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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3)의성 사촌리 천사(川沙)선생 종가 김순섭 여사 | ||||||||||
‘사촌마을 딸네는 묻지도 않고 데리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녀교육 잘하기로 영남에서 소문난 곳, 동서로 길게 땅콩모양처럼 생긴 의성군의 동북쪽에 사촌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1.2km가 넘는 숲과 왜가리들이 취재진들을 가장 먼저 반긴다. 숲이 시야에 나타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다.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인 안동 김씨부인이 친정집에 다니러왔다가 이 숲에서 서애 선생을 낳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사촌마을의 수많은 선비 가운데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의 종가를 찾았다. 천사선생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후산 이종수, 동암 유진원 선생과 함께 호문삼로(湖門三老)로 추앙받았던 분이다. 당시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유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다.
‘와해’(瓦海)라 불렸던 사촌마을은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를 계기로 1896년에 일어난 병신창의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가 됐다. 당시 종택 ‘초려’(草廬)와 정자인 ‘유자정’(孺子亭)도 사라졌지만 올해 유교문화권개발사업으로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그 건립예정지 앞 현대식 양옥집에 천사 김종덕 선생의 7대 종손인 김창회(75)씨와 종부 김순섭(74) 여사가 살고 있다.
##“종녀로 태어났지만 아무것도 몰랐어” 김순섭 종부는 1935년 음력 12월 21일,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오미리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의 한 가문에서 여덟 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진사가 됐고, 그 가운데 다섯 형제가 문과에 급제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김순섭 종부는 그 여덟 형제 가운데 막내인 설송 김숭조(雪松 金崇祖)의 12대 종녀다. 오미리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무렵에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대구부청에 들어가면서 조모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대구에 나가 살게 됐다. 그 덕에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종부를 많이 아끼던 삼촌도 세무서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시집오기 전 한국전쟁을 겪은 일 만큼은 종부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기억이다. 16세 무렵에 조모가 계신 오미리에 혼자 들어왔다가 불과 며칠 만에 전쟁을 겪었다.
여사는 “피란길에 ‘나는 조금 있다가 갈테니 이웃사람 따라 빨리가라’며 억지로 팔을 끌다시피해 나를 먼저 보내고 조모는 그 난리통에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안동 예안 고운 도령 날만 똑똑 기다리소” “친정에서는 별로 어려운거 없이 살았는데 시댁에 와서 고생했지. 살림살이 여유 없고, 식구 많고, 제사 많고, 손님도 잦았어.” 종부가 결혼했을 당시는 스물다섯, 시대적으로 상당히 늦은 편에 속하는 나이였다. 그때까지 부족한 것 모르고 어려운 것 없이 살다가 시집와서는 친정과 비교해 어려운 형편의 시댁 살림을 맡게 된 것이다.
결혼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재미있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스물세살 되던 해에 집안어른이 이 마을 종가댁에 비롯 살림이 어려워도 사람이 좋다며 중매했지만 결혼을 못한 채 신랑감이 군대를 갔어. 그래서 다른데 구혼하다가 누구 말마따나 그래 있으니까 새로 되더라” 스무세살에 결혼 말이 오갔는데 이듬해에 신랑감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결혼이 취소됐다가 다시 말이 나와 결혼하게 됐다는 말이다.
결혼식 이야기도 재미나다. 대구의 친정집 작은 마당에서 했는데, 신랑감이 결혼하기 위해 군대에서 휴가를 받아 나와서 결혼하고 5일 후 귀대를 했다고 한다. 남편이 군 복무중이기 때문에 신행도 혼자서만 왔다. “봄에 결혼하고 신행은 가을에 왔지. 남편은 군대 있고 휴가를 못 나오니까 부친하고 둘이서만 지프차 빌려 타고 왔어, 신행 오니까 막내시누이가 다섯살이었어. 그날 처음 봤는데 시댁 어른들이 노래하라고 하니까 옆에 와서는 ‘안동 예안 고운 도령 날만 똑똑 기다리소’라고 노래를 부르더라니까, 그러던 막내시누이가 스무살에 안동 무실에 전주 류씨가문으로 시집 갔지.”
자식분들 자랑 좀 해달라는 말에 종부는 “그런거는 자랑하는 게 아니다. 공부는 보통 했고 지금 현재 자리는 모두 고만고만하다. 딸이며 며느리들이 좋은 가문에 시집을 오고 갔다”라고 한다. 딸이 좋은 가문에 시집가고 며느리가 명망 있는 가문에서 들어왔다는 것이 그나마 소박한 자랑이다. 종부로 있으면서 접빈하고 제사 치르는 것이 보통 일이었을까? 접빈하는 음식 마련하랴 제수(祭需) 준비하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종부의 음식솜씨는 유명하다고 주변에서 귀뜀한다.
“음식솜씨 하나는 좋다지. 요즘은 힘이 없어 못하지만 술 담아 청주 떠서 제주도 하고 다식도 잘 만들고 접빈(接賓)한다고 내어놓은 국수는 손님마다 다 맛이 좋다고 했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가장이 유림에 출입하는 일이 많아 뒷바라지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종부의 옷 짓는 솜씨도 좋다. “바깥어른이 출입이 많으니까 사시사철 두루마기를 하는데 계절별로 모시하고 무명 두루마기도 하고 또 해마다 씻고 다리고 그런거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며 “평생을 그래 살았으니까, 해마다 계절마다 그랬으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그냥 하는거지”라 한다.
##“나는 말 할만한 것도 없고 어른한테 순종하고```” 종부는 대구에서 오래 살았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고 시집와서는 멀미가 더욱 심해져 바깥출입을 거의 못했다 한다. “2006년에 경주 있는 맏아들 집에 가서 설을 쇠는데, 내가 멀미가 심해서 버스도 못타고 기차도 못타는데 그때는 얼마나 좋던지 여기서 의성 나갈 때는 택시를 탔는데 머리가 뱅뱅 돌데. 그런데 또 기차 타니까 기분이 좋아 멀미도 안하고 비둘기호 타고 가는데 정거장이 몇 개나 되는지 다 헤아렸다. 내가 또 언제 그래 가보나 싶었거든.” 그저 집 안에서 어른이 시키는 대로 가장에게 순종하고 산 것에 만족하신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김순섭 종부와 대화를 마쳤다. 취재진들이 나서는 길에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던 종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사촌 가로숲을 지나 안동으로 돌아오면서 마치 내 고향 내 집에 왔다가 가는 것처럼 마음 한편이 훈훈해져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