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를 쓰자고 시작을 했는데 찔끔거리며 쓰다가 보니까
~ 벌써 닷새를 후기를 쓰면서 이러구 있네요 ㅠ.ㅠ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고 하겠지만,하는 일도 없이 어찌나 바쁜지. 늦깍이 연애를 하니까는 시간이 모잘라요~~ 오늘은 기필코 끝을 내리라 ㅡ.ㅡ
10.9일 밤에는 기륭전자 문화제에 다녀왔어요. 김소연 분회장님이 얼굴 표정이 밝아서 마음이 놓였어요. 역시 단식을 중단 하시니 농성장의 그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진 느낌이 나더라구요. 앞으로는 제발 밥은 먹으면서, 밥심으로 싸우자고 자유 발언에서 말씀을 드렸어요. 농성장 천막을 자세히 봤더니~ 글쎄 전주 촛불들이 7월인가에 보내셨다는, 천에 쓰여진 응원 글씨가 있더군요. 전주 촛불들의 활동에는 정말이지 감탄했습니다. 이 칭찬은 오체투지 하면서 얻어 먹었던, 정말이지 맛있던 그 밥 때문에 하는 아부가 아니고요.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ㅋ~ 그리고 저번 이랜드 바자회에서 처음 만났던 이쁘고 씩씩한 꼬맹이 아가씨도 만났지 뭡니까~ 이제 만으로 세 살이 지났다는 이쁜 꼬맹이 민서가 할머니랑 같이 왔더라구요. 민서 할머니는 이랜드에서 일을 하셨고, 지금도 투쟁을 하고 계십니다. 민서가 촛불을 들고 문화제에 함께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면. 이쁘기도 하지만 좀 슬프기도 하더군요. 민서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 전에, 이 말도 안 되는 21세기 노예제도인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우리 어른들 손으로 해결을 해야겠다는~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이 싸움은 고통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싸움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싸움입니다. 지금 당장은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먼산에 불이 난 걸로 생각을 하다가는 말이죠, 조만간 그 불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태우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삼키고, 급기야는 우리 모두를 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기체로 씁니다~ 이해를 해주세요~
오늘도 순례를 끝내고 쉬고 계시겠구나. 그 분들과 이 땅에서 자기가 선 자리에서 힘겹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빈다. 무척 늦었지만 순례 후기를 써본다. 내 개인의 사소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훗날 이것도 어떤 쓸모가 있는 기록이 아닐까? 그런 거창한 뜻도 조금은 있고, 내가 지나온 과거를 보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안은 경험은 그 당시에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뭐가 남는 것이 없더라.
이틀 참가하고 얼굴이 탔다. 이마에 살이 벗겨진다. 한 달이 넘도록 순례를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상상을 하기도 힘들다.
지난 주말 연휴에는-10.3일 10.4일- 오체투지 순례에 이틀 참여를 했다. 지난 9.20일 토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일행 4명과 함께 내려가서, 오후 시간에 잠깐 순례에 함께하기는 했지만, 왼쪽 손을 비롯해서 어깨와 무릎 전체를 다쳐서, 오체투지를 못하고 반배를 드렸다.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꼭 다시 순례에 가서 스님, 신부님들과 함께 오체투지를 해보고 싶었다.
10.2 출발
10.2일 밤 11시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전주행 리무진 버스를 탔다. 한 2년 전부터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서 하는 여행을 가려고 알아보다가 공항 리무진버스를 알았다. 강남버스 터미날에 비해서는 집에서 참 가까우면서 여러 곳으로 가더군. 28석 좌석에 20석 정도가 찼다. 밤 시간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빠르게 달린다. 어두워서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를 고속도로를 버스는 정말 잘 달리더라. 읽으려고 가져간 우석훈 책을 좀 보려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포기했다. 편안한 의자에 기대서 자면서 있다보니 목적지에 나를 내려줬다. 목적지에 가는 그 중간 과정에 대한 관심 따위는 필요 없더구나. 그저 출발지와 목적지만 있는 그런 여행. 어찌 보면 내가 화물이 된 느낌도 들더라. 그저 표를 살 돈만 있으면 내 마음이야 어떻든 거기까지 나를 데려다 주다니. 좀 많이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 3일 새벽 1시 50분에 전주 코아호텔에 내렸다. 택시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냥 가방을 메고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노송광장이라는 학교 운동장 보다 넓은 둥그런 광장이 나오더군. 나무 의자에 앉았다. 순례단과 만나는 시간이 아침 8시 10분이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어디서 남은 시간을 보낼지 궁리했다. 한 달이 넘도록 순례를 하신 분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도 편하게 지내온 지난 한 달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도 좀 고생을 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럴 작정으로 서울에서 내려왔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흠 여러 생각이 들더라. 노송광장-새벽에 좀 환해져서 이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거기에서 노숙을 해서 그랬을까? 내 눈에는 노숙광장으로 보이더라 ㅋ-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가지고 온 옷가지를 다 꺼내서 껴입고 나무 의자에 누워서, 무릎 담요 3개를 몸 위에 덮었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추워서 깼다. 혹시 몰라서 가지고 내려온 노란색 비옷-촛불 시위 하면서 입었던 정말 유용한 비옷-까지 꺼내서 입었다. 나 혼자 생각에는 나름 5월부터 촛불시위에 참가를 하면서 시청광장에서 노숙으로 보낸 시간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혼자 생각이었다. ㅠ.ㅠ 참 춥더라. 이래서 없는 사람들이 살기는 여름이 더 좋다는 말이 생겼구나 싶더군. 노숙하는 사람들이 깡소주라도 한 병씩 마시려고 구걸을 하던 모습과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 이 가을에 벽도 없고 창도 없고 지붕도 없는 바깥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참말이지 오지게 춥더라. 춥기도 하고 차도 많이 지나가고, 게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도 나고, 땅에다 그냥 내려놓은 가방 걱정도 되고. 잠들었다가 깼다가를 무한 반복. 5시 35분에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떴다. 안개가 조금 낀 광장 주위에는 마치 유령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더군. 좀 많이 놀랐다. 정말 유령인줄 알고. 새벽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묵묵히 광장을 돌더군. 청소차가 날이 밝았음을 알리며 지나가더군. 역시 어느 도시나 새벽을 알리는 건 청소하는 분들이다. 잠에서는 깼지만, 뼛속 까지는 아디더라도 정말 몸 깊숙이 파고드는 한기.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도 떨리는 내 몸. 살랑거리며 나뭇가지와 잎을 흔드는 그 바람이 불과 얼마 전까지는 나를 기분 좋게 했더랬다. 계절이 바뀌는게 이렇게 무섭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피를 빨려고 달려들던 모기~모기가 불쌍해 보여서 몸보시를 조금 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얼마나 춥고 배고팠으면 나한테 달려들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기들은 벌써 내 피를 빨았지만. 전주 노송공원이라는 이 공간에서 같이 추위를 보낸 모기와 내가 남 같지가 않더라 ㅋㅋ
10.3 만남
가져간 책을 좀 펼쳐서 읽자니 6시가 될 무렵에는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 들더군. 밝은 쪽을 동쪽으로 짐작을 하고 길을 나섰다. 순례 행렬이 출발하는 안적 삼거리까지 걸어서 가려고 말이다. 공원 청소를 하려고 지나가는 50대 여성분께 공손히 24시간 편의점이 어디에 있나 여쭸다. 친절하게 알려주시네. 6시 27분에 편의점에서 따끈한 야채호빵 두 개와 따듯한 베지밀 한 병 그리고 삼양 컵라면 하나를 먹으면서 몸을 좀 녹였다. 최대한 천천히 먹으면서 따듯한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편의점 여자 주인은 정확하게 안적 삼거리가 어딘지는 모른다고 하시네. 그렇지만 거리가 꽤나 머니까 걸어가지는 말고 택시를 타라고 충고를 하신다. 충고에 따라서 택시를 탔다. 기사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대충 어디일 거라고 한다. 7시 15분 택시 기사가 내려주고 간 주유소에서 씻고 이빨 닦고 ~ 가다려 보지만 순례단은 안 보여서 여기가 아닐꺼야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들이 오실 걸로 예상이 되는 17번 국도를 거슬러 갔다. 8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주유소가 보이더라.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주유소 직원에게 오체투지 순례단을 보았는냐고 물었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 지나갔다가 한다. 이런 너무 많이 왔구나 ㅠ.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갓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은행이 어찌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 수억년을 살아서 화석나무라고 불린다는 은행나무. 종족번식 이라는 조물주가 정한 그 섭리에 따라서 씨를 떨구지만,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서 그 씨가 뿌리를 내릴 틈은 없고,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에 밟혀서 깨져서 뒹군다. 9시가 가까워서야 아까 택시에서 내렸던 그 주유소에 왔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순례 행렬이 출발한 지가 얼마 안 되었단다. 아 이 얼마나 희소식~~ 감격~~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서 걷다가 보니까 드디어 보이는 순례단. 교통 정리를 하시는 분께 가볍게 인사를 드렸다.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반배를 하면서 오르막길을 조금 걸어서 갔다. 금방 휴식 시간이다~ 다시 출발이다. 내 앞쪽에 아버지와 온 이제 막 4살이나 되었을까? 꼬맹이 하나가 아버지 오른손을 잡고 있더니, 다른 사람들이 오체투지 하는 것을 보았는지 막무가내로 오체투지 하려고 든다 ㅋㅋ 아버지는 놀래서 말리고. 그래도 하려고 하는 꼬맹이. 급기야는 목마를 태워서 달래시더라. 11시 21분 점심 시간이자 휴식 시간이다. 버스로 공원-호동공원인지 그랬다-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는다. 일단 아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혼자 점심을 먹는다. 미숫가루를 가방에서 꺼냈다. 물에 타서 먹으면서 주위를 보자니, 어떤 분이 주먹밥을 먹으라고 권하신다. 얼씨구나 좋다는 마음으로 받아서 먹고 돗자리 꺼내서 잔디 위에 누웠다. 우와 참 편하다. 노송광장에서 보낸 새벽이 하도 추워서, 얼굴만 모자로 가리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누웠다. 몸 속에 쌓인 한기를 떨쳐보자는 마음이었지. 참 따뜻하니 좋더라. 서울에 두고 온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간단하게 했다. 기분이 좋더라~ 이번에 내려 오면서 같이 왔으면 했는데, 그래도 나 혼자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선선히 그러라고 이야기를 해줘서 참 고마웠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 든든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자고 일어나서 책을 좀 읽다가 화장실에 다녀와서 출발 채비를 했다. 아이들 네 명 정도가 공원이 좁다고 막 뛰어다니면서 놀더군. 역시 아이들은 신나게 놀 때가 가장 이쁘다~ 가방에서 목장갑을 꺼내서 손에다 끼고, 무릎보호대-스노우보드 타면서 쓰던-를 꺼내 면바지 안에 입었다. 가방은 진행 차량에 맡기고 나도 이제는 본격적인 오체투지를 할 준비를 마쳤다. 서울에서 주황색 반팔 옷을 입은 화계사 신도들도 여럿이 버스를 타고 오셨다. 공원 한편에 모여서 수경 스님이 하는 말도 듣고 따로 이야기들을 하신다. 공원에서 오전 순례가 끝난 자리까지는 화계사 버스를 탔다.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오체투지~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와 코를 아스팔트에 대본다. 풍겨오는 냄새. 싫다. 눈을 감고 엎드려 있자니, 서서 반배를 할 때와는 느낌이 무척 다르다. 지나가는 차들이 내는 소리가 더욱 무섭게 들리더라. 커다란 화물 차들이 속도를 늦추는 기색도 없이 휑하고 지나가면, 눈을 감고 엎드려 있는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도 들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쇳덩이들. 어디를 저렇게들 빠르게 가고 있을까? 사람이 타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고, 무언가 무서운 것들이 지나가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
쉬는 시간에 도로 바깥 보도블럭 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숨이 좀 고르게 되고 눈을 떠보니, 강아지풀 하나가 보도블럭 틈새에 이쁘게 피어서 그 가느다란 몸을 흔들면서 바람을 즐기더군 ~ 정말이지 감동했다~ 사진기로 찍을 생각을 해봤지만. 사진기가 가방에 있어서 아쉬웠다. 생명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저 가느다란 몸으로 나처럼 어제 노숙을 했고, 아니 이 여름을 저렇게 보냈겠지. 뜨거운 태양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와 뜨거운 열기,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쇳소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 저 강아지풀. 동병상련 이라고 예사로 보이지 않더라. 나는 그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문규현 신부님은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는다. 본인 몸을 돌보아도 모자랄 판인데, 부지런히 여기저기 왔다가 갔다가 하시면서 순례 참가자들을 걱정해주시면서 챙기신다.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내 눈에는 신부님이 더 걱정이건만, 깡마른 체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시고서, 본인도 힘이 들어서 쉬고 싶으실 텐데, 마냥 웃는 얼굴로 사람들 걱정을 하시는 신부님을 보자니 참 고맙기도 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더라. 정말 느리게 가는 길이지만 목적지에 가더군. 5시 15분 아중역에 도착했다. 전주에서 촛불 시위를 하시는 분들이 준비한 문화제를 잠깐 보고 신나는 판소리도 듣고. 문규현 신부님과 인사를 하면서 포옹을 했다. 그렇게 오늘 순례가 끝났다. 혼자 조용히 빠져 나왔다. 큰 길을 건너서 좀 걸었다. 아니 근데 이 동네는 모텔이 어찌 이렇게 많은지. 이렇게 많은 모텔들이 다 장사가 되는지 걱정이 될 정도로 많더라. 평상이 있는 꽃집이 있더군. 평상에 앉아서 집과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꽃집 주인에게 어디 맛나는 밥집이 어딘지 물었다. 농부며느리라는 밥집을 이야기 하시더군. 일러준 대로 걸어서 거기에 갔다. 오천원짜리 백반 정식이 어찌나 푸짐하던지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역시 음식은 전라도가 최고라는~ 디카로 사진을 좀 찍었다. 배부르니 눕고 싶더라. 오늘은 어디서 잔다? 식당 주인에게 가까운 학교가 어디인지 물어봤다. 아중중학교가 가깝단다. 나가서 그리로 가려고 하다보니 조그만 공원이 하나 있더군. 거기 의자에 누웠다. 운동을 나오신 마을 주민들이 좀 쳐다보는 느낌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더라. 잠 자기에는 나쁜 조건이다. 아중 중학교를 찾아서 가다가 과일 가계를 지났다. 머루 포도를 샀다. 아중중학교 운동장에는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가득하더라. 포도를 씻어서 의자에 앉아서 아이들 노는 것을 보면서 포도를 먹었다. 시간이 9시가 좀 넘어가니 사람들이 좀 많이 줄더군. 어디서 잘까 결정을 하려고 학교를 둘러 보았다. 건물 사이에 조용한 곳에 의자가 있더군. 거기에 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사람이 지나가더라. 흠 더 조용한 곳은 없을까 하고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다 보니까 길 건너편에 새로 짓는 교회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 아 저거다 라는 느낌이 팍 들더라. 계단을 따라서 4층까지 올라 갔다. 바닥을 빼고는 공사가 거의 마무리가 되는 건물이다. 창문도 있고, 도배도 했고 바닥에 장판만 깔면 끝인 그런 건물이다. 아 나를 위해서 준비된 장소라는 생각이 팍 들더라. 바로 돗자리 꺼내서 누웠다. 창문을 조금 열어서 환기를 시켰다. 어제처럼 무릎 담요를 꺼내서 덮었다. 모기도 없고 무척이나 따뜻하다. 지붕과 담이 있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집에서 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귀마개를 끼고서 잠이 들었다. 새벽 4시가 가까워서 잠에서 깼다. 남의 건물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잠을 자니까 깊은 잠을 자기는 무리가 따르더군.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주위를 보았다. 사진도 찍었다. 피시방 위치를 확인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피시방에 가는길에 양평해장국이라는 간판이 쓰여진 가계에 사람들이 많더군. 오늘 아침은 여기에서 먹어야지. 피씨방에 들어가서 인테넷에 접속해서 글을 좀 쓰고. 음악을 좀 듣다가 보니 후딱 2시간이 가더라. 해장국 집에 들어가서 황태해장국을 시키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씻었다. 황태해장국은 맛나더군. 느긋하게 먹고 나와서 아중역으로 걸어갔다.
10. 4 오체투지
아중역에는 어제 오체투지를 하면서 얼굴이 눈에 익은 분이 계시더군. 잠깐 인사를 드렸다. 전주에서 촛불 시위를 하시는 백XX 님이신데 오늘도 참가를 하신다고 하시더군. 둘이서 커피를 마시려고 아중역 안으로 들어갔지만, 자판기가 없더군.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라는 노래 가사의 주인공 같은 아중역. 거기서 내 사진기로 서로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을 보내드린다고 이메일과 이름을 받아서 수첩에 적었다. 역 바깥으로 나오자 아까 보다는 사람들이 많더군. 어제 자전거 타고 오셨던 여자분도 오셨고. 일산에서 오셨다는 여성분. 전주 촛불들도 오셨고. 잠시 후에는 문규현 전종훈 신부님, 수경 지관 스님도 오셨다. 오른발을 다친 문정현 신부님도 휠체어를 타고 오셨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오신 분들도 계셨다. 서로 모여서 출발 인사를 하고 징 소리에 맞춰서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갈비뼈가 아프다. 어제와는 좀 많이 다르네. 바닥에 엎드리면 강하게 닿는 부분이 거기라서 그런가. 아프다는 내색을 하기에는 좀 창피했다. 여기에 오면서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찾자는 욕심도 마음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오체투지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오체투지가 힘들어 지면 질수록 머릿속은 비어가고 오직 하나의 생각. 단지 지금 . 프레시안 기자와 인터뷰도 했었고. 저번에 보았던 엠비씨 피디수첩 카메라맨도 내려왔더라. 촬영을 하러 왔냐고 물었더니, 쉬는 날인데 그냥 마음이 끌려서 내려왔다고 하더군.성당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다. 전주 촛불 백XX님이 초대해 주셔서 정말 맨손으로 가서
얻어 먹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과 함께 오신 어머니가 계셨는데,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으신지 이거는 하도 먹어서 오후에 오체투지가 힘들었다. 밥을 먹고서 그늘에서 살짝 자고 일어났더니. 수경, 전종훈 신부님 두 사람이 그늘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앉아 계시더군. 하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거의 만담 수준으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신다. 전종훈 신부님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고 절로 가셔도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전종훈 신부님이 스님이 되면 훌륭한 스님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적이 있다고 하시더군. 수경스님이 그 농담을 받으셔서 절로 오면 신부 경력도 스님 경력으로 쳐준다고 하시더군 ㅋ 힘들기는 정말이지 오지게 힘들어도 끝까지 이 순례를 하시는 분들의 힘은 이런 작은 것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오후에 다시 순례를 시작했다. 어깨까지 뻐근한 것이 온 몸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른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들이 놀랬다.
이마와 코로 느끼는 도로는 참 다양한 냄새가 나더군. 한 가지 느낀 것은 인과응보라는 그 말. 누군가 도로에 버린 그것들을 고스란히 순례 행렬이 느낀다. 담배 재떨이를 도로에 털고 가는 차들이 버린 끄 꽁초와 재는 고스란히 순례단의 코를 통해서 몸으로 들어오고. 무언가 음식을 먹다가 도로에다 버렸는지, 단 냄새가 나기도 하더군. 혀를 갖다가 데고 무슨 맛인지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적으로 들더라. 똥 냄새도 나고. 기분나쁜 아스팔트 냄새며 페인트 냄새며 은행 냄새….
돌아오는 길
떠나기 전에 순례단 분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하지 못했다. 먹을거리를 챙겨주시는 님께 돈을 조금 드렸다. 이틀 노숙했던 것에 대한 숙박비를 썼다는 셈 치고 그 돈을 봉투에 넣어서 드렸다. 고맙다는 말씀에 좀 민망하더라. 점심을 얻어 먹어서 나도 좀 갚으려고, 전주 촛불 분들께 시원하게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그들은 오늘도 전주 오거리에서 촛불 시위를 하신다고, 맥주를 못 마셔서 안타깝다고 하시네. 나도 참 안타까웠다. 이틀을 보내면서 조금씩 얼굴이 눈에 익은 분들께 가볍게 인사를 드리고, 순천에서 오신 똥팔이 학번 이라고 자신을 소개 하시던 분과 전주 역까지 걸어서 갔다. 부산에서 올라 오셨다던 오늘 아침부터 오체투지 하시던 교사 두 분도 길 건너편에서 전주역 쪽으로 걸어 가시는 것을 보았는데, 전주역에 다다르자 갑자기 안 보이더라. 그들과도 같이 맥주나 한 캔씩 마시려고 했는데. 기차 시간이 급하셨나 보더군. 섭섭했다. 순천에서 오신 분과 서울에서 내려온 나 이렇게 둘이서 전주역 광장 의자에서 캔맥주에 만두를 안주로 놓고 마셨다. 맥주 한 캔에 취기가 상당히 오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잘 통했다. 순천에서 오신 분이 기차시간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시고 나는 택시를 타고 전주 코아호텔로 향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택시 기사님은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물어본다. 오체투지 때문에 왔다고 하니 잘 모르시더군. 정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시던데, 내가 대뜸 이명박을 욕하자 아주 신이 나셔서 이야기를 하시네. 코아 호텔에 오기까지 어찌나 말이 잘 통하던지 ㅋ. 나를 더 멀리 태우고 가지 못함이 참 안타까운 그런 표정이셨다. 코아호텔 화장실에 잽싸게 달려가서 씻고 좀 사람 몰골을 갖추다. 하얀 면바지 위에 묻은 얼룩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나도 무언가 좀 고행을 했다는 느낌이 들고. 순례를 하시는 분들께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덜었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 서울로 올라오는 차에 올랐다. 저녁 7시에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는 출발하고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내가 오체투지를 하던 동안에 내 옆을 지나가던 그 무서운 속도에 비하면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무섭게 달리더라. 주위 풍경이 그냥 휙휙 지나가고.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인간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 수가 있을지.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목적지에 대한 어떤 성찰도 없이, 그저 빠르게 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 생각이 아닐지. 물론 그런 방법으로 대한민국 경제는 성장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경제성장 이라는 그 목적 때문에 미친듯이 달리면서 잃어버린 그 어떤 것들을 따져서 얻은 것들과 잃은 것들을 저울에 달면 과연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이 또한 배부른 자의 망상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서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새로 짓는 불이꺼진 아파트들이 어둠을 배경으로 육중한 무게감을 주면서 서있다. 저렇게 많이 지어도 아파트가 부족하는데, 그린벨트까지 해제 하면서 집을 지으면 과연 그 집에서 나 같은 서민들이 살 기회는 있는걸까?
덧 - 어디를 급하게 가야 해서 미완성으로 올립니다. 다녀와서 일요일 밤에 조금 더 수정할 생각입니다.
첫댓글 백XX입니다ㅋㅋ. 후기잘 봤습니다^^
잘 봤습니다. _()_ 시간 내셔서 줄 띄어쓰기랑 하시면 스크랩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