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9. 서안 비림박물관, 섬서성역사박물관
서안의 찬란한 역사 두 박물관에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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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사진설명: 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이 비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동방 전파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781년 건립돼 1620년대 초 서안 부근에서 발견됐다. 비의 높이는 2.77m. |
주지하다시피 실크로드는 물건을 나르기만 한 도로는 아니었다. 사람이 왕래하고, 감정이 오갔던 정겹고 험난한 길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로부터는 동방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페르시아로부터는 이슬람교, 인도로부터는 불교가 한, 당 시대 중국에 전래됐다. 들어온 후 자연스레 각 종교의 사원이 장안에 세워졌다. 지금 이들 사원 건물은 어떻게 됐을까.
자은사, 흥교사 등 현존하는 사찰을 통해 불교 사원의 존재는 익히 알고 또 참배했기에 궁금하지 않았지만, 다른 종교의 사원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는지 몹시 알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신강성 곳곳에서 본 이슬람교 사원인 청진사(淸眞寺)가 서안에도 있는지 물었다. “서안의 중심인 종루의 서북방향에 청진사가 있다”는 안내인의 답이 돌아왔다. 함께 가 보았다. 과연 신강성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지만, 내부는 동일했다. 안에 아무 것도 없는 예배당이 있고, 예배당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신자도 보였다. 이슬람교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동방 기독교로 불려지는 네스토리우파 건물도 현존하는지 알고 싶었다. 안내인은 “기독교는 서안 시내 없다”고 간단히 답했다.
“당나라 시절엔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군요(기자).”
“당나라 시절 서안에 기독교가 있었다고요(안내인).”
“예! 비림박물관에 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기자).”
이미 일몰 시간이라 내일 비림박물관에 가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2002년 10월7일. 서안에 도착한 지 4일 째 되던 날 아침 일찍 비림박물관에 갔다. 우리가 묵은 서안황성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려 입장권을 사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뜰 곳곳에 비석이 서 있다. 모두들 국보급인데, 너무 많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귀중한 것도 간간이 있어야 제 대접 받지, 흔하면 다른 것과 똑같이 취급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 비 저 비 구경하며 서서히 안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희귀하고 중요한 비(碑)들이 진열돼 있었다. 비석이 숲처럼 많이 서 있다. 말 그대로 비림이었다. 마지막 전각 안에 들어가니 어제 안내인과 약속했던 그 비가 있었다.
‘대진의 경교가 중국에 유행했음을 기록한 비’ 즉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하 유행비). 중국에 동방 기독교가 전파됐음을 알려주는 비가 그곳에 있었다. 정통 기독교로부터 이단시 된(431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됐음을 증명해주는 이 비는 당 덕종 건중(建中) 2년, 서기 781년 1월7일 일요일 대진사(大秦寺)에 건립됐지만, 우여곡절 끝인 1620년대 초 섬서성 서안 부근에서 발견됐다.
경교 사제 경정(景淨. Adam)이 찬술하고, 여수암(呂秀巖)이라는 인물이 쓴 이 비를, 기독교에 정말 문외한이지만 역사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가 저술한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출판사), 정수일씨가 쓴 논문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문고’ - 숭실대 김문경 교수 정년퇴임 논총인 〈동아시아사 연구논총〉에 수록 - 등에 의하면 ‘대진’은 ‘페르시아’(혹은 예수가 태어난 유대지방)를 말하며, ‘경교’는 ‘커다란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뜻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전래 직후 파사교(波斯校), 즉 페르시아교 혹은 메시아교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다 당 현종 때 경교라는 명칭으로 확정됐다.
중국에 기독교 전파 기록한 비석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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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비림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인 삼존불. |
각설하고, 비의 높이는 2.77m, 폭은 약 1m, 두께는 0.3m 정도며, 비석 전체의 무게는 2t에 육박한다. 비석의 상단에는 ‘유행비’라는 제액(題額)이 해서체로 크게 새겨져 있고, 이수에는 백운(白雲)과 연꽃, 네스토리우스파 특유의 십자가가 조각돼 있다. 십자가만 없다면 불교나 도교 비석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만큼 전형적인 비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신에 새겨진 한문은 모두 32행 1,764자 이상에 달하며, 하단과 좌우측에 70명이 넘는 경교 사제들의 이름이 한문과 함께 시리아 문자로 적혀있다. 발견 직후 비석은 서안의 사찰 금승사(金勝寺)에 안치돼 있었으나, 1907년 ‘홈’이라는 덴마크인이 저지른 비석의 국외반출미수 사건 이후 비림박물관에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홈’ 등 서구인들이 이 비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가 먼 중국에까지 전파됐음을 알려주는 역사적, 서지적, 기념비적 가치 때문이다. 발견된 지 불과 몇 년 뒤인 1625년 라틴어 번역이 나올 정도로 서구인들은 이 비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비 자체도 가치가 있지만, “비문(碑文) 역시 당대의 일류 명필인 저수량이나 구양순의 글에 못지않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1907년 홈이 반출에 실패하자 서구인들은 원형과 동일한 석재와 크기로 모조품을 만들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기독교가 천년 전에 동방에 전파됐다는 사실을 통해 서구가 아시아를 정복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퍼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동방 전래를 기리기 위해 모조 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한국 금강산 장안사에, 또 하는 일본 고야산에 세웠다”는 영국 출신의 ‘고든’이라는 사람이 쓴 글에서도 서구인들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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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비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비를 탁본하고 있는 현지 관리인. |
기독교 관련 비이기 때문에 ‘유행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635년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비가 세워진 781년까지 어떻게 교세를 확장했는가” 보다, “그 시기에 불교는 어떤 상황이었고, 당시 당나라 사회상은 어떠했는지”를, 비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에 ‘유행비’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우리나라에도 전래된 흔적이 남아있다.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성모 마리아상’과 ‘십자가 장식’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정수일씨가 완역한 비문 내용에 따르면 당시 경교는 불교 등 다른 종교의 용어를 차용해 자신의 교리를 일반인에 설명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설명해야 했기에, 불교나 도교의 용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방식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그리 발전하지 못했고, 9세기 중반 이후 ‘황소의 난(875~880)’ 등을 거치며 경교는 소리, 소문 없이 중국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비신(碑身)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차가운 느낌과 함께 ‘역사의 흔적’이 전해오는 듯 했다. 몇 바퀴 돌며 몇 번이나 보았다. 다른 비도 보아야 하기에, 자리를 옮겼다. 비림박물관 이 곳 저 곳을 살핀 후 섬서성역사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안이 속한 성(省)이 바로 섬서성. 박물관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서안 일대가 수 천 년 동안 중국을 대표해 그런지, 박물관 진열실엔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하, 은, 주 시대의 청동기, 진시황 시대의 유물, 전한시대의 보검(寶劍), 오호십육국 시대의 불상 등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이현묘의 신라사절도’였다.
측천무후의 아들이었지만, 너무나 총명해 측천무후에게 죽임을 당한 이현. 그 이현의 무덤 입구에 그려져 있었던 사절도 진품이 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이현 묘(墓) 입구에서 본 것은 모사품이었던 것. 보존, 관리상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이현 무덤의 신라사절도 진품, 섬서성박물관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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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성역사박물관> |
사진설명: 서안이 속한 섬서성 일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가득 진열돼 있다. |
박물관을 나오니 어느 덧 해는 저물고 있었다. 뜰에 있는 의자에 앉아 서안과 불교, 영웅들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서안을 무대로 자웅을 겨룬 무수한 영웅들, 서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 가 있을까. 화려한 ‘차이나 드림’의 서막을 열었지만 꽃을 보지 못한 진시황, 초패왕 항우, 한 고조 유방, 당 태종 이세민,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 귀비 양옥환 등등. ‘영웅들의 빛과 그늘’에 가린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 주던 불교. 그들은 지금 어디 가 있을까.
화려했던 장안(서안)도 755년에 일어난 ‘안록산의 난’, 875년에 발생한 ‘황소의 난’ 등을 거치며 쇠퇴하고 말았다. 실크로드 역시 당나라의 쇠퇴와 함께 점점 닫혀졌다. 성당(盛唐)을 대표하는 시선(詩仙) 이백은 안록산의 난이 있은 뒤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성(詩聖) 두보는 함락된 장안을 탈출했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1년 뒤 사천(四川)으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티베트, 위구르 등 여러 부족이 차츰 실크로드에 있어서의 당의 주도권을 가로채기 시작했고, 서방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계는 해로로 동방과의 연결점을 찾았다. 육상 통로가 서서히 닫히고, 교류가 바다를 통해 이뤄지자, ‘실크로드의 꽃’ 장안도 시들고 말았다.
불교는 당 이후 송, 명, 청대에도 여전히 성세(盛勢)를 누렸지만, 철학, 사상 면에서의 발전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불교사상에 자극받고 신유학을 주창한 남송의 주희(朱憙. 1130~1200)가 나타나자 ‘사상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오호십육국 시대를 겪으며 중국 대륙 남북을 석권했던 불교사상은 남송 시절 있었던 사상적 타격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섬서성역사박물관에 앉아 그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답이 얼른 떠오르지는 않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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