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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스 스푼” 규장. 오인숙
요약: 이동기목사
PART 1. 사람이 만든 이야기
chapter 1. 금도끼냐 은도끼냐
금도끼와 쇠도끼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시대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정직하게 살면 쇠도끼가 금도끼로 바뀐다는 것을 믿었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 쇠도끼를 금도끼로 바꾸기 위해서.
열왕기하의 도끼 사건에서의 이야기 결론은 금도끼나 쇠도끼나 아무 관심이 없다. 도끼를 빠뜨린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쇠도끼를 잡으라고 했을 뿐이다.
chapter 2. 잠에 빠진 토끼와 거북이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부지런히 열심히 기고 기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야선지자는 아합왕과 그의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을 벌인다. 그런데 그 대결의 승리는 엘리야에게 돌아갔다. 엘리야가 지저스 스푼이었기 때문이다.
chapter 3. 변형된 신데렐라 드라마
사람들은 끝없이 변형된 신데렐라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결국 우리 속에 감취어진 금구두를 심고 싶은 욕망의 숨겨진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끝난 후에도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에게 나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종을 자신의 옛 고향으로 보낸다. 거기서 종은 리브가를 만나 이삭의 아내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금코걸이한 개와 금손목고리 한 쌍을 준다. 금 구두가 리브가에게 맞는 셈이다. 이후에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금수저 쟁탈전이 일어나며, 그것은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이어진다.
chapter 4. 옷을 바꿔입은 왕자와 거지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는 서로 옷을 바꾸어 입고 서로 다른 낯선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또 한 번의 사고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서로는 상대를 이해하는 사람들로 변해 있다는 이야기다.
모세는 히브리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와 누이의 기지로 애굽의 왕궁으로 들어가 애굽 왕자가 된다. 그러나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이면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다. 왕자가 거지 신분으로 살다가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의 클라이맥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PART 2. 지저스 스푼으로 살기
chapter 1. 금수저, 흑수저? 나는?
자신을 ‘예수님 수저’라 여기는 일명, 지저스 스푼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금수저에도, 흙수저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규정의 틀 안에 놓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을 어떤 틀 안에 넣는 사람들은 사실 두려움과 불안,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그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비교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보호자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면 창조주의 보호에 ‘의존하는 자’와 ‘의존하지 않는 자’일 것이다. 삶의 성패는 누구를 보호자로 인정하느냐에 있다고 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창조주의 손에 들려 작용되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님 수저’로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chapter 2. 새로운 이름을 받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름 짓기에 관심이 많으시다. 이름을 바꾸실 뿐아니라 처음부터 친히 지어주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다. 타인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 ‘딴지나 건다’는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뀌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는 것은 인격을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이며, 새 삶에 대한 약속이었다. 대체로 하나님의 이름 바꾸기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하신 미래 ‘나’의 모습으로 지어진다.
신약으로 가면 예수님의 이름 바꾸시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갈대같은 시몬을 장차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시기 위해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훗날 진짜 반석이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스푼으로 쓰려고 하실 때, 스스로 만든 부정적인 형용사로 하나님을 포기시키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이름에 붙인 형용사부터 바꾸신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로. 지저스 스푼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주신다.
‘임마누엘’
■ 당신에게는 임마누엘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니면 행복합니까? :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을 알고 믿느냐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chapter 3. 쓰임에 합당한 삶을 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그로인해 자신을 잡고 있는 하나님의 생생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관계, 포도나무와 그 나무에 붙은 가지와 같은 관계, 함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시공을 초월한 관계, 기도로 날마다 가까이 있어도 부족함이 느껴지는 관계, 듣고 들어도 달콤한 말씀이 연인의 목소리처럼 또 듣고 싶은 관계라는 것을.
사랑은 거리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가까워서 행복하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깨끗하지 않은 그릇은 쓸 수가 없다.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셔서 가까이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와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해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고 구별되어 쓰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지저스 스푼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로 구별되고 쓰임받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깨끗한 스푼으로 쓰임받을 때, 세상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chapter 4.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릭슨의 삼중 부기의 원칙
첫째는 개인의 신체적 상태: 건강, 재능 등
둘째는 정신적 상태다.
셋째는 ‘문화적 환경’ 즉 어떤 가족, 어떤 사회적 상황 아래서 태어나느냐가 인간의 성장에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출발선을 태어나는 지점으로 본다. 출발선과 도착점을 한 선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인생 전체가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출발선의 위치에 대해 열등감도, 우월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은 인생에서 여러 번의 출발선을 경험한다. 만일 당신이 지금 늦었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당신보다 출발선이 늦은 사람을 소개하겠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출발선에 섰다. 모세는 80세에 출발선에 섰다. 이 출발선은 ‘소명’이며, 이 소명은 존재의 이유에 대한 자각이다.
지저스 스푼의 출발은 버리기에서 시작한다. 죄악의 쾌락, 초라하게 보이는 나에 대한 실망, 현실 속의 의욕없음에 대한 변명과 포기, 익숙한 것, 버리기 아까운 것들과 결별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면 지저스 스푼의 결승선은 어디일까? 지저스 스푼은 자기 스스로 결승선을 긋지 않는다. 하나님의 결승선이 지저스 스푼의 도착선이니까. 하나님의 등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머뭇거리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도록 지저스 스푼에의 열망을 되살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생 역전을 위해 밥상을 차려 놓고 계신다.
■ 당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버린 지금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차려놓읜 밥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먹고 계십니까?
chapter 5. 비교불가한, 유일한 나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중 하나가 비교의식이다. 비교의식은 사람을 쪼그라들게 하며, 넘어지게 한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움을 받은 사울을 넘어지게 한 요인은 여인들이 부른 노래 때문이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사울왕은 이 노래를 듣자마자 당장 불쾌감을 드러냈다. “감히 나를 누구와 비교해” 그는 대단한 우월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도 숨겨진 열등감이 있었다. 열등감은 비교에 약하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숨어 있는 열등감을 분노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비교다. 칭찬은 칭찬받는 사람(다른 사람)을 질투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의 비교의식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렇게 버려진 수저가 되었다. 그리고 비교의식은 살의까지 품게 한다. 비교는 독사와 같이 무서운 독성을 갖고 있다.
비교의식을 가진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은 비교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사울은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죽이려 덤비는 사람에게도 반감을 갖지 않는다. 지저스 스푼은 자신을 그 누구와의 비교 선상에도 세우지 않는다. 그가 가진 삶의 목표는 사람을 이기고 왕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나단 역시 비교에 무심한 사람이었었는데 그가 이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 역시 군중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비교의 위치에서 빼버렸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좌절했다. 곧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와 자신을 차별하시는 하나님께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모차르트가 죽게 하지만 그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음악성을 잃고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한다.
비교의식은 참으로 뿌리 깊은 인간의 욕구로, 어떤 때든지 불쑥 튀어나온다, 지저스 스푼은 누구와 비교할 필요없이 예수님을 따르면 된다. 액션!
■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 때 마음은 어떠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하셔서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찾으셨습니까?
chapter 6. 나를 넘어서다
‘나’에게는 ‘실제적 나’와 ‘이상적 나’가 있다. 미래에 되고 싶은 나는 이상적 나이고, 실제적 ‘나’는 자신이 갖기를 원하거나 버리고 싶은 현재 내 모습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나’에게 심리적으로 너무 몰입하면 ‘거짓 나’가 만들어진다. ‘거짓 나’는 자신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마치 자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을 덮었던 비늘이 벗겨졌고, ‘거짓 나’를 바라보던 눈이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도록 변했다. 그의 ‘진정한 나’는 하나님이 택한 그릇이었다.
자신의 정체성, 참 자아를 만나려면 먼저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묻게 된다.
인간이 비울 때 하나님은 채울 준비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 요셉은 두 번이나 옷 때문에 낭패를 본 사람이다. 첫 번째 옷은 아버지가 입힌 옷이다. 두 번째 옷은 보디발이 입힌 옷이다. 그는 과감히 보디발이 입힌 옷까지 버렸다. 버려야 채울 수 있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던 그는 하나님이 입히실 옷을 꿈꾸며 사는 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금사슬을 목에 걸고, 왕이 내린 왕의 인장반지를 끼고,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다. 지저스 스푼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 위한 비우심의 비밀을 안다.
■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사명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당신이 비운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그 빈 곳을 무엇으로 채우셨습니까? 예수님으로 채우셨다. 에수님 안에는 복음, 교회, 하나님 나라가 있다.
chapter 7. 과거도 허비하지 않는다
고통의 과거는 현재의 나를 공격하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죽이는 꼴이라니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웠던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를 무기력하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하는 과거의 고통은 꽤나 끈질기게 우리 삶의 진전을 막는다. 마치 뒤에서 허리를 잡아끄는 올가미처럼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험난한 과거를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해 유연해졌다는 거다. 자신의 과거를 수용한다는 뜻이다. 야곱은 험난했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바로 왕에게 드러내며 바로 왕을 축복했다.
하나님의 ‘지저스 스푼 사용 매뉴얼’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비천한 출생,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 학교생활, 우정, 사랑, 고통, 재능, 능력, 상처 등.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뜰살뜰 챙겨서 사용하신다. 우리의 과거에서 버리고 싶었던 약점이나 고통까지도 사용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삶의 자원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실패로 우는 사람에게는 실패자가 멘토가 되게 하고, 상처의 고통을 앓는 자에게는 상처의 고통을 앓아본 사람으로 위로자가 되게 한다. 병든 사람에게는 병을 치유받은 사람이 희망이 되는 법이다. 지저스 스푼의 섬김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줌으로 그들의 현재가 바뀌고 미래를 준비하게 한다.
■ 예수님께서 당신의 과거를 삶의 자원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사용하고 계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chapter 8. 포기되지 않는 나
이 시대는 ‘포기의 기대’가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7포 세대라고 한다.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 내 집 마련, 인간관계에 이어, 꿈, 희망까지 놓아버린 세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원인을 ‘사회구조’와 ‘여유롭지 않은 가정 형편’ 탓이라고 했다.
포기라는 말에는 시작해보기도 전에 힘이 빠지게 하는 독성이 있다. 여리고에 있던 한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여 나를 불씽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잠잠하라고 그를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질렀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다.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대답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왜 당연한 것을 물으실까? 주님은 이 고백을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으로 보신다.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지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 또 어떻게 살고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 하나님의 무모한 사랑, 작은 자 중에 하나인 죄인된 나를 포기하지 못하시고 독생자를 죄인인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신 무모한 선택과 사랑을 생각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숨겨진 채 포기하며 산다. 우리의 죄악된 삶은 기회를 찾아 하나님을 떠날 생각만 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처럼, 사라져버린 동전처럼, 집을 떠나 방황하는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등진다. 그러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인 이 이야기는 앞으로의 우리 삶이 잔치와 같은 기쁨의 삶이 되기를, 그 삶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현재를 포기하지 말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이다.
■ 누군가를 포기하려고 했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로 인도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 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chapter 9. 내 가치에 점수를 메기지 않는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단다. 난 네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 판치멜로에게 엘리아저씨가 해준 말이다.
지저스 스푼은 사람들의 평가에 의연하다. 그에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누구에게 자신을 맞출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에 점수를 매기지도 않는다. 그의 자신의 존재 가치가 하나님의 기준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어주신 자신의 존재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chapter 10. 나에게 주어진 가능성
공평이란 재능에 맞게 맡기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재능이 부족한 사람에게 제일 많은 금 다섯달란트를 밭기곘는가? 우리가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 즉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그것을 땅에 묻었을까? 실패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패하기도 전에 실패를 예감하고 아예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은 종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충분히 사용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능력은 다를 수 있지만 노력은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우리의 가능성은 노력에 의해 발견된다. 그리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재능들이 튀어 나온다. 여기서 다섯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는 달란트를 받자 마자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 그가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했다는 데 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침 일찍 일어나 산으로 바로 떠났다는 것이다.
주어진 일의 시작을 지체할수록 생각이 많아지며 생각이 많아지면 움직이기 싫어진다.
게으름은 열정을 빼앗긴 자의 실체다. 게으른 것은 주인 보기에 악한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핑계와 변명을 늘어 놓는다.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하든지 비생산적인 일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한다. 생산적인 일을 땅에 묻은 사람은 비생산적인 일을 만들며 다닌다. 그들에게는 계획도 꿈도 내일도 없다. 노력없는 대박을 기다리는 게으름이야말로 우리의 가능성이 싹도 틔우지 못하게 땅에 파묻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세대는 주어진 삶에 대한 계획이 없으므로 지식도, 지혜도 필요하지 않은 세대이다. 계획이 없자는 것은 꿈이 없다는 것이고, 꿈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어 교육도 고용도 훈련도 받으려 하지 않는 ‘니트족’이 급증하는 시대이다. 계획을 세워도 이를 수 없는 세상이라는 비관적인 사고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 깊이 파고든다.
지저스 스푼은 큰 것을 꿈꾸지 않는다. 작은 일에 충성한다. 작은 일은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큰 일로 보이고 어떤 일을 작은 일로 보실지 알 수 없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삶이 남기는 삶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인이 준 보상은 더 많은 일이었다. 일의 축복,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찾아내 성실히 남긴 사람들은 더 큰 가능성을 복으로 받는다. 그것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셔서 경험한 작은 일의 소중함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작은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chapter 11. 고난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질문에 설명해 주신다 한들 우리가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까지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하심과 행하심이 다 들어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성을 믿는다면 질문보다는 순종을 택할 것이다.
인간적으로 약은 사람들은 절대로 총대를 매려 하지 않는다. 뒤에서 남을 조종하면서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를 원한다면 그 변화가 자신을 요구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에도 은밀한 불평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럼에도 그 기도에 응답할 테니 동역하자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려는 나를 아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나를 아는가?
누군가 지저스 스푼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힘들게 동역자를 만드신다. 지저스 스푼으로 사는 사람들은 고난의 이유조차 묻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믿고 기다릴 줄 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삶이 최고의 삶인 것을 인정한다. 고난의 이유나 삶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오늘의 존재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찾을 뿐이다.
chapter 12. 지금, 여기, 내 삶을 받아들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중 90퍼센트 이상이 자신이 싫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내가 싫다’의 기원은 첫 번째 사람들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내’가 싫은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이 두렵다. 언제나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싫은지 이유도 모른 채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으로 살면 좀 더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자꾸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에덴동산의 ‘심히 좋다’는 예수님 안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 심히 좋은 우리의 형상ㅇㄹ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으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나무 사이에 숨지 않아도 된다. 내 이름을 부를 때 “예 여기 있어요”하고 튀어 나올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 삶은 그저 지루한 시간 보내기였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이곳에서부터 모세는 그 신을 벗어버려야 했다. 인간의 신은 벗어버려야 했다. 고통도, 슬픔도, 무력감도, 좌절도, 외로움도 먼지처럼 닦고 걸어왔던 그 신을 벗어야 한다. 그러나 왕궁 생활 40년이나 종살이 40년은 그에게 필수훈련이었다. 지저스 스푼은 하나님을 위한 맞춤 제작이다. 모세의 신을 벗기신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권능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다.
모세의 나머지 40년은 광야의 40년이었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모세와 함께 하셨다. 모세는 처음으로 소망과 목적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살아 숨쉬는 영의 삶을 살게 된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로 살게 된다. 지저스 스푼은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왕자의 삶을 버리고 거지의 옷을 입고 오신 구세주처럼 살기를 원한다.
왕자의 ‘나’ 찾기에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나’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같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거지로 산다고 해도 크리스천의 정체는 하나님의 자녀다. 거지와 왕자에서 에드워드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의 안타깝고 처참한 현실을 보며 좋은 왕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진짜는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산다. 에드워드 왕자의 ‘나’ 찾기 과정은 결국 ‘남’을 복되게 하는 삶을 찾는 것이었다.
■ 나에게 자꾸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chapter 13. 함께 하는 삶을 즐기다
혼자를 즐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혼자는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저스 스푼으로 부르실 때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지저스 스푼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하시는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일을 먼저 생각하기에 힘들어 한다. 그러나 일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먼저 원하신다.
하나님이 곤고함에 빠진 엘리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하신 일은 자고 먹고 다시 자게 하셨다. 엘리야는 천하에 없는 믿음의 용사지만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 성경 속의 영웅들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삼손은 들릴라의 눈 웃음에, 모세는 참지 못하고 내려쳐 버린 바위에, 다윗은 목욕하는 여인에게.
신앙은 지금 잘믿는 다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 지금 하나님과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은 없는가? 있다면 관리를 받아야 한다.
주목한다는 것은 하나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가? 무엇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가? 교회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함께 지어져 가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상처받은 교회를 어루만질 사람이 지저스 스푼이다. 상처가 많은 교회라면 거듭거듭 어루만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지켜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가인같이 대답한다.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지키는 자입니까?” ‘지켜준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에 포함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우주를 지키지 않았느냐”고 하지 않으셨다. 그냥 “네 아우가 어디있느냐”고 물으셨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다행히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안부를 물으신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그 생명을 서로 지켜 성장시키라고 하셨다. 사랑은 적당한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보내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훈련은 관심과 집중이다. 아무리 무리가 많아도 당신 곁의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눈 맞춤을 할 시간을 내야하고, 들어줄 귀를 열어야 한다.
지저스 스푼은 사랑의 훈련에 익숙하다. 누군가의 생명을 빛나게 하고 복되게 하려는 사람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지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구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다. 소금이 밖에 버려져 밟히지 않도록, 빛이 빛을 잃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이다.
■ ‘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혹은 교회를 떠난 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 주셨습니까? 그리고 생각이 바뀐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