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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기획된 역사 관련 포스팅 - 12.12 쿠데타 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올해 12월 12일에 단편으로 내보내려고 했었지만, 기맑사(?)와 연말연시 선물상납, 모 지인의 구매대행 등으로 인해 이리 뭉개고, 저리 뭉개다가(?)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어서 이제서야 포스팅합니다.
이번 포스팅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와 그 쿠데타를 일으킨 한국군 사상 최대의 사조직이라 불리는 하나회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총 3부로 나눠서 진행할 예정이며, 순서는 다음과 같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포스팅 1부
1. 하나회의 모태 1/2 : 옥포만의 오성회(五星會).
2. 하나회의 모태 2/2 : 육사 11기냐? 정규육사 1기냐? - 기칭파동과 북극성회
3. 빡통 날다(?). 그리고 전대갈도 날다(??) - 5.16 쿠데타
▶포스팅 2부
4. 특혜 너무 쳐먹어서 대머리가 되버리신 전대갈 장군(?)
5. 호소. 하나회를 살려주세요 : 윤필용사건
6. 윤필용 사건 그때 그사건 후, 다들 뭐하고 지냈나??
▶포스팅 3부
7. 궁정동이 키워준 빠박이 대통령 : 1979년 10월 31일 후
8. 권력의 심장에 대검을 겨눠라 :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9. Aftermath (完)
원래대로라면 1979년 10월 31일부터 12월 12 쿠데타까지 다루려고 했지만, 다들 아시다사피 하나회를 빼놓은 상태에서 12.12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스팅을 3개로 늘려잡더라도 다뤄야겠다는 생각에서 다루게 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관련 포스팅은 될 수 있으면 주기적으로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본 포스팅은 최대한(?) 축약/생략한 게 많으므로, 세부지적/오타/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미리 밝히는 주요출처 : 별들의 공화국 (송의섭 作 - 고려서적)
제5공화국 (MBC 주말드라마)
만화 박정희 (백무현/박순찬 作 - 시대의창)
만화 전두환 (백무현 作 - 시대의창)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역사문제연구소 기획/서중석 作 - 웅진 지식하우스)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 (이홍환 作 - 삼인)
한국 현대사 관련 책자를 보면 심심찮게 니오는 이 한장의 사진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5.6 공화국(전두환-노태우) 내내 정-관-군의 요직이란 요직, 단물이란 단물은 다 쳐먹고 독차지한 하나회의 사진이다.
10.26 박정희 암살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공백기를 비집고 들어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하지만 모든 쿠데타가 그렇듯이, 쿠데타의 주범을 보좌해주지 않으면 '삼일천하'로 끝난다. 하지만 전두환은 군 내 사조직이라는 '하나회'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끝내 성공시켰고, 이 이후 벌어지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와, 오직 '그들만의 대한민국'의 제물이 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희생을 불러왔다.
물론 그당시 많은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들도 그들이 망쳐놓은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싸웠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방부에서 다시 5공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짓거리들을 벌이고 있다. (예를 들면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무력화라던가..). 그만큼 이 군사독재의 망령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소리다.
혹자는 12월 12일 쿠데타 포스팅 주제에(?) 무슨 3부작씩이나 하고 앉아있냐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쿠데타라는 게 무슨 양판소 주인공처럼 1:41만으로 싸워서 하는 게 아닌 만큼, 12.12 쿠데타'는 물론', 그를 뒷받침해줬던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다루고 넘어가야, 12.12 쿠데타에 관해서 논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하나회 관련 정보까지 포함하여 3부작으로 편상하니, 많은 양해 바란다.
[프롤로그 - 1952년 1월의 옥포만]
1952년 1월 20일. 그러니까 이 날이 경남 진해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벤플리트 주한 미8군 사령관 등이 참석한 육군사관학교(정확히 말하면 4년제 정규육사 1기) 재개교식이 열린 날이였다.
1952년이라면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이라는 상황이라는 얘기지만, 4년제 사관학교를 세우겠다는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욕심?)와 벤플리트 유엔군사령관의 물적/인적 자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가능했다.
4년제 육사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은 대단했다. 일례로, 일본군 출신으로 이뤄졌다는 모자란 정통성을 확립라기 위해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춘생 준장을 초대교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규육사 1기(육사 11기)의 입학식을 시작으로 이들이 졸업할때까지 6차례나 진해육사를 방문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립대인 서울대에는 코빼기도 한번 안비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안춘생 교장의 훈시와 같은 '국토를 지켜내는 지성적인 무인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나가서는 선도적인 공인으로 활동하며, 모범적인 민주시민으로 봉사하게 하'려는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4년제 육사교육은 해방 전후 한국군의 전통이라는 이념에 미국식 웨스트포인트 제도를 접목하겠다는 절충형이였지만, 다들 알다시피 한국군의 주류 군사문화는 '일본군식 기합문화'였다.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친일파가 득시글거리는 곳이 남한이였는데, 군대만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이런 걸 감안한다면 안춘생 준장의 이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셈이였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그당시 그 누구도 - 본인들조차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Ⅰ.하나회의 모태 1/2 : 옥포만의 오성회(五星會)]
이처럼 정규육사는 이상은 좋았지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좋은 제도와 이상이 있어도 그걸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관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있으나마나한 일이라는 건 상식 아니겠는가?
당시 정규육사가 가지고 있는 (위에서 지적한 문제 말고도) 또 하나의 문제는 '패거리 문화'가 성행했다는 것이였다. 소위 말하는 '끼리끼리 문화' -즉 지연에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깽스타 문화(?)가 여기서도 기승을 부린 것이다.
실제 당시 정규육사 과정에서는 정정당당하고 공정한 품성과 인격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생도를 투표에 의해 '명예위원'으로 뽑고, 성적에 따라 반 편성을 계속 바꿔주어 '폭넓고 허물없는 교제관계'를 시켜주는 등 '민주주의 훈련'까지 시켰지만 교관과 교수들만 안보이면 '아 씨바 내가 언제 그딴거 배웠어'란 듯이 지들끼리 뭉쳐다디는 버릇은 여전했다.
당시 생도는 200명 남짓, 그 중에서 영남 출신의 생도들의 유난히 돋보였는데, 우수한 성적이나 바른 품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게 유독 눈에 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5명 - 전두환,노태우,김복동,박병하,최성택이라는 5명의 생도였는데 시도떄도 없이 술을 끼면서 밤새 토론을 즐겼다고 한다. (그들의 주요 토론 주제는 '우정'이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야. 우리 나중에 모두 장군으로 출세하자!' 라고 말을 꺼냈는데, 이에 모두가 찬동하여 자신들의 모임을 오성회(五星會)로 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별 이름을 하나씩 지어 부르기로 했는데, 그 명칭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이 중 박병하는 정규육사 1기(육사 11기)에서 탈락, 오성회 멤버에서 자동으로 제거됬지만, 암튼 그당시 이들은 자신들을 오성회라 칭했다. (생도들이 으레 그렇듯이, 모두가 장군이 되는 게 소원인 만큼, 오성회라는 이름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 취지는 '조국을 위해 일하려면, 끊을 수 없는 유대를 가져야 한다'였는데, 이때는 단순 친목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해먹는 멤버가 나올 줄은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거기까지였다. 정규육사 1기 졸업 후(1955년 10월), 오성회 멤버들은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방의 소대장으로 배치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이들의 우정은 최초의 시험대에 오른 셈인데,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다시 북극성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Ⅱ.하나회의 모태 2/2 : 육사 11기냐? 정규육사 1기냐? - 기칭파동과 북극성회]
정규육사 1기생들은 나름대로의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최초의 4년제 육사과정 - 미국의 교육제도와 우수한 교육진, 대통령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몸인데다가, 과거 어느 기수보다도 오랫동안 학교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본은 이들의 자긍심이 '기스'를 내고 말았으니, 정규육사 1기의 졸업을 앞둔 1955년 4월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생도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집광고에는 '정규 4년제 육사 1기 모집이라 해놓고 졸업할 때가 되니 슬그머니 바꿔놓은 거니, 따지고 보면 생도들을 우롱한 거나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리고 1년짜리 단기육사와는 달리 정규육사는 학사학위까지 받은 '뭔가 남다른' 생도들이니 가만히 있겠는가?
결국 이들은 생도대표인 김성진과 백운택(☜이양반 잘 기억해두시라)을 보내, 당시 학교장이였던 박병권 교장과 육참총장인 정일권에게 항의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정규육사 1기'의 불만을 알고 있지만, 단기육사 출신의 장교들은 한국전쟁 참전 지휘관들이자, 당시 군의 중추였으니, 이들의 반발도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육사 ##기' 대신 '육사 ##년 졸업생'으로 합의를 보는 선에서 끝내는데, 이를 '기칭파동'이라 부른다.
(나중에 5.16 쿠데타 후 1966년에 '육사 ##기생'으로 공식 확정된다.)
이와 같이, 이들은 엘리트의식으로 뭉쳐 있었다. 선배들을 무시해서라다기보다는, 강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였는데, 이와 같은 엘리트의식은 전방에서의 이전 기수와 충돌을 빚게 된다. 그것도 소대장 때부터..
육사11기(이제부텨 편의상 정규육서 1기를 육사 11기로 칭한다.)와 그 전 기수는 아무래도 마찰이 심할 수밖에 없다. 선배장교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전선에서 싸우고 있을때,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11기'이고, 11기 입장에선 '도덕성을 상실하고 타락한 짜가 장교'였다.
실제로 당시 이들은 병사들의 식량을 착복하고, 밤이면 밤마다 영내를 나가서 노름판에 쩔어살고, 그나마 쥐꼬리인 사병들 월급은 떼쳐먹고, 그것도 모자라 농장운영이나 숯구이라는 별별 핑계로 사병들을 개인 잡부처럼 부려먹었다. 한마디로 일본군의 악습에 쩔어살던 자들이였다.
(물론 이들 11기가 아무리 생도시절에 배운 '3금3기'가 있다해도, 이에 대한 면역력이 사실상 재로 상태였다. 당시 군사문화는 일본군의 막가파-빠따질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짐작하겠지만, 실제로 이들 11기도 구 일본군의 악습에 빠져들게 된다.)
암튼 알게 모르게 선배들의 냉대와 차별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정규육사 장교들의 지리멸렬을 방지하고, 선후배간의 연락을 취할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운영해온 동기회 조직을 확대하여, 61년 4월의 육사 17기 졸업식을 기해 발족된 총동창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군내 최초의 종적 사조직인 북극성동창회(北極星同窓會) - 줄여서 북극성회라고 불리는 단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군 내 사조직은 불법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당수의 기억이 맞다면, 현재의 군인복무규율에도 사조직을 조직하는 것은 군법위반이다.) 하지만 당시 육본에서는 이를 묵인해준 듯 한데, '4년제 육사 대부분이 전방에 배치됬는데, 친목이라도 다지지 않으면 뭔 재미로 군생활 하겠느냐'라는 게 이유였다.
[Ⅲ. 빡통 날다(?). 그리고 전대갈도 날다(??) - 5.16 쿠데타]
사실 오성회나 북극성회는 군 내 사조직이긴 하지만, 자기들끼리 이득을 보기 위한 게 아니라 단순 친목단체였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인물에 의해, 그리고 어떤 사건에 의해 타락한 군인의 결정판인 정치군인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리고 이 소식은 당시 육사 참모장 서재관 준장(육사 2기)와 교육처장 장경순 준장(특), 육사교장인 강경훈 장군의 귀에 흘러들어갔고, 오전 10시에 생도대장 김익권 준장(욱사 5기), 교수부장 최영두 대령 등 육사 지도부 8명이 교장실에 모여 대책회희에 들어갔는데, 강 교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어어 박 소장(박정희)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소. 군 지휘관이 부대실정을 파악하는데도 몇달이 걸리는 법인데, 장면 정부가 들어선 지도 1년이 안됬는데,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때려부순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군 상호간에 교전이 벌어져 피를 흘리는 일이 벌어질까 우려가 되는 상황이오.'
당시 다른 참모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이 때 장도영 (당시) 육참총장이 '우리 육군은 혁명(5.16 쿠데타)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육성방송이 교장실 내의 라디오를 통해 나오고 있었고, 이때부터 회의 분위기는 '자연히'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시 북극성회 회원들도 비상소집한 건 마찬가지. 처음에는 이들도 '군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한다.'라는 원칙론을 내세웠고, 강 교장은 생도들에게 '제군들의 선배 중 일부가 정치에 가담코자 혁명을 일으켰지만, 군은 엄연히 지휘계통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인 만큼 경거망동을 삼가하라'라는 훈시를 내렸지만, 그날 오후 육본 군사혁명위원회에서 강 교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쿠데타에 가담한 박창암 대령, 그는 옛 상관에게 명령조로 이렇게 말했다.
'생도들은 서울시내에서 혁명 지지시위를 해줘야겠소. 이건 박 장군(박정희)의 명령이오.''
이후 육사 내에서 찬반양론이 갈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쿠데타에 찬성했지만, 박정희의 육사생도 동원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북극성회의 주도적 멤버들과 강 교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결국 다음날 17일, 박정희는 육사에 '조사위원회'를 파견하여 (1대) 북극성회 회장 강재륜 대위와 김성진,서우인,한건희 대위를 육사 내 헌병대로 압송했고 '반혁명분자'라는 낙인까지 찍어놨다. 그리고 이들은 육사 내무반에 비치된 개인소총까지 압수하는 등 무장해제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박정희는 육사를 '반혁명분자'로 찍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박정희는 육사 참모장인 서재관 중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박정희. 그는 서 중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총살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까지 강 교장은 행방이 묘연해서 쿠데타와 같은 비상시국에 가장 적절한 곳에 위치하여 가장 적합한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게 지휘관의 임무이지만, 이 당시 뭐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저녁쯤에나 도착하여, 그간의 상황을 보고받은 강 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좀 더 기다려보자'라는 말만 남겼다.
(떄문에 향간에서는 강 교장이 쿠데타 반대 입장을 가진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과 6군단장인 김웅수 수장 등과 공동대처방안을 놓고 접촉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강 교장은 육본으로 간다면서 지프차 두대에 분승 - 이때 특별부대장(대령),헌병부대장 (소령), 전속부관(대위)가 동행했다-하고 나섰는데, 자정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서 참모장이 박창암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강 교장의 행방을 물었지만, 대답은 '알 필요 없다. 여기서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말만 나왔다. 하지만 그때 강 교장은 이미 육본에 도착하자마자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연행된 후였다.
이 이후 구심점을 잃어버린 육사는, 결국 다음날인 5월 18일, 쿠데타 지지를 표명하는 시가행진에 나섰다.
이후 강 교장과 이한림.김웅수 중장은 쿠데타 주도세력에 의해 옥고를 치르지만, 이 시위를 이끌어낸 북극성회 주도 멤버들과 육사 교수부 장교들은 '이들은 단지 군의 명예와 나라의 장래를 염려했기 때문'에 이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고, 순탄한 길을 걸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혁명최고회의 임원과 중정, 경호실등의 감투를 받게 된다. 대표적으로 김광욱.백낙의,송한호,임동원,심기철 대위 등이 이런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현대사를 배웠다면 누구나 할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 당수가 여기까지 말해놓고도 말하지 않은 것..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제까지 알기로는 이렇다.
5월 17일, 전두환(당시 대위)이 군사혁명위원회의 박정희를 찾아가 '우리 육사 11기와 모든 동창생은 이미 혁멍을 지지하고,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우리는 육사생도를 동원하여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벌이기로 결의했다.'라고 말한 후 11기들을 동원하여 혁명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 이후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출셋길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낙선 (당시 소령 - 쿠데타 가담)이 당시 메모한 소위 '이낙선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일부만 인용한다.
전두환 대위가 이동남 대위 집으로 찾아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한 결과, 혁명 주체세력이 박정희 장군임을 파악하게 됨. 박 장군에 대해서는 박 장군의 전속부관이였던 손영길 대위 (육사 11기)를 통해 과거부터 잘 알고 있었음 (이낙선 메모 - 5월 16일 저녁)
이동남,전두환 대위 등 5명은 혁명위원회 본부에 들어가다 김종필 중령을 만났는데, 김 중령에게 자신들의 결의사항을 설명하고, 차량지원을 약속받음. 이들은 김 중령과 헤어져 들어가다가, 오치성 대령(육사 8기)을 만나 전두환 대위가 육사생도를 끌어내 가두시위를 벌이겠다는 계획을 말했으나, 오 대령은 '어려울 거요. 잘 해보시오.'라는 반응을 보임. (이낙선 메모 - 5월 17일 오전)
육본내 혁명위로 들어간 전두환, 이영기 대위가 박창암 대령에게 경위를 설명하자, 옆에 있던 박치옥 대령이 이들을 당장 잡아넣어야 한다고 흥분함. 육본에 먼저 도착한 상영훈 교장이 생도 지지데모 반대 의사를 밝히며...-중략-...전두환.이영기 대위 등을 반혁명분자로 중상했던 것임. 이에 박창암 대령이 강 교장과 전 대위를 대질시키자고 주장, 전두환.이영기 대위는 총장실로 들어가 박정희 소장 등 혁명군 간부들이 보는 가운데, 강영훈 중장과 대질이 이루어짐 (이낙선 메모 - 5월 17일 밤)
전두환, 이영기 대위가 동대문에서 행진대와 합류하고, 생도 800명, 졸업생 200명 등 1000여명에 이르는 데모대는 동대문을 출발, 시청앞 광자에 이르는 코스로 행진을 실시함. 시청앞 광장에서 대표 김광욱 대위, 연대장 생도의 결의문 낭독이 있었음. 사실상 혁명은 성공했음 (이낙선 메모 - 5월 18일자 오전)
그리고 전두환이 집권한 후 1981년 초에 나온 '황강에서 북악까지 (천금성 作)' 라는 전두환 전기 비스무리한 책이 있었는데, 유난히 이 책에서 5.16 부분을 강조했던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두환의 '쿠데타 지지결의설'이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과장론'의 근거는 이렇다.
① 당시 시가행진에 가담했던 이동남에 의하면 '아니올시다'라는 반응이다. 전두환이 쿠데타의 주체를 파악한 시점부터가 틀리다고 했는데, 이동남 대위의 집을 찾아가서 알았던 것이 아니라, 하루 전인 이 대위가 당시 원효로에 있던 그의 집에 찾아가 귀띔해줘서 알았다는 것이다.
② 당시 전두환,노태우 등 오성회 멤버들은 5.16 당시 북극성회의 쥬류였던 육사장교단에도 끼어있지 않았고, 그들과도 가까운 사이도 아니였기 때문에 시가행진을 이끌어낼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③ 이낙선 메모에 나오는 전두환-이영기 대위간의 대질을 주선한 박창암의 증언이 결정적이다.
"16일 오후 육사에 디녀온 뒤, 나는 사실사 육사생도 동원문제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17일 밤, 율본에 찾아온 강 교장이 박정희 장군에게 '박창암 대령이 군대를 끌고 들어와 육사대에 반감이 생격 생도동원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한 모양이다. 박 장군이 다시 나를 불러 '육사 동원문제가 어떻게 됬느냐'고 묻길래, '교장이 반대하니까 현재로서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박 장군이) '그럼 서로 말이 다르지 않느냐'라면서 역정을 냈다. 그래서 내가 '그럼 대질하도록 하자'라고 제의, 박 장군과 혁명주체들이 죽 둘러앉은 자리에서 대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강 교장은 나와 박치옥 대령으로부터 '거짓말한다'며 갖은 모욕을 당했고, 곧바로 연행됬다. 혹시 나와 강 교장이 대질하는 장면을 주위에서 지켜볼 수는 있었겠지만.."
"일개 생면부지의 대위가 3중4중의 경비망을 뚫고 들어와 당시 혁명의 총수였던 박 장군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5월 17일 아침 혁명위 본부에서 전 대위를 목격한 적도, 또 누구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④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증언은 바로 전두환 본인의 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