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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뢰1990담판협정21PP24
II. 4. 두 가지를 여섯 번(1976)관한 세 가지 질문들?(1976)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55-66.(P.250)
-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 n°271, novembre 1976
* 들뢰즈에서 제2기라고 할 학위 논문 차이와 반복(1969)과 부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9)를 발표하고, 그리고 요소론적 구조주의를 넘어서며, 무의식의 능동적 생산을 예고하는 의미의 논리(1969)가 나온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생산적 기계임을 강조하는 가타리를 만난다. 이 둘은 우선 자본의 개념이 국가를 대신하여 제국으로 향하고 있음을 비판한 안티 외디푸스(1972)를 쓰면서, 무의식 또는 기억을 생산하는 권능의 실재적 활동성을 밝히고, 정신분석학을 대신하는 분열분석을 창안한다. 이 둘은 흐름 또는 탈주인 무의식의 성질을 리좀(Rhizome, 1976)으로 설정해본다. 들뢰즈는, 이미 니체에 과한 저물이 있지만, 니체를 불러들이는 작업으로 논문 「유목적 사유(1972)」쓰고, 두 철학자는 긴 작업을 위해 체제 밖의 관심으로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1975)을 쓴다. 인류사를 재혼성(re-compostion)하며, 마치 음정(音程)들의 만남이 상승효과를 가듯이, 인간에게서 생산되었던 뜻밖의 또는 양면적 사건들의 의미를 탐구하는 천개의 고원(1980)이 나온다. 무의식은 분출, 용출, 탈주하려는 대기조와 같아서 기회 또는 환경에 따라 균열을 내고 솟아나는 힘들이다. 이 힘들이 고원을 보여주었다. / 일단 무의식은 이미지의 덩어리이고 분출에서는 각각의 선들을 생산하는데, 이러한 분출의 선이 표면의 표상이나 개념을 넘어서 가상적 이미지를 기표처럼 바깥(화면)에 투사한다. 이 투사가 사물(이데아)의 움직임이라 여기는 영화1: 이미지-운동(1983), 사물의 시각 이미지만이 아니라 소리이미지를 결합하면서 기억(무의식)의 내용인 지각이 중첩되는데, 이 지각에는 감화작용(감동과 감응)을 보태면서 영화 2: 이미지-시간(1985)를 통해 재인식과 인간적인 것의 첨가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 한다. - 이 영화노트지[편집자: 이름이 없으니 편의상]와 대화에서 영화에 대한 두 작품이 나오기 전의 구분의 단초를 볼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소리의 차히, 즉 물리학적의 ‘빛의 진동’ 대 ‘소리의 파’ 사이의 차히이다.
들뢰즈가 이 ‘대담’에서 논의를 이끌어가는 장점은 두 가지 감각기관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다르다는 점인데, 사람들은 의식형성 또는 생각(idee)으로 하나의 절대적 통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에서 실증적 자료를 보태고, 또한 앞선 철학자 벩송의 기억이론 설명으로부터 끌어온다.
벩송에서 심리맹(영혼맹)과 언어농의 차이를 물질과 기억(1896)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상기하게 한다. 눈먼자(맹인)와 귀먼자(농인)의 신체적 기제에서 감관(sens)의 손상은 다르고, 이어서 감각(sensation)도 다르다. 그러면 감정(sentiment)의 다름은 이런 감관이 귀와 눈의 손상에서 오는 것만큼 다를까? 무의식의 총체에서 오는 기억에 내재하는 (시원적)지각과 현재의 사물(그림이든 소리이든)의 지각 사이에서 감정(또는 감화)은 중첩(확인, 재인식)하는 작업에서 오는 것인가? 벩송은 의식 안에 개인적 추억들의 혼성으로 된 기억이 먼저 있다는 것이다. 이 기억은 무의식이며, 실재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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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고다르가 실험한(?) 두 가지를 여섯 번씩이나 만들어낸 작품에 아마도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이는 들뢰즈가 영화에 관한 책을 쓰기 전인데 말이다. 고다르가 연속물의 영화로 만들면서, ‘이미지’(사물)와 ‘소리’(언어)라는 두 가지를 구분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편집자는 철학자가 갖는 관심에 대해 물었다. 이 물음 안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다른 벩송의 ‘무의식’이 들어있고, 왜 파라노이아 쪽이 아니라 ‘스키조프레니’ 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벩송도 그의 저술 전체에서 기억 즉 무의식을 해명하는 것은 앞으로 스키조프레니 쪽이라고 딱 하번 언급하고 있다. 이런 무의식에 실재성에 대해서 벩송이 물질과 기억(1896)에서 제안했지만, 그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한 것은 기억이론의 역사(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 1903-1904)인데, 이는 우리가 곧 정리하여 다음에 논의하기로 한다.
들뢰즈는 고다르의 ‘이미지’와 ‘소리’라는 주제에 흥미 있었을 것이다. 그는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그늘이 2천5백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분의 비유에서 4분할로서 사물과 그림자, 추론과 이데아인데, 전자가 사물의 이미지, 후자가 말과 소리로 연관지울 수 있다. 그러나 철학사는 이미지와 소리가 당연히 상응성 또는 정합성이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감각기관과 관련한 감각이미지들, 즉 그림 이미지와 소리 이미지이다(벩송은 청각 이미지란 용어를 쓰고 운동도, 우주도 이미지라고 한다). 게다가 들뢰즈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본 「(구조주의에 대한 인식)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A quoi reconnait-on le structualisme?, 1967)」을 썼다.
단어(말)와 소리(청각이미지), 단어와 그림(시각이미지)에서 단어와 문장을 다루었던 것은 영미철학에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그림이론을 일반적으로 원자론적 명제이론이라 한다. 단어가 사물에 대응하는지, 문장 또는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진위 구분을 한다. 그리고 독일 철학의 판단론으로 보태어 체제를 성립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시기에 소쉬르(Saussure, 1857-1913)의 사후에 나온 일반언어학 강의(1916)의 영향으로 구조주의는 의식 활동에서 시각이미지가 아니라 청각 이미지에 관심이다. 즉 원자와 분자명제가 아니라, 음소와 음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청각이미지가 시각이미지와 같은 방식으로 시니피앙이 있을 것이고 이에 맞는 시니피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원자론을 닮았다는 의미에서 요소론으로 파악하는 정도 밖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원자와 분자와 달리 음소와 음절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을까? 물론 거꾸로 원자와 분자명제 이전에 이미지는 무엇으로 되어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앵글로색슨의 의미론과 라틴계의 기호론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 나로서는 전자의 이유 또는 근거(raison)에는 쓴글을 대상화하는 분위기이고(정립에 대해), 후자의 이유 또는 기원(arche)은 입말을 다룬다고 할 것이다(정초에 대해). 우리말도 입말 다음으로 쓴글의 연관이 중심일 것인데, 오랫동안 중국한자를 빌어서 철학을 하다가 보니, 일제가 서양학문을 들여오다 보니, 쓴글이 먼저이고 입말을 뒷전이었다.
일상에서 쓰여진 글에서도 눈으로 읽으면서 지각하고 느낄 때 그 글을 잘 이해한 것으로 여긴다. 또한 일상의 대화에서 입말을 들으면서 억양, 음색, 표정이 묻어나는 소리에서 지각하고 느낄 때, 전자의 글과 지각 사이와는,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플라톤주의적 단어(말) 대 사물에서 오는 느낌은 지성의 수준이 높고, 글을 읽을 때 주의를 잘 기우려야 알 수 있다(물론 플라톤은 대화록은 입말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입말과 이미지는 감화작용으로 오랜 지각이 무심결에도 동원되어 느낌을 달리한다. 아마도 들뢰즈가 이점을 창안하여 느낌에서 무의식의 실재성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보았을 것이다. 그 느낌은 현재 앞에 있는 사물에만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과거의 추억들의 여러 장면(평면)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벩송은 경험적 총체로 기억을 동원하며, 그래서 기억이 실재성이라 한다. 여기서 물론 쓴글과 명제도 기억을 동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쓴글과 기억을 동원한 조합과 소리와 기억의 혼성에서 차이가 있다. 즉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에서 조합과 혼성의 방법이 다를 것인데, 하나는 회화에서 다른 하나는 음악에서 이다. - 나로서는 니체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었을 때나 다른 철학자들이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 음악적이라고 할 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런 작품들이 내재적 무의식의 혼성의 음악적 흐름을 지니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다는 의미일 것 같다. 그런데 원자론적 명제나 구조주의 기표기의에는 음악적이라기보다 레고의 조립 놀이와 같이 조합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사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구별은 회화나 조각 전시관에 갔을 때와 음악회와 오페라에 갔을 때 다르다고 하면 간단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장면에서 회화의 이미지가 운동하고 있고 게다라 입말(대화)과 주변의 소리(매미, 자동차가는 소리) 등이 온통 뒤섞여 있다. 그것도 무대 위에 올려져 있고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 삶에서처럼 지나가는 과정 속에 뒤섞여 있다. 물론 영화도 연극과는 다르지만 재상연이 있다. 재연과 재상연에서 관객에게 들어오는 두 이미지가 첫 두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은 일반 사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미지들은 구별될 수 있고 또한 작업도 분리할 수 있지만, 한 장면 속에 여럿이다. 여럿은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중요한 개념들은 거의 모두 벩송의 다양체에 관련되어 있다
여럿은 나중에 얼굴성에서 나오겠지만, 얼굴이 여럿의 조합이다. 여기서 다루는 두 이미지인 눈과 귀는 삶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감관(시각과 청각)의 도구이다. 누구의 도구인지는 나중에 다루자. 이 도구 이외에, 후각과 미각도 있고 촉각이라는 얼굴표면도 있다. 얼굴 표면은 살로 되어 있으면서 운동하기보다 변화하기에 익숙하다. 적어도 5관의 변증법적 통일이며 이 통일성을 이루는 절대적 자아가 있다는 단어(추상)를 말하는 것에 대해, 벩송과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싫어한다. 들뢰즈는 이 5관이 연결 또는 접속이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종속이 아니라 각자가 고유함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말한다. 그런데 그리고의 플랑스어 에(ET)는 원자론자나 요소론자들이 에(EST, est)와 다르다. 두 원자론자든 요소론자든 각각들이 있다(est) 또는 ‘이다’로서 성립한다. 들뢰즈는 다양체의 성립에는 각각 이다 또는 있다로서 정태적이라기보다(영화에서 운동이미지), 각각의 생성과 솟아남(탈주선)을 가는 측면서 각각의 선들은 그리고, 그리고 이라는 것이다(영화에서 시간이미지).
여기서 그림이미지든 소리이미지든 하나의 몸에 연관임은 분명하다. 여러 이미지들의 변증법적 통일의 추상화의 개념 또는 관념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추론상의 종과 류에서 류 개념의 한계는 절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로서 몸이라는 관념은 벩송이 실재적이 아니라고 하고[상징이라 한다], 여러 이미지들로 혼성되어 있는 몸을 물질과 기억에서 이미지라고 부른 것이다. 들뢰즈 영화에서 둘(2)로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셋(3)일 수도 있다고 한다. 셋뿐이겠는가, 여럿이다. 다양체라고 할 이 여럿은 여러 선들이며 흐름들로서 혼성들이며, 선들로서 탈주선(용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변역(變易)을 표현하려는 주역에서 어느 서죽(筮竹, 주역의 제비, 살)의 발현이든, 니체의 주사위에서 어느 숫자의 숫자이든, 들뢰즈가 ‘책 속에 쪽들은 알이고, 책안에는 무수한 애벌레들이 있다’고 했을 때, 애벌레가 날개를 갖는 성충이 되어 날라 갈 때 탈주선이라고 하면, 너무나 표면을 넘어서는 것이리라. 삶은 애벌레처럼 쪽들의 연합과 동맹이 있을 것이다. 8천만의 사유에서 주사위 숫자도 거의 무한정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54RLFF)
# II. 4. 두 가지를 여섯 번(1976)관한 세 가지 질문들?(1976)
-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CC), n°271, novembre 1976
CC1: -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는 당신에게 인터뷰를 청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철학자”이고,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원전(쓴)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특히 왜냐하면 당신은 고다르(Godard, 1930-)가 했던 것을 좋아하고 찬양한다. 당신은 최근에 TV에서 고다르의 방영물들에 대해 무엇을 생각합니까? (55)
[방영물은 당연히, 1976년 7월 25일에서 8월 29일까지 방영된 연속물「두 가지를 여섯 번(Six fois deux / Sur et sous la communication)」을 말한다.]
GD: 그러나 그는 TV의 다른 “시청자들(peuplement)”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57)
CC2: - 당신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만일 이 방영물에 관한 “강의”를 해야만 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관념)들을 지각했고 또는 느꼈을까요? 당신은 당신의 열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떻게 행했을까요? 사람들은 나머지 것 다음에 대해 항상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나머지 것(ce reste)이 가장 중요하다. (57)
고다르의 방영물들에서 두 가지 생각(관념)들이 있다. 그는 끊임없이 하가 다른 하나를 잠식하고, 서로 섞이며 또는 한 선분이 다른 선분에 의해 분리된다. 그것이 각 방영물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마치 초등학교에서처럼, 두 가지 축, 사물의 학습과 언어의 학습이 있다. 첫째 생각은 노동에 관한 것이다. (57)
둘째 생각은 정보에 관한 것이다. (60)
CC3: - 만일 거기에 고다들의 두 가지 착상들(deux idées)이 있다면, 이 착상들은 “이미지”와 “소리”라는 상영물 속에서 줄곧 전개된 주제와 일치하는가? 사물들 즉 이미지들이라는 교훈(la leçon)은 노동에 귀착하고, 단어들 즉 소리들의 교훈은 정보들에 귀착하는가? (61)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두세 가지(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1966) (62)
그것은 고다르가 벩송주의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벩송을 새롭게 한 것이 고다르가 아니라, 오히려 텔레비전을 새롭게 하면서 자신의 길 위에서 벩송의 여러 조작들을 발견한 것이 고다르이다. (64)
CC4: - 그러나 왜 고다르에게서 항상 “둘”이 있는가? 셋이‥…있기 위해서, 둘이 있어야만 한다. 좋아요, 이 둘, 이 셋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 (64)
[한마디로 단위 1은 없다. 항상 다른 단위들과 더불어 있다. 그래서 더 많은 하나이다. est(이다)가 아니라 그리고(et) 그리고(et)다. 모든 단위는 처음부터 다양체이다. 하나의 순수한 1은 없다. 마치 무한이 없듯이. 모든 무한도 다양체이다. 싯달다는 이 다양체를 스스로 표면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속에 다양체가 그 주변에 표현으로 다양한 사문, 아라한 보살들이 있다. 열 제자라고 하는 것은 후대의 신자들이 세기(헤아리기) 편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둘의 여섯 번 12(열둘)일 수 있다. 하늘의 운행에 맞게 일년에 12달로 할 수 있고, 알프레드 쟈리처럼 또는 회교처럼 13으로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숫자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천체의 변화에 따라 사유하고 상상해야(imaginer) 한다. 그게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노력을 지속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54MKA)]
(4:36, 54RLF)
* 인명***
1914 세기(Jean Séguy, 1914-1973) 프랑스 언어학자. 툴루즈 대학교수, 민족 언어학. 특히 가스코뉴지역 언어.
1920 베르뇌이(Henri Verneuil, 아르메니아 본명: Achod Malakian, 1920-2002) 아르메니아 출신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영화인. Mayrig (« mère » en arménien), 1985)(1991영화화) 588, rue Paradis. 1992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리좀(Rhizome, 1976), 파르네(Claire Parnet, s.d.)[1948?]와 함께 이야기한 대화(Dialogue, 1977)(이 속에 고다르에 대한 대담?)
1983(쉰여덟)년 영화에 관하여 영화1: 이미지-운동(Cinéma 1: L'image-mouvement) 1985(예순)년 영화 2: 이미지-시간(Cinéma 2: L'image-temps)를 출간하다.
1927 세기(Georges Séguy, 1927-1892) 정치가, 저항자, 노동조합운동가. 노동총동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 서기장 de 1967 à 1982.
1930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스위스 영화인. 감독, 시나리오작가, 대화록자. 제작자. 작가. 영화 비평가이자 이론가.
1945 미에빌(Anne-Marie Miéville, 1945) 스위스 출신 영화제작자, 감독, 시나리오작가, 여배우, 작가. 고다르와 1976년 둘을 여섯 번(Six fois deux / Sur et sous la communication)(feuilleton(연속극) TV)를 공동작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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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문지(La Revue du cinéma)은 1928년 오리올(Jean George Auriol, 1907-1950)이 창간하여 1928-1932, 1946-1949까지 출판했다. 그리고 1946년에 정보지(Informations UFOCEL)로 출간되어 1953년 이미지와 소리(Image et Son)로 이름을 바꾸고, 이어서 이 이미지와 소리(Image et Son)와 합병하여, 동명의 전문지 영화 전문지(La Revue du cinéma)는 1969년에 출간되어 1992년까지 출판되었다.
영화학교 /영화연구고등연구소(L'Institut des hautes études cinématographiques: IDHEC) 프랑스 영화학교로서 1943년부터 1986년까지 활동하였고 1988년에 페미(La Femis)에 통합되었다.
영화 노트들(Cahiers du Cinéma) 1951년 4월 창립한 프랑스 영화 전문지이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1918-1958),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1920-1989), 장마리 로 두카(Joseph-Marie Lo Duca: Giuseppe Maria Lo Duca, 1910-2004), 카이겔(Léonide Keigel, 1904-1957) 등이 창간 하였다.
시청각 국립 연구소(l'Institut national de l'audiovisuel, INA) 1975년 창립, 일드 프랑스 지역의 발드마른(Val-de-Marne)주의 브리쉬르마른(Bry-sur-Marne)에 있다. 1974년 8월 7일 법령의 3조에 따르면 “고문선 보존, 시청각 창조의 탐구, 전문직 형성”(« de la conservation des archives, des recherches de création audiovisuelle et de la formation professionnelle »)을 책임지는 기관이다.
「둘을 여섯 번(Six fois deux / Sur et sous la communication)」은 고다르와 미엘빌(Jean-Luc Godard et Anne-Marie Miéville)가 1976년 텔레비전을 위해 제작한 연속극 영화이다. 이 연속물은 1976년 여름 동안에 “에페르 트르와(FR3)”에서 일요일 밤 8시30분마다 방영되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각각 여섯 에피소드들이 12회 방영되었다.
- 참조: Gilles Deleuze, « Trois questions sur six fois deux », Cahiers du cinéma, n°352, octobre 1983. réédité dans Gilles Deleuze, Pourparlers, Paris, Éditions de minuit, 1990, p. 64-65. [Pourparlers에는 pp.55-66.이며,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 n°271, novembre 1976로 되어 있다. 1983년 10월 판은 재수록일까?]
(lu 54M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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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쟝-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1930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파리 7구에서 12월에 태어났다. 프랑스-스위스 영화인. 감독, 시나리오작가, 대화록자. 제작자. 작가. 영화 비평가이자 이론가.
아버지 (Paul Godard, 1899-1964) 어머니 오딜 모노(Odile Monod, 1909-1954), 1928년 결혼, 프로테스탄트 통합교회인 루브르 오라트와르(Le temple de l’Oratoire du Louvre)에서 결혼했다.
넷 중에서 둘째이다. 1월에 태어난 누나 라셸(Rachel, 1930-1993), 누이로서 베로니끄(Veronique)는 사진작가이다.
1933 가족은 스위 레만 호수 가 – 니용과 롤 사이(entre Nyon et Rolle) - 로 이사갔다.
1936 고다르는 니용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38 레만 호수 서남쪽의 니용(Nyon)으로 이사 갔다.
- 축구, 스키, 농구를 좋아했다. 종교는 프로테스탄트이다. 그림을 좋아했다. 특히: 클레(Paul Klee, 1879-1940)와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의 영향을 입었다.
1940 6월 고다르는 파리 조부모에게 있었고, 독일 침공으로 부르타뉴에 있는 숙모(Aude)에게 갔다가, 여기서 학년 개학을 하고 그리고 스위스에서 가족과 합류한다. 어머니 가계는 프로테스탄트에 좌파인데, 그의 외조부 줄리앙 모노(Julien Monod)는 보수주의자로 페땅을 옹호했다.
1945(열다섯) 니용에서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바칼로레아를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 이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안락한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훔치는 버릇(약간의 광기, 좀도둑 larcin)이 생겼다. - 도벽(盜癖)은 오래간다. 슈랭베르제의 서재의 책도 훔쳤고, 할아버지 책도, 그것을 뽕뇌프에서 팔았다.
아버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scléroses latérales amyotrophiques)을 앓았다. 이 때부터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1949년 가족은 제네바 1951년 로잔으로 이사했다.
1947(열일곱) 바깔로레아에 낙방했다.
- 프랑스 영화감상실(La Cinémathèque française, 1936년 창설한 사적인 모임)에 자주 갔다.
- 가족과 단절에 대해 팜플렛을 썼다. 「가족(Le Cercle de famille. Ou impressions d'ensemble, 1947)」
- 이때부터 영화 전문지(La Revue du cinéma)에서 비판문을 읽으면서 에릭 로메르(Maurice Schérer, dit Éric Rohmer, 1920-2010)를 발견했다.
1948(열여덟) 스위스에 레만 고등학교에서 바칼로레아 준비, 그러나 낙방했다.
1949(열아홉) 셋째 시도에서 바칼로레아 통과. 화가, 영화, 문학 사이에 선택을 주저하다.
- 첫 시나리오 「Aline」를 작성했는데, 라뮈(Charles-Ferdinand Ramuz, 1878-1947)의 소설, 「알린(Aline, 1905)」를 각색한 것이다.
- 가을에 소르본대학에 인류학에 등록하였다. 장차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감독이 될 여성이며 고다르의 같이 영화를 만들, 수잔 끌로샹들러(Suzanne Klochendler, Suzanne Schiffman, 1929-2001)를 만났다.
- 기자가 될 빠르뷜레스꼬(Jean Parvulesco, 1929-2010)도 만났다.
- 라틴가 영화클럽(le ciné-club du Quartier latin)에 자주 들렀다. 여기서 그는 (Maurice Schérer dit Éric Rohmer, 1920-2010), 제로프(Paul Gégauff, 1922-1983), 트뤼포(Truffaut, Chabrol, Gruault et Rivette) 등을 만날 수 있었다.
1950(스물) 9월 꼭또(Jean Cocteau 1889-1963)가 주최한 영화 축제에 참석하다.
12월 아버지의 제안으로 함께 미국 뉴욕, 자메이카에 있는 킹스톤을 여행하다. 아버지는 자메이카의 킹스톤에서 집을 구하고 안착하려 하였다.
그는 혼자서 남아메리리카 공화국을 여러달 동안, 그리고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을 거쳐서 1951년 4월에 프랑스로 오다.
1951(스물하나) 4월 영화 노트들(Cahiers du Cinéma)가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1920-1989)에 의해 창립되었다. [참여자: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1918-1958),]
마테(Rudolf Mayer, 가명 Rudolph Maté, 1898-1964)의 미국 영화, 나를 위해 슬픈노래를 부르지마오(No Sad Songs for Me, La Flamme qui s'éteint)(1950, 미국, 88분)에 관한 논문 첫 출판.
1952(스물둘) 12월 부모가 이혼했다.
고다르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슈랭베르제(Jean Schlumberger, 1877-1968)의 아파트 아래에 살았다.
그는 1952년에 영화 노트들(Cahiers du Cinéma)의 금고도, 코메디 카페의 금고도 훔쳤다.
- 4월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 기차칸의 이방인들(Strangers on a Train: L'Inconnu du Nord-Express, 1951)에 대한 「주체의 패권(Suprématie du sujet, 1952)」 글로 논쟁적 찬사를 이어갔다. .
- 9월에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1918-1958)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글 「Défense et illustration du découpage classique」를 썼다.
1953(스물셋) 봄 쮜리히의 텔레비전의 촬영기사 자리를 아버지 덕에 얻었다. 그러나 그는 방송사 금고를 손댔다. .. 아버지는 그를 수주일 동안 정신과 병원에 넣었다. 이 일로 그후 10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서 풀려나자, 그에게 발레에 있는 그랑드디상스 댐(Barrage de la Grande-Dixence, 1953-1961 건설)의 일자리를 알아봐준다.
1954(스물넷) 친구 장피에르 로브셰르와 함께, 고다르는 16mm 필름으로 이 댐 건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콘크리트 작전(Opération béton, 1954)」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신의 처녀작부터, 고다르는 소리에 특히 귀를 기울이며, 정성스럽게 그것을 녹음하고자 했다.
1954 4월 어머니가 스쿠터 사고로 사망하다.
1955(스물다섯) 고다르는 제네바로 거처를 옮기며 둘째 단편 영화, 모파상에 영감을 받아 예산 없이 찍어낸 「아양떠는 여자(Une femme coquette, 1955)」를 1955년 11월 루소섬에서 촬영한다.
1956(스물여섯) 1월 파리로 돌아오고, 가제트 뒤 시네마 <> 무리들과 다시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다르는 카예 뒤 시네마 로 복귀한다.
1957(스물일곱) 5월, 고다르는 단편영화 「모든 청년들은 파트리크라고 불린다: 샤를로트와 베로니크(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ou Charlotte et Véronique」를 만든다. 에릭 로메르와 함께 쓰고 피에르 브롱베르제가 제작한 이 영화는 천진난만하고 멋을 부리는 두 아가씨가 작중 뤽상부르 공원 주변에서 동일한 남자에게 유혹당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1959년 봄 에두아르 몰리나로(Edouardo Camille Molinaro dit Édouard Molinaro, 1928-2013)의 영화 도시의 증인Un témoin dans la ville의 부록으로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958(스물여덟) 2월 프랑수아 트뤼포 덕분에, 고다르는 주간지 아르(Arts)로 돌아온다. 동시에 고다르는 미리앙 보르수츠키(Myriam Borsoutsky 30년-50년대 활동)의 감독하에 영화 제작자 피에르 브롱베르제(Pierre Braunberger, 1905-1990)의 편집 담당으로도 일한다.
1958년 2월, 일드프랑스에는 억수같은 홍수로 극심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 고다르와 피에르 브롱베르제의 의논이 있던 이후, 프랑수아 트뤼포는 교외에 거주하며 이 홍수 시기에 파리에 가고싶어 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러 떠났다. 이 영화에는 「물의 이야기(Une histoire d'eau, 1958)」라는 제목이 붙었다. 트뤼포는 이 편집용 필름에 만족하지 못했고 계획을 포기했으나, 고다르는 대본을 써서 안 콜레트와 함께 보이스오프로 읽으며 영화를 편집한다. 영화는 1961년 3월 마침내 자크 드미의 영화 롤라(Lola (film, 1961)의 첫 장면으로 상영된다.
1958 고다르는 이후 단편영화 「샤를로트와 그녀의 정부(Charlotte et son jules, 1958)」를 장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와 안 콜레트(Anne Colette)와 함께 찍는다. 장 콕토의 「무심한 미남(Le Bel Indifférent, 1940)」에 영향을 받은 이 영화는 해어지자고 말하고 칫솔을 찾으려고 자신을 보러 온 연인을 앞에 둔 사내의 긴 독백이다. 벨몽도는 촬영후 녹음을 위하여 불참했으며, 고다르 스스로가 등장인물을 더빙했다. 이 영화는 1961년 3월, <롤라>가 개봉하던 기간에 개봉되었다.
[1.4. Les années Karina (1959-1967)]
1959 드미(Jacques Demy, 1931-1990)의 영화 롤라(Lola (film, 1961)(90분)를 개봉하다.
1959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 le 4 mai 1959)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작품, 400번의 구타(Quatre Cents Coups, 1959)가 성공,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진수로 알려졌다. 영화 출시는 1959년 6월이라 한다.
1960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는 파리의 미국 여자와 다시 만나고자 마르세유에서 자동차를 절도한 젊은 남자 미셸 푸아카르의 이야기를 다룬다.
년말에 여자는 여자다(Une femme est une femme) 안 카리나를 만나서 나온 영화.
1961 안 카리나(Hanne Karin Bayer1, dite Anna Karina, 1940-2019) 덴마크 출신 여배우와 결혼(1961-1964) - 1964년 12월 21일 공식적으로 이혼.
1962 자기만의 인생(Vivre sa vie, 1962)
1963 헌병들(Les Carabiniers), 1963년 출시.
Le Mépris (1963)브리짓 바르도(Brigitte Bardot) 발탁.
1963 알제리 전쟁과 연관 때문에 검열에 걸렸다가 알제리 해방 후에야 작은 병정Petit Soldat(개봉 1963)은 개봉된다.
1964 봄 국외자들(Bande à part, 1964)1965 1월 알파빌(Alphaville)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
년 말에 Masculin féminin 모파상의 두 단편 작품(Le Signe et La Femme de Paul)으로.
Une femme mariée (1964)
1966 Made in USA
8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 가지 것들(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1967년 출시) 간헐적으로 웃을 사기위해 창녀짓을 한다.
[1.5 Les années Mao (1967-1973)
[소리이미지(Sonimage)의 모임을 만들다. .
1967 비아잼스키(Anne Wiazemsky, 1947-2017)를 만나다. 결혼하다(1967-1970). [비아잼스키(Anne Wiazemsky, 1947-2017) 여성 작가, 코메디언, 영화감독. 20살에 고다르와 결혼했다(1967-1970).]
La Chinoise, 1967)다섯명의 젊은이는 마오의 원리들을 적용하면서 살기를 시도한다.
주말(Week-end (film, 1967)
1968년 5월:
6월 녹음한 영국에서 스톤즈(Rolling Stones)의 「Sympathy for the Devil」 락 음악이 12월에 유행하다.
1968 Le Gai Savoir
1968 Cinétract(numéros 7, 8, 9, 10, 12, 13, 14, 15, 16, 23, 40)
1968 Un film comme les autres(revendiqué a posteriori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68 One American Movi(abandonné par le Groupe Dziga Vertov, puis terminé par Richard Leacock et D.A. Pennebaker en 1971 sous le titre One P.M.)
1968 One Plus One(distribué dans une version modifiée par le producteur sous le titre Sympathy for the Devil)
1969 British Sounds (signé a posteriori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69 Pravda(signé a posteriori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69 Vent d’est(signé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70 Luttes en Italie(Lotte in Italia) (signé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70 Vladimir et Rosa(signé par le Groupe Dziga Vertov)
1972 Tout va bien(coréalisé avec Jean-Pierre Gorin)
1972 Letter to Jane(coréalisé avec Jean-Pierre Gorin)
1974 Ici et ailleurs (coréalisé avec Anne-Marie Miéville) [[미에빌(Anne-Marie Miéville, 1945-) 스위스 보 지방 출신, 영화인, 영화감독, 제작자 여배우.]
1975 Numéro deux(coréalisé avec Anne-Marie Miéville)
1976 Comment ça va(coréalisé avec Anne-Marie Miéville)
1976 Six fois deux (Sur et sous la communication)(coréalisé avec Anne-Marie Miéville)
[1.6. Les années vidéo (1973-1979)
1976 6월 시청각 국립 연구소(l'Institut national de l'audiovisuel, INA)[1975년 창설]는 고다르에게 FR3 프랑스 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할 “une série de six fois deux”을 주문했다. 의 제명은 Six fois deux / Sur et sous la communication이다. 1976년 7월 25일부터 8월 29일까지 일요일 저녁마다 방영되었다.
[1.7. Le retour au cinéma (1980-1988)
[1.8. Les Histoire(s) du cinéma (1988-2000)
[1.9. Années 2010
참조: “어느 사람도 감히 자기의 많은 선에 대해 또 다른 사람들의 많은 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고다르는 “우리 영화 중의 하나와 베르뇌이(Verneuil, 1920-2002), 들라놔, 뒤비비에, 까르네의 영화 사이에, 진실로 본성 상 차이가 있다.”
루르셀(Jacques Lourcelles, 1940-) 프랑스 영화 작가, 시나리오 작가.
들라놔(Jean Delannoy, 1908-2008) 프랑스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뒤비비에(Julien Duvivier, 1896-1967) 프랑스 영화감독. 1930-1960활동.
까르네(Marcel Carné, 1906-1996) 프랑스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보니처(Pascal Bonitzer, 1946-) 프랑스 시나리오작가, 작가, 영화 감독. (lu 54MKD)
(10:24, 54RLFF)
첫댓글 물론 그리고(le ET), 그것은 분기성(la diversité, 각양각색), 다양성(la multiplicité, 다양체)이고, 동일성의 파괴이다. 공장의 문은 - 내가 거기에 들어갈 때, 그리고 나올 때, 그리고 실업자로서 그 문 앞을 지날 때, - 동일한 문이 아니다. 선고받은 자의 부인은 선고 받기전과 선고 받고난 후의 동일한 여인이 아니다. 오직, 각양각색과 다양체는 미학적 모음집(전집)들이 전혀 아니며(사람들이 “더 많은 남자(un de plus)”, “더 많은 여자(une femme de plus)”…을 말할 때처럼), 변증법적 도식도 전혀 아니다(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곧 셋이 될 것이다고 말할 때처럼). (65) - [들뢰즈가 왜 변증법을 싫어하고 게다가 파라노이아의 분석을 허구로 보았겠는가. 세상은 각양각색이고, 다양체로서 펼쳐져있다. 이 펼침이 노마드 세상인 것이다. 그 중에 활발하게 탈주선을 가는 자들이 전쟁기계이다. (54RLI) ]
북방에서(du Nord) 남방으로(au Sud), 사람들은 항상 집합들을 우회하러 가는 선들을 만난다. [또한] 매번 새로운 문지방을 표시하는, 부서진 선의 새로운 방향을 표시하는, 경계선의 새로운 분열행진을 표시하는, ‘어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un ET, ET, ET)를 만난다. 고다르의 목표는 “경계선들을 보는 것”이며, 말하자면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선고받은 자 그리고(et) 그의 부인, 어머니 그리고 자식. 또한 이미지들 그리고 소리들. (66) - [벩송에서 다발의 가지들이란 들뢰즈가 표현하는 ‘그리고, 그리고 ‥’이다. 다발의 가지가 주역의 서죽(筮竹) 또는 산대(산가지)와 같다. (54R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