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함께하는 책모임에서 어느 가족의 스웨덴 여행기를 읽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사는 한국 가족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옛날 만화 영화 '닐스의 여행'에서 닐스가 모험한 길을 따라 걸으며 쓴 여행기입니다.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
나승위, 파피에, 2015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의 신기한 여행》의 이야기를 씨줄로, 그리고 자신이 찾아간 도시 이야기를 날줄로 삼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행복국가인 스웨덴의 태곳적부터 오늘에 이르는
긴 역사와 풍성한 문화 이야기를 품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책이다.
- 교보문고 책 소개 가운데
여러 주제로 나눴는데
사회복지사이기에 여행 외에도 이렇게 그 나라 사람의 어울려 사는 모습에 관심이 갔습니다.
스웨덴 하면 떠오르는 '인민의 집'. 이를 처음 주장한 알빈 한손의 '인민의 집'에서,
그 당시 그 환대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강자' 뿐이었다는 것도 여행서를 읽으며 처음 알았습니다.
예전 스웨덴이 살기 어려웠던 시절, 자식들의 삶이 복지제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보모에게 의존되어 있던 때에는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더욱 각별했던 듯싶다.
이에 따라 자식들이 부모님께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한층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비와 의료비는 물론, 아동 수당까지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경비의 많은 부분을
국가가 지원하는 지금은 어떠한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예전보다는 소원해진 듯하다.
(...) 어떤 경우에는 부모에게 숙박비를 지불하기도 한다는데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에 스웨덴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자식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각자 하기 나름이다. 크게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면, 부모가 가난하다고 해서
못 배울 것도, 못할 것도 없으니 부모 탓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자식들이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난 텅 빈 농장에서 오직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빌며,
혹시라도 자신이 쓸쓸해한다는 사실을 자식들이 알고 걱정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가난한 시절의 헌신적인 스웨덴 할머니 모습이 가슴 저리는 이유는
아마도 자식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지금 우리나라 부모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127~129쪽
나이 많은 노인들도 이른바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평생 살아오던 집에서 살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버틴다고 한다.
스웨덴에 와서 처음 1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 바로 옆집에 91세 할머니가 사셨는데,
자택에서 살고 있는 '활동이 원활하지 못한 노년'을 스웨덴 정부가 어떻게 돌보는지 보게 되었다.
(...) 누군가 그랬다, 스웨덴은 자식들이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설령 자식이 있다고 해도
그 노인의 삶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자식이 있다면 어떤 주말이나 휴가 때에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누리실 거다.
그러나 그저 그 뿐이다.
(...) 스웨덴의 노인 정책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 이유는 노인 문제를 사회복지 정책이 논의되던 초창기부터 가족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스웨덴 신문에 한 노인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쓸쓸히 임종을 맞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들에게 비난이 돌아갔겠지만,
스웨덴에서는 비난의 화살이 요양원과 사회복지사에게 쏟아졌다. 직무 유기로 말이다.
그런데 노인 문제가 사회 문제로 다루어지면서 정책면에 있어서는 월등할지 모르겠지만
노인이 되면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노인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의 획일적인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사회의 보살핌을 받든 스스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든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듯하다.
242~244쪽
1941년 불임정책 관련법이 페르 알빈 한손 정부에 의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페르 알빈 한손이 누구인가?
스웨덴의 복지 이념을 담고 있는 '인민의 집'을 주창한 사람이 아닌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고 누구보다도 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그래서 스웨덴의 국부로 칭송받는 사람 아닌가? 놀랍게도 그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신장애나
심각한 유전적 질병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비사회적인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까지
강제불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비사회적(social)' 이란 단어는 상당히 모호해서
적용 대상이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강제불임정책은 1975년까지 시행되어 약 6만 3천여 명이 자의 또는 타의로
불임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알바 뮈르달은 이 정도의 불임수술 시행으로는 아름다운 국가 스웨덴을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전체 인구의 약 10%는 정신질활을 앓고 있으며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 초창기에 우생학연구소 건립에 찬사를 보냈던 일간지 <다겐스 뉴헤터>가 1977년 여름,
이번에는 수천 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폭로했다. '양질의 인간들'로 가득 찬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이기도 한 '자녀를 가질 권리'를 박탈하는
불임법이 스웨덴 의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스웨덴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 세계최초로 우생학연구소를 설립하고, 당파와 상관없이 모든 정당들이 이를 지지했으며
불임정책을 가차없이 실행할 수 있었던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었다는 사실에 섬뜩함이 느껴졌다.
272~273쪽
첫댓글 막스는 역사는 가끔 간계를 부린다고 합니다. 즉 전쟁을 통해서 인류를 후퇴시키는 짓을 하고 다시 합으로 또는 정으로 간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대학때). 그러한 측면에서 스웨덴은 역사의 간계를 직면하고 정으로 가려는 방향을 정했다고 보고 실습니다. 좋고 옳은 방향을 설정하는 행운이 스웨덴에게 있었을 까요?
지금의 스웨덴이 있기까지 여러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어떤 선택으로
사회를 발전시켜왔나봐요. 말씀처럼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합리적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스웨덴의 지금 모습이 부러운 건 사실이고 책을 통해 새롭게 안 건,
스웨덴 또한 불과 100년 전까지 무척 가난한 농업국가였고, 전쟁이나 투쟁, 이민 같은
아픈 역사들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이룬 특별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 역시 그렇게 이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단, 좋은 제도가 무얼까 생각하는 가운데
가족 사이를 가깝게 하고, 이웃 사이를 어울리게 하는 제도라는 것도 깊어지게 했어요.
'역사'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무언가 뜻한 바를 이루려고 전쟁을 벌인다니 끔찍합니다.
전쟁이 정치적 행위, 정치적 선택 가운데 하나라는 말도 떠올라요. 무섭습니다.
협력과 평화가 역사의 중심이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가 무서움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른바 저 같이 소심한 사람들,,,,,,,, 인간은 결과의 무서움을 알기때문에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무서움을 아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도 편한 한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