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집 (Casa Bianca) - 패티김(1969)
하얀집 (Casa Bianca) - 패티김(1969)
꿈꾸는 카자비안카 언덕 위에 하얀집은
당신이 돌아오는 날을 오늘도 기다리네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만을 남겨놓고
어느 하늘 밑에서 당신은 살고있나
성당의 종소리가 산마을에 울리면
허전한 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라
꿈꾸는 카자비안카 해저문 언덕을 넘어
흘러가는 흰구름아 내 마음 전해다오
Tutti i bimbi come me 뚜띠 이 빔비 코레 메
Hanno qualche cosa che 하노 쿠알케 코자 케
Di terror li fa tremare 디 돌노 리 파 트레 마레
E non sanno che cos'e 에 논 산노 케 코제
꿈꾸는 카자비안카 언덕위에 하얀집은
당신이 돌아오는 날을 오늘도 기다리네
꿈꾸는 카자비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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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집(Casa Bianca 1969년 번안곡)
한국에 이태리음악인 '칸소네'가 알려진 것은 'Casa Bianca'라는 곡이 들어온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카사비앙카' (하얀집. 원곡은 Vicky Leandros)라는 번안곡을 부른 가수는 바로 패티김으로 당시 미국 라스베가스(Las Vegas)무대에서 귀국, 작곡가 길옥윤과 결혼하고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시작, '서울의 찬가'라는 곡으로 빅히트를 쳤던 대형가수였다.
60년대 후반 서울의 주거환경은 한옥들이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촘촘히 들어서있던 시기였다. 시내 중심가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하나둘씩 채워지고 서서히 고층화 되어가고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나마 낡은 한옥이라도가진 가정은 경제적으로 소위 중상류층에 속하던 때였고 삼양동이나 봉천동 산 언덕배기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프로듀서로 출발하던 1970년대 후반은 가요사에 남을 황금기였다. 이미자, 김추자 ,펄시스터즈, 윤복희, 조영남, 양희은, 트윈폴리오, 남진, 나훈아, 하춘화... 숱한 스타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스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즐거움이었지만 그들을 가까이서 보며 그 전의 꿈을 잃는 건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내내 나를 매료시킨 우상이 그들 속에 있었다.
1967년 5월 파월장병 위문공연 때 패티김
패티김.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 도도하고 당당함에 압도당했다. 당시 쇼 프로그램 조연출자였던 나는 그녀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의 카리스마를 느꼈다.
노래속에는 타고난 천재성이 있었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는 국악을 통한 음악수업으로 더욱 탄탄하고 농염했다.
패티김의 히트송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오랫동안 영혼을 적시는 노래였다. 연출자가 출연가수를 우상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이 비상식적이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젊은 날 패티김은 내 최고 우상이었다.
그 우상이 베일을 벗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1994년 5월 도쿄에 있던 길옥윤(패티김의 전 남편)씨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길옥윤씨가 암으로 22~3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시한부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길옥윤씨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귀국 콘서트를 하고 싶다면서 패티김이 함께 출연해 주기를 원했다.
1994년 6월19일 '길옥윤 이별 콘서트'는 음악 콘서트라기보다 긴 이별 끝에 만난 두 사람의 화해와 용서의 다큐멘터리였다.
생방송 15분전. 몇 년 만에 만난 두 사람.
패티김은 '시시하게 아프고 그러느냐'며 가볍게 질책했다. 심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코멘트였다.
죽음을 앞두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길옥윤씨를 보고 게스트 가수들은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패티김은 얼핏 눈물이 비칠 것 같으면 카메라를 피해 돌아서서 노래를 불렀다.
방송이 끝난 뒤 패티김의 분장실은 잠겨 있었고 30여분 가까이 누구도 그 분장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절제력이 한꺼번에 무너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로소 도도한 스타에서 가슴이 따뜻한 여인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패티김은 이제 가수 데뷔 40년이 가까워 왔다. 얼마전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패티김은 아직도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날씬한 몸매도 여전히 처녀 같다.
내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르고 있었어요? 가수가 된 뒤로 아직까지 배부르게 먹어 본 적이 없어요. 음식 한번 마음껏 먹는 게 소원이에요."
한끼 쯤은 괜찮지 않느냐는 유혹을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저녁으로 야채나 과일만 먹고 견디는 게 고통스러워도 팬들을 위해 청바지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PD는 우상을 잃어가는 대신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직업이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냈지만 젊은 날 나의 우상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패티김은 그러나 여전히 깨지지 않는 우상이다.
(이남기 SBS 예능국장. 1997)
패티 김 Patti Kim(1940~) 본명 김혜자
1959년 미8군 쇼로 데뷔한 패티김(본명 김혜자 59세)은 보기 드문 대형 가수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줬다. 작곡가 길옥윤과 호흡을 맞춰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녀는 가수생활 38년 동안 4월이 가면, 빛과 그림자, 서울의 찬가,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 못잊어, 가시나무새 등 수십곡의 히트곡으로 사랑을 받았다. 1996년에는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는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이 울려 퍼졌고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급격하게 미국문화의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8군 무대는 새로운 음악사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0년대의 미국 백인 사회를 장악했던 금발의 스탠더드 팝 뮤지션의 이름을 딴 패티김의 신화는 1959년에 탄생의 고고성을 울린다. 그리고 60년대의 개막과 함께 TV의 시대가 열렸고, 매혹적인 풍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그가 브라운관과 리사이틀 무대의 디바(diva)로 부상하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장르의 한계를 초월한다. ‘대형가수’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주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adre나 Till, 그리고 패티 페이지의 노래 같은 서구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며 서구 대중음악의 한국 상륙을 완성시킨 패티김은 최창권의 뮤지컬 수록곡인 '살짜기 옵서예'와 길옥윤의 '사월이 가면'을 통해 출중한 가창력과 세련된 무대 맵시를 보이며 승승장구, 60년대 말부터 길옥윤과 함께 그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1969년의 '사랑하는 마리아]에서 이듬해 '사랑이란 두 글자'와 '사랑하는 당신이' 그리고 파격적인 판탈롱 패션을 선보인 1971년의 '님에게'로 이어지는 ‘사랑의 행진’은 패티김의 성가를 한껏 드높였다. 이즈음 거의 동시에 선보인 '대한민국 찬가'와 서울의 찬가, 능금꽃 피는 고향(대구 예찬 노래)은 또한 패티김으로 하여금 ‘국민가수’의 휘장을 가슴에 달게 해 주었다. 1974년 동경 가요제 출품곡 '사랑은 영원히'에 이르러 패티김의 보컬은 거의 드라마틱한 오페라적인 경지를 획득하며 절정의 표현력을 구가하지만 길옥윤과의 결별로 인해 '이별'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악 이력의 제1막을 화려하게 닫았다.
저 멀리 미8군 무대로부터 배태된 길옥윤과 동반한 그의 음악은 빅밴드와 화려한 뮤지컬 사운드에 바탕을 두고 사랑과 이별의 다채로운 표정의 감수성을 능수능란한 템포로 조율하는 한국 스탠더드 팝 음악의 하나의 완벽한 전형이었다. 이들 콤비의 음악에서 청승맞고 어두운 그늘은 없었다. 확신으로 가득한 패티김의 발성은 스탠더드 팝의 상륙 완료를 알리는 일종의 마침표나 진배없었다.
길옥윤과 헤어진 후에도 패티김은 또 하나의 위대한 작곡가 박춘석과 발을 맞추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스탠더드 넘버들을 쉬지 않고 분만한다. 1977년과 1978년에 발표한 '추억 속에 혼자 걸었네'와 '못잊어'는 그의 제2막을 여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유장한 음영이 짙게 묻어나는 수작이며, 특히 1983년 박춘석과 콤비를 이룬 노래 중 최고의 명작으로 손곱히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70년대의 명곡 '사랑이여 다시 한번'과 대조를 이루는 가곡풍의 대작이다. 그는 박춘석과 그 후로도 사랑은 생명의 꽃, 사랑은, 사랑은 멀어지고 이별은 가까이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우리들에게 선물했다. 패티김과 그의 노래는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한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살아있는 박물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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