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으로/때문에(because of)의 paticca은 연緣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죽음이 일어남(uppannā起에 연결)이,
paccaya은 원인(cause) ->태어남의 원인/조건에 늙음 죽음이(태어남의 원인으로 늙음 죽음이)
paccaya came to be distinguished from hetu as the genus of which hetu was the typical, chief species. i.e. paccaya became synonymous with our “relation,” understood in a causal sense, hetu meaning condition, causal antecedent and 23 other relations being added as special modes of causality. Later still these 24 were held reducible to 4 Tikp.1 f. (and foreword); Cpd. 197 Cp. Paṭṭhāna
■ Abl. paccayā as adv. by means of through, by reason of, caused by DN.i.45 (vedanā ˚taṇhā etc., see paṭicca-samuppāda); MN.i.261 (jātippaccayā jarāmaraṇaṃ);
<Paccaya(조건)>경[SN. vol.2. p.25]에는,
‘paṭicca-sam-uppāda(緣起)’와 ‘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已生法, 緣已生인 法)’라는 두 용어가 대비되어 설해집니다. 바로 그 <Paccaya(조건)>경에 기초하여 ..........
Yo paṭiccasamuppādaṁ passati so dhammaṁ passati, yo dhammaṁ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ṁ passatīti. Paṭiccasamuppannā kho pan' ime yadidaṁ
pañc' upādānakkhandhā.
"緣起를 보는 자(passati, 알다, 이해하다, 발견하다)는 法을 보고, 法을 보는 자는 緣起를 본다. 왜냐하면 이 五取蘊(=有身)은 모두 緣起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MN. vol.1. p.190 (중아함 권7, 象跡喩經) (대정장1, p.467a)]"
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Paccaya(조건)>경의 지적에 의하면, <‘연기(緣起)’를 본다>라는 것은 ‘12연기의 <역관(逆觀)>’을 의미하고, 그와 같이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가 생겨난다’라는 그러한 계(界)는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법정성(法定性, 법이 가지고 있는 정해진 성질)]이라고 하십니다. 心의 입장에서 본 ‘그 계(界)’라는 것이 바로 <‘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已生法, 緣已生인 法)’을 心의 관점과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界, 處, 연기’라는 3觀은 모두 法을 그와 같이 관찰하라는 말씀임] 당연히 ‘무명’도 ‘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已生法, 緣已生인 法)’입니다.
비구들이여, 緣已生의 法(paṭiccasamuppannā dhammā)은 무엇인가? 老死는 無常한 것(aniccā), 有爲의 것(saṅkhatā)이며 조건 지어진 法(khayadhammā), 쇠망하는 法(vayadhammā), 사라지는 法(virāgadhammā), 滅하는 法(nirodhadhammā)으로 緣已生(paṭiccasamuppannā)이다. 비구들이여, 生(~無明)은 無常한 것, 有爲의 것이며 조건 지어진 法, 쇠망하는 法, 사라지는 法, 滅하는 法으로 緣已生이다. [SN. vol.2. p.25]
하여간 ...... dhammā(法)라는 것은 그 어떠한 것[=계(界)든 처(處)든 간에]이든 간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緣已生의 法(paṭiccasamuppannā dhammā)이기 때문에 ......... ‘아위자’는 “편하게 <dhammā(法)=緣已生의 法(paṭiccasamuppannā dhammā)>으로 보시거나, 아니면 아예 ‘緣已生의 法(paṭiccasamuppannā dhammā)’의 준말이 ‘dhammā(法)’라고 여기십시오. .......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런 제자는 있는 그대로[=如實] 그 <‘paṭicca-sam-uppāda(緣起)’와 ‘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已生法, 緣已生인 法)’>을 올바른 반야로써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Paccaya(조건)’경의 마지막 문구]
‘paṭicca-sam-uppāda(緣起)’의 조건은 ......
<心意識과 dhammā(法)의 관계>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것 ...........입니다. 나아가 <心意識과 dhammā(法)의 관계>에서 추가적인 새로운 ‘緣已生의 法(paṭiccasamuppannā dhammā)’이 생겨난다는 것 .........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두고서 ‘idappaccayatā’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idappaccayatā(Sk. idam-pratyayatā)는 탈격(Abl.)의 표현이고요, 相依性으로 번역되는 술어입니다. 字義는 ‘이 緣에 의하는 것이라는 특성(이 緣 때문이라는 성질)’이지만, 抽象名詞를 만드는 接尾詞 ‘tā'가 생략된 形인 idappaccaya는 ‘이 緣 때문에’로 번역됩니다.
그 ‘idappaccayatā’에서 ‘ida-tā’부분을 떼어내고 ‘paccayā’만 남겨서 12연기의 각각의 지분을 연결하는 용어로 사용한다고 이해하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그와 같은 ‘緣(paccayā)’은 <因(hetu)이고, 原因(nidāna)이고, 集(samudaya)>과 유사어입니다.
「Vedana-paccayā taṇhā ti」iti kho pan' etaṃ vuttaṁ, tad Ānanda iminā 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edana-paccayā taṇhā. Vedana v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īdaṃ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ṇa-samphassajā vedanā jihv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ṇh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 ih' Ānanda es' 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taṇhāya, yadidaṃ vedanā."[DN. vol.2. p.58]
“아난다여, 「受를 緣한 愛다」고 말했다. 受를 緣한 愛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한다. 아난다여, 만약에 眼觸生受, 耳觸生受, 鼻觸生受, 舌觸生受, 身触生受, 意觸生受라고 하는 이러한 受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受가 滅하여 일체의 受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愛를 施設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러한 것(受 없이는 愛를 施設할 수 없는 것)’ 때문에 受야 말로 愛의 因(hetu)이고, 原因(nidāna)이고, 集(samudaya)이고, 緣(paccayā)이다.”
또한 ‘緣(paccayā)’은 아래의 밑 줄 친 부분과도 유사어입니다.
Evam eva kho bhikkhave imā tisso vedanā phassajā phassamūlakā phassanidānā phassapaccayā tajjaṃ phassaṃ paṭicca tajjā tajjā vedanā uppajjanti, tajjassa tajjassa phassassa nirodhā tajjā tajjā vedanā nirujajhantīti.[SN. vol.4. p.215].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이들 세 가지 受는 觸에서 생겨나고(~jā), 觸을 근본(~mūla, 뿌리)으로 하고, 觸을 原因(nidānā)으로 하고, 觸을 緣(paccayā)으로 하여서 각각의 觸을 기대어(paṭicca, 조건으로) 각각의 受가 생겨나는 것이며, 각각의 觸이 滅하면 각각의 受가 사라진다.
[다음카페] ‘연기(緣起)’와 ‘연이생법(緣已生法)’과의 관계를 설하는 경문 http://m.cafe.daum.net/pali-study/9akA/391?svc=cafeapp
첫댓글 paticca와 paccaya 비교.
조건으로/때문에(because of)의 paticca은 연緣 -> 태어남을 조건으로 발생한 늙음 죽음의 일어남[uppannā, 표상]起에 연결, 조건으로 발생하는 '있는 그대로'[일어남]의 표상에 연결, 표상의 연기!
paccaya은 원인(cause) ->태어남의 원인에 늙음 죽음이(태어남의 원인으로 늙음 죽음이 인과or상의성)12지처럼 연기된 법의 수관에 연결!
☜성스런 제자는 있는 그대로[=如實] 그 <‘paṭicca-sam-uppāda(緣起)’와 ‘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已生法, 緣已生인 法)’>을 올바른 반야로써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Paccayasutta)
부사 paṭicca조건으로 緣용례.
고.낙.비고비락 등 세 가지 느낌受는 접촉phass觸에서 생겨나고(~jā), 觸을 근본(~mūla, 뿌리)으로 하고, 觸을 原因(nidānā)으로 하고, 觸의 원인(paccayā)으로 하는 각각의 觸을 조건으로[緣하여, paṭicca] 각각의 느낌受가 생겨나는 것이며, 각각의 觸이 滅하면 각각의 受가 사라진다.
☞조건으로 paṭicca는 일어남[표상]uppajjanti 혹은 소멸[표상]nirodhā에 연결.
//paṭicca tajjā tajjā vedanā uppajjanti, tajjassa tajjassa phassassa nirodhā...//
조건으로 발생의 조건으로paṭicca는 일어남[표상] uppajjanti 혹은 소멸nirodhā에 연결.
paṭicca tajjā tajjā vedanā uppajjanti, tajjassa tajjassa phassassa nirodhā
idappaccayatā(Sk. idam-pratyayatā)는 ★탈격(Abl.)의 표현이고요, 相依性으로 번역되는 술어입니다. 字義는 ‘이 緣에 의하는 것이라는 특성(이 緣 때문이라는 성질)’이지만, 抽象名詞를 만드는 接尾詞 ‘tā'가 생략된 形인 idappaccaya는 ‘이 緣 때문에’로 번역됩니다.
그 ‘idappaccayatā’에서 ‘ida-tā’부분을 떼어내고 ★★‘paccayā’만 남겨서 ★★12연기의 각각의 지분을 연결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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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māt ih' Ānanda es' 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taṇhāya, yadidaṃ vedanā."[DN. vol.2. p.58]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러한 것 때문에 ★受야 말로 因(hetu)이고, 原因(nidāna)이고, 集(samudaya)이고, 緣(paccay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