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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의 動安詩 산책
정 일 남 시인
대개 명작의 산실(産室)이 명산인 경우가 많았다. 신선(神仙)이 살았던 명산이 명작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개나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은 은거자들이 선호했으며 도를 닦듯이 정좌해서 결의를 다져 필경에 몰두해 명작을 남긴 경우를 문학사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명작이 탄생한 주소는 대개 물 맑고 산이 깊은 명산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명산에는 산의 정기(精氣)란 것이 있다. 정기란 심신 활동의 근원이 되는 힘을 말한다. 그 정기를 받아드리지 않고는 걸작을 남길 수가 없었다. 적막과 고요, 산새소리와 벽계수가 흐르는 골 깊은 은신처는 명작의 근거지였다. 속세를 멀리한 산속의 정기가 창작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 명작은 시인 스스로가 쓴 것이 아니라 산의 정기가 도움을 주어서 쓰여 졌으리라. 그 실례를 들어보겠다.
설악산에서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집필했다. 설악산이 간직한 정기를 받아서 이 명작을 썼으며 지금은 백담사에 만해문학관이 생기고 해마다 기념행사가 열린다. 특히 만해 문학상은 한국의 가장 명성 높은 문학상이 되었다. 오대산의 정기를 받아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집필했다. 서자인 이달을 스승으로 섬긴 허균은 역시 서자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릇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허균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한 것은 오대산의 무한한 정기와 시대를 비관했던 허균의 울분이 합일한 것이리라.
두타산 구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산실(産室)이다. 제왕운기는 본고에서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승휴(1224-1300)는 한국문학사에서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함께 고려시대에 서사시를 완성한 작가로 보아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이승휴는 생애에 제왕운기 외에도 동안거사집 그리고 내전록을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전록은 찾을 길이 없다. 제왕운기는 한민족의 자주성을 명확히 규정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이승휴 특유의 서사시로 이루어졌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존재를 다분히 신화적인 존재로 기록했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제단 단(壇)자를 썼다. 환웅이 곰과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했다. 그러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박달나무 단(檀)자를 썼다. 이런 차이점이 새삼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들은 단군을 쓸 때 제왕운기의 단군(檀君)을 쓰고 있다. 환웅이 그의 손녀에게 약을 먹이고 박달나무와 혼인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이승휴가 바라본 단군의 존재는 독특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이승휴만이 갖고 있는 개국신화가 한국적 서사시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제왕운기는 이승휴의 재능과 두타산의 정기가 합일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안거사집은 이승휴의 자전적 산문과 여러 편의 시 작품으로 이뤄졌다. 두타산 구동에서의 농경생활과 만년을 보냈던 생활상이 그려져 있으며, 많은 시문이 이승휴 특유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다. 그의 사생활을 우리는 동안거사집을 통해서 미약하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빈왕록은 이승휴가 원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시문형식으로 쓴 여행기라 하겠다. 여기엔 몽고의 생활양식과 문물이 세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원나라 수도 대도(북경)에 다녀온 후에 편집해 남긴 중요한 기록이다. 원나라 황제와 황태자의 책봉을 천하에 반포하자 고려에서 이를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게 되는데, 이승휴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가게 된다. 여행길에 겪은 일들과 몽고 황제를 만나 예를 표하는 예식까지 장장 112일에 이르는 이야기를 능수능란한 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빈왕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여기에 다루고자 하는 시는 동안거사집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시편 중에서 필자가 선호하는 몇몇 편의 시를 선별해 시의 산책을 통해서 이승휴의 생애와 그의 정서의 한 측면을 짚어보려고 한다. 이승휴의 생존 시대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안의 연속인 그런 시대였다.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 조정에 와서 곡물을 요구하다 거절당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국경지대에서 고려인에 의해 피살당한다. 이 사건을 구실로 몽고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무려 40여년의 고려와의 전쟁이 3차에 걸쳐 시작된다. 이에 고려의 최씨 군사정권은 바다에 약한 몽고의 약점을 이용해 강화도로 천도하지만 전란에도 조정 위정자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그러다 최씨 군사정부가 막을 내리고 문신정권이 몽고와 강화하고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게 되지만 전세는 기울어 몽고의 지배를 받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승휴는 강화도에서 조정의 부패한 정권에 실망이 컸을 것이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문사들과 접촉했으며 조정의 동정을 살피며 정치에 참여했으나 거슬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위정자들의 부패와 물욕은 만연했다. 군대에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중간에서 물자가 빼돌려지는 것에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들어 이승휴는 그 폐단을 상소했다. 또한 조정이 정치인을 등용하는데도 공정치 못함을 들어 상소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승휴의 청렴결백한 의지를 가름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 옳은 이승휴의 건의가 주변의 정치모리배에 의해 배척되어 직위에서 물러나는 비애도 겪게 된다. 이런 정치 현실에서 이승휴는 괴로워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승휴의 시에 국한 하는 것이고 이 시들은 역사학자 진성규 교수의 번역한 시를 참고함을 밝혀둔다.
바둑의 용기는 신선 사는 고장을 결정하고
용병하는 권력은 적벽강을 빼앗는다.
바둑 뚜는 소리는 옥국에 울려 퍼지고
밤늦도록 바둑을 두니 물시계에 물통 바꿔서 떨어진다
바둑 두는 재미는 몸이 한가로 와서 좋고
바둑 두는 기쁨은 적수를 만났을 때 깊다.
친구여 내기바둑 두자고 하지 말게
내 충심으로 경려 하네.
<바둑>
신선(神仙)이 산상 너래 바위에 앉아서 서로 자연을 만끽하며 노는 오락이 바둑이었다. 신선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닌 그런 존재가 신선이다. 신선은 선도(仙道)를 갈고 닦아서 도(道)에 통달한 사람이며 선경(仙境)에서 사는데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한다. 바둑을 두는 것은 그 뜻이 바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맑게 닦으려는 것이리라. 이승휴가 선호하는 것에 거문고와 바둑과 복숭아꽃이라고 전한다.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이승휴가 이 시를 쓴 것은 두타산 구동에서가 아닐 것이다. 그가 벼슬길에 올라 고려 조정에 머물 때 같은 문객들과 바둑을 둔 것 같다. 하지만 이승휴의 바둑에 대한 생각은 마음을 맑게 닦아보겠다는 선의의 생각에서였다. 결코 내기바둑을 두어 마음을 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가 신선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마음을 닦는다는 생각은 이승휴가 어떤 물욕에도 치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 바둑 두는 재미는 몸이 한가로워 좋다고 했으며 적수를 만났을 때 바둑 두는 기쁨이 한결 좋다고 한 것이리라. 이 바둑의 시를 통해서 이승휴의 세상 보는 심성이 비리와 부정에 물들지 않겠다는 은밀함을 읽을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거문고의 마음은 본래 끝이 없는데,
등잔 불빛에 붉은 기운이 벽에 엉킨 듯,
기러기발 세워놓고 줄은 팽팽하니,
산은 높고 물은 흐르는 듯 곡을 연주하네.
성연(成連)도 교묘하지 못한 솜씨 부끄럽지,
종자기(鐘子期)는 적수 못됨이 부끄러웠지,
절묘한 솜씨로 오묘한 연주를 하니,
지음은 후세에 드날리게 됨을 알겠네. 주악도
<거문고>
이승휴는 거문고 소리 듣기를 좋아한 것 같다. 그가 거문고를 직접 다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승휴가 여가가 있을 때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뜯는다는 것만 알 뿐이다. 거문고는 한국의 3대 악성의 하나인 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가 4세기경의 안악3호고분등 고구려 벽화의 주악도(奏樂圖)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한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몸체 뒤에 단단한 나무로 댄 울림통이 있다. 여섯 줄로 된 명주실의 줄은 각각 이름이 다르다고 한다. 이승휴는 달 밝은 밤에 등잔불을 켜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던 것일까. 이승휴는 거문고의 본래 마음이 끝이 없다고 했다. 그 음의 높고 낮음이 때로는 산처럼 높고 때로는 물처럼 낮게 흘러간다. 그러나 거문고 뜯는 곁에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 혹은 난세의 시름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자기가 뜯는 거문고 소리에 자신이 취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거듭 거문고를 뜯으며 백아(佰牙)의 스승 성연(成連)을 생각하기도 한다. 백아는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의 명인을 말한다.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즐겨 듣던 친구 종자기가 세상을 하직하자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이해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해서 슬퍼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일생동안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휴가 거문고에 취한 것은 그의 섬세한 심성이 거문고로 인해서 다듬어 진 것은 아닌가, 그렇게 여겨지기도 한다. 거문고와 여인의 가는 손길과 영창의 달빛이 비치는 것만 같다.
몇 년이나 몰락해 강산에 부쳐졌던가.
다시 서울을 밟으니, 꿈결 같아라
옛 친구는 모두 천상의 귀한 몸 되었는데
학철의 곤궁함 누가 구제해 주리.
서로 만나니 얼굴모양 변했다고들 하고
말을 하자니 먼저 입이 굳어짐이 부끄럽다.
일찍이 금단지게 맺은 인연 적지 않아
때때로 회포 풀고 한 번씩 갓을 털기도 한다네.
<환도>
몽고의 침입으로 금수강산은 쑥밭이 되었다. 들에 죽은 시체 즐비하고 까마귀 날아들었다. 마을에 인마도 없고 때 되어도 저녁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조정은 강화로 옮겨가고 들에 지키는 것은 들쥐뿐이었다. 이승휴는 막힌 길을 뚫고 조정이 있는 강화로 오랜만에 갔던 모양이다. 강산이 변했다. 용케 당도한 강화도였다. 같이 등과한 친구들도 전쟁에 천상의 몸이 되었다. 이 전란 속에서 구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도 오랜만의 환도로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변했다고 했다. 바람에 갓끈만 날렸다. 서로의 얼굴이 서먹서먹했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들은 고려가 몽고에 당했던 굴욕적인 패배를 어름짐작 할 수가 있다. 마치 6,25 전쟁 때 우리가 겪었던 참상을 잊을 수가 없듯이 <환도>를 통해서 고려의 전쟁과 현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만약에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이승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두타산 구동으로 돌아와 노후를 보낸 것도 전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중에 비리와 부정이 만연할 때 그것을 바로 잡겠다는 상소는 조정의 미움을 받았지만 이승휴의 올바른 선택은 자신의 직위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조정과 두타산 구동과는 너무도 먼 길이었다. 갓끈도 풀리어 다시 갓을 고쳐 털기도 했다.
선생이 길가에서 운 것을 괴상해 말라.
謫仙(이태백)은 항상 술에 취했지.
교태로운 말 껄끄럽고 새끼 꾀꼬리 지저귀는 듯,
느린 걸을 광기가 많아 춤추는 봉황이 뛰듯 하네
성가가 더욱 높아지니, 시가 비단결 같고,
천지에 뛰어드니, 술집이 고향일세.
開元(중국 현종)의 남은 버릇 지금도 남았으니,
궁녀가 얼굴을 씻기는 사나이가 아닐까.
<주정뱅이>
이승휴가 얼마나 애주가 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시가 도성에 퍼지게 되자 주변 문신들이 이승휴를 보고 주정뱅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동안에겐 달갑지 못한 별명이었다. 문청공 최자(崔滋)에게 까지 소문이 알려져 가뜩이나 스승격인 최자로부터 주정뱅이란 말을 듣게 되어 곤욕을 치른다. 이승휴는 최자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그 기쁨을 알리기 위해서 두타산 구동에 있는 어머니께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구동에 온 그 다음 해에(1252) 다시 몽고군의 침입으로 환도길이 막혀 삼척 고향에서 그럭저럭 별 하는 일 없이 자연과 벗하고 시를 지으며 지내는 동안 최자도 세상을 떴다는 풍문을 들었다. 자신을 아껴주고 등과 시켜 주었던 최자의 죽음이 슬픔을 안겨주었다.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서 함께할 형세가 아니었다. 이승휴는 없는 재산이었는데도 변방 도적들에게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두타산 구동 용계변, 거기서 어머님을 모시고 박토를 일구어 생계를 이어가고 살았다. 이 무렵 어머니가 병이 깊어 침상에 계시면서 호흡이 거칠었다. 종들도 역병으로 죽고 나머지 종도 병으로 일어나지 못해 시중할 사람이 없었다. 이승휴는 약탕으로 시중하며 밤낮을 근심으로 지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휴의 효심도 어림잡아 헤아릴 수가 있겠다. 효심이 없는 사람이 정치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손수 두 그루를 심어놓고 은근히 보호하며
작은 정원에 그윽한 운치가 깃들기를 바라네
나중에 烏府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모두들 관동에서 옛날 노닐었음을 말하리
<관아의 정원에 잣나무를 심고>
4월이었던 것 같다. 이 시는 용계변 구동의 생가에서 쓴 시는 아니다. 벼슬 할 때 관아에서 쓴 시라는 걸 쉽게 알겠다. 모처럼 그의 아름다운 정서기 풍기는 소품이라 하겠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이 시작되는 4월에 이승휴는 관아의 문객들과 잣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심는 것이다. 많은 나무 중에서 하필 잣나무를 심은 뜻은 무엇일까. 잣나무는 소나무류며 상록교목이다. 종류로는 눈잣나무, 섬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가 있다. 잣은 실백(實柏), 송자(松子)라고도 한다. 잣에는 자양강장의 효과가 있고 각종 요리에 고명으로 쓰인다. 보신용으로 죽을 끄려 먹기도 한다. 여기 오부(烏府)는 옛날 어사대 후원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까마귀가 많이 와서 살았으므로 부쳐진 이름이다. 이승휴는 개경에서 지내며 늘 마음은 두타산 구동에 가 있었다.
물이 감싸고 산이 휘돌아 별세계를 이루니,
이곳이 도읍터라 속언에 전해오나,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 모두 아득하네.
가운데는 온갖 산봉우리 다 받아드릴 만하고
밖으로는 한줄기 강물이 활줄같이 둘러 있네.
사해와 오호에 물결이 바야흐로 맑은데,
하도 맑아 한 점의 티 끼도 없어,
지금도 순임금 때 같은 바로 그 세월이라 하네.
연주성이 상서로움을 알리니,
국조의 운명이 연장되게 되었네.
<온수리>
위의 시는 경원 이시중(李侍中)이 어가(御駕)를 모시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삼랑성을 구경하며 이시중이 시를 지었는데, 이에 영감이 솟아나 그 시에 답하여 쓴 시로 사료된다. 강화도가 도읍이 된 것은 풍수지리상 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 위치상 개경과 가까웠으며 육지가 아닌 섬이었으므로 바다가 없는 몽고군이 바다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고려는 강화로 천도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바다가 감싸서 별세계를 이룬 강화는 임시 도읍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용이 알고 봉이 춤춘 것은 알바가 아니나 평지보다는 산봉우리가 많아 군사작전에도 유리했으리라. 하지만 천도한 조정은 고통 받고 있는 육지의 만백성을 생각하기는커녕 안일하게 주색가무로 향락을 누렸다니 지금이나 옛날이나 부정부패는 늘 말썽이었던 것 같다. 이승휴는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탄식을 했을 것이다. 이승휴는 직책에 연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개경으로 천도 후에 강화에서 핍박 닫는 무리들이 고려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켰을 때, 이승휴는 원종에게 삼별초군이 강화에서 탈출하는 수로를 막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원종은 이에 대책을 강구할 것을 명했으나 내각에서 응하지 않았다.
화려한 금빛 비취는 아름다운 잔치 자리에,
꽃 아래 술자리는 옛날과 다름없네.
옥 같은 술은 임금이 빚은 것을 받으니,
구슬 같은 문장은 붓 끝에 교묘하게 나오네.
몇 사람의 입이 삼조(三條)의 눈을 마셨는가.
한 번 트림 다투는 소리 온갖 구멍에서 나오는 듯,
만약에 내가 이 모임에 참여했다면,
별세계를 만들어내서 우리 공을 모셨을 텐데.
<하사주(下賜酒)>
이승휴는 다른 주변의 문객이 시를 쓰고 건네면 거기에 반드시 답장의 형식으로 시를 빚었다. 이런 습관은 주변인들이 쓰는 시에 결코 뒤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위의 시 역시 그렇다. 사관의 정원에 장미 한 그루가 있었다. 가지와 줄기가 서로 어우러진 모양이 마치 우산을 편 것 같았다. 어느 날 장미가 활짝 피었다. 문객들이 꽃을 감상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었다. 그런데 하한공(河閒公)이 장미꽃을 찬양하는 장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를 찬양하며 임금이 하사한 술을 마셨다 한다. 이러니 이승휴가 어찌 답시(答詩)를 쓰지 않고 그냥 있겠는가. ‘꽃 아래 술자리’란 시구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으리. 장미꽃이 활짝 핀 그늘 아래서 임금이 하사한 술을 마시는 기분을 측량할 길이 없다. 임금이 하시한 술을 꽃 아래서 담소를 나누며 시를 읊는 운치란 얼마나 멋과 품격이 있는 것이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구슬 같은 문장이 붓끝에서 새어나오는 것이겠다. 여기서 삼조(三條)란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다만 석 잔의 술을 말하는 것은 아닐 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승휴는 그 모임에 참여해서 임금이 하사한 술을 마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뭉실뭉실 한 조각구름이,
천길 절벽에서 피어오르고,
일시에 비가 되어 쏟아지니,
모든 마른 것이 소생하네.
구름이 오갈 때 번개가 따르고,
변화는 용과 적수가 된다네.
구덩이에 허덕이는 물고기 생각해,
빗줄기가 때로 한 번씩 쏟아지네.
<우물(寓物)>
우물<寓物>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허공(許珙)(1233-1291)이 육예시를 지었는데 대한 답시(答詩)로 <寓物>을 지었다고 한다. 허공은 경기도 김포시 양촌 사람으로 추밀원부사 때 전주도도지휘사가 되어 300척의 전함 건조의 임무를 담당했다고 전한다. 전함 90척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했다고 한다. 허공은 후에 충주산성에서 원나라의 반란세력인 합단(哈丹)의 군대와 대항해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허공은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우물<寓物>의 시에는 계절상 여름이다. 구름 한 조각이 절벽에서 피어오르고 그 구름이 하늘을 덮어 일시에 소낙비를 내리게 한다. 가물에 들었던 식물들이 춤추듯 새로 생기를 발하며 소생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천둥과 번개가 치며 일시에 여름은 물 개천을 이룬다. 이런 자연현상은 오늘이나 이승휴가 살았던 고려시대나 매일반이 아니었겠는가. 오늘처럼 오염되지 않았던 자연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승휴의 시에는 주름살이 없고 기미가 끼지 않아 깨끗함이 정겹다. 그의 서정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글씨는 모래에 찍힌 새 발자국에서 전해졌고,
까마귀가 벽에 깃들인 듯 아주 사랑스럽네.
호랑이가 움키는 듯 바람이 일어날까 두렵고,
용이 나는 듯 해 비 떨어질까 걱정되네.
단정함은 임금 앞에 조회하는 듯 하고
힘찬 것은 강적에게 달려드는 듯 하고,
취중의 글씨는 진서 행서 섞여서,
손 안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듯하네.
<글씨>
문신들은 다 붓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 한자 한자가 모여 언어가 되고 언어가 모여서 문장이 된다. 문장이 한 줄을 이루고 연이 모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상형문자는 문자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다. 새의 발자국에서 글씨를 모방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훈민정음도 한옥의 격자문에서 실마리를 찾아 발명했다는 설도 흥미로운 일이다. 글씨가 어떻게 보면 까마귀 형상과도 같고 호랑이나 용의 형상 같기도 하다. 술에 취해서 쓴 글씨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진서나 행서 모양이어서 붓을 든 손안에서 번개가 비친다고 했다. 글씨를 바르고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시를 쓴다고 보기는 어렵다. 육필 시 전시장에 가보면 투박한 시인의 글씨에 실망할 때가 있다. 글씨도 탐스럽게 잘 쓰고 시의 품위도 높은 문신이 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승휴 시인의 자필 글씨를 대할 수 없다. 그의 육필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애석한 마음뿐이다.
한 자쯤 되는 비단에 그림을 그리니,
하늘에 기댄 벽의 모습이 그려졌네.
물을 그리려니 푸른빛이 먼저 엉기듯,
꽃을 그리려니 붉은 물방울이 맺혔네.
시의 청아함은 대략 같을 수 있으나,
오묘함을 빚는 것을 어찌 겨루리.
인각(麟閣)에 단청이 빛나니,
공명의 뜻이 더욱 떨쳤으리.
<그림>
서예가는 글씨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도 함께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시인들도 서화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승휴도 서화를 그렸다. 한자의 비단에 그림을 그렸다. 담 벽을 그리고 흐르는 물도 그렸다. 그런가 하면 꽃도 그렸다. 무슨 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그린 꽃에 붉은 물방울이 맺혔다. 제 감정에 자신이 취했을까. 푸른 물과 붉은 꽃이 어우러져서 그림이 되었지만, 그 그림에 합당한 시를 심는 일이 간단치는 않았으리라. 시와 그림이 일치한 예술이란 또 다른 과제였을 것이다. 기린의 뿔이 여기에 과연 합당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원래 기린의 뿔은 없다. 그래서 극히 드문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아닌가. 이승휴가 그린 그림이 지금에 발견된다면 아마 엄청난 고가로 매매되지 않을까 싶다.
마음은 해 속의 까마귀를 맞추려고,
활을 당겨 구름 밖의 별을 바라보고,
쏜 화살이 머리 위에서 우는데,
흐르는 피가 말 앞에 떨어지네.
구율에는 예(羿)가 공명을 날렸고,
능숙한 활로 한나라는 적을 물리쳤지,
돌을 꿰뚫은 사람을 누가 어여삐 여기랴,
화살을 매만지며 공연히 슬퍼만 하네.
<활쏘기>
문신들도 옛적인 자신의 보신을 위해 무신처럼 활쏘기를 한 모양이다. 이승휴도 활쏘기를 했다. 무관들처럼 활을 잘 쏘지는 못했겠지만 위의 시를 보면 여가마다 활쏘기를 했던 것 같다. 활을 쏘는 것은 신변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젊은 시절 허공을 향해 활을 쏘면 미래에 대한 꿈이 이뤄지는 듯이 쾌감을 느끼기도 했겠다.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간다. 그 까마귀를 향해서 활을 힘껏 당겨 화살을 날려 보낸다. 그 쾌감도 좋지만 그 화살이 허공을 날아가며 운다. 목표물이 제대로 맞았던가. 말 위에 피가 떨어진다. 자신의 활 솜씨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중국 한나라 때 활쏘기의 명인인 예(羿 )는 어느 날 야밤에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길옆에 있는 물체가 호랑인 줄 알고 활을 쏘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위를 쏘았다 한다. 그 바위에 화살이 꽂혔다고 한다. 이승휴는 화살의 명인 예(羿)를 생각하면서 그 공연한 짓이 좋게 보이지 않고 마음만 공연히 언짢아 진다고 했다. 이승휴는 개경 생활에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도 타고 활쏘기도 하면서 여가 선용을 했던 것 같다.
새벽을 무릅쓰고 연산에서 출발해,
저물기 전에 월나라에 도착했네.
빠른 말굽은 옥을 자르 듯 달리고,
젖은 땀은 전대에 흠뻑 배었네.
목만(穆滿)을 모시고 노닐 수 있는데,
왕량(王良)이 아니면 누가 상대가 되겠나?
공이여 다시금 채찍을 가하여,
춤추며 요대(瑤臺)를 향하여 힘차게 가라.
<말 몰기>
몽고인들은 어린아이 시절부터 말 몰기를 시작한다. 말은 재산이기도 하다. 또한 말을 타고 달리는 기술이 없으면 몽고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들판에서 자란 사나운 말을 길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몽고군이 서역을 점령한 것도 말 몰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 <말 몰기>의 시는 이승휴가 몽고에서 체험한 기록의 산물이라 할 수가 있겠다. 이승휴는 연산에서 날이 저물기 전에 말을 타고 달려 월나라(중국 춘추시내 저강 지방에 있던 나라)에 도착했던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말발굽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남의 땅 먼 곳에서 날 저물기 전에 도착하려고 달렸으니 땀은 솟구쳐 전대에 흠뻑 젖었다. 여기 목만(穆滿)은 주나라의 임금 목왕을 말한다. 왕량(王良)은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말을 아주 잘 몰았던 사람이다. 요대는 서왕모가 놀던 곳이다. 주나라 목왕이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의 생일인 3월 3일 삼짇날에 초대를 받아 요지원에서 연회를 베풀 때 불로장생하는 천도(天桃)를 얻었다고 한다. 대체로 이승휴의 시가 상징하는 것이 중국의 옛 사람들의 행적을 예로 들어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했음을 이 시에서도 읽을 수가 있다. 말을 타는 솜씨가 서툴고 서야 어찌 대륙의 먼 길을 여행할 수가 있었겠는가.
어두운 골짜기 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비,
갈림길에 이르자 붉은 황토 물 괄괄 흐르네.
일엽편주 작다고 얕보지 말라.
만경의 거센 물결 단번에 건너리.
<도강 시>
이승휴가 서장관에 임명되어 대도(北京)로 가는 시기는 그의 나이 49세 되던 때였다. 여름 장마철인 음력 6월이었다. 서장관의 책무란 것은 여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세세히 기록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잡무도 맡았던 것 같다. 원종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았던 이승휴는 과일과 술을 대접 받았으며 여비로 백금(白金) 세근을 하사 받고 원나라의 수도 지금의 북경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 건너게 된 강이 패강(浿江)이었다. 패강은 지금의 개성 북쪽의 예성강이 아닌가 한다. 장마 비는 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졌다. 위의 시는 연경으로 가는 첫 시련을 말한다. 하지만 그 장맛비가 결코 사행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승휴의 사행 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이 시는 잘 말해준다. 이렇게 이승휴가 기록한 일지는 대개가 시의 형식으로 쓰여 졌으며 사행 기록으로는 한국의 최초의 기록이란 데 큰 의미를 갖는다. 빈왕록은 너무도 귀중한 보물과도 같은 가치를 갖는다.
여름비 10일이나 이어져 추워지더니,
길을 재촉하던 나그네, 한가로움 얻었네.
훈수(曛水)의 온갖 생각만도 견딜 수 없거늘,
요하보다 백배의 고난을 또 어떻게 말하랴.
염여(灩澦) 구당(瞿塘)도 오히려 험난하지 않고,
꼬불꼬불한 촉도(蜀道)도 어렵지 않네.
길 떠난 지 수개월 동안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이 심정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라.
비는 10일간 쏟아졌다. 10일 동안 비에 젖으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 날씨가 추워졌다. 심양의 동강인 훈수는 도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건너기의 어렵기는 양자강의 험한 구당협이나 사천성을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도 어렵다고 했으니 사행길이 어찌 수월할 수가 있었으랴. 하루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행길이 여름 장마와 싸워야 했는지, 당황한 모습이 역역하다. 이런 시련이야 말로 요하를 건너는 조각배가 세찬 비바람에 뒤집힐 듯 흔들리며 밧줄이 끊어질 듯 했다. 만약에 강신(江神)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무사히 강을 건널 수가 있었겠는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험로였다. 이승휴는 개경을 출발한지 55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도(북경)에 도착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승휴가 황후를 만나는 과정에서 봉어(奉御) 마노(瑪瑙)와 임선사(任宣使)가 궐문 밖까지 인도하자 관반사 후우현이 뜰 안으로 인도했다고 한다. 위로연이 벌어졌는데 한낮에야 헤어졌다고 전한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도의는 다를 바가 없었다고 했다. 역시 서로 통하는 것은 글이었다.
육경(六經)의 의미를 묘령에 통달한,
후우현을 기회 맞춰 조석으로 만났네.
적석(赤舃)의 제후들 토산품을 보내오고,
붉은 구름 만 갈래 천궁(天宮)을 에워싸네.
풍운의 흡족한 경사 요황(要荒)까지 미치고,
일월의 밝은 빛은 원근이 똑 같구나.
장수를 비는 충성 누가 더 간절하던가.
단하(丹霞)가 조각조각 요동 땅에서 피어노르네.
<황후 접견>
위의 시는 황후 접견이 끝난 후에 숙소에 돌아오자 후우현으로부터 받은 詩 에 대한 답시 이다. 이 시를 통해서 보게 되면 서장관으로 간 이승휴에게 베푸는 제후들과 조공을 바치는 천자의 감화가 요동 땅 전체를 감싸고 피어오른다고 했다. 제후들이 주는 토산품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정성과 성의가 깃든 품목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고려 땅이나 몽고의 땅이나 해와 달의 밝은 빛은 그 근원이 같다고 보았다. 서로 질병 없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충성이야 한결 같았을 것이다. 하늘도 무심치를 않아 햇빛에 비치는 붉은 빛의 운기(雲氣)가 조각조각구름에 피어오르기도 했다. 비록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지만, 시대상황에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풍습에서 이승휴는 많은 것을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국을 대신해서 먼 곳을 온 서장관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이승휴가 원나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 조정으로 돌아 왔을 때 주상께서 대단히 기뻐하시며 일행을 내전으로 불러드려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한다.
우연히 유고(遺稿)를 찾다가 다시 침묵에 잠기노니,
농부가 어떻게 정음(正音)을 맞을 수 있으랴.
스스로도 우습구나. 가난한 집안 일물(一物)도 없으면서
공연히 헌 빗자루 갖고 천금을 누리려 했네.
<편집 후기>
이승휴는 원나라 기행문을 완성 한 후에 아쉬운 듯 편집 후기를 우연찮게 썼다. 그것도 아주 빼어난 시 감각을 살려 사행시로 마무리를 했다. 그의 기행문은 일생일대의 원나라를 2번 방문한 것으로 행운이었으며 그렇게 원종이 배려한 것에는 이승휴의 학문과 문장이 중국을 뛰어넘는 천재적 재질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77세의 생을 살면서 남부럽지 않은 정치생활을 했던 동안거사 이승휴, 그의 정직하고 사심 없는 정치생활에서 그릇된 정치를 상소하다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으며 부정과 비리라는 오점을 남기지 않은 정치생활에서 오늘의 세태를 비교하게 된다.
이상으로 미비하지만 이승휴의 선시(仙詩)를 산책하면서 그가 살아온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고려의 시간과 공간을 산책한 기쁨이 새롭다. 단군을 신화의 가상 인물로 여기지 않고 역사적 실재 인물로 보았던 사고와 폭넓은 안목은 이승휴에 대한 존경심을 뒷받침해 준다. 그의 말년을 보냈던 두타산의 정기가 지금은 <두타문학>으로 계승하고 있다. 거문고와 바둑과 복숭아꽃을 선호했던 이승휴는 두타산 구동 용계변에 복숭아나무 천 그루를 심어놓고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 마시며 말년을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을 따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청렴하게 살았다. 그는 두타산에서 신선의 경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승휴는 2005년 문화관광부가 제정한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해마다 10월에 이승휴를 기리는 백일장과 기념사업이 있다. 2014년에 이승휴를 기리는 '이승휴뮨화상'이 제정되었다. 2014년 김윤식 평론가가 제1회 문화상을 수상. 2015년 제2회 조정래 소설가. 2016년 조오현 스님이 수상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