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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견성(見性)입니까?”
황벽이 말했다.
“본성이 곧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 곧 본성이다. 본성을 가지고 다시 본성을 볼 수는 없다. 듣는 것이 곧 본성이니, 본성을 가지고 본성을 들을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본성이라는 견해를 만들어 본성을 듣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다른 법이 생기게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5)
불이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성을 보려면 내가 본성을 보려면 저기 본성이 있고 여기 내가 있어서, 내가 그 본성을 봐야 됩니다. 그러면서 둘로 나뉘는 거죠. 두 개가 아니라 하나, 하나이게 됐을 때는 ‘우리가 본다’ 혹은 여기서 보면 ‘듣는다’ 이러는데. ‘보는 것’ ‘듣는 것’ ‘보는 놈’ ‘듣는 놈’ ‘보는 자리’ ‘듣는 자리’ 그게 바로 본성이라는 것이지요.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이것 자체가 바로 본성이라는 거지요.
‘뭐를 가지고 보느냐’ 내가 보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본성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보이는 모든 대상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다 생겨나고 사라지거든요. 말의 ‘뜻’을 따라가면 좋은 말이 있고, 나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말을 많이 하면 나쁜 사람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 사람은 나쁜 사람, 나쁜 행동, 나쁜 말, 좋은 사람은 좋은 행동, 좋은 말을 해요.
그럼 그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 부처는 다르지 않거든요. 즉 말의 내용은 차별이 돼서 내용은 다른데, ‘말이 나오는 자리’ ‘말을 듣는 성품’ ‘말을 하는 것’ 이것은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듣고, 볼 때 듣고 보자마자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거구나’ ‘저거구나’ ‘좋다’ ‘나쁘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하는 것이고. 그 ‘첫 번째 자리’ 보자마자 보는 걸 해석하고 듣자마자 듣는 소리를 해석하는 건 중생심으로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봐서 알고, 들어서 아는 거, 이거는 의식입니다, 의식(意識). 인식(認識), 안식(眼識)이라고 하고 이식(耳識)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보자마자 알기 이전, 이건 알고 모르고 가 아니거든요. 벌써 알았다거나 몰랐다고 하면 벌써 그건 분별심으로 넘어간 거예요. 두 번째 자리로 떨어진 겁니다. 보자마자 아는, 이해로 넘어가기 ‘이전 자리’ ‘첫 번째 자리’ ‘듣는 자리’ 그래서 우리는 보고, 들을 때마다 매 순간 각각 다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물건을 보고, 다른 세상을 보고, 다른 우주를 보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다 분별의 눈으로 해석했으니까 다 다른 걸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더라도 부처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부처만이 확인된다. 그래서 ‘볼 때, 이것이 부처다’라고 얘기하면서 큰 스님들이 주장자를 쿵 쿵 쿵 치면서 이 ‘듣는 소리, 이것을 부처’라고 하고, 이 주장자를 보이면서 ‘이것이 부처다’라고 했는데.
뭐라고 얘기하냐면 (죽비로 설법대를 치며) 여기에서 ‘이 소리를 빼면, 부처다’ 여기에서 소리를 빼고 이렇게 탕 탕 탕 친다는 ‘이 모양을 빼면, 그것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보이는 모든 것에서 거기 분별되는 모양을 빼면 무엇이 남아 있느냐? 그래서 이것을 ‘바탕’ ‘배경’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기도 하지요. 뭔가 바탕이 있어야 그 위에, 그러니까 바다가 있어야 그 위에 파도가 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고,
듣고 하려면 그 내용을 따라가면 여러 가지로 차별되고 나뉠 수 있겠지만, ‘보는 바탕’ ‘배경’ 어떤 소리를 들으려면, 또 예를 들어 어떤 생각을 일으키려면 어디서 ‘그 생각이 나오는 자리’가 있어야지 생각이 나오는 거잖아요. 생각의 내용물은 뭐 하루에 육칠만 가지가 올라온다고 하니까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그 내용물을 따라가지 않고 그 생각 그 자체가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을 해석하지 않고 ‘그 생각이 일어난 자리’
‘생각이 돌아간 자리’ 그 자리에서 소리도 나왔고, 모든 대상이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보이는 모든 것들, 들리는 모든 것들, 내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들, 생멸법이라고 하는 우리가 ‘것들’이라고 하는 삼천대천세계 무엇, 무엇 ‘것들’ 이걸 이제 ‘제법(諸法)’ 혹은 ‘제행(諸行)’ 이렇게 하거든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러 듯이. 모든 것은 ‘무아’고 ‘무상하다’,라는 것은 ‘모든 것’ ‘모든 것들’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눈치챌 수 있고, 알아챌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들, ‘일체’라고 하잖아요.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마주하는데, 여기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일체’라고 합니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이러지요, 그러지요.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다 생멸법, 생사법이거든요. 생겨나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 내가 인지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뭔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다 생멸법이지요. 전부다 생멸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멸법이 아니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지금까지 분별하던 그런 방식으로는 알 수 없다는 소리에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유도하는 바가 뭐겠어요? ‘보는 것이 바로 본성이다’ ‘듣는 것이 바로 본성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가 바로 본성이다’라고 할 때 알려고 하는 의도는 있어야 하겠지만,
알려고 애쓰는 마음은 없어야 됩니다. 알려고 애쓰는 마음을 일으키면은 그 애쓰려는 의도가 일어나서 생각이 막 굴러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의도하는 바는 뭐겠습니까? 알 수 없는 걸 얘기하고 있는 거지요, 지금. 알 수 없는 걸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들어도 요건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전혀 없어요.(웃음) 어차피 모르는 얘기를 하는 거기 때문에. 어차피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딴 사람들은 다 알 텐데, 왜 난 모르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모르라고 하는 소리니까. ‘오직 모를 뿐’ 해서 꽉 막히라고 하는 소리라는 거지요. 꽉 막히는 게 정상입니다. 모르는 게 정상이지. ‘왜 난 모르지’ 이건 생각입니다. ‘조금 더 애를 쓰면 내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면, 이렇게 애를 쓰는 건 다 분별이에요, ‘의도’ 머리가 돌아가잖아요. 머리가 주관할 것 같잖아요, 알려고 애쓰면.
그래서 모든 법문은 이와 같이 알아들을 듯하지만 알 수 없는 얘기를 합니다. 알 수 없는 얘기를 통해서 분별이 막히게 하는 거지요. 분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래서 알 수 없는 걸 알았으면 하고 뭔가 마음속에 마음은 있는데, 그걸 뭐 알 수도 없고, 방법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꽉 막히는 거지요. 의식이 꽉 막히는 것. 분별이 꽉 막히는 것.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는 이 분별인데,
세상을 살아가는 이 ‘도구’ ‘분별’ 이것을 막히게 하는 것. 그런다고 해서 하루 종일 막힐 필요는 없어요. 법을 들을 때만 막히고, 밖에 나가서는 계속 다 분별하고 살아야지요. 일상사는 일상사대로 살되 법에 대해서 그러니까 일상생활하다가도 ‘아! 뭐지’ 이런 그냥 막막한 갈증? 답답함? 그래서 갈증이라고 할까요? 뭔가 ‘답답함’ ‘막막함’ ‘모름’ 그게 화두입니다. 그게 수행이고. 그게 마음공부에요. 그래서 ‘이 뭐고’ ‘이 뭐고’가 진짜 ‘이 뭐고’가 아니고,
‘이 뭐고’ 이러면 ‘이 뭐고’ ‘이 뭐고’ 계속하면 그건 죽은 화두라잖아요. ‘이 뭐고’ ‘이 뭐고’ 계속하면 ‘이 뭐고’의 답을 내야 되니까. 이 뭐지? 뭐지? 해서 머리로 막 굴리려고 답을 찾으려니까. 그래서 숭산 스님이 살아있는 세계 삼대 생불로 꼽혀요. 달라이 라마 스님은 달라이 라마라는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값이 있으실 것이고. 틱낫한 스님은 초기불교 위빠사나를 기반으로 하시는데, 이 숭상 스님은 선(禪)을 기반으로 하는 스승님이다 보니까,
제가 예전에 미국에 갔을 때도 보면 달라이 라마, 틱낫한 스님보다 오히려 그때 하버드에서 교수님들 이렇게 식사하고 이럴 때 얘기 들어보니까, 아주 그 상류층에 이런 분들은 숭산 스님이 오실 때 난리가 난답니다. 서로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고. 그런데 말 그대로 선기(禪氣)가 가득한 이런 법문을 해주는, 그냥 다른 분들은 평범하게 이렇게 하시는데. 진짜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법이 있는 분’ 이러면 단연코 숭산 스님을 꼽았던 거 같아요.
숭산 스님께서는 그래서 ‘이 뭐고’ 화두를 하지 말고 ‘모를 뿐’이라는 화두를 해라. ‘모른다’ ‘알 수 있는 게 없다’ ‘법을 모르지 않느냐’ ‘삶도 모르고 법도 모르고’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는 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모를 뿐’이라는 말이 그냥 꽉 막히라는 소립니다. 나는 그냥 모르겠다. 그러니까 얼마나 간단해요. 어차피 여러분 모르는 얘기를 제가 하고 있는데, 여러분 모르고 있어요.(웃음)
성공적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따로 본성이라는 견해를 만들어서 그 본성을 봐야지, 들어야지, 이렇게 하면 또 다른 법이 생기는 거지요. 내가 또 다른 봐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음 장에 보면은,
“부처님의 사리는 본래 있는 것입니까? 쌓아서 얻은 공훈(功勳)입니까?”
황벽이 말했다.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공훈도 아니다.”
물었다.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공훈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여래의 사리라는 정제된 부처님의 뼈가 남아 있습니까?”
황벽이 꾸짖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대가 이런 견해를 내고도 선을 배우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허공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부처님의 마음은 허공과 같거늘, 무슨 뼈를 찾는다는 말이냐?”
물었다.
“지금 이렇게 사리를 보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황벽이 말했다.
“그대의 망상하는 마음으로 인해 사리를 보는 일도 있는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7)
사리를 우리가 분명히 보고 있는데 그건 사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망상하는 마음으로 인연해서 사리를 보고 있는 거지. 진짜 사리가 있어서 그 사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지요. 부처님 사리라는 뭔가에 걸린다면 그럼 상(相)에 집착하는 거잖아요. 상(相)에 빠지는 거잖아요. 그 사리를 가지고 이렇게 사리가 있으면 훌륭한 사람이고 없으면 훌륭하지 않다든지,
사리를 보면 뭔가 거룩하고 ‘이런 것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공덕이 뛰어난 사람만이 사리를 얻을 수 있겠구나’ 뭐 이런 생각, 이런 분별심, 그런 차별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이 선(禪)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사리와 모래밭에 있는 흙이 한 치 다를 것이 없지요. 그냥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거잖아요. 사리도 큰 쇠뭉치로 깨뜨리면 깨지죠.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좀 황벽 스님보다 더한 것 같아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 몸에 담석이 생겼다. 그것도 뭐 사리라고 하면 사리지요.(웃음) 결석이 생겼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 차별심을 깨뜨려야 된다는 얘기에요. 부처님은 금강경에 보면 32상 80종호 그것도 다 깨뜨리라고 하잖아요. 모든 부처라는 상(相), 전부다 상(相)입니다. 어떤 세속적인 상(相)이나 부처라는 상(相)이나 똑같은 하나의 상(相)일 뿐이에요.
아상이나 법상이나 똑같은 하나 상(相)일 뿐이고. 그래서 이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특정한 상에 빠져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어디, 그걸 또 가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인연 따라가게 되면 가고, 말게 되면 마는 건데. 굳이 성지를 찾아가야지만 내가 부처님을 더 빨리 친견하게 될 것 같고, 뭐 꼭 그렇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 부처님이 언제나 이렇게 살아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듣는 것으로써, 살아있는 생생한 ‘자불’을 이렇게 가지고서 딴 데에서 자꾸 찾으려 하니, 나한테 있는 부처를 자꾸 버리는 행위잖아요. 나한테 있는 부처를 자꾸 훼손하는 것이고, 부처와 자꾸 멀어지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을 찾으러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부처와 멀어지고 있는 거지요. 여기 있는 부처를 자꾸 버리고 다른 데 가서 부처를 찾으려고 애쓰니까.
그러니까 어디 성지순례를 가고 뭐 이렇게 다니는데,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아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그까지 가가 지고 거기 땅에 있는 흙 같은 거라도 아니면 돌이라도 하나 안 챙겨 왔느냐. 본인은 그걸 이렇게 조만한 작은 병에다가 바라나시(Varanasi) 물을 떠왔다고 그러면서, 바라나시(Varanasi)의 물은 성스러운 물인데 그거 하나 채취해가지고 오지 그랬느냐. 본인은 이 바라나시에 있는 물하고, 카일라스에 있는 흙하고,
이렇게 가지고 가서 이거를 탁 모셔놓고 기도를 하겠다는 둥, 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봤어요. 바라나시에 있는, 인도 사람들은 바라나시 강물에 목욕을 하면은 신성해지고, 업장이 다 소멸된다고 알고 있거든요, 옛날부터.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경전에 뭐라 하셨냐면, 바라나시에서 목욕한다고 업장이 소멸되면 바라나시 강가에 있는 물고기들은 다 해탈했겠다.(웃음) 이렇게 경전에 나와 있거든요.
실제 제가 바라나시에 가보니까 물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하고 온갖 똥물에다가 진짜 똥물에다가 사람들의 시체 태운 걸로 넘쳐나는 물이고 불에 덜 탄 시체들도 많아요. 그래가지고 심지어는 불에 그을리지도 않은 시체를 돈이 없으니까 그냥 버린 것도 있어요. 그때 제가 찍어놓은 사진에 보면 개가 뭘 물고 있어서 보니까, 시체를 그대로 그냥 포대 같은데 싸가지고 포대가 다 뜯어져서,
그런 물을 성스러운 물이라고 해서 거기서 목욕을 하고 그걸 바이러스 득실득실한 물을 굳이 가져올 필요가 있나. 성지라는 곳은 내려놓고 오는 곳이지. 그런데 오히려 그 사람들은 가서 뭔가를 쥐어가지고, 오히려 성지에까지 가서 무언가를 쥐어서 오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어떤 상을 가지는 것. 이런데 가서 하면 더 어떨 것이고 뭐 이런 것들. 그런 과도한 상을 가질 필요는 굳이 없지요.
그러나 인연 따라 뭐 어디 여행 갈 일이 있거나 이러면 같이 성지 한번 돌아보고, 이런 것도 또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사리가 어쩌고 뭐 이런 얘기를 자꾸 하게 되면 그야말로 한 대 얻어맞을 소리밖에 되지 못하지요. 그래서 부처님 마음이 허공과 같은데 무슨 뼛조각 같은 것을 찾느냐. 제가 예전에 전방 모 법당에 있을 때 그때 한창 뭐라지요? 우담바라, 우담바라 꽃이라 해가지고 TV에서 유명했었어요.
그런데 제 방 창문을 딱 여니까 TV에서 봤던 우담바라 꽃이 쫙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보여줬더니 막 진짜라고, 진짜라고 일부러 보라고 거기서 찍 눌러보고 했더니, 그러다가 괜히 우담바라 꽃을 이렇게 해가지고 화를 얻는 거 아니냐. 그거 하나 찍 눌렀다고 화를 얻고 그게 생겼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게 있고 그러겠습니까. 그냥 뭐랄까? 그거를 장사치로 써먹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속는 사람이 있으니까 써먹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혹은 그거를 장사치가 아니라 오히려 신행으로 써먹으려고 하면은 그거는 너무나 갔지요. 방편도 좋긴 좋은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그렇게 할 필요가 굳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뭐 과도하게 사람들 참배하고 있는 데 가가 지고 찍할 필요까지는 굳이 없겠지요. 왜냐면 잠자리 똥도 하나의 부처님이고, 온 우주법계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까. 티끌 하나도 다 부처님이니까. 아마 그런 차원에서 그걸 아주 성스럽게 느끼겠지요.
그것은 그것만 성스럽다,라는 게 아니라 ‘온 우주법계 성스럽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의미로 저렇게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사리를 보고 있는데 “이건 무엇입니까?” 했더니 “네가 망상하기 때문에 사리를 보는 거야.” 이게 진짜일까요? 진짜 사리를 보고 있잖아요. 저기 건봉사에 가도 사리가 진짜 있고. 어렵게, 어렵게 사리 한 번씩 친견해보셨지요. 영롱한 사리를 친견해 보셨을 겁니다.
저는 사리 친견을 여러 번 해 봤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데 그 사리보다 더 영롱한 것을 바닷가에 가서 많이 봤습니다.(웃음) 바닷가에 보면 아주 영롱하고 오색의 신기한 돌들이 많아요. 그때 제가 망상이 하나 일어난 게 ‘야 요런 돌 몇 개 잘 찾아다가 사리라고 하면은 아무도 모르겠다’ 그 생각이 들데요. 만약에 그것을 우리가 사리라고 해서 사리라고 해서 고귀하게 모시고, 돋보기 갖다 놓고 이렇게 삼배하고 나서,
아니면 백팔 배나 삼천 배하고 나서 친견하라고 하고, 이런 형식을 갖춰놓고 이거 아주 중요한 분위기로 장엄하게 만들어놓고, 그러고 탁 친견하게 하면 사람들이 마음 자세가 벌써 사리 친견하러 올 때부터 거룩한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와서 그걸 탁 보면서 어떤 사람은 눈물도 흘려요. 저는 그냥 돌 같아서 전혀 눈물이 안 나는데, 그걸 보고 막 감동을 해요. 거기다가 요즘 금세공하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납니까.
그런 걸 갖다 놓던 아니면 제가 말했던 돌 같은 거 예쁘장한 영롱한 돌을 몇 개 갖다 놓고는 사리라고 친견하라고, 그렇게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어 친견하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그걸 보고 당연히 놀라워하고 감동하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그 사리를 그런 여러 개 돌 사이에 갖다 놓고서 놔둔다면, 그냥 돌이라고 생각해서 휙 집어던질 수도 있겠지요. 그 사리는 내가 마음으로 사리라고 느꼈기 때문에 사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부처님이 2500전에 열반하셨는데, 그게 부처님 진신사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모르는데, 그 수많은 저는 부처님 진신사리 엄청 많이 봤거든요. 그 부처님 진신사리가 다 부처님 진신사리인지 아닌지도 사실 알 수 없을 것이고, 진신사리라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멸법인데. 허망한 생멸법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막 거룩하게, 이게 하나의 이벤트죠, 이벤트.
그냥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이벤트는 뭐 그냥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걸 그냥 방편으로 신심을 분발시킬 목적으로 그냥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그 이벤트에, 아까 황벽 스님처럼 부처도 아니고 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예법을 무시하지도 않으니까, 진신사리라고 하면 거룩하게 삼배하고 거룩하게 반배하고 가서 탁 친견하고 하! 하면서 돌아 나오면 그럼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이래 보고서 ‘야 저게 돌이랑 뭐가 달라’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까지. 거기 모셔오는 스님이 얼마나 힘 빠지시겠어요. 그냥 그건 또 그거대로 거룩하게 보고 ‘야! 이렇게 그래도 평생을 수행을 열심히 하고 또 이렇게 하신 분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또 있을 수도 있는가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아! 그분의 공부한 수행한 그 정신, 야, 정말 이 법 하나를 위해서 살아왔던 그런 삶의 정신?
그런 것들을 내가 귀하게 여길지언정 그걸 귀하게 여기라고 요런 하나의 이벤트를 하는 거지요. 그거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닌 거지요. 그거야 뭐 갖다 던져버리든 깨뜨려버리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불상을 목불을 떼 가지고 불 때어서 살았던 스님처럼. 그 망상하는 마음이 사리를 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본 그 사리가 진짜 사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막말로 그냥 말한다면. 그러고 또 다른 걸 보고도 사리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건 사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안 믿었으면 사리도 사리가 아닌 게 돼버려요. 사리를 훔쳐 가려는 도둑이 든다. 그러면 사리 아닌 거를 갖다 놓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걸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 그게 그렇게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 뭐 저 중국에 어디 갔더니만 법당마다 그 사연들이 다 있어요. 그게 이제 하나의 ‘야! 이 상술이 대단하구나’라고 느꼈는데. 부처님마다 다 뭔가 하나씩 있어요.
이 부처님한테 가면 건강하게 해주는 부처님(웃음) 요 밑에 내려가면 저 부처님은 뭐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는 부처님, 여기는 아들 낳게 해주는 부처님, 뭐 이런 식으로 다 그걸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그걸 만들어놓고 가이드가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 심리가 그까지 왔는데 내가 원하는 걸 또 거기 가서 굳이 안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가서 그냥 하는 거지요. 그런 거는 어찌 보면 진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이야기 만들듯이,
스토리를 하나 만드는 거지요. 그래서 요즘에 그냥 소설 하나 쓰듯이 그냥 하나의 그런 스토리를 만드는 그런 정도이지요. 그걸 가지고 진짜 그렇겠는가? 뭐 이렇게 순순한 신심 있는 분들은 그렇게 진짜 그렇다,라고 믿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여기서 내가 기도했으니까 난 반드시 나을 거야. 그럼 나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의 신심이 내 마음에서 굳게 믿었으니까. 내가 나를 믿은 거지요. 바깥에 있는 상(相)을 통해서.
그러니까 상(相)이 나를 구제해준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나를 구제했는데, 아직 근기가 그렇게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직 똥 치우는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겉에 있는 상호’ 그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깃거리를 만든 거지요.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은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니까 그런 걸 그 앞에서는 그대로 인연 따라 예법은 차리고,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남들은 다 갔다 왔는데 나는 다리가 아파가지고 못 갔더니 옆에 있는 친구가 “야 거기 갔더니, 야 건강 낫게 해주는 게 있던데, 너 거기 가지 그랬어.” 이러면 “어 그래 괜찮아.” 이러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거지요. 마음속에 상처 안 받고. “갈걸. 그때 갔을걸.” 이런 고민을 안 해도 된다는 거지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분별하느냐에 따라서 그 부처님이 거룩한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부처님이 되기도 하는 거지.
그 돌덩이에 무슨 영험(靈驗)이라는 게 있겠어요. 아니 막말로 돌덩이에 무슨 영험이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염원을 담고 하면 그 마음들이 모여서 그게 진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본질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어떤 상(相)에 대해서 무조건 다 깔아뭉개라,라는 의미로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요.
“어떻게 하면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밥을 먹지만 한 알의 밥도 씹은 적이 없고, 하루 종일 오고 가지만 한 뼘의 땅도 밟은 적이 없다. 이러할 때는 나와 남이라는 개념도 없다. 하루 종일 온갖 일을 행하면서도 어떤 경계에도 속아서 얽매이지 않는다면, 비로소 자재한 사람이라고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
진정 자재한 사람은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재한 사람. 계급에 떨어진다는 게 뭐냐면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이건 높고, 이건 낮고' '이건 또 부처님에게 가깝고, 이건 부처님에게 가깝지 않고' 이런 식으로 차별하는 것, 차별심을 내는 것. '나는 지금 이 정도 수준이다' '저 사람들은 이 정도 수준이야' 이렇게 자꾸 나누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 그걸 이제 계급에 떨어졌다고 해요. '나는 부처에게 가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한참 여기서 가고 있고, 저 사람은 저 만큼 가고 있구나' '나보다 계급이 높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그게 이제 계급에 떨어졌다. 분별에 떨어졌다,라는 소리지요. 그래서 이 마음공부의 목적은 계급에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지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법계 모든 이들이 기복적인 기도를 행하는 사람에서부터 깨달음을 얻은 부처에 이르기까지 한 치도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부처라는 사실을 아니까.
부처님과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동일한 부처라는 사실을 아니까. 그 누구도 함부로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지요. 내가 우월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우월감이라는 환상, 그런 것이 완전히 내려놓아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밥을 먹지만 한 알의 밥을 씹은 바도 없다. 하되 행한바 없이 행하기 때문에. 뭐 많이 먹었다, 적게 먹었다, 뭐 이런 차별도 없다,라는 것이지요.
또 하루 종일 오고 가지만 한 뼘의 땅도 밟은 적이 없다. 왔다가 갔다가 하더라도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다. 부처님 성지를 갔다 오면 내가 더 거룩해지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요. 공부를 더 많이 하면 내가 더 성스러워지거나 이런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 연쇄살인을 저질러서 감옥에 가 있는 연쇄살인범과 여러분은 심지어 부처님은 한 치 티끌도 차이가 나지 않는, 똑같은 부처입니다.
감옥에 있는 연쇄살인범도 이 소리를(죽비로 설법대를 치며) 들을 줄 알아요. ‘듣는 자’ ‘듣는 부처’를 ‘듣는 부처’와 함께 부처와 함께 먹고 자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그 어떤 계급도 없다. 그 어떤 차별도 없다. 부처가 꾸는 하나의 꿈이 있을 뿐. 허망한 꿈이라는 하나의 스토리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의 진실은, 진실은 ‘하나의 부처’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꿈속에서 백 리를 가더라도 한 발도 뗀 적이 없는 거지요. 꿈속에서 나쁜 놈을 만나가지고 천리 길을 도망갔어도 밤새도록 도망을 갔는데 꿈 깨고 나면 그냥 지금 이 자리입니다. 배가 고파서 꿈속에서 아무리 백 끼, 천 끼를 먹었어도, 꿈 깨고 나면 그냥 한 입도 먹은 바가 없어요. 다 하나이기 때문에. 불이법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먹은 것과 먹지 않은 것, 오고 가는 것, 이것이 다 차별이 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나와 남이라는 개념도 없지요. ‘하나의 꿈’이 있을 뿐이지. 하루 종일 온갖 일을 행하면서도 한 바가 없습니다. 어떤 경계에도 속아서 얽매이지 않겠지요, 당연히. 하되 한 바가 없으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자재한 사람이다.
순간순간 어떤 모습도 보지 말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
특정한 모양, 모습, 상(相)에 걸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과거, 현재, 미래를 분별하지 말라. 과거는 지나가지 않고, 현재는 머물지 않으며, 미래는 오지 않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거예요.
마음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아 태연히 집 안에 편히 앉아 지내며,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
마음을 내려놓고 바깥을 좇아서 이거 좋아서 좇아갔다 저거 좋아 좇아갔다, 여기 집착했다 저기 집착했다가, 이것을 추구했다 저것을 추구했다가, 막 왔다 갔다 이렇게 바깥을 향해 추구하며 떠다니는 이런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집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본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천 길, 만 길을 떠돌아다녀서도 그 사람은 집 안에 있는 겁니다.
바깥을 향해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집 안에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귀의’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 있는 사람. 그래서 그런 사람을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아 태연히 집 안에 편하니 앉아 지내는 사람이다. 몸이 집 안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몸은 다 움직이더라도 마음이 언제나 자기 ‘본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연 따라 그저 흘러가면서 얽매이지 않는다면 비로소 해탈이라고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
인연 따라 흘러갑니다, 해탈한 사람도. 인연 따라 흘러갑니다. 인연이라는 이 우주법계의 흐름, 인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인연 따라 살아가는 거예요. 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에게 응하고, 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에게 응하고. 이 일을 할 땐 이 일을 하고, 저 일을 할 땐 저 일을 하고. 좋은 일 나쁜 일 그냥 인연 따라 마주하는 대로 그냥 그 인연에 응해서 사는 것이지요.
인연 따라 그렇게 그저 흘러가면서, 그러나 어떤 좋은 거에도 얽매여 집착하지 않고. 어떤 나쁜 거에도 과도하게 밀쳐내려고 하거나 거부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저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비로소 ‘해탈’이라고 한다. ‘지금 이대로, 이대로 있는 것’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정진’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문중의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단지 3∼5명만이 깨닫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239)
이렇게 큰 스승이 계시던 이때조차 그랬던가 보지요. 아니면 그냥 평균을 얘기했을 수도 있고, 이때는 더 많이 깨달았을 거니까. 왜냐면 이 당시는 큰 스승 밑에 뭐 100명, 200명씩 깨달았다. 이런 얘기들이 나오니까. 그런데 일반적으로 천 명, 만 명 가운데 한 3명 뭐 이렇게 깨닫는다는 것이지요.
만약 정진하지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38,239)
그러니까 참 이게 노력하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정진하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안 하면 그냥 중생으로 남는 거니까. 그러니까 노력하라고 하지만 노력할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어떻게 노력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마음의 간절함을 가지고, 그러니까 이 법 있는 곳에 자꾸 귀 기울이고, 자꾸 마음이 그리로 가니까 마음 가는 곳으로 저절로 그냥 끌려가는 거지요, 끌려가는 거. 내 의도를 가지고 막 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끌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런 거지요. 우리는 공부하려고 막 과도하게 애를 써요. 뭐 이런 말 하면 여러분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아카데미를 가고 싶은 날도 있고, 가기 싫은 날도 있어요. 아니면 이제 이번 2학기 아카데미 신청을 받을 때 아카데미 신청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막 분별심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또 가고 싶은 날, 가기 싫은 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고민이 생겨요.
아니면 내가 법문을 들으러 갈까 말까 고민이 될 때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기존에 우리가 정진하는 세간의 방식에서는 ‘야 좋은 거면 무조건 가야지’ 가는 게 정답이지. 하고 무조건 애쓰라고 그래요. 수행이 그런 방식이잖아요. 무조건 수행을 하는 건 좋은 거, 안 하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죠. 앉아서 오래 앉아있는 건 좋은 거, 안 앉아있는 건 나쁜 거, 조금 앉아있는 건 덜 좋은 거, 딱 그렇잖아요.
절을 오래 하면 좋은 거, 조금 하면 나쁜 거. 염불 오래 하면 좋은 거 조금 하면 나쁜 거잖아요. 딱 그렇게 정해져 있잖아요. 그렇게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아카데미 등록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는 것만이 100% 정답인 거는 아닙니다. 즉 옆에 친구가 있는데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그럼 반드시 하라고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그래서 저는 신도님들이 “우리 아들, 남편을 포교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면.
그냥 책 하나 사서, 그분 근기에 좀 맞을 만한 책 하나 사서, 그냥 가볍게 줘라. “반드시 읽어 봐.” 이런 말도 거추장스럽게 하지 말고. 그냥 책상 위에나 하나 올려놓고 놔둬라, 그냥. 그럼 시절 인연이 될 때 언젠가 꺼내 본다. 안 꺼내 보면 ‘아직 인연이 안 됐다’ 생각하고 아니면 “한 번 읽어 봐죠.” 정도. 아니면 정 내가 좀 더 인위적인 노력을 하고 싶다 하면 “너 요즘 갖고 싶은 게 뭐가 있니?” “뭐 좀 사주세요.”
“야 그럼 그거 사줄 테니까, 이 책 반만 읽어 볼래.”(웃음) 아니면 “우리 절에 가서 법문 한 번만 들어볼까?” 뭐 요 정도는 애교스럽게, 본인도 좋고 나도 좋으니까. 뭐 요 정도의 과도하지 않은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과도하지 않은 정도는. 그런데 본인이 죽어도 싫다고 하면 안 데리고 오는 게 정답입니다. 와가지고 오히려 더 안 좋게 느낄 수도 있고, 마음에 불평불만이 있으면 좋게 안 들려요.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머리로는 공부해야 되는데, 지금은 너무 하기가 싫어요. 그럼 안 하고 놀면 됩니다. 그냥 쉬면 돼요. 참선을 해야 되겠는데 난 눕고 싶어. 그럼 누우면 되지요. 눕고 일어나서 참선해도 되고. 즉 제가 하는 말은 뭐냐 면요. 과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수행도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잘 가는 말에 채찍 정도는 해도 좋다,라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의 마음 냄 정도, 어느 정도의 노력, 그거는 ‘정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느 정도 노력해야지 과도하게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습관이 있어요. 예를 들어 평소에 맨 말 술 한잔하고,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고, 이런 습관이 있다. 그럼 그런 사람에게 “죽어도 오늘 당장 담배 끊어.” 이렇게 하는 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그 사람에게 그게 도움이 안 될 수 있어요. 남편이 술을 그렇게 좋아하고 평생의 낙이 술이다. 매일 술을 먹는다. 술을 끊는 게 좋은 건 맞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오늘부터 절대 술 안 주고 막 가둬가지고 술도 못 먹게 하고 이러면 그게 오히려 역효과이지, 오히려 술 먹어서 속 편한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거든요, 너무 반발심이 크고 이런 거보다는. 그것과 비슷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공부도 노력할 때 적당한 노력은 좋습니다. 너무 과도하지 않아서 내가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 즉 절에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고민될 때 어지간하면 가도록 노력은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가기 싫은 날 인상을 써 가면서까지 굳이 갈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때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늘 혼자서 이렇게 산엘 다니거나 뭐 가끔 여행을 가거나 할 때는 그냥 이렇게 법문을 좀 듣던지. 아니면 평소에는 늘 이렇게 법문을 듣거나 아니면 고요히 이걸 느끼고 누리고 이러면서 다녀요. 옛날에 제가 음악을 엄청 좋아했었습니다. 노래 듣는 게 제 어릴 때 낙이었을 정도로 음악을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제 음악을 안 들은 지가 꽤 오래됐는데. 가끔 이렇게 나오는 음악들 지나가다 들으면 또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언젠가 이렇게 여행을 갔는데, 아! 그때 내 마음속에서는 ‘공부를 해야지’ ‘수행을 해야지’ 뭔가 이런 마음들이 늘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야 이런 여행지까지 와서 정말 법문을 듣기가 싫더라고요. 공부하는 마음도 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제가 어딜 갔었지? 마음껏,
마음껏 이어폰을 사가지고 귀에다 꽂고, 그동안 내가 듣고 싶었던 음악을 마음껏 듣자. 하고 음악을 마음껏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그러고 나서 이제 이렇게 돌아오는데 너무 가볍고 개운하고 뭔가 정말 그 어떤 기도보다도 오히려 더 기도 같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거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취미활동이 있는데, 그게 불법과는 조금 어긋나는 취미활동이에요.
그럼 그걸 안 해야 된다,라고 믿어서 이걸 과도하게 억눌러요. 그런데 ‘내가 이걸 될 수 있으면 줄여야지’라고 발심을 하는 건 좋은데. ‘내가 술을 좀 줄여야지, 줄여야지’라고 발심을 하고 어느 정도 노력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조금씩 줄이는 거를 노력하는 건 좋은데. 무조건 끊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안 끊는 거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에 자꾸 쌓여있어서 뭔가 모르게 찜찜해요.
절에 다니면서는 찜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벼워야 돼요. 전에부터 맥주 한잔하는데 그게 죄의식을 느끼면서까지 술 한잔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기왕 술을 먹을 거면 기분 좋게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기왕 담배를 완전히 끊지 못했으면 좀 줄여가면서 하더라도 괜찮아요. 담배 피운다고 해서 부처님이 안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담배 피우는 성자들이 있지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깨달음을 얻으면 인스턴트식품을 안 먹을 거다’
그건 우리 생각이지요. 미국인이 깨달으면 맨 날 햄버거 먹고 살 겁니다. 스테이크 먹고살고. 그런 어떤 세세한 현실적인 어떤, 그걸 이제 하나의 계율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과도하게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지키는 것도 과도하게 부러질 듯이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좀 융통성이 있어야 돼요. 그걸 이제 중도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막 뭔가 그런 계율을 지켜야 되면 하나도 어기지 않아야 된다고 하니까,
본인 스스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몇 년 있다가 확 던져버리고선 그냥 계율을 막 어겨버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까지 과도성을 가지고 할 필요 없어요.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보살님은 옛날에 물 따로 밥 따로 뭐 어쩌고 그러는 게 있었나 봐요. 죽어도 뭐 먹을 때 물기나 이런 걸 일체 안 먹고. 다 같이 그냥 국이나 찌개를 먹는데, 다들 맛있다고 하는데 난 절대 안 먹어. 왜 안 먹느냐 했더니,
“아 이건 같이 먹으면 안 좋다.” “뭐가 안 좋다.” 절대적으로 그러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분은 2, 3년을 그렇게 하더니, 이게 오히려 더 힘들어 안 되겠다 그러면서 또다시 먹기 시작하고. 또 어떤 분은 무슨 요법이 좋다고 하면 그걸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너무 과도하게 그렇게 되면 부러져버려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발심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이제 변화가 찾아와요.
‘내가 술을 좀 끊어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끊는 거보다 끊는 게 더 좋겠지’ 왜냐면 ‘그거 먹는 시간이 내가 공부를 더 못하고 이렇게 되니까, 될 수 있으면 끊는 게 낫겠지’라는 마음만 내고 좀 줄이려는 약간의 노력만 하면 어느 순간이 되면 어느 인연이 되면 저절로, 저절로 이렇게 별 흥미가 없어지는 걸 느껴요, 이제. 평소에 내가 하던 취미생활 이런 거에서. 그래서 안 좋은 거를 과도하게 끊으려고 애쓰는 거 보다도 내가 관심 가지는 것.
법에 대한 것, 진리에 대한 것, 공부에 대한 것에서 이 발심이 강해지면 나머지는 관심이 좀 적어집니다. 관심이 적어져요. 그러고 또 반대로 여기저기 두루두루 관심이 많았던 것들을 조금씩만 이렇게 좀 줄이려고 애쓰면 그게 또 공부에 추진력이 있어지고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도 과도하게 애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고 내가 너무 힘들어요. 내가 너무 힘들면 길게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도님들 그러시잖아요. 불교 공부 한 3년 바짝 했다가 한 2, 3년 끊어버려요. 불교 공부를 끊습니다. 그러고 생활에서 막 살아요. 그러다 또 힘든 일이 생기면 또 이제 ‘다시 한번 슬슬 시작해볼까’ 그러면서 절에 또 열심히 다니면서 기도하고 신행하고 뭐 공부 또 열심히 하고. 또 할 때는 막, 막, 막 집착해서 하고, 또 끊을 땐 확 끊고. 그러면 안 되고요.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도하게 막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삶의 일부’가 되어서 늘 이 마음을 잊지 않고 하려면, 아무리 좋은 것도 과도하게 집착해서 뭐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걸 우리는 되게 별거 아니라고 느끼는데,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공부에 있어서. 그래서 심지어는 좀 안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 예를 들어 ‘나는 낚시하는 게 취미야’ 그러면 불교에서는 낚시하지 말라고 얘기해야 되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큰 스님들께 물어보면 ‘끊어라’ 이렇게 까진 안 해요. “차차 줄이다가 될 수 있으면 끊도록 노력해 봐라.”라고 그런 정도로 얘기를 하지. 아무리 안 좋은 것도 내가 이미 그렇게 습이 되어 있으면 그게 습을 떼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너무 과도하게 뭐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항상 마음을 그쪽으로 이렇게 하면서 하게 되면, 삶이 너무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괴롭지 않게, 힘들지 않게, 가볍게, 유희삼매를 즐기듯이. 이 마음공부도 이렇게 즐겁고 재밌게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수 (이어서 2부 44분 40초 녹취)
첫댓글 정리를 안 하려고 했는데.... ㅠㅠ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이것 자체가 바로 본성이라는 거지요.
허공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막말로 돌덩이에 무슨 영험이 있겠습니까.
연쇄살인범과 여러분은 심지어 부처님은 한 치 티끌도 차이가 나지 않는, 똑같은 부처입니다.
인연 따라 흘러갑니다.
그냥 책 하나 사서, 그분 근기에 좀 맞을 만한 책 하나 사서,
그냥. 그럼 시절 인연이 될 때 언젠가 꺼내 본다.
미국인이 깨달으면 맨 날 햄버거 먹고 살 겁니다. 스테이크 먹고살고.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습니다.
“차차 줄이다가 될 수 있으면 끊도록 노력해 봐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이날 아카데미에 못갔는데 법우님 덕분에 좋은 말씀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