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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7권
8. 변지품③
8.5. 지(智)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3]
3) 이생과도 공통되는 공덕
앞에서 [논설한] 세 가지 공덕(무쟁ㆍ원지ㆍ4무애해)은 오로지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부처의] 공덕으로, 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① 6통(通)
이제 바야흐로 범부와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인 신통[通]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신경(神境)과 천안ㆍ천이ㆍ타심과
숙주와 누진통이 바로 그것으로
해탈도와 혜(慧)에 포섭된다.
네 신통은 세속지, 타심통은 다섯 지
누진통은 10력(力)의 경우와 동일하고
다섯 신통은 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자지와 하지를 경계로 삼을 뿐이다.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각기
2천ㆍ3천ㆍ무수한 세계에서 신통을 행하며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자는 가행에 의해
일찍이 닦은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세 신통은 신념주이고, 하나는 나머지 세 염주
하나는 법념주, 뒤의 신통은 법 혹은 4념주이다.30)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이고
나머지 네 신통은 오로지 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이며,
둘째는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이며,
셋째는 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이며,
넷째는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이며,
다섯째는 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이며,
여섯째는 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이다.31)
비록 이러한 여섯 신통 중에서 여섯 번째 신통은 오로지 성자만의 공덕이라 할지라도,
앞의 다섯 가지는 이생도 역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 특징[總相]에 의거하여 이생에게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라고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신통은 해탈도(解脫道)에 포섭되며,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사문과(沙門果)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해탈도’라고 하는 말은 장애에서 벗어났다[出障]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32) 승진도(勝進道) 중에도 역시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통의 지혜[通慧]는 무간도(無間道)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단계에서는 결정코 타심지를 차단하기 때문이며(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아라한이 무간도를 버릴 때 역시 누진통도 버린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심통과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세속지에 포섭된다.
타심통은 다섯 가지 지에 포섭되니,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누진통의 경우는 [10]력(力)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에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10지에 포섭되기도 한다.33)
이에 따라 누진지증통은 일체 지(地)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일체의 경계를 반연한다는 사실도 이미 밝힌 셈이다.
그리고 앞의 다섯 신통은 4정려에 근거할 뿐 무색정과 근분정과 중간정에 근거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그것은 다섯 가지 신통의 근거가 될 만한 선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려]지(支)를 포섭하는 선정이라야 다섯 신통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진통 역시 그것(무색정 등)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모든 경지에서 능히 누진(漏盡)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색(色)을 관찰하는 것을 가행으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앞의 세 가지 신통(신경ㆍ천안ㆍ천이통)의 경계는 무색정에서 능히 반연할 수 없으니,34) 이러한 세 가지 신통은 다만 개별적으로 색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심통을 닦을 때에는 색을 방편[門]으로 삼기 때문이며, 숙주통을 닦을 때에는 점차로 분위(分位)의 차별을 억념(憶念)함으로써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가행 중에 반드시 색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35)
그래서 무색정의 경지에 근거하는 경우, 이와 같은 [앞의 다섯 신통의] 공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중간정이나 다섯 근분정에서도 역시 색을 반연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마땅히 다섯 신통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으니, 앞에서 설한 이유 때문이다.
즉 [정려]지(支)를 포섭하는 선정이라야 다섯 신통의 근거가 될 수 있으니, [정려]지를 포섭하지 않는 등지(等持)라면 저열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지(止)ㆍ관(觀) 중의 어느 하나가 감소하기 때문이다.36)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누진통은 존재하는 것인가?
고(苦)ㆍ낙(樂)의 느리고 빠른 경지에서도 다 능히 번뇌[漏]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37) 그러나 다섯 신통은 수승한 공덕(즉 4정려)을 별도로 닦아야 하는 것으로, 요컨대 수승한 경지라야 비로소 능히 일으킬 수 있다.
신경통 등 앞의 세 가지 신통을 닦을 때에는 가벼움[輕]과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행으로 삼으며, 그것이 성취되고 나서는 자유자재로 원하는 바에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38)
온갖 유정으로서 타심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의 두 가지 상(相)이 전후로 변이하면서 서로에 수반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후 다시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데, 이에 따라 가행이 점차로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가행이] 성취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음과 온갖 색신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의 마음 등에 대해 능히 참답게 알 수 있게 된다.39)
온갖 유정으로서 숙주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바로 전 찰나에 멸한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점차 다시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생의 분위(分位, 즉 胎外5위와 胎內5위)에서 이전[의 상태]와 그 이전[의 상태]의 차별을 관찰하여 결생(結生)할 때의 마음에 이르고,
나아가 중유 전의 일 찰나를 능히 기억하여 알면, 이를 일컬어 자신의 숙주통의 가행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이의 숙주를 기억하기 위한 가행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이 처음으로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순서대로 알지만, 자주 익혀서 성취될 때에는 역시 또한 [순서를] 뛰어넘어서도 능히 기억할 수 있다.
또한 기억된 모든 일은 요컨대 일찍이 경험[領受]한 것으로서, 정거천(淨居天)을 기억하는 자는 옛날에 일찍이 그것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40)
또한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이곳에 태어난 자는 처음에는 다른 이의 상속에 의지하여 이러한 신통(무색계에 관한 숙주통)을 일으키며,41) 그 밖의 신통은 역시 자신의 상속에 의지하여 일으킨다.
이와 같은 [앞의] 다섯 신통의 경계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자지와 하지이다.
먼저 신경통과 같은 것은 그것이 어떤 경지에 근거하여 일어난 것이든 자지와 하지에서만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자재할 뿐 상지에서는 그렇지가 않으니,42)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네 가지 신통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상지인] 무색계의 타심(다른 이의 마음)과 숙주(과거세의 일)를 취하여 두 신통의 경계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다섯 신통은 세계를 경계대상으로 하여 작용하는데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어 온갖 성자의 그것이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위대한 성문과 인각유와 대각(大覺)이 지극하게 작의(作意)하지 않은 경우라면 순서대로 능히 1천과 2천과 3천의 온갖 세계를 경계대상으로 하여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만,
만약 지극하게 작의한 경우라면 순서대로 능히 2천과 3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세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은 다섯 신통은, 만약 수승한 힘[勢用]과 맹리함을 지녔더라도 무시(無始)이래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자라면 가행에 의해 획득하며,
만약 일찍이 [과거세에] 자주 익힌 자로서 수승한 힘을 갖지 않은 자나 [미래세에도] 그러한 [수승한 힘을 갖지 않을] 종류의 유정이라면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즉 [2승과 이생이] 만약 [지금] 일으켜 현전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가행에 의해 획득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경우 일체의 [신통은] 다 이염득으로, 가행에 의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대로 현전한다.
그리고 3승의 성자와 [최]후유(最後有)의 이생(즉 보살)은 일찍이 획득하였던 신통과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신통을 모두 획득하지만,
그 밖의 이생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였던 신통만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4념주(念住)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할 경우, 경계대상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과 체성(體性)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 두 가지에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두 가지 신통 즉 천안통과 천이통을 제외한 그 밖의 네 종류의 신통은 ‘혜’를 자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천안통과 천이통은 바로 신념주의 경계대상이 되며,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모두 법념주의 경계대상이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로 여섯 종류의 신통은 모두 ‘혜’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니, 경에서
“그것들은 모두 경계대상을 요별 통달[了達]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6통은] 모두 법념주의 경계대상이 된다.
그러나 만약 체성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할 경우, 6통 중의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신념주에 [포섭되니], 그것은 다만 색(色)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경통은 외적인 네 가지 처(색ㆍ향ㆍ미ㆍ촉처)를 반연한 것이고, 천안통은 색처(色處)를 반연한 것이며, 천이통은 성처(聲處)를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계경에서]
“사생지(死生智, 즉 천안통)는, 유정류가 현신(現身) 중에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온갖 악행 등을 성취함에 따라 [당래 악취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43)
천안통이 능히 이 같은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신통의 권속으로서 성자의 몸[聖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별도의 수승한 지혜가 있어 이것이 능히 이와 같이 아는 것으로, 이러한 지혜는 바로 천안통의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과 합하여 ‘사생지’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타심지통(他心智通)은 세 가지 염주에 포섭되니, 수(受)ㆍ심(心)ㆍ법(法)이 바로 그것으로, 그것은 마음 등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숙주지통은 법념주에 포섭된다.
비록 계경에서
“일찍이 경험[領受]한 고ㆍ낙의 일 등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하였을지라도,
이는 바로 전생에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등에 의해 경험된[所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바로 잡연(雜緣)의 법념주에 포섭된다.
그리고 누진지통은 [누진지]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혹 어떤 경우에는 법념주이고, 혹 어떤 경우에는 4념주이다.44)
만약 선 등에 근거하여 6통을 분별하면 [이러하다].
유여사(有餘師)는 “6통은 모두 선이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로 천안통과 천이통은 오로지 무기성이며,
그 밖의 네 가지 신통은 한결같이 선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는 바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이기 때문이다.”45)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6통은 모두 해탈도에 포섭되는 것으로, 안(眼)과 이(耳)의 두 식(識)이 해탈도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이같이 해석해야 한다.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 능히 자지의 뛰어난 대종을 결과로서 인기한다. 즉 이러한 ‘혜’가 현전하면, 바로 자지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를 인기하여 지금 바로 존재하게 하니, 이를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아 안식과 이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주가 말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는 신통이 아니며, 다만 신통에 의해 인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② 3명(明)과 6통
예컨대 계경에서는 무학의 3명(明, vidyā)에 대해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5ㆍ제2ㆍ제6의 신통이 ‘명’이니
3제(際)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으로
뒤의 ‘명’은 진실이고 [앞의] 두 ‘명’은 가설인데
유학의 경우는 어리석음이 있어 ‘명’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3명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이며,
둘째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이며,
셋째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인데,
순서대로 무학위에 포섭되는 다섯 번째와 두 번째와 여섯 번째의 신통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는다.
즉 6통 중에서 유독 세 종류의 신통만을 ‘명’이라 이름한 것은 순서대로 3제(際, 즉 3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숙주지통은 전제(前際, 과거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사생지통(즉 천안통)은 후제(後際, 미래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며,
누진지통은 중제(中際, 현재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신통에 대해서만 유독 ‘명’이라는 말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또한 숙주통은 전제의 자신과 다른 이의 괴로운 일을 억념하는 것이고,
사생지통은 후제의 다른 이의 괴로운 일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생사의 여러 괴로움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누진통을 일으켜 열반의 즐거움을 관찰한다.
그래서 오로지 세 종류만을 ‘명’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세 신통은 순서대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과 유신견(有身見)을 능히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명’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이것은 능히 유정법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별도로 ‘명’으로 설정하였다.46)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말하였다.
“숙주통은 ‘과거는 제온(諸蘊)이 전전(展轉)하며 서로 원인이 되어 차례로 전래(傳來)한 것이니, 여기에는 어떠한 작자(作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능히 관찰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능히 공(空)의 해탈문(解脫門)을 인기할 수 있다.
사생통은 유정의 생사가 아래위로 회전하는 것이 마치 물을 대는 수차[灌輪]와 같다고 능히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3유(有)의 과보를 더 이상 희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능히 무원(無願)의 해탈문을 인기할 수 있다.
그리고 누진통은 염리(厭離)를 방편[門]으로 삼아 무상법(無相法)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의 해탈문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신통에 대해서만 유독 ‘명’이라고 명칭으로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3명을 모두 ‘무학의 명’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은, 그것들은 다 같이 무학의 소의신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최후의 명(누진지증명)에 대해서만 진실(眞實)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두 가지는 [‘무학의 명’이라고] 가설(假說)한 것이니, 그 자체는 오로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후의 ‘명’에 대해서만 ‘무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니, 자성과 상속이 모두 무학이기 때문이다.
즉 앞의 두 종류를 [‘무학의 명’이라 말한 것은] 다만 상속에 의한 것일 뿐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시설족론』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등지(等持)와 상응하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혜’는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울러 무루와도 [상응하기] 때문에 성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성자의 소의신 중에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에 성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앞의 두 가지 명)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무학’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유학의 소의신 중에는 어리석음의 어두움[愚暗]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앞의 두 가지 ‘명’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록 잠시 동안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조복하고 멸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후 다시 그것에 의해 은폐되기 때문에 ‘명’이라는 말로 설정할 수 없다.
요컨대 어두움이 영원히 없어질 때 비로소 ‘명’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3시도(示導)와 6통
계경에서는 ‘세 종류의 시도(示導, prātihārya)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1ㆍ제4ㆍ제6 신통이 시도(示導)로서
교계시도(敎誡示導)가 가장 존귀하니
결정코 신통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시도(示導)란
첫째는 신변시도(神變示導)이고,
둘째는 기심시도(記心示導)이며,
셋째는 교계시도(敎誡示導)이니,
그 순서대로 6통 중의 첫 번째와 네 번째와 여섯 번째 신통을 자성으로 한다.47) 오로지
이러한 세 종류의 신통만이 교화될 중생을 인도하여 처음으로 발심하게 하는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능히 [신통을] 나타내어 능히 [중생을] 인도한다는 점에서 ‘시도(示導)’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48)
이러한 세 가지 시도 가운데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니, 결정코 [여섯 번째] 신통(즉 누진통)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며, 결정코 [다른 이의] 이익과 안락[利樂, 즉 열반]의 과보를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주술 따위로도 역시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신통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가 아니다.
예컨대 건타리(健馱梨, gāndhārī, 구역 乾陀梨)라고 일컫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허공을 자유자재로 솟구쳐 오를 수 있다.
혹은 뛰어난 공덕을 갖춘 약초가 있어 이를 복용하거나 지니게 되면 자유자재로 비행할 수 있다.
또한 이찰니(伊刹尼, īkṣaṇikā, 구역 伊叉尼柯)라고 하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心念]을 알 수 있다. 혹은 관상(觀相)을 보거나 그의 말소리를 듣고서도 역시 다른 이의 마음이 생각한 바를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결정적인 [시도]’이다. 혹은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외도 역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세 번째 시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시도는 다만 다른 이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일 뿐 필경(畢竟)의 이익을 획득하거나 안락의 과보를 능히 인기할 수 없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역시 또한 결정코 다른 이로 하여금 당래의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게 하니, 능히 참다운 방편으로써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며, 그 밖의 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④ 특히 신경통(神境通)에 대하여
‘신경(神境)’이라는 두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의 본질은 말하자면 등지(等持)이고
‘경’은 ‘가는 것’과 ‘변화하는 것’ 두 가지이니
가는 것의 세 가지 중 의세(意勢)는 부처와 통하며
운신(運身)과 승해(勝解)는 그 밖의 유정과도 통한다.
변화는 두 가지로, 욕계와 색계의 그것인데
네 가지와 두 가지 외처(外處)를 자성으로 한다.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변화이다.49)
논하여 말하겠다.
‘신(神)’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뛰어난 등지(等持)에 근거한 것으로, 이 같은 뛰어난 등지에 의해 능히 신통한 변화의 사업[神變事]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신통한 과보[神果]를 ‘신’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그같이 설한] 뜻은 거친 것(변화의 사업)을 미세한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뛰어난 등지가 바로 그것(신통한 변화의 사업)의 직접적 원인[近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신통한 변화의 사업 자체는 실로 ‘신’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각분(覺分) 중에서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50)―
즉 온갖 신통한 변화의 사업을 설하여 ‘경(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여기(신통한 변화의 사업인 ‘경’)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그것이다.
[‘가는 것’의 세 종류]
‘가는 것’에는 다시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운신(運身, gamana)으로, 마치 나는 새처럼 허공을 타고 가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승해(勝解, adhimokṣa)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思惟)하면 바로 신속하게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하니,
만약 지극히 먼 색구경천에 대해서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하면 능히 바로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유 즉 ‘해(解)’로는] 본디 오거나 가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신속하게 간다는 것인가?
이것으로도 실로 역시 갈 수 있으니, 다만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解]하고 가면, 가는 것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승해(뛰어난 생각)’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혹은 세존께서 말하기를
“정려의 경계는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오로지 부처만이 능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셋째는 의세(意勢, manojava)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마음을 일으켜 그곳을 반연할 때 몸이 곧장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신통의 세력[勢]은 뜻[意]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예컨대 마음이 색구경천을 경계대상으로 취하자마자 바로 그곳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가는 것’ 가운데 의세는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며, 운신과 승해는 그 밖의 승(乘, 성문과 독각)과도 역시 통하는 것이다.
즉 우리 세존께서는 신통이 신속하여 바야흐로 먼 곳이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마음만 먹으면 곧 바로 이를 수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모든 부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마치 햇빛이 펼쳐지듯이 온(蘊)의 흐름도 역시 그러하여 능히 단박에 멀리까지 이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설하였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몰하여 그곳에 출현하는 중간이 단절되어 ‘[단박에] 간다’고 하는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부처님의 위신력은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곧 바로 이르게 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가히 측량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의세의 행(行, 즉 뜻대로 가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승해는 그 밖의 다른 성자에게도 존재하며, 운신은 아울러 이생에게도 존재한다.
[‘변화하는 것’의 두 종류]
‘변화하는 것’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계에서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욕계에서의 변화라면, 그것은 성처(聲處)를 제외한 외적인 네 처(색ㆍ향ㆍ미ㆍ촉처)의 변화이며, 만약 색계에서의 변화라면 오로지 색처와 촉처의 두 가지 변화만이 있을 뿐이니, 색계 중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두 세계에서의 변화에는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기 몸에 속한 변화와 다른 이의 몸에 속한 변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욕계에 있을 때의 변화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며, 색계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 여덟 가지의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51)
그리고 비록 색[계]에 태어나 머물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하였을지라도 색계에서 향처와 미처를 성취하는 과실은 없으니, 자기 몸은 오로지 두 가지 처(색처와 촉처)만을 변화 조작[化作]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네 처를 변화시키지만, 마치 옷 등을 [만들더라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52)
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변화의 사업
신경통이 능히 변화의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요컨대 이러한 신통의 결과[通果]인 능히 변화시키는 온갖 마음[能化心]이다.
이러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그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선정의 결과인 두 가지 내지 다섯 가지로서
소의가 되는 선정처럼 획득되는데
정정(淨定)과 자류(自類)에서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다.
변화의 사업은 자지에 의해 일어나고
변화된 이의 말은 모두 자지와 하지에 의하며
변화된 이의 몸과 변화의 주인공은 반드시
말을 함께 하지만, 부처는 그렇지 않다.
먼저 원(願)을 세워 몸을 남겨 두고
그 후 다른 마음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며
죽어서도 견실(堅實)의 몸을 남기는 일이 있지만
어떤 이는 남기는 일이 없다고 설한다.
초심자는 다수의 마음으로 한 가지 변화를 낳고
성만위에 이른 자는 이와 반대인데
수득(修得)의 변화심은 무기에 포섭되며
그밖에 획득된 것(生得)은 3성(性)과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모두 열네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근본 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초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는 오로지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니,
첫째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2ㆍ제3ㆍ제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는 그 순서대로 세 가지와 네 가지와 다섯 가지가 있다.53)
즉 상지는 하지에 근거하는 일이 없으니(다시 말해 상지에 포섭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하지의 정려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54)
[그리고] 상지와 하지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마음으로서 동일한 정려의 과보인 것은 소의(所依)와 작용[行]이 동등하더라도 지(地)에는 수승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으며,55)
동일한 지(地)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마음으로서 상ㆍ하 정려의 과보인 것은 지(地)는 비록 동등할지라도 소의와 작용에는 수승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다.56)
[또한] 위의 정려의 과보로서 하지에 계박되는(포섭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아래 정려의 과보로서 상지에 계박되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의] 경우,
순서대로 지(地)는 [전자가] 저열하고 [후자가] 수승하며,
소의와 작용은 [전자가] 수승하고 [후자가] 저열하다.57) (이상 初句와 제2구)
[또한] 정려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도 역시 그렇게 [획득되니], 결과(能化心)와 소의(정려)는 동시에 획득되기 때문이다.
즉 정려는 모두 세 때에 획득되는데, 이염(離染)과 수생(受生)과 가행(加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지의 염오를 떠나 상지의 정려를 획득할 때 이러한 선정에 의해 인기된 결과인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도 역시 획득하며,
상지로부터 몰하여 색계에 태어날 때와, 그리고 가행에 의해 뛰어난 공덕(정려)을 일으킬 때에는 다만 소의가 되는 정려를 새로이 획득하는 경우에만 그것에 의해 인기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역시 함께 획득한다.
[그리고] 욕계 소의신에 근거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거나 연근(練根)의 단계에서 응과(應果)를 증득할 때에는 열네 가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일시에 모두 획득하며,
나아가 소의신이 제4정려에 있으면서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에는 다섯 가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을 획득하게 된다.(이상 제3구)
[또한] 이러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곧장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다.
즉 이러한 마음은 청정한 선정[淨定, 즉 淨정려]과 자신과 동류[自類]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고,
무간에 능히 자신과 동류의 마음과 청정한 선정을 낳기 때문에 오로지 두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 것으로,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나거나 다른 것을 낳는 것이 아니다.58)(이상 제4구)
[또한] 오로지 자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의 변화의 사업만을 일으킬 뿐이며,59)
변화한 이[化]에 의해 발성된 말은 자지와 하지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에서 변화한 이의 말은 오로지 자지의 마음에 의한 것이지만,60) 그 보다 상지에서 말을 변화시켜 일으킨 경우에는 초정려의 마음에 의한 것이니, 그러한 경지(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욕계에 태어난 이에게 제2정려 등의 변화의 사업이 일어날 때 어떻게 표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의 마음은 다른 계(界)의 몸에 의지하여 바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필시 자계의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그러한 계에 포섭되는 대종을 이끌어 내어 현전시켜 소의로 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색계 대종을 이끌어 내어 현전시켜 욕계의 몸과 은밀히 화합하여 머무는 경우,
그것에 근거하여 능히 [말을] 발하려는 그 같은 표업의 마음[表心]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여기에 선정의 경지[定地, 즉 제2정려 등]에 존재하는 표업의 마음이 산심의 경지[散地, 즉 욕계]의 몸에 근거한다는 과실은 없다.
혹은 선정에 근거하여 능히 [말을] 발하려는 표업의 마음을 일으킨 것으로, 이는 마치 선정에 근거하여 천안통과 천이통의 식(識)을 낳는 것과 같다.(이상 제5ㆍ제6구)
[또한] 만약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化主, 화작의 주체]이 몸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면, 요컨대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비로소 변화된 온갖 몸도 말하게 되니, [변화된 이의]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言音詮表]는 모두 다 [주인공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모두 다 말하며
한 명의 변화의 주인공이 침묵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역시 그러하다.62)
그러나 이는 다만 그 밖의 유정에 대해 설한 것일 뿐 부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의 온갖 선정의 힘은 가장 자재하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과 동시가 아닐 수 있으며,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즉 能詮의 의미)도 역시 다를 수 있는 것이다.(이상 제7ㆍ제8구)
만약 위의 세 정려지에서 변화된 이[所化]가 말할 때에는 초정려의 표업의 마음이 현전하여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단계에서는 이미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서 출관하여 변화된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변화된 이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63)
먼저 원력(願力)에 의해 변화된 이의 몸[所化身]을 남겨 두고, 그 후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는] 다른 마음(즉 發語心)을 일으켜 어표업을 낳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이 소의[신]을 결여하게 되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오로지 변화의 주인공[化主]의 목숨이 현재할 때만(다시 말해 생존해 있을 때만) 능히 변화된 몸을 남겨 오랫동안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마친 후에도 역시 머물게 한 이가 있다.
예컨대 존자 대가섭파(大迦葉波, Mahākāśyapa)가 골쇄(骨鎖)의 몸을 남겨 자존(慈尊, 慈氏世尊 즉 미륵불을 말함)의 세상에 이르도록 [머문]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64) 오로지 견실의 몸[堅實體, 즉 뼈]만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음광(飮光, 가섭파의 의역어)은 마땅히 살[肉] 따위도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필시 원력(변화의 원력)만으로는 능히 사후에 이르기까지 몸을 남겨둘 수 없으며,
성(聖) 대가섭파께서 골쇄의 몸을 남겨 오래도록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천신(天神)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제9송에서 제12송)
[또한]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初習業者, 초입자]는 다 [찰나에 걸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그리고 요컨대 소의[신]에 의지할 때 한 가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익혀야 힐 것을 원만히 성취한 자[習成滿者]는 한 [찰나]의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 의해, 그리고 소의[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여러 가지 다수의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다.(이상 제13ㆍ제14구)
[또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소성(修所成,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며,
둘째는 생득(生得, 선천적으로 태어나면서 획득된 것) 등으로서,
[이에 따라] 일어나게 된 변화의 결과 역시 이러한 설명과 같다.
수소성의 변화가 포섭되는 처(處)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니,65) 능히 변화하여 유정(有情)의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획득된 변화 등의 경우,
욕계 중에서의 변화는 9처(處, 색ㆍ향ㆍ미ㆍ촉처와 5근)에 [포섭되고],
색계에서의 변화는 7처(색ㆍ촉처와 5근)에 [포섭되는데],
근(根)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9처 등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였지만,
이치상 실로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근(根)을 화작(化作)하는 일은 없다.66)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修果]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밖의 변화(생득의 능화심에 의한 변화)에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67)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의 경우, 표업을 일으키는 것은 변화의 주인공(화작의 주체)의 마음에 의해서이지만, 그 밖의 경우는 스스로(변화된 이)의 마음이 신ㆍ어표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68)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의 경우,
먹고 마신 음식이 만약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필시 변화의 주인공(화작의 주체) 몸 안에서 소화되지만,
만약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한 것이라면 쇠나 돌 따위도 삼킬 수 있는데,
혹 그러한 변화의 사업은 바로 몸 안에 머무르기도(몸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편의에 따라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밖의 변화(생득의 능화심에 의한 변화)경우, [변화된 이가] 먹고 마시는 음식은 [그의] 소의[신]에 따라 머문다.69)
나아가 수소성에 의한 [변화의] 결과와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오로지 무기성(즉 通果無記)이며, 그 밖의 마음(즉 생득의 능화심)은 3성과 통하니, 이를테면 선ㆍ악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천룡(天龍) 등이 갖는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같은 것으로, 그들 역시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이상 제15송과 제16송)
⑥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에 대하여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라는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색근(色根)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혜’에 근거한 말이라면, 마땅히 ‘천안’과 ‘천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색근에 근거한 것이라면, 마땅히 ‘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본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
―이를 일컬어 천안통과 천이통이라고 하였다―
이것(즉 ‘혜’)에 의해 인생(引生)된 뛰어난 대종의 결과를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다.70)
그렇다면 그 같은 [천안과 천이의] 체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천안과 천이는 말하자면 근(根)으로서
바로 선정의 경지의 청정한 색이니
항상 동분이면서, 결함이 없어
감추어지고 작고 멀리 있는 것 등을 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것(천안과 천이)의 본질은 바로 천(天)의 안근과 이근이다.
이를테면 소리[聲]와 빛[光]을 반연하여 가행을 닦았기 때문에 4정려에 근거하여 안근과 이근의 [후]변(後邊)에서 그러한 [정려]지(地)의 미묘한 대종소조인 청정한 색[淨色]의 눈과 귀 두 근을 인기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니, 이를 천안과 천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안근과 이근을 어째서 ‘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그 자체가 바로 ‘천’이니, 선정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으로,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에 ‘천’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경에서는
“천안과 천이에는 피륙(皮肉)이나 힘줄 혈관이 없으며, 오로지 미묘한 대종소조의 청정한 색일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안과 천이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득(修得) 즉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생득(生得) 즉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하늘에 태어난 자의 그것을 말한다.71)
셋째는 유사한 천안과 천이[似天]로서, 이를테면 그 밖의 취(趣)에 태어난 자가 수승한 업 등에 의해 인생(引生)한 것으로 능히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천안과 천이와 유사한 경우를 말하니,
예컨대 장신보(藏臣寶)와 보살과 전륜왕과 온갖 용과 귀신, 그리고 중유 등의 그것이 그러하다.72)
그리고 수득 즉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생에 걸쳐 항상 동분(同分)이니,73) 현재에 이른 것은 반드시 식(識)과 함께 하며 능히 보고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소(處所, 즉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扶塵根으로서의 눈과 귀를 말함)를 필시 온전히 갖추었으며, 막히는 일도 없고 어떠한 결함도 없으니, 색계에 태어난 일체의 유정의 그것처럼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감추어진 것이나 지극히 미세하고 멀리 있는 것 등 온갖 방역(方域)의 색과 소리를 능히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와 같은 게송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육안(肉眼)에는 감추어져 있거나
작거나 멀리 있는 온갖 방역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작용이 없지만
천안으로는 남김없이 모두 볼 수 있다.
⑦ 5통을 획득하는 여러 방법
앞에서 [능]화심(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수득(修得, 선정에 의해 획득된 것)과 그 밖의 방식으로 획득된 것(즉 生得)의 차별이 있다고 논설하였는데,
신경지(神境智) 등의 다섯 신통의 획득에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역시 차별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선정과 생(生)과
주술과 약물과 업으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며
타심지는 선정과 생과 주술로써 성취되며
또한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한 성취가 더해진다.
그 밖의 세 가지는 선정과 생과 업으로 성취되며
수득(修得)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다 3성과 통하고
인취에는 오로지 생득(生得)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옥에서는 처음 태어날 때만 [타심과 숙주를] 능히 안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지(神境智)에는 모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득(修得) 즉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생득(生得) 즉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며,
셋째는 주술로써 성취되는 것[呪成]이며,
넷째는 약물로써 성취되는 것[藥成]이며,
다섯째는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으로서, 만타다왕(曼馱多王, Maṅdhātṛ, 구역은 頂生王, 성장하여 금륜왕이 된다고 함)이나 중유 등의 온갖 신경지는 바로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신경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논설한] 가는 것[行]의 세 가지(즉 運身ㆍ勝解ㆍ意勢)와 변화의 한 가지로서,74)
여기서 ‘변화’라고 하는 말은 예컨대 계경에서
‘하나가 나누어져 다수가 되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타심지에는 모두 네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며,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천안ㆍ천이ㆍ숙주지)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得]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生得]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선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所得]’을 제외한 그 밖의 것(태어나면서 획득되는 것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다 선 등과 통하지만, 그것은 선정의 결과[定果]가 아니기 때문에 ‘신통[通]’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인취 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75) 그 밖의 것은 다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본성(本性)의 생(즉 숙세에서의 생)에 대한 기억[念]은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 중에 포함된다.
즉 사람들은 이전의 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지옥취에서 처음으로 생을 받을 때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타심지와 숙주지로써 다른 이의 마음 등과 과거의 생을 알지만, 고수(苦受)에 핍박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아는 일이 없다.
그들(지옥취)이 과거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예컨대 계경에서
“그들은 스스로 기억하기를, ‘우리는 과거 일찍이 다른 이(사문과 바라문)가 설한 온갖 탐욕의 과환(過患)을 듣고도 염리(厭離)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와 같은 극심한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바로 전의 한 생만을 능히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인취와 지옥취을 제외한] 그 밖의 취에서는 상응하는바(즉 生處得智)에 따라 항상 [다른 이의 마음 등과 과거의 생을] 알 수 있다. 즉 방생(傍生)이 과거를 아는 것은 예컨대 누성(螺聲)이라는 개 등이 그러하였으며,76) 아귀가 과거를 안다고 한 것은 예컨대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옛날 [진귀한] 많은 재물을
법답게 혹은 비법(非法)으로 모았기 때문에
다른 이는 지금 부유함의 즐거움을 받는데
나만이 홀로 가난의 괴로움을 받는구나.77)
또한 천취(天趣)가 [생처득지(生處得智)로써] 과거를 안다고 한 것은, 예컨대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서다림(逝多林)을 보시하여
대법왕의 주처(住處)로 삼게 하였는데
현성(賢聖)의 스님이 이를 수용하였으니
그래서 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로다.78)
또한 계경에서
“하늘에 태어나는 모든 이는 처음으로 태어날 때 반드시
‘나는 어디로부터 몰하여 지금 어떠한 처소에 태어나게 되었으며, 어떠한 업으로 인해 이 같은 세간으로 와 태어나게 된 것인가?’에 대한
세 종류의 기억을 일으켜 말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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