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의 실체
직장인의 소진
소진(燒盡)*은 ‘일에 대한 힘과 에너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게 타 없어진 상태’입니다. ‘Burn out’입니다.
현장 사회사업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기관 부조리, 임금과 처우, 인간관계 갈등 따위로 소진되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직혁신, 처우개선, 휴가나 마음위로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이런 대응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만, 이는 직장인 누구나 경험하는 어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월급 받으며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에 일어나는 필연적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어떤 점은 개선하고 지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사회사업가의 소진이 이것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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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소消’를 써서 ‘消盡’로 쓰기도 합니다.
‘힘, 에너지, 시간, 물질 따위가 모두 쓰여 사라진 상태’란 뜻은 같지만,
영어 표기를 생각하면 ‘불화’를 사용한 ‘불사를 소燒’가 맞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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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의 노동으로 소진을 경험하다면, 이는 개선이 필요합니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여 소진을 경험한다면, 이 역시 요구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이런 구조적 상황을 외면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사업가라면 이런 외적 요소 외에도 다른 소진 요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영혼을 갈아 넣는 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만 일해야지요.그렇게 일하는 사회사업가가 당사자를 잘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인격을 존중 받으면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도 떠납니다. 존중 받아본 사회사업가가 당사자도 존중할 겁니다.
사회사업가의 소진
사회사업가의 소진은 정의부터 다릅니다.
‘일에 대한 힘과 에너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게 타 없어진 상태’란 자기 처지 문제만을 넘어,
사회사업가라면 ‘일에 대한 힘과 에너지와 같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게 타 없어져,
타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나아갑니다.
소진은 전문가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회사업가는 소진 원인이 다른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사업가의 소진 원인을 단순히 직장인으로의 어려움보다
사회사업가로서 보람, 자존감과 자신감, 전문성과 자부심에서 찾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경험하는 소진에 대한 대응으로
당사자와 인격적 만남, 전문가로서 자부심, 다른 사회사업 동료와 교류에 마음 씁니다.
소진의 세 원인과 대응
① 당사자와 인격적 만남
당사자와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다면 헛헛함 끝에 소진을 만납니다.
당사자를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봅니다.
나도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당사자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도 이유가 있을 거라 여깁니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여도 초지일관 그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대하려 합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관된 관점과 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실천과 기록을 지켜나갑니다.
지금은 그를 이해하며 도와가는 데 한계가 있을지라도
시종일관 힘써온 그 과정과 경험이 다음 사람을 돕는 데 도움 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나는 붙잡을 수 있습니다.
② 전문가로서 자부심
사회사업 전공자로서 배운 바를 적용하고 그로써 이뤄진 변화를 맛보지 못하면 소진이란 쓴맛을 봅니다.
‘당사자와 지역사회가 복지를 이루고, 더불어 살게 돕는 사람’이란 사회사업 정의대로 실천합니다.
당사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그와 관련한 ‘사람 사안 상황’을 학습합니다.
전공서적과 논문을 찾고, 여러 사례집을 읽습니다.*
읽어야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학문한 사람의 실천은 아무리 작은 일도 달라집니다.
이때 전문성이 드러나고, 여기서 자부심이 생깁니다.
우리 일의 자부심이 있을 때 자존감도 높아집니다.
“가는 길 어려워 보여도, 내가 택한 나의 인생, 열정과 긍지가 있단다, 우리들은 복지인”
- ‘복지인 노래’ 가운데
* 당사자를 만나기 위한 사회사업가의 ‘준비학습123’.
당사자와 관련한 이론서 1권, 최신 논문 2편, 관련 사례 3편 읽기.
최소 이 정도 준비를 마쳐야 ‘당사자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③ 다른 사회사업 동료와 교류
사회사업을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 하며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 교류합니다.
그런 사회사업가와 교제하며 나누는 재미에 빠지지 못하면 소진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사람은 상대를 통하여 애정, 자존, 자아실현과 같은 욕구를 충족합니다.
사회사업가 역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 가치가 높아집니다.
내가 하는 실천을 서로 나누며 점검하고, 위로 받습니다. 다시 힘을 냅니다.
사회사업을 이야기하는 동료가 있어야 재미도 있지만,
상대를 통해 도전도 받고, 훌륭한 동료를 보며 자부심도 생깁니다.
“때로는 힘들고, 포기하고 싶어도, 지지와 격려를 통해서, 다시 힘을 내리라”
- ‘복지인 노래’ 가운데
지금 점검합니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당사자가 있는가, 사회사업 배운 바를 적용하고 있는가, 사회사업 동료와 교류하고 있는가.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처음 얼마간은 버틸 수 있지만
머지않아 소진을 만나거나, 소진의 쓴맛을 보거나, 소진에 빠질 겁니다.
소진은 ‘힘든 상태’가 아닌 ‘길 잃은 상태’
소진의 실체를 더 들여다봅니다. 당사자와 인격적 만남, 전문가로서 자부심, 다른 사회사업 동료와 교류.
이런 세 가지를 잘 갖추고 있다면 당사자를 지원하는 가운데 마주하는 ‘힘든 상태’는 오히려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로 일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당사자를 만날 것이라 예측했을 겁니다.
당사자로 인한 힘든 순간이 올 것이라 예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 놓였을 때 이를 소진으로 느끼는 건 어쩌면 이 세 가지 요소가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 일은 열심히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닌데, 이상 없이 뛰어가기만 한다면 돌아올 길이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목표 없이 달리기만 하는 상황에서 마주한 ‘길 잃은 상태’를 소진이라 느끼는 것일지 모릅니다.*
거들기 쉽지 않은 당사자를 만났지만, 그를 잘 돕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그를 지원하기에 전공서적을 읽고, 관련 논문을 살피고, 해당 사례를 읽습니다.
이런 지원 과정과 경험을 사회사업 동료들과 나누며 생각을 정리하고 지혜를 얻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소진이 올 수 있으나, 어렵지 않게 이겨낼 겁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소진을 극복하게 하는 열정을 줄 수 있습니다.**
* 이 세 요소로써 후배를 지도하는 게 슈퍼비전입니다.
세 요소로써 후배의 상황을 살피고 안내하는 이가 슈퍼바이저입니다.
이런 틀이 없으면 그저 ‘쉬었다 오라’거나 ‘다들 그렇게 일한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할 겁니다.
**고딘량 선생님은 대전 어느 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지적장애인 지원센터에서 일합니다.
지원하는 당사자가 달려들어 고딘량 선생님 얼굴을 뜯어놓았습니다.
사회사업 글쓰기 모임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얼굴이 온통 반창고로 가득했습니다.
한 달 지나 글쓰기 모임에서 다시 뵈었습니다. 그때 일을 어떻게 기록하였을지 궁금하여 얼른 읽어보았습니다.
“얼굴에서는 피가 떨어졌고 상처가 심하게 생겼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은 주호 씨를 복지관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관장님을 비롯해 복지관 직원분들은 제 얼굴에 난 상처를 걱정해 주셨지만 제가 무서웠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집에서 공격을 당하고 얼굴에서 피가 날 때도 별로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과 차를 향해 뛰어갈 때는 혹시 모를 사고의 위험성 때문에 무서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 일은 주호 씨만을 탓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미숙한 모습을 보인 것이 더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종이와 과자를 챙겨가지 못했으며 심한 제지를 했고 주언씨가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으니까요.”
- 고딘량 선생님 글 ‘발맞춤’ 가운데
그 상황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주호 씨와 같은 이를 더 잘 지원하기 위한 경험으로,
그래서 다른 지원방식을 시도하는 공부로 여겼습니다. 당사자와 함께 걸어가다 돌을 만났습니다.
어려웠던 상황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져 소진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이런 해석 뒤에는 관장님의 슈퍼비전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소진 뒤 회복
소진은 물리적 현상입니다. 때가 오면 누구나 경험합니다.
세 요소를 갖췄다면 소진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 요소가 없으면 소진이 왔을 때 무너집니다.
세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도 소진이 올 수 있습니다.
세 요소 덕에 그 소진을 이겨냈습니다. 이제 회복합니다.
회복의 으뜸은 ‘기록’입니다.
전후 상황, 이로써 얻은 깨달음 따위를 정리해 놓으면 소진의 아픔은 자산이 됩니다.
다음 사람을 더 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록을 공유하면 비슷한 경험을 한 동료에게는 위로가 되고,
아직 소진이 오지 않은 이에게는 대비할 수 있는 안내가 됩니다.
기록하여 소진을 극복하고, 이로써 더욱 성숙한 사회사업가가 됩니다.
기록하면 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드는 무늬가 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동료들과 공유했습니다.
윤주영 원장님, 매번 이렇게 글 쓸 때마다 잘 읽어주시고
시설 동료들과 함께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