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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칸트 상층 철학자로서 체계 있게 글을 쓴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다. 플라톤의 경우 대화편들에서 독자는 논제를 찾아내 정리하고 또 여러 편을 관계항을 중첩하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학문은 분야별로 체계를 세울 수 있는 내용들을 분류하여 놓았다고 한다면, 칸트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인식론, 도덕론,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을 세우듯이 체계를 세워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골격(뼈대)을 구축(구성이 아니라)한 건축가의 소질이 있다. 이것은 뉴턴 물리학을 토대로 구축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건축물에 살을 붙여서 움직이고 살아있는 기계처럼 보이게 하려고 변증법을 동원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이 기계가 다양한 방향으로 강도와 두께를 지니고 있는 다양체이며, 또한 다양체는 기계들을 통해 선들을 만들고 또한 잘라져서 선분들을 만들고 그리고 뭉쳐서 흐르기도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들뢰즈/가타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기계가 다양체로서 자기 원인과 자기 생성을 갖는다는 점을 알게 해준 이는 스피노자와 벩송이다.. (50TKB)
가끔 농담을 한다. ‘독일 철학자들이 길고도 무거운 긴 글을 써놓았다. 그것을 독일인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여, 그들의 책이 나오고 나면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읽는지 보자고들 한다. 프랑스에서는 고교철학이 있기에 전문가들이 그것들에 대해 고교생을 대상으로 간략하고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그러면 독일에서는 그 프랑스 번안자의 글을 중점으로 독일 독일철학의 장점을 강조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철학이 18세 이후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전고교4년은 철학이 필수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들에서 각각이 주장하는 바가 다른데, 자기만의 신념을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타인들의 논점을 파악하려면 타인들의 토대학설과 삶의 영역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타인들의 철학적 견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리고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는 것을 제2의 탄생이라고 룻소가 이야기하고, 이어받아 칸트가 계몽기란 ‘인간이 이제 성인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독일에서는, 일본이 이것을 배웠지만, 외통수로서 타인 또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배우지 않고 자기 것만이 맞다고 한다. 앵글로색슨 철학은 이런 경향이 있고, 신자유주의 이래로 이어져온 독단과 망상으로, 트럼프의 일방성이 “늙다리(dotard)”라는 별명을 얻는 것과도 같다. 적폐청산에서 이명박을 방어하려는 안철수, 정진석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일방주장의 폭력성은 김기춘이 초원복집 사건을 벗어날 때부터 다듬어 진 것일 것이다. 속좁은 이성이 자기 명증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편에서만 성립하고 있으며, 자기편이 권력을 쥐고 있거나 수적으로 다수라고 주장할 때이며, 진실과 사실 그리고 사건과 관계없이 만들어진 담론에서만 자기 명증성이 있는 셈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도, 개 같은 영혼 없는 이들이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맞장구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의 적폐청산의 지름길은 모든 18세에게 철학을 필수로, 즉 대학 1학년들 모두가 다 철학을 배워야 한다. 세상은 일방통행이 없으며 쌍방도 아니고, 다양체이기 때문이다. (50T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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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칸트 310-334
1. 독일 관념론 개관 310-314
18세기의 철학은 영국 경험론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존 로크, 버클리, 흄 등이 그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라고 하겠다. (310) [프랑스 철학의 백과전파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유물론 철학도 무시하고 있다.] [21장에서 프랑스 유물론을 다룬다.]
[러셀의 로크 강조] “지식은 두 관념의 일치 또는 불일치에 대한 지각이다.” // 우리는 세 가지 실재적 존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다. 즉 우리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지각적(知覺的) 지식,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적(論證的) 지식, 그리고 감각에 나타나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感覺的) 지식이 그것이다. (311)
버클리는 이 불일치의 해결에 중요한 발전을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정신과 정신의 관념만이 존재할 뿐이다. (311)
흄은 이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이론을 실천과 부합시키려는 충동은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아를 부인하고 귀납과 인관관계를 의심하였다. 그는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물질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버클리처럼 신의 관념의 형식으로 대용품을 내놓지 않았다. (311)
1750년부터 1794년에 이르는 동안에 가슴은 더욱 큰소리를 쳤다. 드디어 테르미도르(Thermidor) 시기 이후에 적어도 프랑스에 있어서는 한 동안 심장의 맹렬한 부르짖음을 끝마쳤다. 나폴레옹(Napoléon)의 치하에서는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침묵하게 되었던 것이다. (313)
독일에서는 흄의 불가지론에 대한 반동은 루소가 끼친 영향보다도 더욱 심오하고 미묘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칸트(Kant)와 피히테(Fichte) 및 헤겔(Hegel)은 18세기 말의 파괴적인 학설로부터 지식과 도덕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철학을 주장하였다. (313) [대혁명이후 파괴적이 아니라 내부로 심층으로 방향을 잡는 학문들이 등장하게 된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아니라, (스토아이래로 침잠해 있던) 심층의 전복의 철학이 방향을 잡아가는 시기가 칸트이후 19세기이다.]
독일 관념론은 낭만주의의 조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피히테에게는 특히 이런 경향이 돋보이고 셸링(Schelling)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헤겔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친근성이 제일 적었다. (313)
거기에는[독일철학에는] 초기 프랑스나 영국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던 스콜라 철학의 색채가 있다. 칸트, 피히테, 헤겔은 학식 있는 청중들에게 강의하는 대학교수이지,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설이나 하는 한가한 신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그들 자신이 의식적으로 그런 바람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314) [독일의 대학은 그 당시도 지금도 도제제도나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에서는 꼴레쥬 드 프랑스가 있고, 대학 교수가 되기에는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50TMA)]
2. 칸트 철학의 개설 31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흔히 현대[근대]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314)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한 볼프(Wolf)의 번역판을 공부하였으나 루소와 흄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버리기로 하였다. 흄은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의 비판으로 칸트를 그의 독단적인 꿈에서 깨게 하였다. (314) [볼프(Christian Wolff ou Wolf, 1679-1754) 독일 철학자, 법학자, 수학자. 그의 논리학은 프랑스 포르르와얄 논리학과 문법학의 영향이라 한다.]
칸트는 매우 규칙적인 습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산책을 다니는 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 갈 때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시간표가 어긋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루소의 에밀을 읽던 때였다. (315) [설에 의하면 두 번인데, 다른 한번은 프랑스 대혁명의 기사를 읽느라 산보를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경건한 기독교도로서 성장했으나, 정치에서나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였다. .. / 그는 [대의]민주주의 지지자였다. .. 그의 철학은 좀 과장해 말하자면 사보이 교구의 보좌신부의 현학적인 재판(再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5)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직접민주주의도 아니었고, 자연주의적 성향도 아니었다.]
[인성에 관한 한] 인간은 각자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그의 원리는 인권사상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 “인간의 행위가 타인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315) [루소의 일반의지론 보다 소극적이다.] [벩송의 자기에 의한, 자기의 생성이란 관점과도 다르다.(50ULJ)]
칸트의 초기 작품은 철학보다 과학[물리학]에 관한 것이 더 많다. 리스본 지진 이후 지진에 과한 글... 유럽에 부븐 서풍[기상학].... 자연지리학...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1755).. 이것은 라플라스의 성운설을 연상하게 한다.(315-316) [칸트는 뉴턴 이래로 물리학의 학적 성립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가 회의론(懷疑論)에 빠져 곤란을 받던 시절을 전후하여, 그는 형이상학의 꿈에 의해 설명된 어느 환상가(Träume eines Geistersehers, erläutert durch Träume der Metaphysik, 1766)을 썼다. 여기서 환상가란 스웨덴보르크(Emanuel Swedenborg, 1688-1772)였다. 그는 신비주의 체계를 방대한 저술로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 칸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스웨덴보르크의 체계는 정통적인 형이상학보다 더 공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316)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칸트는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젊었을 때의 학구적인 습관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글을 쓴 사람이 미혼자인지 결혼 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316) [토를 단 러셀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초판 1781)(초판: 1781년, 재판: 1787년) (316)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인식론] >
그는 라이프니츠가 혼돈하고 있던 두 가지 구별을 확실히 밝혔다. 하나는 분석적(分析的) 명제와 종합적(綜合的) 명제의 구별이고 또 하나는 선험적(先驗的, a priori) 명제와 경험적(經驗的, a posteriori) 명제의 구별이다. (317)
분석적 명제란 술어가 주어의 부분으로 되어 있는 명제이다. 가령 “키가 큰 사람은 사람이다” 또는 “이등변 삼각형은 삼각형이다.” .. 이 명제는 모순율에서 비롯된다. 키가 큰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원은 둥글다” - 동어 반복이다]
종합적 명제는 분석적이 아닌 명제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는 다 종합적이다. .. [이명제로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즉 “화요일은 흐려 있었다” 또는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등등이다. 그러나 칸트는 라이프니츠나 그 밖에 칸트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이 역(逆)[반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위대한 장군은 나폴레옹이다] (317)
경험적 명제는 우리의 감각적인 지각이건, 다른 사람의 지각이건 간에, 감각의 도움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이다. 역사적 및 지리적 사실은 다 이런 것이다. 과학의 법칙도 그 법칙의 진리성에 대한 지식이 관찰에서 비롯될 경우에는 마찬가지이다. (317)
한편 ‘아 프리오리’한[선험적] 명제는 설사 그것이 경험에 의해 유도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후로는 경험 이외의 다른 하나의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산수를 공부하는 아이는 두 개의 대리석과 또 두 개의 대리석이 있음을 경험하고 이것을 합치면 네 개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 공부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2에 2를 더하면 4”라는 일반 명제를 안 연후에는 이미 실례를 확인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명제는 귀납이 어느 일반적인 법칙에 줄 수 없는 어떤 확실성을 갖는다. 순수 수학[산술학]의 모든 명제는 이런 의미에서 ‘아 프리오리’하다. (317-318) [가장 가까운 거리, 직선은 분석적일까 선험적일까? 유크리드 기하학에서 분석적이지만 비유크리드 기하학에서는 선험적이다.]
흄에 의하면 인과법칙(因果法則)은 분석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 / 칸트는 인과법칙이 종합적이라는 견해는 인정했지만, 선험적으로 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산수도 기하도 종합적이며 동시에 ‘아 프리오리’하다고 주장하였다. (318)
선험적[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데 대한 대답과 그 결론이 “순수 이성비판”의 주제가 되었다. (318) [5+7은 12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5와 7을 분석해도 12는 없기 때문이다.] ,
그는 초판(1781)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 해결되지 않은 형이상학의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여태까지는 이 문제[선험적 종합판단]의 해결을 위한 열쇠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재판(1787) 머리말에는 자기가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轉換)”[Kopernikanische Wende]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318)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이제까지 지식은 대상을 통해서 인데 이제는 주체를 통해서 지식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사물이 주체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정신(주체)이 사물 주위를 돈다. 칸트의 전환(전도)는 주관성의 확보인 셈이다. 그럼에도 자신(영혼 생명)이 대상이 될지 아닐지에 대해, 즉 내재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물자체를 버렸다. 이로써 속 좁은 이성이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치닫게 된다. (50TME)]
우리의 감각의 원인이 되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s sich, things in themselves)는 알려지지 않는다. “물자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며, 칸트가 범주(範疇, category)라고 부르는 어떤 일반 개념으로서는 부를 수 없다. (318-319)
칸트는 공간과 시간은 어떤 개념일 수 없으며 직관(Anschauung) 형식이라고 한다. (319) [제1부 선험적 감성론: 시간과 공간의 직관 형식. “공간과 시간 내에서 직관되는 모든 것은 .. 오직 현상이거나 혹은 단순한 표상들이다.” / 선험적(transzendental, eng. transcendental), 초월적 (transzendent, eng. transcendent) ]
그러나 선험적(先驗的, a priori)인 것 중에서 “직관의 형식”이외에 선험적 개념이 있는데 이것이 곧 범주(範疇)이다. 칸트는 이것을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유도해 내고 있다. (137) [범주의 연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논리적 연역)는 전통 논리학의 판단 형식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지성의 활동은 부단히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선험적 연역)는 ‘통각의 다양성이 종합적으로 통일하는데’ 근거한다. 모든 경험은 통일적으로 질서 지어져 있다. 이러한 질서의 조건이 범주이다. 범주는 주어진 표상들의 다양성을 통각한다. = 먼저 주어진 질서는 자연의 제일성, 통일성이 있다는 전제가 되어 있는데, 이는 부당전제의 오류에 속한다. 벩송에 의하면 두 가지 질서(deux ordres) 또는 방향(deux sens)이 있다.]
1) 양 –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2) 질 –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3) 관계– 실체와 우연성, 원인과 결과, 상호성
4) 양상 – 가능성, 현존성, 필연성
이 범주들도 공간이나 시간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 구조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이 범주가 적용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물자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일관성(一貫性)[습관 믿음]이 있다. 왜냐하면 칸트는 “물자체”를 감각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의지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320) [모든 경험에 범주의 적용이 과학 즉 인식론이다. 이는 합리에 토대를 두고 실용에서 관심을 찾는다. 그래서 유용성 실용성 도구성은 같은 계열을 가고 있다. (50TME) ]
순수이성비판의 많은 부분이, 경험할 수 없는 사물에 공간과 시간 또는 범주를 적용시킬 경우에 일어나는 과오를 밝히는데 충당하고 있다. (320) [선험적 변증론(Dialectique transcendantale)에서 크게 3가지를 다룬다. 심리의 오류추론(Les paralogismes) 네 가지 안티노미(Les antinomies) 순수 이성의 이상(L’Idéal de la raison pure)]
칸트에 의하면, 직관의 형식이나 범주를 경험되지 않는 사물에 적용시키면, “이율배반(二律背反)”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첫째 이율배반에 있어서 정립은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작을 갖는다. 그리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다”이다. 그리고 반정립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작이 없다. 또흔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둘째 이율배반은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셋째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두 가지 인과율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 법칙에 있어서 인과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유에 있어서 인과율이다. 반정립은 자연법칙에 의한 인과율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넷째 이율배반에서 절대적 필연적인 존재자는 존재하며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부분이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율배반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320) [이항 대립의 관계를 오성(속 좁은 이성)으로 풀려고 하는 것은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변증법의 해결로서 하나의 절대지를 창안하는 것은 관념을 종합으로, 내가보기에, 우격다짐이다. 국가의 절대성은 우격다짐을 넘어서 폭력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루소의 자유의지는 국가에 양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에 강탈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럼 국가란 무엇인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1980)에서 국가는 하나의 통일성 또는 보편성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편집증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사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 철학하는 것이다. (50TMG)]
칸트는 유명한 한 장(章)에서 신의 존재에 관한 종래의 이성적인 증명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신을 믿는 다른 이유가 있따는 것을 밝힌다. 그는 이것을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윤리학)에서 나중에 발표하려고 했으며 .. 순수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 것에는 세가지,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자연신학적 증명이 [있다]. (321)
존재론적 증명에 있어서는 신을 가장 실재적인 존재, 즉 존재자에 속하는 모든 술어의 주체가 되는 자라고 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 만일 무엇이 존재한다면 어떤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하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따. 그러므로 하나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신학적인 증명은 계획으로부터의 증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형이상학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증명에서 우주는 목적의 증거인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한다. .. 칸트는 이 증명은 세계 건축자를 증명할 뿐 세계 창조자를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321)
그의 말에 의하면 신, 자유, 영혼 불멸은 “이성의 세 가지 이념”이라는 것이다. (322) [칸트에서 도덕형이상학이 성립하기 위한 세 가지 요청이다.]
<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 >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 보다 먼저 나온 ...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칸트의 윤리 체계를 볼 수 있 ... 이 책에서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란 말이 나온다. .. 칸트는 공리주의와 관련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322) [마땅히 해야만 한다. ... 라는 정언명법은 장점도 있지만 ‘마땅히’란 보편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약점도 있다. 군사명령, 선교임무, 교육임무 등에서 ..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등 (50UKC) ]
“전혀 고립된, 그러니까 어떤 신학이나 물리학 또는 초물리학(hyperphysique) 등과는 혼돈되지 않는 도덕의 형이상학을 원한다.” “모든 도덕 개념은 완전히 선험적 이성 속에 그 위치와 근원을 갖고 있다.” (322)
명령에는 두 가지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이 있다. 가언명령은 “네가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된다”이고 정언명령은 목적에 관계없이 어떤 행동이 객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종합적이고 선험적이다. (323)
“정언 명령을 생각해 보면 곧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정언명령에는 도덕 법칙이 포함되어 있고, 행동 규범이 이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필연성이 포함되어 있을 뿐 그 밖에는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도덕 법칙은 이 보편성을 가져야 하며, 또 그래야만 명령을 절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이 단순한 것이다. 즉 ‘너는 네 행동 규범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또 ‘ 너는 네 행동 규범이 네 의지를 통하여 일반적인 자연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이다” (323) [벩송은 정언 명법이 도덕의 정태적이라 보고, 닫힌도덕이라 한다.]
그런데 칸트의 원리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그가 분명히 잘못이라고 생각할 행위가 많이 있다. 가령 자살의 경우가 그렇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누구나 다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칸트의 순수한 형식주의적인 입장을 버리고 행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중요시해야 한다. (323-324)
그는 만인이 그 사람 자신에게 목적이 있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 만일 그 이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해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난점은 특히 정치 철학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다수를 위해 그런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 만일 정부의 윤리 같은 것이 있다면, 정부의 목적은 하나라야 하며, 정의(正義)에 부과되는 유일한 목적은 사회의 선(善)일 것이다. (324) [플라톤은 정의가 세 요소의 조화였다. 이데아론에서 최고 이데아를 설정하여 이데아들의 자족적 공존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선, 하나의 목적은 개별자들을 하나에 포획 또는 묶임에 있다. (50ULJ)]
< [러셀은 지면상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나?: 미학) 취향과 숭고함을 빠뜨렸다.]>
칸트는 노년에도 마음의 움직임이 발랄하고 생기가 있었다는 것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1795)에 대한 그의 논문이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324) - [루소의 영구 평화론(Extrait du projet de paix perpétuelle)(1756년 쓰다가 1761년 출판) - 칸트가 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세계 정부를)이루고 있는 나라들의 조직체는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 .. 이 책을 쓴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시대(the Reign of Terror)의 충격을 받고 있었던 때이므로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 / “전 국민이 나라 일을 처리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의지는 그 자체와 모순되고 자유의 원리와 모순된다.”(325) -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1882년 프랑스가 실행한] 보편, 평등, 무상, 탈종교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 대혁명이후 100년이나 걸렸다. 민주주의 실현의 길이 멀고도 어렵다는 점인데, 20세기 후반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교육의 4대 이념이 실현되고, 21세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시대이다. 가짜뉴스도 넘치지만 말이다. (50UKC)]
3. 공간과 시간에 대한 칸트의 학설 325
칸트의 공간론과 시간론 ... 이 학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초판 1781)과 철학서설(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1783)에 서술되어 있는데, 후자가 좀 더 알기 쉽지만 전자처럼 충분하지 못하다.(325)
칸트는 우리의 감각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원인을 “물자체(Ding an sich)” 또는 실체(neumena)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의 지각에 나타나는 것을 “현상(phenomeno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감각(感覺)이라 불렀다. 또 하나는 주관적인 지각으로부터 .. 현상의 형식(形式)이라 불렀다. (326)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인 형식임을 증명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한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탐구요, 또 하나는 인식론적 탐구, 즉 선험적인 탐구이다. .. 공간에 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는 네 가지가 있다. (326-327)
1) 공간은 외부의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 개념은 아니다. .. 따라서 외부적인 경험은 오직 공간의 표상(表象)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측지학에서 기하학으로 추론에 의한 공간이 아니다]
2) 공간은 모든 외부적인 지각(知覺)의 근저에 놓인 ‘아 프리오리’한 필연적인 표상이다. 왜냐하면 공간에 아무것도 있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공간 없이는 사물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공간은 사물들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이론적 또는 일반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간이 있을 뿐 우리가 말하는 공간들은 그 일부이며 예들(instances)아니기 때문이다.
4) 공간은 이미 주어진 무한대의 것으로 그 안에 모든 공간의 부분들이 포함돼 있다. .. 공간은 개념이 아니라 직관(直觀)이다. (327) [선험적 감성의 직관이라고 했다. - 들뢰즈 식으로 시각의 공간은 왕립과학으로, 내감의 공간은 노마드의 공간으로 분류한다. (50UKC)]
그럼 여기서 앞에 주장에 대하여 일일이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첫째로] 칸트는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간은 외부의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이 외부에서 왔다고 말하려면, 즉 공간 속에서 내가 내 자신을 발견하는 위치와 다른 어떤 위치에 있는 사물에서 (감각이) 왔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그 사물들을 상호간에 밖이나 곁에 있는 것으로서 지각하려면, 그리하여 이 사물들이 서로 다르고 각각 다른 곳에 있음을 지각하려면 미리 공간의 표상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zum Grunde liegen) 하기 때문이다.” (328)
그런데 한 가지 난점이 – 칸트는 전혀 느껴 본적이 없는 것 같지만 – 있다. 이것은 칸트가 주장하는 공간과 시간의 주관성에 대한 모든 학설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다. 지각의 대상들을 정리할 경우에 나로 하여금 언제나 내가 정리하는 대로 정리하게 하고 이와는 다르게 정리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328)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바꾸는 자아의 재배치 방식이다. 이에 젖게 된 상층 사고는 사물들도 그렇게 분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배치가 달라지면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런 배반 전복이 있냐고, 그 전복에서 저항, 봉기, 혁명이 나온다. (50ULI)]
둘째로 칸트는 형이상학적인 탐구에 있어서 주장하기를 사물이 없는 공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공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다. (329-330)
셋째로 형이상학적인 탐구에서 칸트는 주장하기를 “공간은 사물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논리적 또는 이른바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유일한 공간을 상상할 뿐이다. 설사 우리가 ‘공간들’에 대하여 말할 경우에도 우리는 단지 하나의 공간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것은 동일하고 유일한 공간의 부분들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전체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 부분들은 공간 속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공간은 본질상 유일하면 공간 속의 다양(多樣)은 오직 제한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330) [칸트도 한계 안에서 사고와 한계를 밀고 나가는 또는 한계 없는 사유가 다름을 알았다. 그래서 한계없는 공간은 그 자체가 다양체이다.]
넷째는 형이상학의 탐구에서 공간은 주로 직관이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공간은 주어진 무한히 큰 것으로 상상 된다”(혹은 나타난다 또는 표상된다는 것이다). (330-331) [공간은 술어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사물은 공간에 있다. 공간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장(場)처럼 결(파 派, 흐름)처럼 잘라진 부분 없이 있다. 이것을 들뢰즈는 매끈한 공간이라 부른다.]
선험적(先驗的) 즉, 인식론적 탐구는 철학서설(Prolegomena, 1783)에서 분명히 진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형이상학적 규명보다 훨씬 명확하다. .. 기하학은 두 가지 상이한 연구를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한편으로 순수기하학이 있는데, 이것은 공리에서 연역하여 결과를 내는 것이며, 그 공리자체가 옳고 그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학의 한 분과로서 기하학이 있다. 가령 상대성 일반이론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경험과학이다. 여기서 공리는 측정에서 귀납되며, 유클리드 기하학과 다르다. / ..하나는 ‘아 프리오리“하지만 종합적이 아니고, 다른 하나는 종합적이기는 하지만 ‘아 프리오리“하지 않다. (331) [일반적으로 칸트는 순수 기하학의 선험적 공간에다가 직관 형식과 개념의 범주를 세웠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두 가지 공간을 갖게 된다. 하나는 주관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객관적인 것이다. 하나는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고, 또 하나는 오직 추리(推理)된 것이다. (332) [칸트는 데카르트 이래로 이원성의 관계를 선험적 형식으로 여러 학문의 토대에 적용하여 그럴 수밖에 없음을 추인한 셈이다. 이 이원성은 형이상학의 부정으로 가거나 또는 그가 선전제로서 두었던 물자체를 배제하여 주관성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어째거나 이원성을 골고루 종합하려는 학문은 헤겔의 “역사학”의 생성을 가져올 수 있다. ]
[칸트의 영향: 독일 관념론]
칸트의 직접 후계자인 피히테(Fichte, 1762-1814)는 “물자체”를 버리고, 건전하지 못하다고 불 수 있을 만큼 주관주의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주장에 따라면 자아는 유일한 궁극적인 실재이며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가정해서만 존재한다. 비자아는 종속적인 실재성을 갖고 있을 뿐이며, 이것 역시 자아가 그것을 가정할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334)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독립운동과정에 일본 제국과의 투쟁에서 피히테 자아와 비자아의 투쟁관계를 원용하다가, 무장 투쟁으로 나섰다.]
피히테는 순수한 철학자로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독일 국가주의의 토대를 세운 사람으로 중요시된다. 독일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1808)은 예나 전쟁 후에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에게 대항하여 궐기할 의도에서 행해진 연설문이다. (334) [벩송은 피히테의 인간의 운명(Die Bestimmung des Menschen, 1800)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직접 후계자 셸링(Schelling, 1775-1854)은 한결 온후한 사람이 있지만 주관주의적인 경향은 칸트에 못지않았다. 또한 독일 낭만주의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시에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나, 철학에 있어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다. 칸트의 철학에서 중요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헤겔(Hegel, 1770-1831) 철학이라고 하겠다. (334)
[칸트의 사상이 새로이 조명을 받은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신칸트주의(le néokantisme)로서는 마르부르트 학파(École de Marbourg)와 바덴학파(École de Bade) 또는 독일 서남학파가 있다. 전자에는 논리주의적 경향으로 코헨(Hermann Cohen, 1842-1918), 나토릅(Paul Natorp, 1854-1924),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가 있고 후자에는 가치론적 경향으로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와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가 있다. / 다른 방향으로 보면 독일 철학에서, 주로 헤겔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낌새의 시대(l'ère du soupçon)에는 (Schopenhauer), Kierkegaard, Marx, Nietzsche, [Freud]가 있고(쇼펜하우어를 제외하고 독일 외곽에서 활동한 학자들이다),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방향으로는, Dilthey, Husserl, Jaspers, Heidegger, Sartre, Levinas, Merleau-Ponty, Ricœur. 정치철학에서는 Habermas, Rawls, Apel, Arendt, Alain Renaut, Luc Ferry. 후기구조주의에서는, 푸꼬(Foucault et la notion de modernité)와 들뢰즈(Deleuze et son concept d'empirisme transcendantal)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10:01 50ULI) (10:16, 50ULJ)
#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 재1787) Critique de la raison pure.
Sommaire [masquer]
1 L'Idée critique
1.1 L'intention de Kant
1.2 La révolution copernicienne
1.3 L'Idéalisme transcendantal
1.3.1 La question de l'a priori
1.3.2 Le transcendantal
1.3.3 Les jugements
1.4 Les formes
1.4.1 Formes a priori de la sensibilité
1.4.2 Formes a priori de l'entendement
1.5 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2 Esthétique transcendantale 선험적 감성론
2.1 Définitions
2.1.1 Sensibilité et entendement
2.1.2 Connaissance et intuition
2.1.3 Le phénomène
2.1.4 La synthèse
2.1.5 L'Intuition pure
2.1.6 L'Imagination
2.2 De l'espace
2.2.1 Exposition métaphysique de l'idée d'espace
2.2.2 Exposition transcendantale de l'idée de l'espace
2.3 Du temps
2.3.1 Exposition métaphysique du temps
2.3.2 Exposition transcendantale du concept du temps
2.4 Conséquences
3 Analytique transcendantale 선험적 분석론
3.1 Analytique des concepts
3.1.1 Exposition des concepts purs de l'entendement
3.1.2 Déduction des concepts purs de l'entendement
3.1.2.1 La déduction logique
3.1.2.2 La déduction transcendantale
3.2 Analytique des principes
3.2.1 Introduction
3.2.2 Un exemple de schème
3.2.3 Du schématisme des concepts purs de l'entendement
3.2.4 Système de tous les principes de l'entendement pur
4 Dialectique transcendantale 선험적 변증론
4.1 L’introduction
4.2 Les paralogismes 심리의 오류추론
4.3 Les antinomies 네 가지 안티노미
4.3.1 Enjeux
4.3.2 Exposition des quatre antinomies
4.4 L’Idéal de la raison pure 순수이성의 이상
4.4.1 Les trois preuves de l'existence de Dieu
4.4.1.1 Preuve ontologique
4.4.1.2 Preuve cosmologique
4.4.1.3 Preuve physico-théologique
4.4.2 Réduction de toutes les preuves à l'argument ontologique
4.4.3 Réfutation de l'argument ontologique
5 Théorie transcendantale de la méthode
5.1 Discipline de la raison pure
5.2 Canon de la raison pure
5.3 L'architectonique de la raison pure
5.4 L'histoire de la raison pure
6 Postérité de la Critique
6.1 L'idéalisme allemand
6.2 Le kantisme et l'école de Marbourg
6.3 La phénoménologie
7 Plan de l'ouvrage
#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 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Préface
Introduction
Première partie : Doctrine élémentaire de la raison pure pratique
Livre premier : L'analytique de la raison pratique
Chapitre premier - Des principes de la raison pure pratique
I. De la déduction des principes de la raison pure pratique
II. Du droit qu'a la raison pure, dans l'usage pratique, à une extension qui n'est pas possible pour elle dans l'usage spéculatif
Chapitre II - Du concept d'un objet de la raison pure pratique
Chapitre III - Des mobiles de la raison pure pratique. Examen critique de l'analytique de la raison pure pratique
Livre deuxième : Dialectique de la raison pure pratique
Chapitre premier - D'une dialectique de la raison pure pratique en général
Chapitre II - De la dialectique de la raison pure dans la détermination du concept du souverain bien
I. L'antinomie de la raison pratique
II. Solution critique de l'antinomie de la raison pratique
III. De la suprématie de la raison pure pratique dans sa liaison avec la raison pure spéculative
IV. L'immortalité de l'âme comme postulat de la raison pure pratique
V. L'existence de Dieu comme postulat de la raison pure pratique
La liberté (Freiheit) comme postulat de la raison pure pratique
VI. Sur les postulats de la raison pure pratique en général
VII. Comment est-il possible de concevoir une extension de la raison pure, au point de vue pratique, qui ne soit pas accompagnée d'une extension de la connaissance, comme raison spéculative
VIII. De l'assentiment venant d'un besoin de la raison pure
IX. Du rapport sagement proportionné des facultés de connaître de l'homme à sa destination pratique
Deuxième partie: Méthodologie de la raison pure pratique
Conclusion
Influence
#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ou Critique du jugement
2 Inhalt
2.1 Geschmack 취미 취향
2.2 Subjektive Allgemeinheit 주관적 보편성
2.3 Das Schöne und das Erhabene 아름다움과 숭고함
2.4 Das Genie 천재
(Ire partie) le jugement esthétique
(IIe partie) le rapport entre l’homme et la nature
le Beau et le sublime .
le genie
##***
책1945러셀17서양철최IV21
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우리가 17-18세기의 사상적 사조를 표면의 시대, 또는 표면의 이중화의 시대라고 부르고, 19세기의 사상의 방향은 내부로 또는 심층으로 향하는 시대라고 불렀다. 19세기는 칸트가 죽은 시기 이래로 주지주의 사고의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였다.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피히테가 인간은 어디로 향하는가를 문제제기했다. 천상으로? 아니 내부로부터 또는 과거로부터 라는 사유의 방향을 바꾸어 보려고 한다. 내부가 거의 한계가 없듯이 과거 또는 인류의 지식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칸트적 의미에서 이미 인류가 또는 생명체가 먼저 경험하여 내재적으로 축적되고 압축되어 있는 선험적(transcendantale ) 영역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19세기 말이 되면 외부의 경계란 것도 또한 경험적(실험적으로) 무한히 넓어져 간다. 인류는 자기 지식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려진 과거만큼이나 열려진 미래로 나아간다. (50ULI)
19세기 사조는 러셀이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것 같다. 영국의 철학계가 아니라 사상계 일반에 대한 견해도 잘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러셀이 살았던 시기의 한계, 앙글로 색슨의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한계 일 수 있다. 앙글로 색슨 철학이 인식론의 길로 즉 과학철학이란 이름으로 명제 분석으로 가는 것도 그 일부분일 것이다. (50UMB)
***
제21장 제19세기 사조 335-349
19세기 지적 생활 ... / 첫째 그 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관련된 [지리상]면적이 넓어졌다 [문화의 다양성 발견]. .. 미국과 소련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 고대 또는 현대의 인도철학도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 [영국 제국 또는 영연방을 중심으로 사유한 것이다.] / 둘째, 과학의 발달도 그 요소가 되었다. .. 특히 지질학[지구과학], 생물학, 유기화학 등... [사회학, 심리학, 정치경제학의 등장] / 셋째, 기계 생산(manchine production)은 사회 조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 [공장제와 자본주의 발달] / 넷째 전통적인 사회 조직 및 정치 조직, 경제 조직 등에 대한 철학적 및 정치적인 두 가지 방면에 걸친 근본적인 반역[들뢰즈 표현으로 전복]은 그때까지 불가침한 것으로 생각되어 온 여러 가지 신앙이나 제도에 대하여 공박하게 되었다 (335)
낭만적인 반역은 바이런(Byron, 1788-1824)[23장],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 1860)[24장], 니체(Nietzsche, 1844-1900)[25장]를 거쳐 무솔리니(Mussolini, 1883-1945)와 히틀러(Hitler, 1889-1945)에 이르고 있다. 합리주의적인 반역은 프랑스 혁명 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다소 완화되어서 영국의 철학적인 급진주의자들에게 전해지고, 맑스(Marx, 1818-1883)[27장]에 와서 더욱 심화되어, 소련에서 그 결과를 보여 줄 것이다. (336-337) [우리는 앞에서도 이런 구분에 대해 반대하였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 962–1806)에 의해 그의 국제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 종교개혁과 30년 전쟁(1618-1648)은 거의 기울어져 가던 통일 독일을 아주 파괴해 버리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수많은 소공국들 남겼을 뿐이다. 18세기에 와서 독일 유일한 국가인 프러시아가 프랑스에 대하여 항거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Friedrich II, 1712-1786)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336)
그러나 프러시아도 나폴레옹에 대항할 수 없었다. 예나 전투(fr. bataille d'Iéna, 1806)에서 완전히 패배하였던 것이다. 비스마르크(Bismarck, 1815-1898)의 프러시아 부흥은 과거 알라릭(Alaric)의 역사적 영웅, 카알대제(Charlemagne, Karl der Große, 747 ou 748(?)-814), 바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52-1190)의 재판(再版)으로 보였다. / 비스마르크가 “우리는 카노사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336)
그러나 프러시아는 정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서부 독일보다 우세하지 못하였다. 괴테를 비롯하여 많은 저명한 독일 사람들이 예나에서 거둔 나폴레옹의 승리를 서글퍼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 동부 프러시아에는 여전히 농노가 남아있었다. 시골에서는 귀족들이 대체로 전원적인 무지(無知)에 갇혀 있고, ... (336-337)
너그러운 몇몇 군주들, 르네상스 군주들(Renaissance princes)이 궁중에서 하던 대로 예술과 과학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예는 바이마르[공국]이다. 바이마르 대공은 괴테의 보호자[후원자]가 되었다. (337)
19세기 동안에 신교 독일의 문화는 점점 프러시아화 되어 갔다[앵글로 색슨]. 프레데릭 대왕(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재위 1740-1786)은 일개 자유사상가로서 프랑스철학의 찬미자로서 베를린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베를린 대학은 이때 총장으로서 유명한 프랑스인 모페르튀(Maupertuis, 1698–1759)를 모셨다. 그는 불행하게도 볼테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337)
그러나 피히테와 헤겔은 프러시아의 철학적인 대변인이었으며[관변철학자], .. 그리고 이점에 있어서 그들의 과업은 독일의 위대한 역사가 특히 몸젠(Mommsen, 1817-1903)과 트라이치케(Treitschke, 1834-1896) 등에 계승되었다. (338)
경험론[영국] 쪽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독일 관념론 쪽으로는 로체(Lotze 1817-1881), 지그발트(Sigwart, 1830–1904), 브래들리(Bradley, 1846-1924), 보즌킷(Bosanquet 1848-1923) 등, 이들은 아무도 철학자들 중에서 선두를 서지 못했다. (338)
프랑스의 혁명 철학자들은 대체로 루소와 관련되는 여러 가지 신조(belief)를 과학에 결부시켰다. 엘베티우스(Helvétius, 1715-1771)와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 ... (338)
엘베티우스(Helvétius, 1715-1771)는 저서 정신론(De l'esprit. 1759)으로 소르본 대학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금서목록에 오르다]. .. 벤담(Bentham 1748-1832)은 1769년에 엘베시우스의 저서를 읽고 바로 그의 입법의 원리에 대하여 자기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베이건(Bacon)이 물리학계에 미친 영향을 엘베시우스는 도덕계에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도덕계도 그의 베이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뉴턴은 앞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엘베시우스는 윤리면에서 공리주의자로 쾌락을 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이신론자로 열렬한 반성직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또 인식론에 있어서 로크의 견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 “로크에 의해 계몽된 우리는 우리의 관념(idea), 즉 우리 정신은 감각기관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39)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는 .. 이렇게 주장하였다. 인권이란 인간의 감성적인 존재(sensitive beting)로 추리할 수 있으며 또한 도덕적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이 하나의 진리에서 비롯된다. .. “소견이 넓은 시드니(Sydney)는 이 원리를 위하여 생애를 바쳤으며, 로크는 자기 이름의 권위를 이 원리에 복종시켰다. 이 원리는 나중에 루소에 의해 더욱 완벽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
콩도르세는 미국 독립전쟁을 크게 찬양하였다. .../ 그에 의하면 미국 헌법은 자연권 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에 네바(The Neva 러시아 북부의 강)에서 구아달퀴비르(The Guadalquivir: 스페인 서부의 강)에 이르기까지 인권이 무엇인지 알게 하였다. (340)
그는 또한 맬서스(Malthus, 1766–1834)의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의 발견자였다. ... 맬서스의 부친(Daniel Malthus, 1730-1800)은 콩도르세의 제자였다. 그리하여 맬서스는 그 학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341) [제자라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다...]
벤담(Bentham 1748-1832)은 처음에는 법률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 1808년 이후에는 공화주의자였다. 남녀 동등함을 믿고 제정(帝政)에 대한 반대자로서 완강한 민주주의자가 되었다. / 이와 같은 견해의 대부분은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다 교육의 절대적 힘을 믿고 있었다. (341)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의 원리를 세운 것은 물론 민주주의적인 견지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권에 대한 반대다 내포되어 있다. (341)
그리고 벤담의 학도들과 프랑스의 선배들과의 차이는, 공업국가인 영국에 있어서는 고용주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심하여 노동조합주의와 사회주의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투쟁에서 벤담학도들은 대체로 노동자계급에 등을 돌리고 고용주 편을 들었다. [루터는 말년에 귀족편을 들었듯이 벤담도 상부 고용주 편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말년에 인민의 자유에 관심을 가졌다] /.. 그런데 벤담 학파들은 대개 합리주의적인 경향이 농후했다[허구다]. 그런데 벤담 학파들에게 반대하고 현존하는 경제조직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도 합리주의적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다음 장[27장]에서 다룰 맑스(Karl Marx, 1818-1883)에 이르기까지는 체계적인 철학을 갖지 못하였다. (342) [공업국가와 농업국가의 차이인데, 미국은 농업을 공업화하면서 자본이 산업 노동자와 이민자들을 짓누를 수 있었다. / 20세기의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베를린 장막에 비해, 흥미로운 것은 21세기에 미국이 장벽을 쌓고 있다는 점이다. 노마드가 아닌 이주자들을 배척하는 장벽은 감옥을 만들 것 같다. 내부에서 간수들의 지휘자들만이 자유를 누리거나...] / [ '소련붕괴 예언'으로 유명해진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은 "트럼프 집권기에 '미국제국' 몰락" 할 것이라 한다. (50UMH)]
반항을 일삼는 낭만주의적 형태와 합리주의적 형태는 – 다함께 프랑스 혁명과 혁명직전의 철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 매우 다르다. 낭만주의적 형태는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 비철학적인 옷을 입고 등장하였지만,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와 니체(Nietzsche, 1844-1900)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342-343) [두 철학자들은 낭만주의에 넣기는 불편하다. 프랑스가 말하듯이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들에 속한다. / 주로 헤겔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낌새의 시대(l'ère du soupçon)에는 (Schopenhauer), Kierkegaard, Marx, Nietzsche, [Freud]가 있다.]
17세기의 갈릴레이나 [18세기] 뉴턴이 갖는 의미는 19세기에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 갖는 의미는 동일하다. 다윈 학설은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 하나는 진화론으로 생물의 각각 다른 형체는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차츰 발달된 것이라고 한다. .. 이것은 아낙시만드로스(Ἀναξίμανδρος, 전610-전546)는 물론이고 라마르크(Lamarck, 1744-1829)나 다윈의 조부인 에라스무스(Erasmus Darwin, 1731-1802)에 의해 이미 주장되었던 것이다. ../ 다윈 학설의 둘째 부분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다. (343-344)
진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생존 경쟁에 있어서 일종의 생물학적 경제(biological econimics)라는 것이다. 다윈에게 진화의 근원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임을 암시하는 것은 동물과 식물계에까지 확대된 맬서스의 인구론(1798)이다. (344)
획득형질들(acquired characteristics)이 유전된다면 엘베시우스와 같은 견해에 대한 대립은 다소 누그러졌을 것이다. (345)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다윈은 알았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유기체라는 개념은 자연법칙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의 원자론적인 사상은 이미 낡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로 하여 드디어 이론 물리학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학에서는 개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자연히 공동체를 강조하게 한다. .. / 생물학이 기계적인 세계관과 싸우는 동안 현대의 경제적인 기술은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과학 기술은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론과 대립된 것으로 ... (346) [들뢰즈가 공식(관변)과학과 노마드 과학을 구분한다. 19세기에 제반 과학들에서 심층과 상층의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엥겔스(Engels, 1820-1895)는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이 원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중세기에서와 같은 주인의 친절에 대한 복종이었음을 알지 못하고서 칼라일을 칭찬하였다. / 사회주의자들은 산업주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고용주의 지배에서 해방될 것을 원하였다. (347)
이와 같이 하여 위정자들이나 또 그들과 접촉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힘 – 첫째로 자연과의 싸움에 있어서 인간의 힘 그리고 다음으로 지도자들의 힘 즉 과학적인 선전 특히 교육에 의한 인간의 신앙이나 포부를 좌우하는 지도자들의 힘 – 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 (348) [인류의 역사에서, 들뢰즈/가타리는 구석기 시대부터 전제권과 판관권의 힘이 있었다고 본다. 이 두 힘이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되면서 19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재영토화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지식이 하나의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한편으로 대기업가들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이 있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경제주의]의 내부 분열을 민주국가의 일반 사람들은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 이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발견한 대중의 이익과 소수의 이익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은 실제로 파시즘에 있어서 나타났다. 철학사 중에서 니체는 서슴지 않고 소수의 편을 들고, 맑스는 전적으로 다수의 편을 들었다. 아마도 벤잠은 그 상반되는 이해 관례를 조정하려고 한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348-349) [러셀이 세계사를 보는 한계이다.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영국 철학계가 문제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고교 철학을 하는 프랑스가 그래도 다른 나라 철학의 지향점 방향성 그리고 근본적 태도 등을 설명해 주고 있다. / 브레이어 번역에 박차를 가해야 겠다. (50UMB)]
(6:04m, 50U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