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7> 서장 (書狀)
진소경에 대한 답서(3)
붉은 빛과 보라빛 누가 이름지었나?
“시끄러운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날 때마다 늘 스스로 점검하지만, 아직 공부에 힘쓰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이 피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공부를 마칠 곳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 점검한다면 도리어 멀어질 것입니다.
옛날 노화엄(老華嚴)은 말하기를, ‘불법(佛法)은 매일 매일 쓰는 곳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곳과 차 마시고 밥 먹는 곳과 이야기하고 묻는 곳과 행위하는 곳에 있으니, 마음을 들어 생각을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곳을 딱 마주치면,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점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조사(祖師)께서 말했습니다. ‘분별이 생기지 않으면 텅 비고 밝아서 저절로 비춘다.’ 또 방거사도 말했습니다. ‘매일 쓰는 일이 따로 없고 오직 나 스스로 마주하여 잘 어울린다. 한 물건도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곳곳에서 어긋남이 없다. 붉은빛과 보라빛을 누가 이름지었는가? 언덕과 산에는 티끌 한 점 없구나.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이 물 긷고 나무 나르는 것이다.’ 또 선성(先聖)이 말했습니다. ‘마음을 가지고 분별하고 헤아리기만 하면 자기 마음의 드러남이 모두 꿈이다.’
회피할 수 없을 때에 마음으로 헤아리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여여합니다. 또한 이해함이 날카롭다고도 하지 말고 무디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날카롭고 무딘 일에 조금도 상관치 말고, 고요하고 시끄러운 일에도 전혀 상관치 마십시오. 피할 수 없을 때에 딱 마주쳐서 홀연 의식(意識)의 포대를 벗겨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크게 웃을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털끝만큼이라도 공부를 통하여 증명하려고 한다면 마치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붙잡아 어루만지려 하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피로할 뿐입니다.”
일상의 삶이라는 것은 순간 순간 마주치는 경계의 연속이다. 이렇게 매 순간 피할 수 없이 경계들에 마주칠 때 그 경계를 혹은 이렇게 이해하고 혹은 저렇게 바라본다고 하면, 이것은 경계와 나 사이에 의도적인 마음이 개입되어 경계와 내가 마주하여 상대하는 것이다. 마주하여 상대하게 되면, 그 상대를 배척하든 끌어들이든 무시하든 어떤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하며, 의도적인 노력은 힘들고 피곤하며 두려운 일이다.
선에는 힘들고 피곤하고 두려운 일이 없다. 선을 알게 되면, 매 순간 순간 피할 수 없이 마주치는 경계가 모두 나의 반대편에 나를 상대하여 서지를 않는다. 즉 선에서는 상대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해석하거나 이해하거나 배척하거나 끌어들이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피곤한 행위를 할 일이 없다.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여서 경계와 내가 둘인가 하나인가를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점검하려는 노력이 생기는 것이 이미 대상과 나를 나누어 놓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둘인가 하나인가를 아무리 점검하려고 노력하여도 결국 둘일 뿐이다. 하나임이 분명하다면 점검이 필요 없으므로 점검하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피할 수 없이 경계를 마주치게 되면, 우선 힘써 경계를 상대하여 경계를 파악하려고 하지도 말고, 또 경계와 다른 나 자신 혹은 경계 위에서 확인되는 나 자신을 확인하려는 노력도 하지 말라. 어떤 경계가 나타나든 상대화시켜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놓아두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라.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그곳에서 홀연 벗어나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만약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대로가 여여(如如)하여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 하고 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상대화시키는 것은 모두 상을 취하는 것이다. 상을 취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일거수 일투족과 한 생각 한 느낌이 모두 여여한 법(法)일 따름이다. 있는 그대로가 여여한 법인데 다시 공부를 하여 법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망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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