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두 개의 이름, 민채원과 민서라
신성한 매실 758
의외였다.
경험상 대다수 참고인은 형사를 피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직접 자신의 시간을 내주겠다고 했다.
최림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서서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담배 한 갑을 사곤 그녀가 말한 카페로 들어갔다.
과연 여자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시간에 맞추어 왔다.
최림은 계산대로 가서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재빨리 그녀 앞에 앉았다.
“채원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렇죠?”
여자는 아까의 표정이 아니었다.
조금 전 대화에서는 담담한 표정을 짓던 그녀였는데, 태도가 돌변했다.
최림은 민채원에 관하여 속속들이 알고 싶어, 여자에게 그간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으니 다행이네요.”
“민채원 씨와 친했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친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언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냥, 인간관계에서 상, 하 정도로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저는 아직도 언니를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최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언니는 많이 배웠고 똑똑했어요. 특히, 종교 분야에 꽤 해박했어요.”
대충은 짐작한 일이었다.
“어떤 종교에 특히 심취해있던가요?”
“그 뭐라고 하더라? 기독교 계통인데, 정통인 건 아니고 ….”
이쯤에서 최림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일종의 사이비 종교이지요. 천년왕국 이란 단어를 운운하지 않던가요?”
“네, 맞아요. 언니는 어떤 분을 도와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건설한다고 했어요.”
“거기다 지리산이죠?”
그러자 여자가 놀랐다.
“이미 다 아시고 있네요? 맞아요. 지리산 깊은 곳에서 그 왕국을 준비한다고.”
예상한 대로였다.
민채원은 전두태에 완전히 가스라이팅을 당한 게 맞았다.
“민채원 씨 주변에 남자가 있습니까?”
“네? 누구요.”
“누구든지요.”
최림은 은근히 전두태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찾아오는 분이 있었죠”
“네?”
“아마 언니의 남자 친구겠지요. 그런데 언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어요.”
“남자 친구? 그렇다면 혹 그 사람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가끔 퇴근 무렵에 언니를 만나러 왔거든요. 하긴 멀찌감치서 봐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어쨌든 예사롭지 않은 분이었어요.”
“예사롭지 않다?”
“네. 겉모습은 마치 시골 사람처럼 수수한데, 얼굴엔 광채가 났고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 같았어요.”
여자의 말에 최림은 웃었다.
“아니? 멀리서 봤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죠?”
“그러니까 그분이 신비하다는 거요.”
“신비하다?”
“네, 멀리서 저와 한번 눈이 마주쳤는데 제가 마치 죄인처럼 느껴지는 그런 기분? 레이저광선 같은 그분의 눈빛 때문에 내 안의 죄성(罪性)이 모두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최림은 그가 전두태임을 직감했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퍽 흘렀다.
여자를 통해 민채원의 세세하고 내밀한 정보를 파악했다.
하지만 여전히 최림은 그녀의 이름에 관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혹시 ‘민서라’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민서라? 아뇨.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즈음 여자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참, 언니에 관하여 더 알고 싶으면 여길 찾아가 보세요.”
“누구?”
“언니가 살았던 원룸을 알고 있으니 주인에게 물어보시든지요.”
여자는 메모지에 원룸 이름과 호수를 메모지에 적어 최림에게 건네주었다.
아마 직접 안내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최림은 오늘 이 정도의 얘기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여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최림은 곧바로 원룸에 찾아갔다.
원룸 건물은 다른 건물보다 높이가 낮아 대낮에도 햇빛이 들오지 않았다.
1층에 주인 가족이 살고 2, 3, 4층에 세입자가 사는 구조였다.
마침, 주인 영감이 있었다.
최림은 그에게 민채원에 관하여 물었다.
다행히 주인 영감은 좋은 사람이었다.
원룸 건물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몹시 추웠다.
그때 마침, 주인이 제안했다.
“형사 양반.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근처 따뜻한 대폿집에 가는 게 어떻겠소? 당최 여긴 추워서 말이요.”
아무리 출장 중이라도 지금은 근무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따뜻한 해장국과 술을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최림은 못 이기는 체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안내한 대폿집은 허름한 가게였지만,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는 낮임에도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놀랐소? 대낮부터 사람이 많아서?”
주인은 예상했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다 갈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오. 저기 메뉴판을 한번 보시오. 소주가 1,500원, 안주류는 제일 싼 게 2,000원, 많아 봐야 5,000원을 넘지 않소. ”
주인의 말에 최림은 고개를 돌려 손님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주인의 말대로 하나같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들뿐이었다.
막노동자부터 노인들, 백수, 중년의 등산객까지 모두 시대를 비켜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이 사람들보다 낫지 않습니까? 건물주시잖아요.”
최림의 말에 주인은 뭘 잘 모른다는 투로 웃음을 지었다.
“그야 형사님 생각이지요. 건물주도 건물주 나름입니다. 요새 너도나도 원룸을 신축 분양하는 바람에 빈방만 여러 곳이오.”
소주와 안주가 나왔다.
안주는 달랑 계란말이 하나였다.
슬쩍 메뉴판을 보니 가격은 이천 원이었다.
주인은 두 개의 맥주잔에 소주를 똑같이 따르더니 나태주에게 한 잔을 건넸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건배합시다. 그년을 위하여. 아니! 그년에게 꼬여 지금쯤 어디 있는지 행방도 모르는 우리 아들을 위해!”
“그년이라 하시면 민채원 씨를 말씀하시는가요?”
주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최림은 엉겁결에 그가 건네준 잔을 들어 건배했다.
“말씀을 들어보니 민채원 씨와 아드님이 어떤 형식으로든 엮였군요. 자, 어찌 된 사연인지 말씀해보시죠.”
최림은 몰래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들을수록 원룸 주인의 이야기는 과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그가 횡설수설하는 등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졌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면 이렇다.
주인이라는 호칭 대신 영감으로 하는 게 나을 듯하여 그리하였다.
젊을 때 고생하다가, 말년에 건물을 짓게 된 영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반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공부를 잘했다.
다만 몸이 약하고 성격이 내성적이었다.
그래도 아들은 공부는 물론 부모에게 워낙 효자였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대한 대로 J시의 모 국립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부터 아들은 고시를 준비하였는데 매번 아깝게 떨어졌다.
해서, 졸업 후에도 아들은 원룸 1층에 기거하며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민채원이 그의 원룸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이 년 전이였다.
영감은 그녀를 좋게 보아 2층 제일 좋은 방을 임대로 내어주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 두어 달 후에 아들은 행정고시 1차 시험을 봤다.
그런데 또 아깝게 떨어졌다.
다른 과목은 잘 봤는데 영어가 문제였다.
그래서 영감은 아들을 서울의 유명한 영어학원에 보내려 작정했다.
그런데 우연히 민채원이 길을 묻던 미국인과 대화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듣기에도 그녀의 영어 회화는 유창하였다.
그길로 그는 민채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곤 아들의 영어 과외를 부탁하였다.
물론 그 대가는 월세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으므로 그녀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의 방에서 처음으로 영어 과외를 받고 오던 아들은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후에 아들로부터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영어만 출중한 게 아니었다.
한국사에도 능통하여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영감은 그녀의 월세 면제에 이어 매달 웃돈을 주면서 사례했다.
무엇보다 아들이 공부뿐만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점점 좋아졌다.
아들은 그녀를 통해 점점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이에 영감은 아들이 시험만 합격하면 건물 일부를 그녀에게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좋았던 일은 여기까지였다.
일 년 후 아들이 행정고시를 봤는데,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험이 있기 전 아들은 모의고사를 통해 영어 성적이 월등히 올랐다.
게다가 다른 과목도 거의 만점 가까이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도 영감은 시험 당일에 아들이 컨디션 난조로 실수를 많이 해서 떨어진 모양이라 생각하고 내년을 기약했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아들 역시 내년에는 꼭 붙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농담까지 했다.
영감은 여전히 아들과 그녀를 신뢰하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곧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