 사람 상처 주고 산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아를 형성하면서 상처를 줬던 몇몇이 떠오른다. 상처를 주고도 놓아주지 못하는. 놓아주는 게 맞는 걸까, 나는 별로 놓고 싶지 않은데.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또 넘긴다. 선인장. 아까 마산 도착했을 때 딱 이 노래가 나왔는데. 그땐 밝았지. 그리고 마산인줄 모르고 터미널을 지나쳤지. 그때 혹시나해서 앞좌석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갔으려나. 큰일날 뻔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재밌었을 뻔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랬더라면 로이스 초콜릿은 못받았겠지. 헤어지기 직전 급하게 받아온 로이스 초콜릿, 아까 버스 타고 자리에 앉아서 바로 개봉. 두 조각 꺼내먹었다. 진짜진짜 맛있었어. 녹차가 짱이야. 그 맛을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입을 달싹인다. 목 언저리가 뻐근해 고개를 양옆으로 움직여 풀어준다. 앞머리가 얼굴을 간질여 오른손으로 훑어내고 양손 소매를 걷는다. 히터가 조금 덥네. 초콜릿 안녹겠지. 깜깜하다. 좀 잘까. 오늘따라 유독 선인장이 너무 좋다. 뭔가 되게 감성을 건드리는 것 같다. 이걸로 뭔가 하나 창작하고 싶은 느낌.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다시 선인장으로 돌렸는데, 다음 곡이 Amie였던 걸 순간 봤다. 데미안 라이스가 이거 난자에 대한 곡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여자사람친구의 방에서 자위를 했다고. 웃긴다. 역시 인간의 욕망이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이고.. 하하 다 부질 없다. 아니다 부질 없진 않은데. 아이고, 다 헛되고 헛되다. 공사상을 좋아해서(좋아하는 건지 지향하는 건지) 맨날 저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다 헛되고 헛되다. 주황색 가로등불. 얼굴 위로 스치고 또 스치고 스쳐 지나간다. 좋아. 좋아. 배터리 닳는다. 이제 폰 덮고 이 풍경을 좀더 즐기다 잠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