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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III 아버지 뜻 기도, 사명 기도>의 줄거리 :
아버지 이름 기도와 아버지 나라 기도를 하게 되면 이제 문제가 뭡니까? 그러면 이제 나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만 하느냐 입니다. 이 문제를 위한 기도가 바로 아버지 뜻 기도입니다. 내 생각 말과 행동은 이미 하늘에서 뜻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뜻을 내 생각 안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아버지 이름과 나라와 뜻이 바로 내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서 위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사명입니다.
III 아버지 뜻 기도, 사명 기도
(마태복음 6:10b~11)
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 중심으로 <III. 아버지 뜻 기도, 사명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한 기도와 내 사명을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와 뜻 기도는 별개의 기도가 아닙니다. 주 기도의 내용은 별도의 항목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분들이 의미상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흔히 주 기도를 이해할 때 이름 기도, 나라 기도, 뜻 기도까지를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생각하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부분부터는 이 세상 삶을 위한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구분한다면 주의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아버지의 뜻을 위한 두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이 두 기도는 앞에서 언급한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전제되어야 실효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 뜻을 위한 기도는 아무 실효성을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문구만 반복해서 주절거릴 뿐 실제로 기도의 효과와 결실을 거둘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는 함께 사는 아내와 외지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름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질 때 제 의식은 어떠한 상태일까요? 저는 아내도 아들도 의식은 하지만 마음은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기억함으로써 십자가 너머로 아내를 보고, 십자가 너머로 아들을 봅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은 아내와 아들에게 가지 않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께 머뭅니다. 남편이고 아버지이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남편으로 죽은 자이고 아버지로도 죽은 자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남편으로서의 마음을 아내에게 주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마음도 아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저의 마음이 아내나 아들에게 주어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아내와 아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저의 마음이 아닙니다. 제가 마음을 쓴들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족들에게는 저의 마음보다 더 절실합니다. 아들은 외지에 나가 있고 아내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 같이 지냅니다. 이때 문제는 아내를 향해서 내가 무엇인가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일어나야 할 일은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의식하는 모든 대상을 등지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께 머뭅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내 마음 대신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내를 향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 두 가지 전제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고, 아버지의 주권은 아내를 향해 내려오시는 중입니다. 이 와중에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돈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먼저라서 마음이 돈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만 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순간들이 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 상황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뜻은 세움과 이룸의 두 개의 과정으로 나뉩니다. 실제로 뜻을 세웠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은 어떨까요? 아버지가 뜻하셨지만 아직 세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시면서 세상에 대한 뜻을 품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을 품거나 세우셨다고 하시지 않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 생애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완전히 다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다 죽을지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매 순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뜻으로 다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내 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날과 모든 시간을 뜻으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제가 아내를 마주하든, 아들과 전화로 통화를 하든, 십자가 복음 가족과 만나든 이 모든 순간들에 아버지가 이미 결정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생각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이름 기도, 나라 기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름 기도에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만을 대면하여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으심만으로 만족하려는 마음가짐이 유지되고, 내 마음이 없는 빈 자리로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시는 일이 유지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생을 완결하신 뜻 중에서 지금에 해당하는 뜻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의 내용이 지속되는 중에 아버지가 이미 이루어 놓으신 뜻을 내 생각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하늘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뜻으로 결정해 놓으신 내용대로 내가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에서 내가 어느 날 누구를 만날지, 어떤 때에 어떤 사건이 터질지, 어떤 물건을 대하고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하늘에서 이미 아버지는 다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결정하신 대로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내가 해야 할 생각과 말과 행동 역시도 이미 하늘에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뜻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늘에서 완결된 뜻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여전히 땅에 머물면서 삶에 대해 좋음을 추구하는 주인이 된 상태에서 내 뜻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다고 해서 운명론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무 말이나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저절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앞에 있는 두 가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시는 일이 지속되는 중에만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전제가 없으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전부 내 생각이고 내 뜻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제일 부담스럽게 여기는 인생의 문제가 있다면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일 것입니다. 건강 문제가 터지고 재정 문제가 터진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내가 지금 육체의 오감으로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를 의식하고 있지만, 내 마음은 이름만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로 다 가야 합니다.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를 의식한다고 해서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탈출시켜서 아버지께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좋음을 추구하는 마음이 아버지께로 올라가면 아버지를 마주하여 아버지만이 좋음이 됩니다. 그러면 병이 난 것이 나쁨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이 좋음도 아니게 됩니다. 돈이 없다고 나쁨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좋음도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좋음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의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병으로 죽든, 병이 나아서 살든, 돈이 없어서 거지가 되든, 돈이 많아서 부자가 되든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뜻만 이루어지면 됩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로 충만하고, 이 땅에는 아버지의 주권이 막힘없이 내려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에 대하여 아버지가 이루어 놓으신 뜻이 내 생각 안으로 전달됩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시는가가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완결된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선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때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이 쭉 결정돼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조명을 비추듯이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될 뜻을 내 생각에 넣어주십니다. 그러면 내 생각으로 지금 하늘에서 결정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라는 두 전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 아버지가 이미 다 결정해 놓으신 뜻과 어떻게 일치할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라는 두 가지 전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만 마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있는 한 아버지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뭔가 좋음으로 채워야 되는데 아버지뿐이기에 아버지만이 좋음입니다. 아버지만이 좋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이 땅에서는 좋음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만 좋음이기에 몸에 병이 난 것도 나쁨이 아니고, 병이 나아도 좋음이 아닙니다. 아버지만 좋음이기에 돈이 없는 것도 나쁨이 아니고, 돈이 있어도 좋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유지될 때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에 의도가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내게 떠오르는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에 대한 생각에서 이익을 보겠다는 의도나 손해를 피하겠다는 의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인 다스리심만 임하시면 된다는 소원으로 간절합니다. 이처럼 내 의도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생각이 떠오른다면 아버지의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행하실까요?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넣어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세상을 향해 소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원이 생길 때는 먼저 두 가지 전제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유지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두 전제가 유지되고 있지 않는다면 세상을 향한 소원은 그냥 내 뜻이고 내 의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면 내 의도가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내게 생각이 떠올랐다면 아버지께서 넣어주신 뜻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내 마음이 하나님께만 드려지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돈이나 건강에 대해 붙어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의 의도가 돈을 많이 벌고 싶고, 건강하고 싶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미 외식하는 기도이자 이방인의 기도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그러는 중에 내가 의도하고 뜻하는 세상일이 실패 없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알려질 수가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세상 것에 다 붙어있고, 아버지로부터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고 나의 주체적인 판단과 생각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성공을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구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알려질 수 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은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진행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 생각 속에 당신의 뜻을 넣어주실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뜻을 생각으로 받아서 그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내용에 대해서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입으로 들어갈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명의 기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부터 세상 삶을 위한 기도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7~8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31~32절에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엄연히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단순히 먹을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우리는 앞선 말씀과 연결하여 주의 기도를 하나의 전체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이름 기도가 있고, 나라 기도가 있고, 뜻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 후에 양식을 언급하십니다. 이것을 이름 기도, 나라 기도, 뜻 기도와의 연관성 하에서 풀어보자면 ‘양식을 주셔서 먹음으로써 몸이 살아 있는 한, 다른 일에 힘을 쏟지 말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만을 위하여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하자면 ‘다른 일에 힘 쏟지 말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만을 위하여 살도록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양식을 먹어서 목숨이 지탱되는 마지막 시간까지 오직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만을 위해서 사는 사명자가 되라는 간구였습니다. 사명자가 되는 일에 성별이나 신분이나 나이나 직업은 상관 없습니다. 어떤 성별이든, 어떤 신분이든, 어떤 나이든,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아니면 직업이 있든 없든, 지금 내 형편이 어떠하든, 어떤 조건에서도 아무런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의 첫 번째 의미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명이라고 하면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목사님도 ‘이 지역에서 우리의 예배당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예배당을 잘 짓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명에 대한 오해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의 사명이란 돈이 있어도 없어도, 몸이 약해도 강해도, 여자도 남자도, 나이가 많아도 어려도, 직업이 있든 없든, 직종이 무엇이든, 아무런 상관없이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식을 먹고 살아있는 한 그 시간까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이든 오직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만을 위해 사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맥락 안에서 사명이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땅을 향해 바라시는 것을 나의 소원이자 열망으로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을 향한 아버지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 되어서 사는 상태가 사명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바람을 받아서 나의 바람으로 여기고 사는데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사장님도 되고, 어떤 사람은 직원도 되고, 어떤 사람은 엄마도 됩니다. 이처럼 사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선교사의 형태도 있고 목사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 목사가 사명이고 선교사가 사명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직종이 사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목사로 만드셨다면 목사의 자리에서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사명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라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사명을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엄마가 사명이 아닙니다. 엄마라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사명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사명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바람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승철아, 오늘도 네 마음은 천국에 있는 나에게로 와서 머물러야 하느니라. 제발 네 마음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나에게로 와서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마치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벌면 기분이 좋을까, 건강하면 기분이 좋을까, 자녀가 형통하면 좋을까, 여행을 가고 휴가를 즐기면 좋을까, 취미 생활을 하면 즐거울까, 맛있는 것을 먹으면 즐거울까’라고 찾아다니면서 마음이 세상에서 뒹굴고 돌아다니는 것이 탕자입니다. 이러한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란 더 이상 세상에서 돌아다니지 말고 하늘로 올라와서 아버지의 좋음을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좋음은 세상의 어떤 것도 좋음이 될 수 없게끔 만드는 좋음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좋음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듯이 오감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좋음을 찾지 말고 하늘로 올라오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의 이 바람이 나의 사명입니다.
사명의 두 번째 의미는 아버지의 주권이 나를 통해 내려오시는 것을 바람으로 갖는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몸으로 관계를 맺고 삽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버지의 바람은 당신의 주권이 나를 통해 땅까지 착륙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땅에 착륙하시면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은 곧바로 아버지가 주권적으로 공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람을 등지고 마음이 땅에 있으면서 세상 삶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고 주체가 되어서 성공하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땅에서 이것이 좋다 하고 저것이 좋다고 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주권은 착륙하실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는 내가 마음을 두는 대상을 치십니다.
마음이 돈에 매여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를 치셔서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게 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자녀에게 매여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게 하실 것이고, 마음이 배우자에게 매여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배우자에게 문제가 생기게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고 부활 승천을 따라 올라오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소원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셔야 한다는 바람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의 주권이 내 안에 착륙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땅에 머물면 착륙하시는 아버지 주권을 방해하는 막이 됩니다. 장애물이 있기에 아버지의 주권이 나를 통해 착륙하실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나도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를 보든, 아들을 보든, 사역을 생각하든 어떤 일을 의식하든지 간에 ‘내가 의식하는 모든 대상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야 아내가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고, 사역이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도, 아들도, 사역도, 내 몸까지도 아버지의 주권이 필요한 것이지 내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의 주권이 착륙하시는 지점이 되어야 한다.’라고 아버지의 바람을 나의 바람으로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보시기에 가장 좋은 형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뜻 안에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보시기에 좋게 결정해 놓으신 뜻대로 내 삶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삶의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 한 사람에 대해 유일하고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보시기에 좋게 다 계획을 완결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멋대로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아버지의 마음은 조마조마하십니다. 내가 A라고 말해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순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이루어지는데, 자꾸 B라고 말하고, C라고 말하고, D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가장 좋게 만들어 놓으신 나의 모습이 자꾸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에 땀을 쥐듯 조마조마해하시며 ‘내가 정해놓은 뜻대로 해야 너의 삶은 아름답고 유일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삶이 될 수 있다.’라고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바람이 엄연히 살아있는데, 우리가 다른 바람이나 소원을 갖고 사명자의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어느 직종이나 신분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바람이란 주어진 직종과 신분과 자리에서 의식하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아버지께만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똑같이 바라는 것이야말로 나의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떤 직종에 있든 어떤 형편에 있든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주권적 다스리심은 나를 통해 착륙하셔서 이루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다 뜻이 있다. 네 아들이 지금 멀리서 자취하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마음으로 아들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내가 다 생각하고 있다. 네 아들이 악하면 악한 대로 내가 다 알고 있고 계획하고 있다. 그러니 네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네 아들에 대한 나의 주권적인 계획이 착륙할 수 있도록 네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게 해서 자리를 비워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바람을 나의 바람으로 갖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관계 맺는 모든 대상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관심은 이미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갖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이 나로 인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심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드리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내가 마음을 써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세상에 마음을 써서 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을 이제까지처럼 마음을 쓰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쓰는 대상도 망가지고 나도 망가질 뿐입니다.
아버지의 바람이 내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와 관련된 대상들에 대해 마음 쓸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될 필요가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대한민국과 관계가 있지만 대한민국에 대해 당장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와의 관계를 이용하셔서 대한민국을 당신의 뜻과 주권적인 다스리심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자리를 비워드려야만 합니다. 당장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걱정은 없습니다. 이름 기도와 나라 기도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아버지의 다스리심은 내려오십니다. 즉, 십자가에서 땅에 대한 죽음이 철저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땅에서 내 주체성이 죽어 아버지의 주체성이 내려오시는 것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아버지의 뜻은 또렷하게 알려집니다. 그러면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복음성가 중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다만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기도를 할 수 있기에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나 이방인의 기도가 아닌 주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합시다. 기도할 수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그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이 목숨 걸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모든 혜택 위에서 하는 기도임을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주의 기도를 함으로써 걱정도 불안도 없이 평강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