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냐 소음이냐 / 캐나나. 서강 이정순
요즈음 온 세계에서는 갑질이 논란이 되고 있다.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거나 아니면 걸어가는 앞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음에 안 든다다거나 해서 행동이나 말로 폭력을 취하는 것을 갑질이라 일컽는다. 아니면 아랫사람인 약자에게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폭력을 갑질이라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 참지 못할 정도로 급한 성격 내지는 스트레스가 갑질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지하철 손님이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물을 SNS에 올린 걸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 영상물은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 안 장면이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환희의 송가’ 가 아코디언으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아름다운 소리였다. 유명 음악가가 연주하는 것을 녹음해서 지하철 안내 방송으로 내보내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곧 목에 바구니를 걸고 앞을 못 보는 장애인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등장하는 것이었다. 창가 의자에는 몇몇 손님이 졸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는 아예 자리를 편 듯 창에 기대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저 신사한테는 저 아코디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곡이 클라이맥스에 오를 즈음 자고 있던 신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야,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 ××야!” 며 그 아코디언을 빼앗아 바닥에 팽개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지하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 아코디언 악사의 환희의 송가가 눈물의 송가가 되었을 것이다. 무심결에 보고 있던 나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났다. 물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은 피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코디언 소리를 자장가라고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유럽 광장의 플래시 몹 영상물이 참 감동적이라고 해서 보고 있는데 왜 그 장면이 낡은 영상필름처럼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영상물은 유럽의 어느 대성당의 장엄한 교회 앞이다. 교회의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허름한 평상복차림의 한 거리의 악사가 자기 키만 한 더블베이스에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이다. 지나가던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가방에서 피리를 꺼내 그 앞에 가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불기 시작했다. 거리의 악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가 불고 있는 곡이 무슨 곡인지도 이해 못 하는 표정을 짓는다. 소녀는 한 소절 한 소절을 불어 주며 따라 하게 한다. 악사는 한 소절 한 소절 따라 한다. 그 부분에서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그 악사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재미있었다. 그는 금세 곡을 익혀 서툰 솜씨로나마 혼자서 연주한다. 음도 맞지 않고 서툰 연주지만, 지나가던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 더블베이스의 서툰 연주는 지하철 아코디언 연주와는 참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거리에서 피리를 불거나 아코디언을 켜는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거나 장애인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곡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려 동정을 받고자 즉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수단일 뿐이다. 베이스기타의 서투른 연주자 역시 차림새를 보아 아코디언 연주자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행인들이 장단을 맞추고 함께 호응하며 거대한 중창단이 되었다. 지하철 악사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아코디언 연주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벽한 연주의 악사는 비참하리만치 패배를 당했다. 듣기 싫으면 귀를 막으면 될 것이고, 돈을 주기 싫으면 돈을 안 주면 될 것 아닌가 말이다. 시주는 못 할망정 그 쪽박까지 깰 이유는 없었는데. 참 입맛이 씁쓸했다. 한 장면은 예술로, 한 장면은 소음으로 분류되는 시점이었다.
만약 그 아코디언 악사가 무대에 섰더라면,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 아코디언으로 ‘환희의 송가’를 완벽하게 연주했다고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관객으로부터 기립 박수는 받았던가. 무대에 따라 아름다움 음악도 소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서툰 음악도 듣는 이에 따라, 아니면 신분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 작곡가 베토벤도 역시 장애인이었다.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체 교향곡 9번을 작곡했다. 그 곡의 초연을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지휘를 하느냐고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베토벤은 자신이 느낀 대로 지휘를 했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기립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이 위대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아코디언 악사도 완벽한 연주를 했지만, 기립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시 그 '환희의 송가' 가사를 보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시어들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신을 찬양하는 기도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정열의 빛이 가득한 성스러운 신전으로
그대의 고요한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중략)
창조주를 믿겠는가, 온 세상이여
별들이지는 곳에 그가 있도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다. 곧 예술은 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고. 신 앞에 숙연해지고 예술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지하철의 그 신사도 이러한 가사나 그 곡을 알았다면 그러한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하다. 하지만 때로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보지 않았더라면, 듣지 않았더라면 하는 것들도 참 많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무대서나 감정을 드러내는 갑질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