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요의 저 온몸 필기체를 본다
화랑공원과 중앙초등학교 사잇길에
그늘이 들어선다
오후 2시와 3시 사이,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 기어가고 있다
새들은 추락의 절벽 위에서 날아가는 법을 배운다지만
조것들은 인내심을 어디서 배운걸까
티끌 같은 발로 눈물처럼 기어간다
햇살이 가만히 조팝나무 잎사귀에 손 얹고 있는 한 낮,
적요의 저 온몸 필기체를 본다
벌레는 회벽 아래로 기어가며 지금 시를 쓴다
침입자
화분에 물을 주고 한참을 지나
물 받침을 여니
거기 살찐 지렁이 한 마리 고개 내밀고 있다
기겁을 한 건 징그러워서만은 아니다
뭔가가 나를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
침입자,
오랫동안 나의 진화를 다 엿본 저것,
아무도 모르지만 저 놈은 안다
내 바스트, 웨스트 사이즈를 칭칭 감으며 팬티 색깔까지...
나는 발이 오그려진다
일상의 행간 사이사이 뱀처럼 숨어 얼마나 자주 나를 훔쳐봐 왔을까
어쩌면 저것은 내 안의 날숨과 들숨까지
지켜보는 눈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찍히고 잡히는 일상,
섬뜩하다
이틀 혹은 사흘
어제 저녁 먹다 남은 한 조각의 빵,
급하게 처리하느라
키친 타월 길게 뽑아 덮어 씌운다
바람 불 때마다 펄럭이며 습한 시간을 빨아 들이더니
이윽고 곰팡이가 파르스름 내려 앉는다
멀리서도 푸른 신호등 불빛은 뚜렷하고
몇 사람의 발걸음들이 성급하게 뛰어가고 있다
신호등 아래 지워지는 몇몇 장면들
식탁위에서 빵은 다 뜯긴 창호지 문짝처럼
제 몸 비틀며 습기를 짜내고
곰팡이가 빵의 살 속을 헤집고 들어가 박힐 때
늘어뜨린 키친타월이 길게 제 그림자를 감싸 안는다
사람들은 식탁위에 멈춘 빵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빵은, 모네가 그린 거꾸로 선 정물이거나 습한 시간일 뿐이다
이틀, 혹은 사흘 지나도 빵은 그 자리다
49제
자동차 소리, 바람소리, 문 여닫는 소리, 아이 울음소리, TV소리, 쌀씻는 소리, 전화벨 소리, 시계 초침소리, 개 짓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도마소리, 뉘집 싸우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웃음소리,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
엄마 목소리는 이제 없습니다
기억을 묻다
금호강 가에서 그는 낚시를 했다. 머리 위 기인 낚싯대 휘감아 던지면 그 끝에 출렁, 오도암 뒤 절벽 봉우리가 걸리곤 했다. 산 그림자가 그를 막는 시간이면 ‘번번이 허탕이군’ 투덜대며 일어서는 그를 더 깊이 끌어안는 산줄기가 첨벙첨벙 멱 감았다.
강에 닿아 강을 본다
무수한 발자국들이 걸어간 금호강이 길을 내는 것 본다
눈물에 떠다니며 모질게 뿌리박고 있는
달개비, 마름, 긍긍이
투덜대는 그를 납작하게 엎드려 배웅하는 것 본다
장마
빗발이 점점 굵어진다. 퍼부어댄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치더니 다시 가는 비 온다. 모든 게 젖는다. 몇겹 동여맨 가슴이 젖고, 그가 잠든 산등성이의 솔숲이 젖는다. 자동차가 달리며 젖고 신발이 젖고, 날은 저물고 비는 쏟아지고 또다시 젖고, 비, 비 내린다
어느 새 내가 기대어 앉은 장롱 속으로, 주저앉은 천정 위로 좁고 어두운 입구로 마구 발을 뻗는다. 세상을 흔들고 훑으며 누추한 짐짝들까지 마구잡이로 적신다.
마침내 밤이 빗속에 몸져 눕는다
신천 둔치에서
칠월 염천에
코스모스 피었다
엄발난 가시내처럼
가는 목 흔들며 교태부리고
고추잠자리 언제 눈 맞았는지 왼종일
숨 넘어가는 소리로 꽃속을 파고 든다
시뻘건 것 사타구니에 집어 넣고
서녁하늘이 능청 떨고 있다
모든 건 잠깐이다
사리
시인협회 행사를 마치고 고등어구이로 늦은 저녁을 먹던 날
찢고 발기면서 정신없이 파먹다가 본 그것,
파먹히며 파먹히며 버티던 그것,
칠남매 왁자지껄한 한 마당,
함박 웃음이다가도
엄마의 인생을 매번 비트는 건 아버지의 바람이었다
자랄수록 우리 남매는 아득한 시간 저쪽으로 자꾸 달아났고
엄만 뼈만 남은 고등어처럼 앙상하게 야위어갔다
종달새는 새기를 지키기에 하루에 3천번씩 우짖는다는데
앙상한 지느러미 펄럭이며 엄마의 바다는 얼마나 가팔랐을까
세상으로부터 돌아눕듯 머뭇거림도 없이 떠난 빈 집,
그 집을 배경으로 푸른하늘 이고 선 일곱자식들
*아, 입만 있는 것들,
입밖에 없는 것들
접시 위 생선가시가 놓여있다
*이상호 시인의 시에서 인용
너를 그리고 싶다
그가 가고 처음 생리가 찾아와 자리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사정없이 쏟아내는 범람, 석고처럼 웅크리고 앉아 달아난 시간들을 꿰면서 당신 속으로 자꾸 파고드는 새벽 두 시, 여전히 내 심장 속에서 불타고 있었고 내 온 몸에서 꽃 피워내고 있었다
드디어 꽃 숲 뒤에서 그가 말했다.
-그려내 봐, 피워내 봐.
느낌
-유럽 명품 조각전에서
기원전의 스핑크스가 대구에 왔다. 바빌론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비와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을 데리고 세기의 징금다리를 건너면서 이 곳까지 왔는데 입장료는 겨우 5천원이다
루브로 박물관이 끌어안고 있는 아프로디테의 풍만한 육체가 두 팔을 잃어버린 채 냉정한 표정으로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없는 두 팔에 대한 아름답고도 설레는 상상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비너스의 시선이 거북스러워 비껴가는 내 앞에 사막에서 고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기원전의 끝없는 행렬 속에서 문득 목 조여오는 통증,
나는 지금 엄청나게 거대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ㅡ그려 내봐, 피워내 봐ㅡ모든 건 잠깐입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축하 드립니다.
주영씨
오랫만에만난그대의시
반가워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박주영선생님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