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로세움
♣ 대전차 경기장
♣ 포로 로마노
콜로세오(콜로세움, Colosseo)
콜로세오는 72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원형 경기장으로, 80년 베르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총 5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기장이 그 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관중들이 입장하는 데 30분, 퇴장하는 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개폐형 지붕과 같은 놀라운 시설을 갖춘 콜로세오는 2007년 새롭게 선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1층부터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는 이 경기장에서는 맹수의 시합이나 검투사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으며, 1층은 귀빈석, 2층은 일반석, 3층은 입석으로 이루어졌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사들의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경기를 중지시키면서 끝이 난다. 이후 콜로세오는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 재료로 쓰이기 위해 외벽 절반 이상이 뜯기게 되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2,000년 전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콜로세움은 로마에 세워진 전무후무하고 거대한 상설 석조 원형극장으로 자그마치 500년 동안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의 바깥벽 높이는 거의 50미터이고, 타원형 평면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188미터와 156미터, 둘레가 527미터이다. 아레나(경기장)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약 86미터와 54미터(280×168로마식 피트)로 장축 대 단축의 비율이 당시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던 5:3이었다. 또 콜로세움의 기초의 두께는 하중이 큰 바깥벽 쪽은 12~13미터, 하중이 작은 안쪽 관객석은 4미터가 되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가라앉거나 금 간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치와 아치 사이에 사용된 기둥의 양식을 보면 1층은 투스카니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토스식이다.
콜로세움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웬만한 도시의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는데도, 관중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15분이 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은 맹수 사냥이나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를 깔았는데,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arena)는 ‘원형경기장’이란 뜻으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열리던 여러 행사 가운데 최고의 인기 종목은 단연 검투사 시합이었다.
콜로세움에서는 물을 채워서 모의 해전까지 가능했다고 하며 말이 모의 해전이지 노예들을 배에 태워서 한편이 모두 죽을때 까지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구경거리였으며 해전에 임하는 노예들은 행사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목숨걸고 싸웠을 것이다.
500여년간 모의 해전 및 검투사 대회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약 1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행사는 서기 52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콜로세움은 거의 450년 동안 사용되었던 셈이다. 굳건하게 서 있던 콜로세움은 중세 때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무너져내린 돌들은 건축자재로 다른 곳에 사용되었고,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는 이음쇠를 빼내기 위해 곳곳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콜로세움 근처에 보이는 조형물인데, '팔라티노 언덕(Palatino Hill)' 으로 올라가는 출입문이라고 한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의 이름인 콜로소(Colosso)에서 와전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Colossus', 즉 거대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217년 화재, 442년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는 성당 건물들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이 되어 파헤쳐지기도 했다.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콜로세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죽지 않았다고 한다.
콘탄티누스 개선문
이 웅장한 개선문은 로마의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로, 로마 황제들이 축하 행렬을 벌일 때 택했던 오래된 길인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서 있는 주요 유적이다. 이 개선문은 티투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더불어, 고전기 로마 시대부터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은 세 개의 로마 개선문에 속한다. 이는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라 알려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바로 외부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312)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서로마 제국의 단일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대전차 경기장(Circo Massimo)
지금은 비록 황량한 공터와 같지만 한때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로마의 상징이자 성역과 같은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있던 대전차 경기장이다. 특히 영화 〈벤허〉의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이곳에 있던 경기장은 4세기에 세워졌는데, 수용 인원만 25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는 4륜 마차 경기와 경마, 맹수와의 검투 시합 등이 열렸고, 기독교 수난 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터널을 지나 오르면 포로 로마노를 관람할수 있는 카피톨리오 언덕 뒷편이 나타난다
카피톨리노(캄피톨리오) 언덕 후면부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 전경
캄피돌리오(Campidoglio)는 로마의 일곱 언덕 카피톨리노(Capitolino)라고도 불린다. 이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으로,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었던 유피테르와 유노의 신전과 로마 시청이 위치해 있다.
캄피돌리오(Piazza del Campidoglio) 언덕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언덕이다. 언덕 위에 로마의 최고신인 제우스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시대 이 언덕에 신전을 짓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땅 속에서 해골이 나왔다. 신전을 짓기로 한 언덕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뼈가 발견됐다는 불길한 소문이 퍼져나가며 민심이 흉흉해 지자 로마의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이렇게 대처했다.
"세계의 머리가 될 언덕이다!"
이 말은 즉시 사람들 사이로 퍼지면서 민심은 완전히 달라졌고, 한순간에 불길한 언덕에서 성스러운 언덕이 되어버렸다.
에트루리아인이었던 왕은 에트루리아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빌려 이 해골의 주인을
"영웅 아울루스의 유골이야! 역시 이곳은 성스럽기 그지 없는 곳!"
그리하여 이 언덕은 '아울루스의 머리' 라는 뜻인 '카푸트 올리'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여러 변천과정을 거쳐 캄피돌리오가 되었고 로마가 서방세계를 제패하고 난 뒤, 로마의 중심이던 이 언덕은 곧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은 국회의사당을 가르켜 Capitol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캄피돌리오에서 온 말이다.
수도, 으뜸의, 최고의 등등의 뜻을 가진 Capital 역시 캄피톨리오에서 나온 말이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콜로세오에서 성스러운 길이라는 의미의 ‘Via Sacra’ 거리를 따라가면 포로 로마노를 만날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연결되어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는 여러 황제를 거쳐 오면서 발전했지만,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면서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여러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얼핏 보면 폐허와 같은 모습이지만 지금까지도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고, 예전의 번성했던 로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이며 계속 발굴이 되고 있는 곳으로 사법, 정치, 종교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로원, 로물루스 신전, 2개의 개선문 등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기둥이나 초석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원로원, 에트루리아 왕에게 대항한 로마 반역을 추모하기 위한 사원, 로마의 중심부로 쓰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외 많은 건물들의 잔해가 있다.
포로(Foro)라는 말은 ‘포럼(Forum)’, 즉 ‘아고라’와 같은 공공장소를 지칭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4세기 말에 서고트 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