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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8卷
第4章 勝利島 (28~33)
<승리섬 28>
낙도본부총회에는 가고시마현 도카라 열도에서도 멤버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도카라 열도는 가고시마항에서 약 200킬로 떨어진 남해상에 줄지어 늘어선 화산열도다.
야쿠섬과 아마미오섬 사이에 위치하는 구치노섬, 나카노섬 등 12개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섬은 가고시마 군 도시마무라에 속한다.
학회는 이 도시마무라와 사쓰마 반도에서 남남서쪽으로 40킬로 떨어진 다케시마섬, 이오섬, 구로시마섬으로 이루어진 미시마무라를 합쳐 도시마지구를 결성했다. 1964년 3월, 이시키리 히로타케가 지구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14년 동안 이시키리는 가고시마 시내에 거주하면서 이들 섬에 사는 동지를 격려하러 다녔다.
이시키리는 1955년10월 마흔한살에 입회했다.
가고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시키리는 수산회사와 아이스크림 제조업 등에 손대지만 실패한다. 거액의 빛을 안고 괴로워할 때 지인에게서 학회이야기를 듣는다. 신비주의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의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설하는 종교라는 점에 공감하고 신심을 시작했다. 입회한 뒤 학회활동에 의욕적으로 도전해 10세대, 20세대로 홍교를 달성했다.
경제고는 여전했지만, 입회한 이듬해에 오사카에 홍교하러 갔다. 그때 오사카에 와있는 청년부 실장인 야마모토 신이치를 만나 명함을 주고받았다.
이해 7월,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지원활동의 최고책임자를 맡은 신이치가 선거위반이라는 사실무근의 죄로 부당하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석방된 신이치에게서 엽서가 왔다.
엽서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동요 하지 말고 광선유포의 사명을 위해 꿋꿋이 살아 후회 없는 일생을 보내라는 기백 넘치는 글이 씌어 있었다. 이시키리는 감동했다.
‘본인이 가장 힘든 상황에서 겨우 한번 만난 사람인데 사업에 실패한 패잔병 같은 나를 걱정해 격려하시다니, 이것이 학회의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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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이시키리에게 보낸 엽서에는 <우에노전답서>의 한 구절이 씌어 있었다.
“혹은 불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물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더라. 청문했을 때는 타오르듯이 생각하지만 멀어지고 나면 버리는 마음이 일어나느니라. 물과 같이 라고 함은 항상 퇴하지 않고 믿는 것이니라.”(어서 1544쪽)
이시키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희일우(一喜一憂) 하지 않고 묵묵히 신심에 힘쓰자. 반드시 물과 같은 신심을 관철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윽고 이시키리는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 식품회사를 세우고 전국으로 판로를 넓혀 빚도 갚고 멋지게 신심의 실증을 보인다.
1958년 8월,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가 서거한 뒤 총무로서 학회를 이끄는 신이치가 가고시마를 방문한다. 이시키리는 신심에 힘쓴 결과 사업이 많이 좋아졌다며 가슴을 펴고 당당히 보고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으로 생활고와 싸우는 다기진 동지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다.
신이치는 이야기를 다 듣자 이시키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홍교에 힘써 사업이 잘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본존의 공덕이고 신심의 힘입니다. 그러나 만일 만심을 일으켜 신심이 좀먹는다면 다시 모든 것이 막히고 맙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오만을 없애야 합니다.
제목을 부르고 절복을 하면 당연히 공덕을 받고 경제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생성불이라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하려면 신심을 꾸준히 관철해야 합니다. 신심의 핵심은 지속입니다.
그런데 오만이 머리를 쳐들면 신심이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오직 모름지기 그대 부처가 되고자 생각한다면 만(慢)의 당번(幢幡)을 쓰러뜨리고 분노의 지팡이를 버리고 오로지 일승(一乘)에 귀의 할지어다. 명문명리는 금생의 장식이고 아만편집(我慢偏執)은 후생의 족가(足枷)이니라’(어서 463쪽)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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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어서를 풀어 설명했다.
“니치렌대성인은 성불하고 싶으면 오직 만심의 당번(幢幡)을 쓰러뜨리고 분노의 지팡이를 버리고 일불승(一佛乘)인 남묘호렌게쿄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명문명리는 금생의 장식에 불과하며, 자신을 자랑하고 편견에 집착하는 마음은 후생에 성불하는데 족쇄가 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퇴전한 사람은 대부분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심에 차면 자기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단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광선유포의 조직을 파괴하는 작용이 됩니다. 당신이 신심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기에 굳이 말해둡니다.”
이시키리는 자신의 본질을 날카롭게 간파 당한 듯한 심정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좋다. 반드시 만심을 깨부수자! 평생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광선유포에 이바지하는 남자가 되자!’
1953년, 이시키리는 ‘세이쿄신문’보급소를 운영하게 된다. 광선유포와 학회를 위해 힘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결단을 내렸다.
배달 구역은 미시마무라와 도시마무라도 포함했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주3회 발간이었다. 섬에 사는 구독자에게는 집집마다 우편으로 보냈다.
이듬해 3월, 이시키리는 도시마무라와 미시마무라를 포함하는 지구의 지구부장에 임명된다.
리더가 해야 할 활동의 요점은 한 사람 한사람과 만나는 일이다. 그것이 기본이다.
도시마무라 멤버를 가정방문 하려면 아마미오섬의 나제로 가는 배를 타고 구치노섬, 나카노섬, 다이라시마섬, 스와노세섬, 아쿠세키섬 고다카라섬, 다카라지마섬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며 돌아야 한다. 배는 한 달에 4차례만 왕복한다.
도시마무라는 남북으로 150킬로에 걸쳐 섬들이 산재해 있고, 열도의 이 섬 저 섬에 3세대, 5세대로 퍼져 있는 동지를 격려하는 활동이다.
매달 한번은 도시마무라와 미시마무라를 돌았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는 결항한다. 집을 나서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집에서 자는 날이 한 달에 열흘도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시키리는 섬의 동지를 위해 사력을 다할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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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섬을 돌며 활동하는 이시키리를 가족들은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도왔다.
섬사람들의 생활도, 학회활동도 본토의 도시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어려움이 있었다. 이시키리가 지구부장이 되었을 무렵에는 아직 항구를 정비하지 않은 섬이 많아 먼 바다에서 나룻배로 옮겨 타고 노를 저어 섬까지 들어가야 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
배에서 짐을 내려 운반하려면 나룻배를 젓는 사공이 섬에 있어야 한다. 도시마무라의 가자섬에서는 주민이 수세대로 줄어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뱃사공이 없어지자 1970년에 주민이 모두 섬을 떠나 무인도가 되었다.
전기도 1978년 7월에 비로소 도카라 열도의 북쪽 현관에 해당하는 구치노섬에 24시간 송전이 실현되었다. 그전에는 섬의 자가 발전소에서 전력을 공급했기 때문에 시간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공급이 불안정해 좌담회 도중에 정전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이시키리는 멤버들에게 학회영상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영사기를 짊어지고 학회원집을 방문했다. 스위치를 켜자 영사기 전구가 나갔다. 예비전구도 나가고 말아 상영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자가발전으로 전압이 본토와 달랐다. 그 뒤로 변압기도 들고 다녔다.
섬 안을 돌려면 2시간이든 3시간이든 그저 걸을 수밖에 없다. 캄캄한 밤길을 걷다가 도랑에 빠질 때도 있었다.
이시키리는 가방에 즉석라면을 여러 개 넣어 다녔다. 자신의 식사문제로 섬 동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도가 높아 배가 결항하면 며칠씩 섬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 한 사람 한사람과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 섬에서는 한 사람만 진지하게 일어서도 광선유포가 크게 열리지만, 한 사람만 퇴전하거나 배반해도 조직이 괴멸상태에 빠질 때도 있다.
이시키리는 ‘불요불굴의 결의로 일어서는 광포의 투사를 육성하자. 그러려면 내가 불요불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자(師子)가 되어야 사자를 기를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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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마무라와 미시마무라는 해마다 태풍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시키리는 지구부장이 된 뒤로 태풍 피해가 적도록, 섬의 한 사람 한사람이 행복 해지도록, 섬의 광선유포가 추진되도록 필사적으로 기원했다.
당시 도시마무라와 미시마무라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젊은 사람들 대다수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섬을 떠났다. 도시생활을 강하게 동경하기도 했다. 본토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인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회원은 섬을 번영시키려고 밝고 힘차게 노력했다.
주위 사람들이 신심을 반대해도 웃는 얼굴로 감싸듯 대하며 착실히 이해자를 넓혔다. 이시키리는 그 모습에 마음이 씻겨지는 듯했다.
이오다케 분화구가 연기를 뿜어내어 ‘기카이가섬(귀신섬)’이라고도 부르는 미시마무라의 이오섬에도 섬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신심에 힘쓰는 한 부인이 있었다. 병약한 남편을 돌봐야 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반드시 신심의 실증을 보여 광선유포를 추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학회활동에 힘썼다.
대나무 베기 작업이나 남자들과 함께 토목공사 현장에서도 일했다. 새 옷도 사지 못하는 형편이라 새끼줄로 옷소매를 매고는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
이 부인이 불법(佛法)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멸시하며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착실히 생활혁명의 실증을 보이자 차츰 학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리고 이오광산이 폐쇄되어 불경기가 이어지는 시절에도 부인의 가족은 멋진 집을 신축한다.
같은 미시마무라에 있는 다케시마 섬에는 일찍이 타종의 승려를 지낸 학회원도 있었다. 섬에서 유일한 승려가 학회의 신심을 시작한 까닭에 사람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며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왜 승려인 자신이 학회에 입회 했는지’를 통해 니치렌대성인 불법의 올바름과 위대함을 꿋꿋이 주장했다.
이시키리는 지금 지용보살이 용출하고 있음을 마음속 깊이 실감했다.
광선유포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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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포의 조류는 1955년 무렵부터 각 섬으로 밀려와 해마다 수량을 더했다.
아마미 군도에서는 아마미오섬, 도쿠노섬은 물론이고 기카이섬, 가케로마섬, 요로섬, 우케시마섬, 오키노에라부섬, 요론섬 등에도 동지가 잇따라 탄생해 학회조직이 정비되었다.
신이치가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1961년에는 아마미에 지부가 결성되었다.
아마미오섬 남쪽에는 가케로마섬이 있고 그 더 남쪽에 요로섬과 우케시마섬이 있다.
초창기, 요로섬 동지는 가케로마섬이나 우케시마섬에 노를 저어 홍교하러 다녔다. 또 아마미오섬의 중심부에서 여는 회합에도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참석했다. 4, 5명이 같이 타고 몇 시간씩 걸려 바다를 건넌다.
우비를 입고 타지만 파도가 높으면 물보라로 옷이 흠뻑 젖는다. 노를 젓는 팔은 아프고 몸은 지쳤다. 그러나 ‘한번 노를 저을 때마다 숙명전환이 가까워 진다’고 서로 격려하며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갔다.
자신들이 직접 노를 저어 자신들을 수송하는 ‘손님 없는 배’라며 서로 웃었다.
가케로마섬 동지도 기세가 대단했다. 하루에 5킬로, 10킬로를 걸어 우인의 집을 찾아가 불법대화에 힘썼다.
아마미 군도 중에 사람이 사는 5개 섬에는 맹독을 품은 독사가 서식하는데 가케로마섬도 그 중 한 곳이었다. 독사는 야행성이라 밤에 더 위험하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는 언제 덮칠지 모른다.
밤에 학회활동을 나갈 때는 횃불이나 남포등으로 발밑을 비추고 한손에 긴 손잡이가 달린 낫이나 막대기를 들고 풀을 헤치며 걸어간다.
비오는 날, 좌담회를 마치고 산길을 걸어오는데 우산 위에 툭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독사였다. 또 오두막에서 비를 피하는데 멍석아래에 독사가 있을 때도 있었다.
사명을 자각한 민중에게는 온갖 장애를 물리칠 힘이 있다. 니치렌불법은 벗의 행복을 바라는 민중의 ‘불굴의 행동’으로 넓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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