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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와카[和歌]론의 역사적 고찰
박영준
Ⅰ. 들어가는 말
먼저 가론의 의미를 정의해 보면 가론은 와카[和歌]에 대한 이론이나 평론·노래의 본질·미적 이념·가풍·와카를 짓는 방법 등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와카의 본질론·효용론·용어선택·풍체론 등 여러 가지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일본문학론 중에서 가론이 처음 성립한 이래 근세까지는 가론이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와카가 오래 동안 생명을 유지해 온 것과도 일치한다. 원래 가론의 성립은 와카에 대한 자각에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아스카[飛鳥:593-686]시대에서 나라[奈良:710-784]시대에 걸쳐 중국의 문헌이 들어온 이래, 시학 쪽에서는 {詩經}에 이어 六朝時代의 {文選}을 비롯해 시학에 관한 책이 전래되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懷風藻』와 『만요슈(万葉集) 이하 만요슈』가 편찬되고 {歌經標式} 등이 저술되었기 때문에 육조 시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일본가론의 역사를 보면 와카에 대한 이론의 전개와 더불어 歌人이 와카를 짓는 작법을 배우고 표현기술을 습득케 하기 위해 쓰여진 가론이 많은데, 그 중에는 와카에 대한 이론과 가인이나 작품에 관한 구체적인 비평의 글도 많이 볼 수 있다. 수 없이 쓰여진 가론서를 정리하고 와카에 대한 이론의 전개를 더듬는 것은 일본 와카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가론의 역사를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의 5기로 나누지만, 본고에서는 근세까지의 가론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의 가론은 문학사적으로 큰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Ⅱ. 고대의 가론
1. 가론 전사
고대는 사적으로 나라시대 말에서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까지를 가리킨다. 고대는 와카의 성립과정을 포함하는 와카사의 최초의 시기이다. 가론이나 歌學은 와카가 성립한 후에, 와카에 대한 비평의식, 반성의식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고대가론은 다른 시대에 비해 그 존재가 희박한 것은 사실이며 또한 그 내용도 가론으로서 질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나라시대 중기부터 중국의 {詩經} {文選} 등의 영향을 받아 『懷風藻』가 편찬되고 또한 私家集(개인 시가집)도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撰集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단가[시가]를 어떻게 분류하고, 선택하는가 하는 이유에서 시가에 대한 자각과 비평의식이 생겨났다. {만요슈}의 편찬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고 772년의 후지와라노 하마나리[藤原浜成]의 {歌經標式}가 저술되는 기반은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운이 그대로 헤이안시대로 이어진다.
2. {고킨슈(古今集)} 가나[假名]서문의 세계
헤이안 초기는 한시문의 융성으로 인해 {文華秀麗集}, 『凌雲集}, 『經國集} 등 한시집의 편찬과 더불어 시학서인 구카이[空海]의 {文鏡秘府論}도 쓰여진다. 한시문의 융성에 자극 받아 와카 부흥의 기운이 일어나, 905년 『고킨슈(古今集), 이하 고킨슈』가 편찬되는데, 이것은 와카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또한 가나 서문은 가론사상 큰 의미가 있다.
{고킨슈}에는 가나·한문의 양 서문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기노 쓰라유키[紀貫之]가 쓴 가나 서문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가나 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① 와카의 본질과 효용 ② 와카의 기원 ③ 와카의 표현법 ④ 고대와카의 찬미 ⑤ 롯카센[六歌仙]에 대한 비평 ⑥ 찬집의 경위와 聖德의 찬미 ⑦ 撰者의 영광과 자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에서 ③까지는 와카의 일반론, ④와 ⑤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와카의 흥망의 역사와 대표가인에 대한 비평, ⑥과 ⑦은 撰集의 개략이라는 정리된 구상하에서 집필되었다.
가나 서문의 가론적 원리는 「와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心)을 근본으로 해 수 없이 많은 언어(詞)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문장에 잘 나타난다. 와카를 [心]과 [詞]의 양면으로 받아들인 사고방식은 와카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기 때문에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데이카[定家]도 이 이론을 지지했다.
또한 위의 분류 중 롯카센 비판 항목이 가장 주목할 부분인데, [詞] [心] [樣] [眞]을 비평의 기준으로 해 와카의 내용뿐만 아니라 용어법·표현법에 많은 배려를 한 당시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내용과 형식의 양면을 대립시킴으로써 비평의 단서를 끌어내는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이 방법은 후대의 가론에도 계승되었고, 또한 한 수[一首]의 종합적 표현미로서 [樣]을 중시했는데, 이것은 후지와라노 긴토[藤原公任]의 [姿]의 이념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서 가론사에서 전통적인 비평이념으로서 주목받게 된다.
전체적으로『고킨슈』가나 서문을 일관하는 기노 쓰라유키의 포부는 중국시론·유교적 문학관의 형태로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와카 본질의 의미부여라든가, 와카 비평의 기준설정, 또 롯카센 비평에서 볼 수 있는 具象的 비유의 독자적인 생태 등 후대에 대한 국풍전통으로서 계승되어 가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3. 후지와라노 킨토의 가론의 미학
가잔인[花山院]과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라는 대조적인 와카의 후원자의 시대에는 전문가인이 점점 줄어들고, 상층귀족이 가인으로 등장하는 한편, 가인과 문인과의 혼융·와카의 일상화와 실작성의 중시라는 양상을 띠는데, 거기서 이론적 지도자가 된 사람이 후지와라노 긴토이다.
처음 「心」과 「詞」의 문예 미학을 제창하기 시작한 사람은 기노 쓰라유키였지만, 그의 시점에서는 아직 궁정문학으로서 와카를 의미부여하기 위해 현실보다도 이론이 선행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心」과 「詞」의 이론이 와카사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후지와라노 긴토의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다시 말해 기노 쓰라유키가 제창한 이론에 후지와라노 긴토가 구체적으로 살을 붙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지와라노 긴토의 가론을 기록한 『신센주이노(新撰髓腦), 이하 신센주이노』는 단가를 정의해 秀歌로서 있어야 할「姿」를 기록하고, 와카를 짓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秀歌를 가뵤[歌病]禁詞의 실례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고, 또한 혼카도리[本歌取]에 대한 주의도 서술하고 있다.
후지와라노 긴토의 가론의 진수는 {신센주이노}의 [무릇 와카란 마음 즉 정취가 깊고, 형[姿]이 단순한 것에 가깝고, 취향[心]이 오묘한 것이 있는 것을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라는 문장에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心]과 [姿]를 중시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詞]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창작법 중에서 詩論의 영향으로 同音語를 사용하는 가뵤(歌病)를 다루고, 이것에 유연한 자세로 대처해 [예전에 가인이 읊은 말[詞]을 취향으로 한 것은 좋지 않다. 약간이라도 취향이 뛰어나다 해도 새로운 말로 지으려고 생각해야 한다] 라고 하며 신선한 말[詞]의 발견을 제창한다.
여기서 [姿]는 {고킨슈} 서문의 [樣]에 상당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고킨슈}와 동일하지만, 기계적 歌病論을 멀리한 점에서 한 시대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내용도 체계적이 아니었고, 서술도 간결했기 때문에 해석하는 데에 많은 문제점은 있지만, 그는 {고킨슈}의 心詞具有의 미학을 보다 심화시켜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歌語와 聲調가 융합한 風體로 결실시키서 句間에서 情調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秀歌라고 했다. 즉 心姿相兼의 미학이었다.
또한 {신센주이노}의 서술과 실례의 증거로서 「와카구품」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와카를 上品上에서 下品下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評言을 달고 例歌를 2수씩 들고 있다. {忠岩十體}나 『道濟十體』와 흡사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이들이 전체의 맥락에서 애매한 점이 있는 것에 비해 발상과 표현, 風體와 余情 등의 시점에서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평론을 전개한 점에서 그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上品上의 와카란 [문장이 대단히 뛰어난 경지로 여정(余情)이 있는 것] 이라 한다. 즉 [余情]을 자아내는 노래를 최상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여정은 여정이되 슌제이[俊成] 이후의 가론에서 볼 수 있는 夢幻妖艶한 幽玄美가 아니라 優美平淡한 情趣美와 같은 것으로 美的 理念보다도 技術批評의 次元의 말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心姿相兼의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마침내 마나모토노 도시요리[源俊賴]의 {俊賴髓腦}를 거쳐 중세가론으로 전개해 가는 선구를 이루는 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헤이안시대 초기부터 행해진 우타아와세[歌合]는 형식의 완비에 따라 와카의 비평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또 우타아와세의 判詞(判者의 노래나 句의 우위를 판정한 말)를 위해서 비평의 기준을 구하는 일이 많아 가론 그 자체도 진전되었다.
그리고 헤이안후기에는 가론의 보수적 경향도 혁신적 경향도 우타아와세의 判詞를 통해 기술되는 일이 많아 가론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와 같은 보수와 혁신과의 양자를 종합해 고대가론의 완성을 이름과 동시에 중세가론의 선구가 된 사람이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의 가론이라 할 수 있다.
Ⅲ. 中世의 歌論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개는 후지와라[藤原] 귀족의 쇠퇴와 무사의 발흥에 의한 봉건제의 확립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헤이케[平家]의 멸망은 인생의 무상감을 느끼게 했는데 그것이 불교사상에 의지하는 중세사상을 성립케 했다고 할 수 있다. 가론도 또한 사상적인 경향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幽玄과 有心, 그리고 無心이 中世美의 중심이 되어온 것은 無常 속에서 영원을 구하는 인생관적인 것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와카의 중심이념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가론에도 사상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시작된 중세 가론은 후지와라노 슌제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 후지와라노 슌제이의 가론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 이하 슌제이]는 91년의 생애에서 42세까지는 고대에 살고, 43세 때부터 호겐[保元]의 난을 경계로 해 중세에 들어와, 헤이케[平家] 전성기에 20여 년을 지내고, 70세 때에 헤이케가 멸망하고 나서 20여 년을 가마쿠라[鎌倉]기에서 보냈다. 이와 같은 격동의 세상의 변화 속에서 인간형성을 한 것이 그의 가론에 반영되었다. 호겐·헤이지[平治]난 후, 고시라카와[後白河] 院政期(상황이 정치를 하던 시기)는 궁정 가단이 쇠퇴하고 院政 말기의 시대상의 반영과 함께 지게[地下:당하관]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주정적인 가풍이 유행했다. 하지만 草庵人으로서 생활하는 자는 자유스런 서정을 시도했지만 대부분의 가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歌風的인 통일은 부족했지만, 주정적 경향을 띠면서 1187년 {센자이슈(千載集)}가 슌제이에 의해 撰進되었다. 그 직후부터 고쿄고쿠 요시쓰네[後京極良經]의 비호하에 요시쓰네가의 미코히다리[御子左]파에 의한 그룹이 형성되어 활동하는데 거기서 슌제이는 지도자가 되어 독자적인 궁정시를 창작함과 동시에 가론을 전개해 갔다.
슌제이는 중년이후 우타아와세[歌合] 판정자로서 歌壇을 이끌고 있었으며 또 만년에는 貴顯(지체가 높고 이름난 사람)의 요구에 따라 가론서 {고라이후테이쇼(古來風體抄)}를 쓴다. 이 歌評에서 슌제이가 가장 간절히 바란 것은 [幽玄]과 [艶]이었다. [유현]이란 [한적한 정취가 있는 姿]이며, [艶]이기도 한 복합미로써, 그 속성으로서는 [言外의 余情]을 의미했다.
그러나 복합적·심층적인 여정미 내지는 情調象徵美의 세계에 눈을 뜨고, 또한 그것에 의해 「신코킨슈(新古今集)」시대의 歌人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슌제이는 자기의 이념이나 詠風의 전체를 유현이라는 한 단어로써는 총괄하지는 못했다만 슌제이는 유현의 개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가론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상은 [모토노고코로(本心)]와 {고킨슈}를 중심으로 하는 [三大集] 속에서 노래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는 고전주의였다. [본심]은 院政期의 우타아와세 비평 등에서 심화되어 온 [本意]사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本意]가 읊어지는 사물의 미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 그 미적 본성으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노래하려는 여러 사물의 미적 본성을 가인이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은 「三大集」을 중심으로 하는 와카 전통을 이해해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고전을 주체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고킨슈』에서 『센자이슈』까지의「七大集」에 녹아 있는 [姿·詞]를 충실히 배워서, 그 [姿·詞]의 현상적 변화 속에 나타나 있는 보편적인 미적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단가(短歌)적 표현이 언어표현의 어떠한 기구 속에 보편적인 사물의 미적 본성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와카 본질론으로서 그는 [艶에도 아와레(哀)에도]라는 미묘한 정취야 말로 표현하려고 하는 내용이며, 그것은 詠吟의 소리 속에서 감수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음률을 통일계기로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더욱이 [慈鎭和尙自歌合]에서 [좋은 노래가 되려면 그 詞 姿 외에 景氣가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닌가] 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음률과 더불어 [景氣], 즉 언어의 영상표현의 효과를 인정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후지와라노 긴토[藤原公任]가 깨달은 [余情], 즉 음률 및 영상표현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던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본심]이 단지 고전에 의해 알 수 있는 사물의 미적 본성에 머물지 않고, 그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의 시정신이라는 것을 믿은 슌제이의 주체성에 있었다. 또한 [詞·姿]의 추이의 변화 속에서 [본심]을 응시하려고 하는 태도, 그리고 그와 같은 태도를 전하는 전통의 자각은 수십 년에 걸친 오랜 창작·비평체험을 성찰한 결과였다.
슌제이의 확신은 [景氣] [余情]의 발견에서 얻어진다. 슌제이가 마음에서 절실하게 찾은 것은 감성적인 余情이며, 그것을 위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조화가 잡힌 상징적 여정주의의 입장이었다. 이때 마음이란 시의 作因도 있으면 서정의 의미내용도 있는 그러한 主客一如까지 생각한 詠歌 주체의 심층 감정이며 憂艶에, 또 우수감·적막감·무한감에 사로잡힌 침잠한 감정이다. 이것이 보편적이고 참된 와카의 의미였다는 발견은 슌제이에 있어 중요했다. 이러한 입장을 계승하고 구체적으로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였다.
2.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가론의 성격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 : 이하 데이카]의 가론은 48세 때 쓴 {긴다이슈카(近代秀歌)}가 시초인데, 50세 후반부터 60세를 넘은 때 가집 {슈이구소(拾遺愚草)}의 편찬을 포함하는 歌業 集成 의식이 작용하는 속에서 {마이게쓰쇼(每月抄)} {에이가노타이카이(詠歌之大槪)}가 쓰여져 일단 완성을 보였다. 가학서로서는 이 시기의 {겐추미쓰칸(顯註密勘)}을 비롯해 만년에 쓴 {헤키안쇼(僻案抄)} 등이 있으나 결국 데이카 가론의 윤곽은 {고킨슈} 가나 서문을 의식한 {긴다이슈카}와 한문으로 된 서문적인 재설로서의 {에이가노타이카이}, 그리고 작가 이념에서 기법론·詠歌心得·양식론을 포함하는 개설서 {마이게쓰쇼}에서 끝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데이카의 가론은 슌제이를 기점으로 해 출발한다. 먼저 시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긴다이슈카}의 내용은 서간형식으로 쓰여진 와카 부분과 秀歌例로 이루어 졌는데 가론 부분은 내용적으로 보아 와카사론과 作歌 방법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간단히 살펴보면 처음에 기노 쓰라유키[紀貫之]의 가풍에 대한 기호(嗜好)를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고킨슈} 서문에 나타난 와카의 변천을 역사에 따라 비평하고 자기가 주장한 신풍 와카의 긍정, 이상으로 하는 와카양식의 저술로도 이어진다.
둘째로 作歌 방법론으로서 그는「三大集」시대의 고전세계의 「詞」를 이용하고 발상은 아직 읊어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41세 때의 判詞에서 그는「詞는 옛 노래를 모방하고, 心은 내 마음에서부터 진정 이끌리는 것이야말로 노래의 本意가 아니겠는가」라고 천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구체적인 作歌 방법으로서 데이카가 제시한 것은 혼카도리[本歌取]였다.
그러면 그의 혼카도리논은 왜 필연이었던가. 그것은 고전을 현대로 환생하려고 한 방법론이었다. 末代의 현실에서 상실한 고귀하고 우미한 詩趣는 결국은 내부에서 성립하는 고전과의 융합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탐미하는 혼 속에 있는 고전의 시취가 현대시의 유일한 근거였다. 그러한 까닭에 고전 歌語와 그 歌句에 미적 영상을 서로 접목해 새로운 시의 시공을 한 수 속에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유일한 창작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歌句가 지시하는 의미내용·情調와 聲調가 古歌에 의해 몽환적인 시의 시간·공간을 짙게 나타내는 것이 데이카의 신풍에 관한 방법론적 핵심이었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현실의 발로이며 초현실적인 시적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여기서 데이카가 중시한 것은 風情을 얻기 위해 제재에 몰입해 거의 의식하에 가까운 심리상층에까지 침잠해 비로소 얻어진 깊은 서정의 탄성이며, 유미적 영탄의 마음이었다. 이 점에서 수미정돈된 우미·고귀한 서정의 진실에 집착한 슌제이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 데이카가 추구하고 조형하려고 한 것은 오히려 심리적 진실·상상력의 진실이며, 상상력에 의해 심층으로 하강함에 따라 발견된 깊은 作因을 발하는 시심이 틀림없는 [有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이게쓰쇼}에서 [有心]이란 觀想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며, [有心體]란 관상의 깊이가 작품의 서정의 깊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 관상적 태도는 어구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감지해 그들의 교감이 자아내는 복잡 미묘한 정조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슌제이 가론의 [본심]을 창작태도의 문제로서 구체화한 것이었다.
{마이게쓰쇼}는 데이카의 가론서 {긴다이슈카}나 {에이가노타이카이}가 詠作 기법인 것에 대해 [有心體]론을 중심으로 한 詠歌 태도론이라 할 수 있다. {마이케쓰쇼}에서는 [和歌十體] 중 기본양식 4체는 [솔직하게 우미한 모습(姿)]를 읊는 것이고, 특히 [有心體]는 [노래를 지으려고 하는 정신의 움직임이 완전히 맑은 심경]에서 읊는 마음이 깊은 와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秀歌]의 와카를 [마음이 깊고, 유려한 성조로, 구상이 기묘하며, 말이 나타내는 이외에 기분으로서 느껴지는 것이고, 한 수 전체가 기품이 높고, 말은 거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처럼 들리고, 마음에 끌리는 맛이 있고, 묘한 기분이 드는 정경이 이미지로써 떠올라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것이라 정의한다. 이것은 확실히 실작 경험에서 나온 깊은 경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의 극한, 시적 사념의 응축이 극치에 달했을 때 갑자기 의도를 뛰어 넘어 나타난 은총과 같은 직관의 시정이라 생각되며, 또한 이것은 이미 슌제이의 [景氣] 존중을 계승함과 동시에 미묘한 余情 樣式을 성숙시킨 데이카다운 표현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데이카가 강조한 것은 歌境에 대한 침잠을 깊게 해 景氣가 微茫 속에서 이미지를 성취하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을 갖는 것이 참된 의미의 와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主客融卽의 진실에 침잠해서 아주 고아하고 맑은 至純의 시심이며, 그 시심의 순수함 속에서 서술된 부동의 風姿인 것이다.
초월적인 화려한 기교와 의표를 찌르는 박진감, 더욱더 우미하게 나타난 깊은 여정과 그러한 風姿의 근원에 있는 시심의 원형으로 이들 風體를 승화한 후의 평온한 시심의 발현을 그는 [有心體]라 불렀던 것이다.
3. 歌門의 분열과 가론의 흐름
1241년에 데이카가 80세로 세상을 떠난 후, 歌壇의 중심이 된 사람은 장자인 후지와라노 다메이에[藤原爲家]였다. 슌제이 - 데이카 - 다메이에, 즉 3代에 걸쳐 계속되는 미코히다리[御子左:이하 미코다리]가의 歌壇 지배가 확립되었다. 가단에 군림한 다메이에는 1243년 11월의 「河合社歌合」의 판정자가 되어 歌觀과 권위를 나타낸다. 이 우타아와세는 후지와라노 노부자네[藤原信實]가 다메이에의 歌壇 지배를 옹호하기 위해 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메이에는 우타아와세 判詞로서 「心·詞·姿」의 모든 것을 평가대상으로 해 편견 없이 우미한 것을 와카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유일한 가론서 {에이가잇테이(詠歌一體)}의 요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두에서 주장하는 [歌道]의 사상으로 {쓰레즈레구사(徒然草)}에 통하는 중세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둘째로는 소위 平淡美의 주장으로 [귀에 거슬리는] 표현을 피하는 태도는 이후, 니조[二條]파 가론의 기본이 된다. 셋째는, 적은 표현으로 많은 내용(특히 기분·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당연히 [余情]의 존중으로 연결되어 슌제이·데이카가 확립한 것을 이어 받는 것이지만, 초심자인 다메스케[爲相]에 대한 가훈인 까닭인지 오히려 [詞가 적고]라고 규정한 것이 아주 특이하다. 넷째로, 또 다른 의미에서「詞」에 제한을 두었다. 우선 [古歌에 없는 詞]를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혼카[本歌]에서 취하는 句에 규제를 둔 {긴다이슈카}의 방침과는 다르지 않지만 「신고킨」가인들의 秀句의 도용을 금했던 것이다.
한편 이것과는 달리 중세에서는 슌제이·데이카 이래 判詞나 갓텐[合点] 때에 비난받아온 어구가 [制詞] 혹은 [制禁의 詞] 라 해 서서히 집성되어 갔는데, 그 기원은 다메이에 때에 시작된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다메이에의 가론의 특질은 모두 중세적임과 동시에 作歌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그 나름대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그 정신을 잊은 후대는 단지 보수적으로 치우쳐 平板한 가풍으로 빠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平淡美 歌論·歌風에 대한 비판은 실은 그의 등장직후부터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반(反)다메이에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것이 소위 가마쿠라[鎌倉]중기의 반(反)미코히다리파였는데, 그 결성의 계기가 된 것은 1243-1244년에 걸쳐 완성된 {新撰六帖題和歌}였다. 이 작품은 이에요시[家良]·다메이에·도모이에[知家]·노부자네·신간[眞觀]이 소위 六帖題로서 와카를 지어 서로 갓텐[合点]한 것이다. 그러나 돈아[頓阿]의 가론서인 {井蛙抄}에서 이것을 비난하는 니죠 다메요[二條爲世]의 글이 인용되고, 또 도모이에·신간 등이 다메이에·다메우지 부자와 사이온지 사네우지[西園寺實氏]의 미코히다리파를 배제한 채 쓴 {春日若宮社歌合}을 써 미코히다리가에 대한 반항의 기치를 든다. 이들의 창작·평론은 {春日若宮社歌合}와 {建長八年百首歌合} 등이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 그들의 가풍·가론의 특징·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풍에 관해서 보면 ①제재·용어·어법의 新奇·자유를 목표로 해 때때로 기이·난해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②발상·취향이 모두 같았다. ③혼카도리와 「制禁의 詞」에 대해서 미코히다리 가학에 따르지 않고 더욱 더 자유스러웠다. ④「만요슈」을 존중하고 「만요우타(万葉歌)」를 혼카[本歌]로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제재·어법·표현의 각 방면에서 자유주의를 택했다.
둘째로 가론에 대해서 보면 형식적·내용적으로 몇 가지의 특색을 들 수 있다. 형식면에서는 判詞에 일본과 중국의 고사·典據 등의 많은 실례를 들어 논했으며, 내용면에서는 ①[幽玄]의 존중 ②[憂] [艶] [妖艶]의 중시 ③「만요슈」 내지는 상대작품에 대한 경도·관심 ④가뵤[歌病]의 중시를 들 수가 있다.
이러한 반(反)미코히다리파의 눈에 띠는 활동에 대해 다메이에·다메우지 등 미코히다리파는 그다지 표면화된 대항을 하지 않았다. 1275년에 다메이에가 세상을 뜨자 이번에는 미코히다리파의 내부에서 대립이 일어났다. 다메이에의 장남 다메우지[니조(二條)파의 원조]와 다메이에의 측실로서 다메스케[레제(冷泉)가의 원조)·다메모리[爲守]를 낳은 돈부쓰[頓佛]와의 대립이었는데, 이것이 후에는 다메우지 혹은 그 아들 다메요와 다메스케와의 대립이 되었다.
이러한 二條[니죠]·冷泉[레제] 양가의 대립 속에서 교쿄쿠[京極]가의 다메노리(爲敎)·다메가네(爲兼) 부자도 합류한다. 다메노리가 다메우지의 {續拾遺集}에 불만을 나타낸 후 1279년에 죽자 다메가네는 그의 누이 다메코(爲子)와 함께 돈부쓰 모자를 지원하는 형태로 다메우지에 대항했다. 더구나 다메스케는 그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니조·레제·교쿄쿠 세가문의 대립항쟁이 시작된다.
그 후 歌壇·가론의 전개는 다메이에에 의해 시작되어 다메우지·다메요에 의해 계승된 니조파 가론은 슌제이·데이카 이래의 역사의식과 고전주의를 계승하면서 平淡·침잠 속에서 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반(反)미코히다리파와 교코쿠파·레제파 등에 의해 때때로 안티테제는 나왔지만, 무로마치[室町]말기까지 다메이에 가론 내지 니조파 가론은 그 나름대로 중세적인 특질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교코쿠 다메가네의 가풍과 가론
후시미인[伏見院]과 친했던 다메가네가 조정의 문예 애호가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 그룹을 중심으로 해 교코쿠파가 성립·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이들의 가풍과 와카에 대한 의식 내지는 가론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대해 교코쿠 다메가네의 {다메가네쿄와카쇼(爲兼卿和歌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와카의 길은 얕은 것 같지만 깊고,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불법과도……」라는 {긴다이슈카}의 모두를 인용해 歌道, 즉 와카의 길이 심원한 도로써 불법과도 같이 마음속의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점에서 한시도 와카도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와카의 본질을 제시했다. 또한 {고킨슈} {신고킨슈} 등의 서문을 받아 와카는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도 느끼게 만들어] 라고 하며 와카의 효용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日本에 온 때부터 일본에 적합한 말, 즉 일본어를 제일로 해] 와카를 짓고, 모든 성취에는 [相應]을 우선시 하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文筆眼心抄}를 인용해 「봄은 꽃의 경치, 가을은 가을의 정취」라 하며 대상에 접해 마음과 相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와카 수행의 마음가짐으로는 항상 본질적인 물음을 갖고서 歌道를 이해해 와카를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만요」시대의 와카를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의 「와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느낀 바를 그대로 밖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이념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다메가네와카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心」과 「詞」의 관련에 언급한 부분인데, 그는「心」(감동·발상)의 중시와 「詞」(용어·어법, 제재를 포함한다)의 자유화를 제창했다. 그가 이러한 가론을 제창하기에 이른 배경에는 니조파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니조파에서는 용어, 관념이나 발상도 [雅]와 [本意]로서 인정된 기존의 틀 속에 있을 것을 요구해 오로지 그러한 틀 속에서 와카를 짓을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메가네가 말하는 詠作의 마음가짐은, 예를 들면 [上陽人(후궁인 불우한 여성)]의 歌題를 받게되면 [결국 上陽人이 된 마음]으로서 와카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애수 깊은 와카를 지을 수 있으며, 그것이 사랑의 와카가 되면 대상과의 일체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음가는 대로 「詞」가 향기 나는 대로 와카를 창작해야 한다고 하는 와카에 대한 그의 신조였다.
Ⅳ. 근세의 가론
근세의 시작은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 1568-1600]시대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의 가론으로서는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齊]의 {詠歌大槪抄}와 {細川幽齊聞書} 등이 있다. 유사이는 『고킨슈』 전수를 전해 니조 가풍의 가론을 주장한 반면에 기노시타 조쇼시[木下長嘯子]는 『만요슈』를 중시해 다메가네의 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조쇼시의 견해를 중시한 사람이 국학연구의 선구자였던 게이추[契沖]였다. 그는 {和字正濫抄}를 써 니조파의 데이카의 가나에 의한 표기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는 {河社} 라는 수필집에서 와카는 감정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며 후세의 와카가 기술적인 것에 대해 古歌는 진심을 생명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와카를 지을 때 기교나 기술을 부정하고 참마음으로 와카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게이추의 견해를 이은 사람이 다야스 무네타케[田安宗武]와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이다. 다만 무네타케는 유교적인 견지에서 [이치(理)]를 주장해 와카보다도 한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마부치는 이것에 비해 眞情을 중시해 [이치]를 비판했다. 양자간의 견해차는 있지만, 『만요슈』를 『고킨슈』나 『신고킨슈』보다 중시한 점에서는 서로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네타케를 섬긴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는 1742년에 {國歌八論}을 써 『신고킨슈』을 중시해 와카의 [기법(技)]을 주장한 것에 대해 무네타케가 반박한 것이 {國歌八論余言}이며, 그것에 대해 아즈마마로가 다시 반박한 것이 {國歌八論再論}이었다. 마부치도 이 논쟁에 참가해 무네타케의 설에 따르면서 眞情과 이치에 대한 양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마부치의 가론서는 {歌意考} {新學} 등 10여종이 전해지는데, 그의 가론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와카란 사람의 眞情이 마치 소리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技巧를 멀리하고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존중해 상대 『만요슈』의 가풍을 중시했다.
한편 마부치의 제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그의 가론 {排蘆小船}와 {石上私淑言} 에서 [아와레(哀)]를 와카의 중심에 두고 『신고킨슈』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아즈마마로의 기교주의에 상응하는 점이 있었다. 다만 노리나가는 기술[技法]과 기교를 중시했지만 마음을 비우면 眞情의 발로는 저절로 멋진 표현과 기교가 따르는 것이라 했으며, 또 진실한 감동이 있으면 그것을 사람에게 전해서 동감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교를 부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眞情이 있으면 말의 향기가 나는 대로라고 주장한 다메가네의 가론과도 공통된 점이 있다 하겠다.
근세에서는 『만요슈』존중과 『신고킨슈』 존중 외에 『고킨슈』 존중의 가론도 있다. 교토(京都)는 當上派의 세력이었던 점에서 『고킨슈』를 존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서 활약한 오자와 로안[小澤蘆庵]·가가와 가게키[香川景樹]는 둘 다『고킨슈』을 중시했다. 로안은 가론서『振分髮』에서 詩心이 생각나면 즉시「詞」로서 표현해야 한다고 하며 『고킨슈』의 다다코토노우타[와카형식의 하나 : 비유 따위를 쓰지 않고 평이하게 부른 노래]를 주장했으며, 다다코토노우타에 깊은 감동이 나타난 와카를 중시한 同情新情論은 주목해야 할 견해였다. 진실한 감동이면 어떤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동감한다는 것이 동정론이며, 감동은 진실하면 항상 새롭다하는 것이 新情論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게키는 「調」를 중시해 [노래란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음률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고킨」調를 중시하고 있다.
즉 근세가론은 『만요슈』와 『고킨슈』 그리고 『신고킨슈』 모두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고전주의적 가론이라 할 수 있지만, 이론은 명쾌한데 중세가론과 같은 함축미와 애매함은 없었다. 여기에 근세가론의 특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Ⅴ.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론이란 와카의 본질론·효용론 및 용어의 선택·풍체론 등 여러 분야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대의 가론은 중국의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아 기노 쓰라유키[紀貫之]의 {고킨슈(古今集)} 가나 서문이 쓰여지는 데 거기서 와카를 [心] 과 [詞] 의 양면으로 받아들인 사고 방식은 후대의 가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입장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후지와라 긴토[藤原公任]였는데 그는 {고킨슈}의 心詞具有의 미학을 보다 심화시켜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歌語와 聲調가 융합한 風體로 결실시켜서 句間에서 情調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心姿相兼의 미학으로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미나모토노 도시요리[源俊賴]를 거쳐 중세가론의 선구자인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로 이어진다.
슌제이 가론의 핵심은 [본심]과 [三大集] 속에서 노래의 본질을 찾으려는 고전주의였다. [본심]이란 [本意] 사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본의가 읊어지는 사물의 미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시킨 것에 대해 그 미적 본성으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물의 미적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자기의 시정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슌제이의 입장을 계승해 발전시킨 사람이 그 아들 데이카(定家)였다. 그의 가론의 특징은 [有心] 과 [有心體] 에서 찾을 수 있다. [유심] 이란 觀想의 깊이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구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감지해 그들의 교감이 자아내는 복잡 미묘한 세계를 의미하며, [유심체]란 초월적이고 화려한 기교와 의표를 찌르는 박진감, 더욱 더 우미하게 나타나는 깊은 余情과 그러한 風姿의 근원에 있는 시심의 원형으로 이들 風體를 승화한 후의 시심의 발현을 의미했다.
위의 슌제이와 데이카의 가론은 다메이에로 계승된다. 그는 소위 平淡美의 와카와 슌제이·데이카 이래 判詞나 갓텐[合点]에서 비난 받아온 어구를 [制禁의 詞] 라고 해 귀에 거슬리는 표현이나 문구를 배제했는데 이것은 후에 니조[二條]파 가론의 기본이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 반(反)미코히다리[御子左]파였다. 이들 가론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 제재·어법·표현 등 각 방면에서 자유주의를 택했다는 점이다.
歌壇은 다메이에가 세상을 뜨자 미코히다리파에서 내분이 일어나 니조·레제이[冷泉]·교쿄쿠[京極]가로 3분되어, 이들의 대립항쟁 속에 발전한다. 그후 歌壇·가론의 전개는 다메이에에 의해 시작되어 다메우지(爲氏)·다메요(爲世)로 계승된 니조파 가론은 슌제이·데이카 이래의 역사의식과 고전주의를 계승하면서 平淡·침잠 속에서 미를 추구한다. 다메이에 가론 내지 니조파 가론은 그 나름대로 중세적 특질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쿄쿠파의 지도자였던 교쿄쿠 다메가네(京極爲兼)의 가론의 특징은 「心」의 중시와 「詞」의 자유화에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떤 詠作의 대상이 주어지면 그 詠作의 대상이 되어 와카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근세에 들어서면 가론은 와카의 쇠퇴와 더불어 그 미적 이념도 그리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근세가론은『만요슈』와 『고킨슈』 그리고 『신고킨슈』 모두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고전주의적 가론이라 할 수 있지만, 반면에 이론은 명쾌한데 중세가론과 같은 함축미와 애매함이 없는 점에 그 특질이 있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일본문학사에서 가론은 와카와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가론을 문학사에서 없앤다면 일본 문학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부기] : 와카의 용어
1)心이란 [詞]에 대응하는 말로서 表現論的으로 사용되는 경우와 作歌主體의 精神과 心的態 度 그리고 心境을 나타내는 말이다.
2)詞란 ①[心]에 대응하는 말로서 한 수 전체의 표현에 관계되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 ②개 개의 語句를 가리키는 경우 ③傳統的으로 와카에 사용되어 온 詞, 즉 歌詞를 가리키는 경우 ④歌題의 하나를 가리키는 경우.
3)사마(樣)란 한 수 전체를 논할 때 쓰는 말. 표현양식을 나타내는 [姿]와 같은 의미로 사 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한 수의 構想과 趣向을 중심으로 한 표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4)姿란 心과 詞의 綜合體로서 와카를 논할 때 쓰는 말. 그 용법으로서는 ①表現樣式·스타일 을 가리킨다. ②心과 詞에 대응해 사용되어 心詞의 統一體로서의 한 수 전체에서 생기는 情 趣 등을 말한다.
5)余情이란 言外에 떠도는 情趣·기분을 말한다.
6)아와레란 헤이안[平安]조 이래 가장 중시된 미적 이념으로서 특히 마음 속 깊이 느끼는 정 서를 가리키지만 본래는 감동을 말하는 말이다. [艶] 이 화려함을 숨긴 아름다움과는 달리 쓸쓸함을 포함하는 미적 정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7)幽玄이란 본디 중국에서 불교사상·노장사상의 방면에서 사용되어 불법의 심원한 것을 가 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일본에 들어와 예술방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유 원하게 俗情을 떠난 운치가 한없이 넓은 정서·분위기를 가리키는 말. 슌제이[俊成] 이후 [ 優] [艶]에 접근한 개념의 語가 되었다.
8)有心이란 無心의 [마음이 없음] 에 대해 [마음이 있음] 의 뜻. 깊은 마음을 담은 것, 情調 의 풍부함을 말한다. 가론상에서 有心이 문제가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시대에 들어가서부 터 이다. 특히 데이카[定家]가 양식상의 이념으로서 [有心體]를 제창하고 나서 [幽玄體]와 더불어 중세가론의 중요 이념이 되었다.
9)艶이란 고상하고 우미한 아름다움, 맑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 [艶]을 余情美의 한 형태로 발아들인 사람은 슌제이였다.
10)優란 [艶] 과 같은 동류의 미적 개념을 함유하며 典雅하고 고상한 아름다움, 유화하고 端 雅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속성은 [艶] 보다도 넓고 다면적이다.
11)本意란 題詠意識이 심화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형성된 사물의 미적 본성을 말하며 특히 우타아와세[歌合]에서는 本意에 입각한 表現이 요청되었다.
12)景氣 : 言語에 의해 換起되는 시각적 映像, 繪畵的 이미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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