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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한계 -로버트 버튼- 「예일 대학교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의대를 졸업했다. 33세에 UCSF 마운트 지은 병원에서 신경학부문장으로 임명되었고. 뒤이어 신경과학과 부과장이 되었다. 가장 유물론적인 신경과학과 가장 허구적인 소설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저자이기도 한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인정받은 세 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소살리토에 살고 있다.」 [서문]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얼핏 이 질문은 어리석게 들릴것이다. 당신은 증거를 살펴보고, 찬반 양측의 득실을 저울질하고, 그런 다음 결정을 내린다. 증거가 충분히 강력하다면, 다른 답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 결과로 얻은 확신은 의식적이고 신중한 일련의 추론에 의해 도출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유일한 결론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확신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고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도 아니다. 확신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유사한 현상들은 마치 사랑이나 분노처럼, 이성과 무관한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뇌가 어떻게 앎이라는 불수의적인(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감각을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수많은 유전적 요인에서부터 신체감각의 착각에 이르기 까지 주변 모든 것들이 이 안다는 느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그것들을 보고나면 이 안다는 느낌이 결코 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헤어날 수 없는 수많은 딜레마의 중심에 바로 이 안다는 느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안다는 느낌] 1930년대에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의 무법자 동네 한 곳에서 약국을 하셨다. 아버지는 금전등록기 뒤쪽 아래에 작은 권총을 숨겨 두고 계셨다. 어느 날 밤 , 한 남자가 접근해서 칼을 뽑아들고, 등록기 안에 있는 돈을 몽땅 내 놓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카운터 아래로 손을 뻗어 권총을 그러쥐고 강도를 겨누셨다. “내려놔,”강도는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너는 날 쏠 생각이 없지만, 난 마음만 먹으면 널 죽일 수 있어.” 잠깐 동안 할리우드 영화의 대치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총을 내려놓고, 등록기를 비워서 돈을 건네셨다. “하시려는 예기가 뭡니까? 변호사가 물었다.”부친께서는 그놈을 쐈어야 했어요. “ “그날 분명한 건” 내가 말했다. “그 순간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내가 뭘 해야 될지 언제나 알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물론 당신은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확실히, 저를 위협하는 놈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쏠 거예요.” “전혀 주저 없어요?” “전혀요, 저는 자신을 알아요, 제가 뭘 할지는 제가 안다고요.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것도 없어요.” 가장 흔히 인식되는 안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간혹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당장 떠오르지는 않지만 답을 알고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이 느낌을 혀끝에 맴도는 감각tip-of-the-tongue sensation'이라 한다. 잊어버린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찾아 머릿속의 서류철을 뒤지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알긴 아는데,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이 예에서 당신은 이 안다는 느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알고 있음을 자각한다. 안다는 느낌 대부분은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보통 그 느낌들을 사랑이나 행복감 같은 자연발생적 감정이나 기분으로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고(일련의 추론을 구성하는 요소들)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2+2의 계산법을 배운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4가 맞는 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 우리는 우리 마음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답이 맞음을 우리가 ‘안다’고. 이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우리의 이해에는 두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2+2=4라는 지식, 그리고 이 이해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우리는 2+2=4라는 우리의 이해 자체가 맞음을 안다. [우리가 뭘 아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예전에 만족스럽던 인생의 목적과 의미의 느낌들이 더 이상 옳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하는 순간들에 대해, 역사의 경험은 우리에게 다르게 가르쳐왔다. 논리와 이성이 '설득력이 있는convincing' 경우는 드물다(여기서 ‘설득력이 있는’은 사라져버린 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느낌을 부활시키는‘과 동의어다). 대신 우리는 금욕주의자, 신비주의자, 영적 구도자들의 이미지를 불러낸다. 거친 고행자의 옷을 걸치고, 성 제롬처럼 걸어서 사막을 건너고, 동굴 속이나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거나, 수도원에서 고립과 침묵을 추구해 온 사람들을 말이다. 동양의 종교는 잃어버린 의미감sense of meaning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의 고요‘를 강조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답일까? 안다는 느낌의 부재를 치료하는 처방은 의식적인 노력과 생각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일까, 아니면 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일상적인 가르침들은 모두 기본적인 신경 생물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맹시blidsight라는 기묘한 현상을 생각해 보자. 맹시는 아마도 지식이 존재하긴 하는데 안다는 느낌이 없는 경우를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연구일 것이다. -눈에서 멀다고 마음에서 먼 것은 아니다- 뇌졸중으로 뇌의 후두피질, 즉 1차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부위만 선택적으로 망가진 환자가 있다. 그의 망막은 여전히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보내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각피질이 망막에서 보낸 정보를 등록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환자는 의식적으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제 그의 시야를 사분면으로 나누고 빛을 비췄다. 환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위치를 사분면에 상당히 정확하게 대응시켰다. 그 환자는 자신이 단지 추측을 하고 있다고 느끼며, 자신의 추측이 우연에 의한 것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먼저, 보이지 않는‘ 빛의 경로를 추적해 보자. 망막에서 출발하는 일부 시각 신경 섬유들은 후두엽에 있는 1차 시각피질로 곧장 진행한다. 하지만 다른 섬유들은 의식적인 ’보기‘를 맡고 있는 영역을 우회하여 대신에 피질 아래 뇌간위에 있는 영역으로 투사된다. 그런데 이 영역은 시각적 상을 만들지 않는다. 이 아래쪽 뇌 영역들은 주로 싸우거나 달아나기와 같은 자율적인 반사기능들에 관여한다. 빠르게 접근하거나 불쑥 드러나는 물체를 보면 몸은 눈이 위협을 살필 수 있는 위치로 고개를 돌린다. 즉각적인 반사적 행위에는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의식적 지각과 숙고에 비해 분명한 진화적 이점이 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 피질 아래 영역들은 시각적 상을 자각하지 않고도 위협을 본다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맹시는 환자의 피질이 장님이 됨으로써 나타나는 원시적이고 무의식적인 시각적 위치 확인 및 반응 체계이다. 빛의 위치에 대한 환자의 ‘의식되지 않는 앎’은 안다는 느낌을 촉발하지 않는다. 이 의식되지 않은 앎은 느낌을 발생시키는 더 고차원적인 피질 영역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환자는 자신이 빛을 본 적이 없다고 맹세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명 잠재의식에서 빛의 위치를 알고 있다. 섬광이 비치는 적절한 사분면을 선택할 때, 그에게는 그것이 맞는 답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이 뭘 아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맹시의 예에서, 지식과 이 지식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분리되는 것이 근본적인 결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망가진 연결은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힌다고 해서 회복되지 않는다. 문제가 우리의 통제권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임상적으로 증상이 뚜렷한 맹시는 대대 후두피질에 대한 혈액공급을 방해하는 뇌졸중에 의해 일어나는 드문 현상이지만, 안다는 느낌의 그릇된 표현은 날마다 일어난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간이 가면서 기억이 변한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인지 부조화- 1957년, 스탠포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 교수인 레온 페스팅거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 행동이 아는 자신과 일치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또 다른 의견들과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는 괴로운 정신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페스팅거와 그의 동료들은 지구가 홍수로 파괴될 것 이라고 믿는 어떤 종파를 묘사했다. 홍수가 일어나지 않자, 그 종파에 덜 심취한 신도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 종파를 위해 일하려고 가정과 직장을 포기하며 더 많은 것을 바쳤던 신도들은 십중팔구 증거를 재해석하고, 그동안 내내 자신들이 옳았지만 자신들의 신앙심 때문에 지구가 파괴되지 않은 것임을 보여주려 하였다. 패스팅거의 중대한 관찰사항은 우리가 어떤 믿음에 더 많이 헌신할수록, 설사 압도적으로 강력한 반대 증거를 대면한다 해도 그 믿음을 단념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의견을 버리는 대신, 그 의견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킬 새로운 태도나 믿음을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창조론을 심사숙고하는 지질학자- 시카코 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지질학 박사를 딴 다음, 하버드의 스티븐 제이 굴드 Steaven jay Gould 밑에서 연구했으며, 테네시 주 데이턴에 있는 브라이언 칼리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던 커트 와이즈kurt wise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갈등을 이렇게 적는다. “나는 진화론과 성서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성서가 사실이고 진화론이 틀렸을까, 아니면 진화론이 사실이라서 내가 성경을 던져버려야 하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화론을 포함해 하나님의 말씀에 맞서게 될 모든 것을 물리친 것은 그때 그 밤이었다. 그리하여 크나큰 슬픔 속에서, 나는 과학 안에서 내가 품었던 모든 꿈과 희망을 불속에 던져 넣었다……. 우주 안의 모든 증거가 창조론을 부정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인정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창조론자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코타르 증후군- 코타를 증후군이라는 병명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쥘 ㅋ코타르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1882년, 자기부정의 망상증세를 보이는 여러명의 환자들을 기술했다. 이 자기부정은 신체의 일부가 없어졌거나 썩어버렸다는 믿음에서부터 몸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정도까지 광범위했다. 이 증후군의 원인은 다양한 뇌 손상, 뇌졸증, 치매를 비롯한 심한 정신병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이 증후군의 가장 범상치 않은 요소는 자신이 죽었다는 환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어떠한 논리적 반대 결론도 제압해 버린다. 자신의 뛰는 심장이 느껴지는 것도 자신이 죽었다는 더 강력한 실재감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아니다. -맞는지도 모르지만 안 맞는다 우리는 종종 육감에 관해 이야기 한다. 지금은 신경장성 뇌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이 존재한다. 마치 어떤 형태의 사고는 실재로 위胃 주머니에서 기원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럴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은 내 자동차 좌석이 원래 상태를 벗어났음을 그냥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각의 기원이 무엇이 되었든, 주요한 특징은 그 바탕에 무언가가 맞거나 맞지 않는다는 감이나 느낌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신념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맹시 연구는 지식과 이 지식의 자각이 별개의 뇌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맹시에 반대되는 임상적 예들, 다시 말해 뇌 기능이 이상하거나 변질되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순간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성 테레사 : 어느 날 한 순간에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 어떻게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은혜를 받았다. 나는 사물을 그것의 고유한 형태로 지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고, 여전히 내 영혼에 생생한 감동을 주었다……. 그 광경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해서 이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제임스의 요약된 의견 : 개인적인 종교 체험은 신비적인 의식 상태에 뿌리와 중심을 갖고 있다……. 그 경험의 질은 직접 경험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전달할 수 없다. 이 기묘함 속에서, 신비 상태는 지성의 상태보다는 느낌의 상태에 더 가깝다……. 느낌의 상태와 그토록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신비 상태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의 상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산만한 지성으로는 측량되지 않는 진실의 깊은 곳을 통찰하는 상태다. 그것은 의미와 중요성으로 가득한 해명이자 계시들이며, 전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불명료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개 장래를 좌지우지하는 묘한 권위감이 실려 있다. 이는 종교 상태와 신비 상태를 앎의 감각과 대등하게 보는,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지식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뛰어난 관찰이다. 제임스의 묘사는 완벽하게 직선적이다. 신비 상태에서, 사람들은 지식처럼 느껴지지만 어떤 특정한 지식도 없이 일어나는 자생적인 정신적 감각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느껴지는 지식, 사고 없는 지식, 숙고도 없고 어떤 사고가 있었다는 의식적 자각조차도 없는 확신을 말이다. -신경신학- 제임스의 시절, 종교적 현현의 원인에 관한 추측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 진영은 심리적 원인, 즉 히스테리, 전환반응, 분열성 인격장애 등을, 다른 진영은 영적 원인을 내세우면서 종교적 현현이 더 높은 권능에서 직접 내리는 계시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최근의 신경생리학적 연구는 그러한 느낌들이 국지적인 뇌의 영역(변연계) 활성화(자생적인 것이건 직접 자극한 결과이건)로부터 곧바로 일어난다고 암시한다. 당신이 토론토의 심리학자 마이클 피싱어Michael Persinger의 연구를 인정한다면, 외부에서 뇌를 자극하여 같은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지원자들은 자기磁氣코일의 격자가 장착된 천으로 된 수영모를 쓴다. 자석을 사용하여 국한된 뇌의 영역을 자극하면서, 피싱어는 ‘현존의 감각’ ‘또 다른 자기’ ‘우주와의 합일(환자의 실제 묘사들)’의 느낌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종종 예수의 존재를 묘사하고, 이슬람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무함마드의 존재를 묘사하곤 했다. 어떠한 특정한 관념이나 믿음과 결부된 것은 아니지만, 경외, 기쁨, 그리고 일반적으로 조화와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 심오한 감정들도 자주 언급된다. [정신 생태의 분류] [신경망] 인간의 뇌에서, (하나의 세포에서)전형적인 뉴런은 대략 1만 개의 다른 뉴런들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모듈성과 창발] -창발- 창발의 고전적인 예는 흰개미들이 보잘것없는 뇌를 가지고 7미터도 도 되는 높이의 거대한 탑을 쌓을 수 있는 원리다. 탑을 어떻게 또는 왜 쌓는가에 대한 단서를 갖고 있는 흰개미는 한 마리도 없다. 흰개미의 뇌는 그런 정보를 담을 정도로 크지 않다, 물론 흰개미 공학자나 건축가, 비평가 따위는 없다. 모든 흰개미들이 청사진도 없이, 또는 흰개미 탑에 대한 관념조차도 없이 일하는 저급한 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은 세워진다. 어떤 식으로든 저급한 능력들의 상호작용이 고급한 활동을 낳는다. 같은 과정이 인간의 뇌에도 적용된다. 각각의 뉴런은 흰개미와 같다. 뉴런은 완전한 기억을 담을 수도 없고, 지적인 논의를 할 수도 없다. 뉴런들을 감독하는 슈퍼뉴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 뉴런 안에 기본 계획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각 뉴런의 DNA는 한 세포가 어떻게 작동하고 다른 세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일반적인 지침을 줄 뿐, 논리나 이성, 또는 시를 위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포들의 덩어리에서 셰익스피어와 뉴턴이 나온다. 의식, 지향성, 목적, 의미 모두가 이 요소들을 담고 있지 않은 수십억 뉴런들 사이의 상호 연결에서 창발한다. 흰개미와 흰개미 탑의 관계는 단일 뉴런과 마음의 관계와 같다. 1차 모듈들이 벽돌과 회반죽을 제공하고, 2차 연합 영역들이 집을 지으며, 이 건물을 진정한 집이라 부르려면 더욱더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필요하다. -공감각- 라벨의 음악을 들었는데 그 곡의 한 부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에 따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음악을 들을 때면, 그 나무가 그냥 저절로 칠해집니다. 신경학자 라마찬드란은 공감각이 일어나는 방식에 관해 설득력있는 추측을 내놓는다. ‘아마도 돌연변이로 인해, 보통은 분리되어 있는 뇌 영역들 사이에 연결이 생길것이다. 아니면 돌연변이의 결과로 기존 연결을 쳐내는 능력에 결함이 생겨서 보통은 드문드문하게만 이어질 영역들이 단단히 이어진 채 남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공감각은 흔히 가게를 타고 흐르므로, 대부분의 신경학자들이 유전적 요소를 인정한다. -사유의 섬들- 사고라는 것이 단어와 기호의 조작이라면, 다름 아닌 우리 사고의 구성 요소들 역시 불수의적으로, 심지어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우리들 각자를 자각하고 사고하는 ‘사유의 섬들’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고는 언제 시작될까?] -타이밍, 그 착상은 닭인가, 갓 부화된 병아리인가- 당신은 어떤 착상에 대해 숙고한다. 찬찬히 관찰하고, 되새기고, 명상하고, 자면서도 생각한다. 당신은 점차 설득되어 자신에게 말한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고, 사고의 평가, 맞다는 느낌의 이 명백한 인과적 시간 순서가 바로 안다는 느낌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순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안다는 느낌에서 모든 실제적 가치를 없애버릴 것이다. 하지만 경험은 우리에게, 안다는 느낌과 의식적 ‘추론’의 시간 관계는 가변적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타이밍 순서에는 다음 예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각본 A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고도 동반하지 않고 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신비체험이나 뇌 자극 연구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이 느낌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은 모두 경험 이후에 일어난다. 현대의 흔한 예는 심오한 영적 ‘일체감sense oneness'으로, 이 순간이 신의 계시를 대변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각본 B에서는 일련의 무의식적 연상이 ‘맞다는 감’과 융합된다. 사고와 ‘맞다는 느낌feeling of correctness'은 하나의 단위로 의식에 도달하고 통찰이나 ’아하‘하는 순간으로서 함께 경험된다.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자신이 찾은 돌파구를 체계적인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닌 ’갑작스런 사고의 정지‘로, 혹은 ’그냥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고 묘사해왔다.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말하지만 실제적인 통찰은 천만뜻밖의 것이었다. 유명한 인도의 수학자은 일찍이, 자신은 수 이론에서 어떤 복잡한 결과가 참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이 오로지 나중에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는 것을 ’그냥 안다‘고 말했다. 어려운 수학적 정리가 앞서 어떤 심사숙고도 준비도 없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그럴법하지 않다. 하지만 끝을 보지 못한 이전의 반추나 반쯤 형성된 질문들, 또는 희미한 육감의 재작업에서 새로운 연상이 얼어난 결과로서 통찰이 일어난다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이 연상은 숨겨진 층 안에서 시작되고, 일단 맞다고 판단되면, 다음에는 의식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그 사고와 맞다는 느낌을 동시에 유레카eureka나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으로 경험한다. 각본 C에서는, 어떤 착상을 처음으로 맞닥뜨린다. 우리는 그것이 맞는지의 여부가 객관적으로 결정된 다음에야, 그 답이 맞음을 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초인종에 답해야 친구의 집을 찾은 줄 알고, 전화번호를 누른 다음에야 통화하려고 한 부서에 연결된다, 어떤 사고가 맞다는 느낌은 분명 의식적 평가의 시험 뒤에 온다. 안다는 느낌이 정당한 결론을 대변한다고 무조건 신뢰하려면, 이 세 각본들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각본은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타이밍이 전부다. 하지만 뇌 안에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지각을 재배열하는 기제들이 들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뇌가 우리에게 속임수를 써서, 사실은 사건 X가 사건 Y보다 앞서는데 사건 Y를 뒤따른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면? 앞뒤가 뒤바뀐 제안처럼 들리지만, 이 재배열이 일련의 사건들을 적절히 지각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또 다른 생리학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면? 일단 설명된 착시는 우리가 실제라 일컫는 것을 우리의 뇌가 어떻게 조립하는지에 대해 통찰하게 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당신은 최근에 언제, 제시되는 시간을 착시라고 보았는가? -주관적인 시간의 역방향 투사- [지각적 사고 : 그 이상의 설명] -일회 기억 대 의미 기억-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수십년전에 헐렸고, 고등확교는 관공서로 바뀌었다. 하지만 학교 이름들은 나의 뇌 안에 여전히 새겨져 있다. 신경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이라 부른다. 이에 반해, 일회기억episodic memory은 그 학교들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들을 가리킨다. 의미기억에는 진주만 공격의 날짜와 시간, 베이브 루스가 친 홈런의 숫자로부터 당신의 현주소와 주민등록번호까지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일회기억은 먼저 이것이 일어났고, 다음에 저것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한데 엮인 특정한 일화들의 기억을 가리킨다. -목격의 정확성- 형제나 자매와 옛날을 추억하다보면, 십중팔구 당신은 어린 시절에 함께 겪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의 설명이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회기억 회상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얼추 우리의 기억에 해당한다는 믿음을 고수한다. 때때로 세부 사항들이 약간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어떤 기억의 요체를 의심하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적어도 과거의 기억들이 기본적인 진실을 반영한다는 관념에 의지한다.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왜 말했는지에 관해서도 그토록 쉽게 햇갈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기억들을 정확하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사고의 쾌감] 포커게임을 할 때 이성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인 사람에게 착 붙어서 그의 잠재의식에 거짓말 탐지기를 연결하면, 소리 없는 애원이 들릴 것이다. 오, 포커의 신이시여, 저에게 에이스를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투자를 들먹이지만, 자기 주식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짜릿함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식 가치가 포물선을 그리는데도, 분석가들 대부분은 역사의 교훈을 팽개치고 걷잡을 수 없는 시장의 초 단위 중독을 택했다. 우리 모두 필시 그것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자신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쾌감 원리- 실험용 생쥐의 뇌에 있는 쾌감 중추에 전극을 꽂으면 , 쥐들은 먹이도 물도 팽개치고 쾌감을 일으키는 그 전극을 자극하는 막대를 쓰러질때까지 계속해서 누를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은 미세전극 이식뿐만 아니라 뇌 영상과 상세한 해부학 연구를 이용해서, 쾌감 - 보상 체계, 정서와 감정, 아편계 펩타이트(엔도르핀)를 책임지고 있는 뇌의 영역들 사이에 광범위한 연결망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뇌의 보상회로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은 중뇌변연관련 도파민계mesolimbic dopamine system로, 뇌간 상 부(복측피개영역)에서 시작되는 신경세포들의 집합이다.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관련되겠지만 , 이 보상 회로를 활성화하는 데에는 도파민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체계는 변연계 및 안와전두피질의 일부와 중격의지핵nucleus accumbens,즉 중독 행동과 관련된 것으로 널리 생각되는 뇌 바닥의 한 영역을 포함해, 감정과 인지를 통합하는 영역들로 연장된다. 뇌 영상 연구에서 우리는 보상계가 자연적으로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모습(예를 들어 여러 묶음의 뉴런들이 쾌감을 주는 맛, 냄새, 촉감, 음악에 반응하여 확실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정신약리학적 재주가 늘어가는 속에서, 뇌를 속이는 방법들을 묵인해왔다. 코카인, 암페타민, 알코올, 니코틴은 모두 유사한 영역들을 활성화한다. 도박에서 따면 안와전두피질은 순수한 네온사인으로 변한다. 이러한 희열이 없다면, 중독도 없을 것이다. 역으로 전두엽 절제술로 안와전두 영역을 제거하면동기도 없는 인간 좀비가 된다. 장기적인 목적이 사라진다. 마약, 알코홀, 도박, 담배 중독에 관한 연구는 행동이 보상되는 방식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어왔다. 최악의 코카인 중독이나 우표 수집이나 쓸데없는 공상에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리는, 행동이 지속되려면 뇌가 전해주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순간적 판단이나 통찰력 있는 숙고를 통해 황급히 나무에 오름으로써 돌진하는 사자를 피한다면, 당신에게는 사고의 가치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사자는 슬그머니 물러나 점심은 가젤로 결정한다. 당신은 무언가를 배웠다고 느끼며 나무에서 기어 내려온다. 그 안다는 느낌과 나무에 오르자는 결정은 함께 연결되어 ‘사자가 돌진하는 경우에 할 일’이라는 표지를 단 신경망이 된다. 그 경험이 강렬할수록, 그리고 자주 일어날수록, 그 결정과 그 결정이 맞다는 느낌 사이의 연결 고리는 점점 더 튼튼해진다. 낮설고 친숙하지 않다는 느낌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중에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경고일수가 있다. 인간은 진화해왔다. 사고는 더 복잡해졌고 더 추상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것은 분명한 답도, 명백한 인과적 결과도 없고, 쉽게 측정할 수도 없다. 사고의 가치에 대한 어떤 느낌도 없이 진행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당신의 아이가 숙제를 안 하면서, 라틴어나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을 아무 쓸모도 없다고 강하게 불평하는 것만 보아도 안다. “무슨 소용이야?”라는 말은 사고의 보상계 스위치가 꺼져 있다는(당신이 신경화학적 은유를 선호한다면, 활기를 잃었다는)말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할 능력은 없다. 계속해야만 할 뿐이다-
크로스워드 퍼즐의 예에서는, 피드백이 상당히 즉각적이다. 일단 몇 단어만 자리를 잡으면, 당신은 이후 선택의 여지를 재빨리 평가할 수 있다. 생리학적 보상계 대부분의 시간은 달력이 아니라 스톱워치로 측정된다. 싸우거나 달아나기의 경우, 달아나기로 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당신은 금방 안다. 코카인과 도박은 지금 보상한다. 한 달 뒤에 즐거움을 경험하겠다는 목표로 바흐를 듣거나, 당신을 내년에 웃게 하려고 농담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쾌감계에게는 기억이 없다. 시냅스 전달과 신경전달물질 대사의 시간 틀 안에서 측정되는 쾌감계에게는,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다. 보상이 계속되려면 뇌 자극이 계속 돼야 한다. 쥐들조차도 이것을 알아낸다. 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전적으로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정말로 불쾌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프로이트의 남근 숭배적 억측들 가운데 너무도 많은 것들이 섣부른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오늘날 적응을 바탕으로 한 설명에만 의존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단순한 행동일 것이다. 행동을 관찰해서 어떤 신체적 특징이 왜 진화했는가를 결정하다 보면, 우리는 인간의 맹장이 배고픈 외과 의사들을 위한 대출상환금 수입원으로서 발달했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가 진화해왔으며 적응력이 있다는 개념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그 적응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다. 오늘날 상식적으로 투명한 것이 내일은 농담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중대한 만약의 문제- 우리의 뇌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보상계는 필수적이었다. 광범위한 쾌감들이 단기 해법, 예를 들어 얽힌 생각의 이해, 수반되는 노력, 특정 수열의 아름다움, 문법의 우아함, 또는 그저 생각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다는 낭만적인 이상 등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의심과 절망의 긴 밤들을 헤치며 생각을 앞으로 끌어가게 할 만큼 강력하고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고의 실용적인 가치를 어는 정도 증명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막연하게 지속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소설을 쓰다보면, 원고를 찢어버리고 잭 다니엘에 빠져 헤엄쳐 다니고픈 암흑 같은 나날들이 있다. 당신은 사냥개처럼 아내를 부엌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제일 마음에 드는 줄들을 읽어주면서 칭찬을 애걸한다. 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 구절을 읽어준다. 설사 진심이 아니어도, 그가 괜찮다고 말해줄 것을 알면서. 어떤 심리적 충동으로 시작했든, 자신의 신경섬유다발에 주기적으로 조그만 쾌감의 알약을 떨어뜨리지 않고서 코를 찌르는 실험실에서 20년을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험적 방법이라는 관념은 시행착오라는 간단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최초의 착상이 잘못되어 조사를 더 해야 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어떤 사고를 끌어낼 방도가 전혀 없는 것 보다는 바람직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사고가 입증될 수 있을 때까지 역경을 헤쳐 나갈 만큼 충분히 강력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보상은 어떤 사고가 맞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얻는 느낌과 비슷하게 느껴져야 한다. 직감이나 육감에서부터 신앙, 믿음, 깊은 확신에 이르기까지, 다리를 놓아주는 동기의 스펙트럼으로 들어가 보아라. 안다는 느낌에 기여하는 이 다양한 감각들은 기시감처럼 어렴풋한 친숙함의 낌새에서부터 압도작인 신념에 이르기까지, 부가적인 기능을 진화시켜왔다. -양날의 일편단심- 감정적 습관과 패턴, 행동적 보상에 대한 기대는 일단 확립되면 완전히 뿌리 뽑기 어렵다. 이와 같은 논거가 사고에도 적용된다. 어떤 사고와 맞는다는 느낌을 연결하는 신경망은 일단 단단히 확립되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틀린 것으로 알려진 착상이 계속해서 맞게 느껴진다. [유전자와 사고] 우리가 인간의 사고에서 우리에게 통제권이 있다고 믿는 단 하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신, 완벽한 내세, 불과 유황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우연이 지배하는 무의미한 우주의 보잘것 없는 점들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떨어져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의 면담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쌍둥이의 종교적 태도나 성향에는 매우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다. 한 쌍둥이가 종교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면 떨어져서 자란 그의 일란성 쌍둥이에게도 유사한 성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내가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종교나 영적 문제에 대한 관심의 정도이지, 어떤 특정 종교 선택의 여부가 아니다) 떨어져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철저히 평가해서 구성한 집단들을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수장인 미네소타 대학교의 심리학자 토마스 부처드Thomas Bouchard는 나아가 종교적 태도에 있어서 양육이 실제적인 역할을 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까지 언명했다. -내가 포커를 못 치는 이유- 위험 감수 유전자가 양성이고 스타스민 유전자(두려움 공포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단백질)가 음성인 그러한 정치가들은 쉽게 겁을 주거나 창피를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곤란하거나 의심받던 상황들을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생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유전자는 십중팔구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라는 드레이나 박사의 관찰로 돌아가자. 일반적인 범주의 안다는 느낌에 명백한 생존적 이익이 있음을 놓고 볼 때, 그러한 느낌들이 유전적 소인과도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불행히도, 적당한 동물 모델도 없고 안다는 느낌의 현상학은 엄청나게 복잡한 관계로, 우리가 그 유전적 요소를 적절히 가려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종교와 영성을 비롯해 기타 성격 특성을 향한 태도가 가계에 따라 무리지어 나타나는, 떨어져 자란 일란성 쌍둥이 연구와 같은 우회적이 데이터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확신의 상태나 의심의 상태 쪽으로 기울어 보이는 정도는 그 자체가 부분적으로는 그 사람이 마음 깊이 안다는 느낌을 경험하기 쉬운 정도의 표현일 것이다. 언젠가, 뭐든지 아는 체하는 사람과 영원한 회의주의자는 안다는 느낌을 위한 유전자가 켜져 있거나 꺼져 있는 두 극단의 입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그 이상의 복잡한 문제가 있다. 환경이 유전자 발현에 미치는 광범위한 효과들을 고려하지 않고 유전자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진공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넓게 보기 위해, 나는 환경의 소리가 기본 언어 습득과 말의 발달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혁신적인 연구를 간단히 제시하고 싶다. 귀에 들어오는 영어는 대략 40~45개 음소들의 조합이다. 반복적인 노출과 궁극적인 패턴 인식을 통해 뇌가 형성하는 신경망들이 개별 음소의 탐지 법을 학습한 다음. 음소 조합의 탐지 법을 학습한다. 아빠라는 말을 배울 때 아이들은 ‘다’로 시작해서 ‘대디daddy'와 대다dada'로 발전한다. 언어의 습득에는 이 시행착오과정 맨 처음부터 적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그 보상이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든, 엄마의 미소를 보는 것이든. 그 순간의 안다는 느낌은 글자, 기호, 음소들을 인식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신경망들의 빠뜨릴 수도 떼어 낼 수도 없는 특징이 된다. 그 결과, 가장 기본적인 언어 발달에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의 편견이 영향을 줄 것이다. 이때 맞는다고 들은 것이 이후의 모든, 언어에 기반을 둔 사고를 형성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채색되어 있는 이 언어의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지도자를 선택하고, 과학실험을 고안하고, 철학과 종교에 관한 이론을 세우고,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가 어떤 생각에 완전히 동의할 때조차 이 동의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에서 일어나고, 이 다른 사고방식에는 지극히 고유한 유전자와 개인의 경험도 연관된다. 다른 사람들을 나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사고 과정을 우리의 지문만큼이나 고유하게 만드는 타고난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감각적 사고] 당신이 나무 위로 올라가 돌진하는 사자를 처음 피했을 때, 이성은 이것이 뛰어난 전략이라고 당신에게 말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경험을 통해 훌륭한 전략도 때로는 비참하게 실패하며, 고려해본 적 없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전략의 유효함을 입증할만한 행동으로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껏해야 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이번에는 효과적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독립된 하나의 체계로서, 사고는 영원히 “맞아, 하지만”을 계속할 운명이다. 이 운명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 능력이 없는데서 비롯된다. 회로자동차단기가 없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아무 결정도 행위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끝없는 반추를 멈추고 미지의 우월한 대안을 놓칠지 모른다는 공포를 진정시키는 정신적 스위치다. 그러한 스위치가 하나의 사고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똑같은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 사고처럼 느껴지지만 사고의 영원한 자기 의문에 빠지지 않는 어떤 감각일 것이다. 안다는 느낌을 구성하는 놀라운 정신 상태들은 ‘어떻게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매우 현실적인 형이상학적 궁지에서 헤어나기 위해 우리가 진화적으로 적응한데서 나온 놀라운 결과물이다. [확신의 양대 기둥: 이성과 객관성] -합리성의 관념을 단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통속 심리학과 이성적인 마음의 신화- 우리에게는 우리가 아는 것만 보인다 <괴테> -보완대체의학- PBS 방송 프로그램에서, 의학박사 앤드루 웨일Andrew Weil과의 대담시간에 접골요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린아이에게서 재발하는 중이염을 접골 요법으로 다룬 예를 들어보죠. 저는 투손에 있는 연로한 접골사와의 경험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비싸지도 않고 조직을 침범하는 일도 없이 이 방법으로 한 번만 치료하면 , 그 아이는 다시는 귀에 염증이 도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을 근거로, 저는 귀에 연증이 생긴 아이들에게 접골사에게 가서 이 요법을 받아보라고 권유해왔습니다. 연구계가 이것에 관심을 갖도록 20년을 애쓴 뒤에, 우리는 마침내 재발하는 중이염이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것을 실험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선정했습니다. 우리는 그 실험에서 이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저는 거기에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설정한 실험 방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의 일부는, 접골사들에게는 이것을 시술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채용한 접골사들이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이 제가 본 이 연로한 접골사가 쓰던 방법이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이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는 매우 강력한 직감이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뒷받침하는 긍정적인 증거를 얻을 때까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확신한다”가 아니라 “나는 믿는다”는 것 뿐이다. 이는 창조론을 믿는 지질학자가 진화의 증거를 이해하면서도 그 증거를 거부하게 한 것과 똑같은 인지 부조화다. 물리학자 러셀 타그 Russell Targ 와의 대담도 있다. 초기 레이저 연구의 선구자인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스탠포드 연구소에 심령력 연구 분야를 공동으로 창설하기도 했다. 타그는 1985년에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1992년,CAT 스캔과 초음파 조사 결과 대장암의 전이 재발이 의심되었다. 그는 검사와 가능한 화학요법을 권고받았다. 그는 권고 받은대로 하는 대신 , 촛미리학 학술회의에서 만났던 영적 치유자인 제인 카트라Jane Katra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관에 따라, 카트라는 타그에게 그는 아프지 않다고, 그가 자신에게 아프다거나 암에 걸렸다고 말함으로써 그 개념에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강제력을 느꼈다. 그래서 카트라는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라고는 어떤 필름에 얼룩들이 찍혔다는 것이 전부예요”라고 말했다. 카트라는 주요 생활 양식을 바꾸라고 권고하고 그를 돌봐주면서, “병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숙주를 바꾼다는 원리를 따랐다. 타그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그는 처방된 화학요법을 하나도 받지 않았는데, 6주 뒤의 CAT스캔은 그 종양이 완전히 무해한 무언가로 삭아들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이후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직감과 육감이란 진정한 형태의 믿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강한 안다는 느낌과 연관된 무의식적인(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사고들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이 주장들이 얼마나 달랐겠는지 상상해 보라. [신앙] -환영한다, 드디어 올 곳에 왔다- -톨스토이와 절망의 생물학- 「나는 평생 항상 의지해왔던 무언가가 내 안에서 무너졌음을, 내가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사실상 내 삶이 멈추어버렸음을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게 그런 존재는 제거하라고 강요했다……. 그것은 내가 예전에 가졌던 살려는 열망과도 같은 힘이었으나, 다만 나를 반대 방향으로 몰아R타에서 진행되는 상황들에 관한 한, 내가 완전히 행복했어야 마땅할 시기에 일어났다.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훌륭한 아내가 있었고, 훌륭한 아이들과 많은 재산이 있었다……. 친척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었고……. 낮선 이들의 찬사도 분에 넘치도록 받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병든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나는 체력과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것은 내 나이의 사람들에게서 만나본 적이 거의 없는 드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이 어떤 행위에도 합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모든 가지들에서 설명을 구했다……. 길을 잃고 스스로를 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설명을 구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에 더해 나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나보다 앞서 과학에서 답을 구하려 했던 모든 사람들 역시 아무것도 찾지 못했음이 틀림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를 절망으로 이끈 바로 그것, 즉 무의미한 인생의 부조리만이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게 명백한 지식임을 그들도 깨달았음이 틀림없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톨스토이의 경험에 우울증의 반응이라는 꼬리표를 달 것이다. 심각한 임상적 우울증의 표식들 중 하나가 바로 의미감과 목적의식의 감소나 부재다. 의사들은 대부분 바탕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을 의심하고 프로작이나 졸로포트 같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처방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노먼 빈센트 필 식의 테이프를 들으라거나 ’입술을 앙다무는‘ 영국식 접근법을 제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가 우울증에 빠진 환자에게 ’극복해‘라고 울러대지 않는 이유는 뇌 화학의 탈선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감의 상실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의식과 의미감이 있을 때, 그것은 대개 신경 기제들이 적절하게 작용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신 목적과 의미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용어로 논의된다.(굳이 말하라면, 나는 우리들 대부분이 목적과 의미를 의식적인 선택이라고 여기거나 최소한 거기에 주요한 수의적 요소가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적과 의미의 느낌들이 우리의 이식적 통제권 안에 들어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그것들을 안다는 느낌과 밀접하게 연관된 불수의적인 정신적 감각으로 보면,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을 다시 생각해보게 할지도 모르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게 된다. -주의: 전방에 해체 구역이 있음- 리처드 도킨스가 인용한 문구가, 종교인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문제를 한 눈에 예증한다. “신앙은 대단한 구실, 즉 증거를 생각하고 평가할 필요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단한 핑계다. 신앙이란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어쩌면 증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단신이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존중하겠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오로지 당신에게 그에 대한 신앙이 있다는 말로 당신의 관점을 정당화 한다면 나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도킨스는 자신이 가진 내적 성찰과 자기평가의 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정신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율적인 이성적 마음의 신화를 믿는다. 이는 또 한 가지 신앙의 작용, 즉 우주의 물리적 법칙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면 그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결합된다. 물리적 속성들을 지적으로 이해해서 주관적인 형이상학적 진실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은 비범한 제안이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는 개인적 의견과 사변의 문제이지, 과학적으로 탐구할 질문이 아니다. 추가되는 더욱더 기본적인 문제는 도킨스가,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과 동의어라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이 목적의식과 의미 감을 촉발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너무도 우아하게 상기시키듯이, 이성이 반드시 의미 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킨스는 심지어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종교의 언어를 비켜갈 능력도 없다. ‘허락되었다allowed’는 표현은 이 특권을 수여 할 수 있는 더 높은 권능의 존재를 암시한다. 하지만 더 높은 권능이 없다면 누가 이 특권을 수여하고 있을까? 도킨스는 자칭 무신론자이므로 나는 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이 이해 능력을 가진 전능한 이성적 마음이라고 추정한다. 본질적으로 도킨스는 그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도록 허락해줄 이성적인 마음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면, 우리가 복권에 당첨되었다 해도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행운, 우연의 일치, 기적이나 신의 개입에 관한 논의는 전부 낮은 확률의 사건에 대한 어떤 사람의 개인적 관점과 맞물려 있다. 차이라면, 이성주의자와 회의주의자는 우연의 일치를 우발 사건의 비 개연성과 무관한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더 높은 권능을 믿는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에게는 우연의 일치가 기적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는 유일한 시점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숫자와 나름의 개인적 관계를 맺는다. 복권을 샀다가 날려도 우리는 의미 없는 우주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확률이 당첨과 적대관계라는 것을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당첨되면, 흔히 ‘나만 뽑혔다’거나 ‘선택되었다’는 어떤 의식을 느낀다. 동네를 휩쓸고 있는 감기로 앓아누우면 당신은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희귀병에 걸리면, ‘왜 나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는 것과 그럴법하지 않은 것들을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특징지으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실제적인 제안- 가능하다면 과학과 종교 모두, 잠정적 사실이라는 발상을 채택하고 고수하려 애써야 한다. 일단 모든 사실들이 진행 중인 작업이 되면, 절대론은 권위를 잃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증거를 갖다 대어도, 성경이나 코란의 문자적 해석은 더 이상 유일한 가능성이 되지 않을 것이다. 뇌가 자기 생물학의 모순되는 측면들을 상쇄하는 방식을 탐색하여 상식화함으로써, 우리는 절대론을 점차 지킬 수 없는 무지의 입장으로 바꾸어갈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목격자 확인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을 밖으로 쏙 내놓고 다니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착시와 지각 심리학 과목들을 통해 지각이 꾸미는 못된 장난의 위력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뭘 아는지를 아는 능력에 생물학적 제약이 있다는 관념에 의거하여 길러진 미래 세대들과의 대화는 얼마나 다를지 상상해 보라. 내가 볼 때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마음에 대한 사색] 우리가 우리의 사고들을 아는 것은 지각적 착각과 잘못된 지각의 지배를 받는 정신적 감각들을 통해서라는 깨달음은 나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가장 풀기 힘든 해묵은 철학적 쟁점들의 일부는 우리 뇌가 일으킨 지각적 속임수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궁금증을 일으켰다. 이 장은 모든 문제에 꼭 맞는 하나의 이론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장 거대한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들의 일부가 어째서 모순되는 생물학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에 지날 수 있는 지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다. 고전적인 예는 마주 보는 두 얼굴의 윤곽선이 꽃병으로도 보일수 있는 착시현상이다. 그림을 응시하면 꽃병과 옆얼굴이 번갈아 나타난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로 얼굴이나 꽃병 하나만을 계속해서 보지 못한다. 전경과 배경의 이 불안정한 교대관계는 시각적 지각에서 같은 비중을 지닌 측면들이 지각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결과다. 어떤 쪽일까? 두 얼굴의 윤곽일까, 아니면 꽃병일까? 우리가 자문하는 질문에는 마치 답이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해도 답은 없다. 그 질문에는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은 숨겨진 층이 지각의 경쟁하는 측면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얼굴이냐 꽃병이냐를 결정하는 문제는 보는 사람의 마음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 주:객관적인 답은 없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쟁점이 아니다. 이 전경-배경 줄다리기를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해결할 수 없는 역설의 본보기로 간주하자. 개인 감정과 무관한 그러한 시각적 속임수의 경우, 우리는 결과적으로 답이 없다는 것에 대해 ‘이것은 착시’라고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 어깨를 으쓱하고 말 수 있다. 상이 안정되는 만족감은 느끼지 못해도, 그것이 어째서 불가능한지를 알기에 얼굴이나 꽃병 가운데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느끼지 않는다. -우주의 기원 또는 우주론 대 가장자리와 경계- “태초에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어둠과 공허뿐이었다. 길고 긴 시간동안, 모여든 어둠은 마침내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에리조나 피마 인디언에게 구전되는 이야기>“ 우리는 어떤 시작이든 그 시작 직전에 존재했던 것에 대비해서 본다. 가혹한 역설은, 마음의 눈이 그린 주위 공간 또는 시간 부재의 표상이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이전의 시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공유하는 주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태초 이전에 어떤 것이든 있었다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나는 우리가 대상을 배경에 대비시키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시각 장치를 지녔다면, 이 질문이 어떻게 틀을 이룰까를 상상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내 뇌가 꽃병-얼굴 간의 착각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마음의 눈이 지닌 한계에 부딪혀 꼼짝도 하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 꽃병-얼굴 그림은 확실히 두 얼굴 아니면 꽃병이므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다른 하나를 누르고 하나의 상을 임의로 골라보려고 상당한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답이 맞는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회의적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신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신념은 입증되지 않은 맹목적 신앙과 동등하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하나를 누르고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뇌 작동 방식의 작용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 착각이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가 유리 비커 안에 반쯤 잠김 막대 유리 막대가 곧게 보일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이유는 굴절의 법칙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 편으로 기울어 있다면, 우리는 우주에 우주가 포개진, 또는 우주 전에 우주가 있는 이론들을 향해, 즉 주위 공간이 없어도 우주가 저절로 펼쳐질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아마 맞겠지만 헤아릴 수는 없는 수학 방정식들 쪽으로 쏠릴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도 이 내면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할 능력은 없는 것 같다. “우주는 막대한 폭발로 시작되면서 공간과 시간을 낳고 우주 만물이 창조되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설명도 불만스럽긴 마찬가지다.”점-우주는 공간에 고립된 한 물체가 아니라 완전한 우주였고, 따라서 대 폭발은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는 말만이 유일한 답이 될 수 있다. “ 가장 명석한 사람들조차도 열외가 아니다. 스티븐 호킹은 말했다. “공간과 시간이 경계가 없는 닫힌곡면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또 우주의 문제에서 차지하는 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된다……. 우주에 시작이 있는 한,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우주가 실재로 완전히 자급자족하고 경계나 끝이 없는 것이라면, 우주에는 기초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주는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창조자가 존재할 자리가 어디일까? 마음의 눈의 경계라는 이 쟁점을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 호킹은 ‘무경계’ 상태를 상정했다. 그것은 설사 전적으로 맞더라도, 우리가 가진 마음의 눈이 작동하는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 관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주위 배경을 이해하려는 데서 생기는 긴장을 해소할 손에 잡히는 해결책이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추상이 아니다. -심신 이원론과 자아감- 통증의 목적은 우리 기계의 어떤 부분이 길을 잘 못 들었을 때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연료를 재충전하고 급수할 때를 알려준다. 이 감각들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들은 마치 바탕이 되는 우리 몸의 신체 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어떤 감각들은 신체 기능에 대한 자각과 결별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훌륭하게 봉사한다. 가장 즉각적인 예는 자아감sense of self이다. 모든 것에는 진화적 함정이 있다는 함정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개인적인 자아감은 도덕성, 연민, 법, 목표, 더 고상한 목적, 의미를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내가 유일 무일하고 가치 있는 개인이라는 이 지각에 꼭 필요한 것은, 자아는 바탕의 ‘무심한’ 뉴런들의 산물일 뿐이라는 느낌이 아니다. 통증이란 중뇌와 시상에 있는 통증 수용체와 통증 발생 기제들로부터 창발 하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서슴없이 인정한다. 통증에는 실체도 없고 무게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실험실로 보내 해부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탕에 있는 생물학적 기제들의 연장이다. 우리는 부딪친 발가락의 통증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보통 실재와 연관되는 물리적 속성들 없이도 받아들인다. 우주의 기원, 또는 연혼의 존재나 부재에 관해 생각하든, 아니면 자유 의지와 개인적 책임에 관해 결정하든, 우리는 한 발 물러나 먼저 이 문제들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정신 상태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신적 감각들은 사고의 초석이다. 우리가 위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으려면, 먼저 이 질문들 자체가 우리의 생물학, 특히 우리의 사고에 느껴지는 의미를 주는 정신적 감각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마지막 사고들] -간단한 요약- 안다는, 친숙하다는, 낯설다는, 실제라는 느낌들은 복합부분 발작이나 측두엽 뇌 자극과 연관된 신경학 적 호기심의 대상 이상이다. 정신적 기능들인 감정, 기분 또는 사고의 표준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도 않는다. 총체적으로 그것들은 정신적 활동에 속하는 별도의 한 유형,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자각하고, 채색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게 하는 내부 감시 체계의 여러 측면들을 대변한다. 신체의 다양한 감각계에 비유하는 것이 가장 명백하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주위 세계와 접촉한다. 유사하게, 광범위한 감각 기능들이 우리 내부의 환경을 평가하기 위해 존재한다. 몸에 음식이 필요하면, 우리는 배고픔을 느낀다. 탈수되어 물이 필요하면, 목마름을 느낀다. 우리에게 우리를 외부세계와 연결해주는 감각계가 있고, 내부의 신체적 필요를 알려주는 감각계가 있다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감각계가 있다고 말해도 타당할 것 같다. 생각하고 있음을 자각하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감각이 필요하다. 학습을 보상하려면, 우리에게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 또는 맞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고들인 궁극적으로는 유용한 새로운 발상이 될 한가로운 사색을 보상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도 유사한 느낌들이 있어야만 한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보상이 되려면, 안다는 느낌이나 신념과 같은 이 감각들의 일부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결론처럼 느껴져야 한다. 그 결과, 뇌는 사고처럼 느껴지지만 사고가 아닌 놀라운 정신적 감각들을 개발해왔다. 이 불 수의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느낌들은 마음의 감각이다. 감각들처럼, 그 느낌들도 모든 감각계에 공통된 광범위한 지각적 착각의 지배를 받는다. 시간이 순간적으로 바뀌는 일(다가오는 야구공의 예)은 시각 계에서 날마다 일어난다. 이 이해를 정신적 감각들에 적용하면, 사실은 안다는 느낌이 사고보다 앞서서 그 사고가 착각되게 하는 원인일 때에도 마치 그 느낌이 사고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여기가 이지너츠의 집이 틀림 없어의 예)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뇌의 위계 구조가 일반적인 신경망의 노선을 따라 체계화되어 있다는 이해도 우리로 하여금 이 정신적 감각계를 어떤 사고의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게 해 준다. 앞서 다섯 번째 장 <신경망>에서, 나는 더 큰 신경망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신경망을 더 큰 위원회에 속한 위원들에 비유하여 묘사했다. 하나의 의문이 제기 된다<입력>. 각 위원회 위원에게는 단 한 표가 있다. 모든 표가 합산되고 나면(숨겨진 층의 계산>,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출력>. 이제 각 위원들이 안다는 느낌에서 친숙하거나, 기묘하거나, 실제적이라는 느낌에 이르는 정신적 감각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하는 신경망을 상상해보라. 우리가 어떤 사고에 관해, 그것의 ‘옳고 그름’을 포함해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표의 최종 합산일 것이다. 연에 관한 단락의 묘사를 평가하는 신경망의 위원들은 답을 읽기 전에, 친숙하지 않다, 낯설다. 어쩌면 심지어 기묘하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감각에도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이해했다는 감각에 찬성하는 표는 없을 것이다. 연이라는 설명이 입력되면, 친숙함에 표를 던진 위원들은 “그래, 그게 맞아”할 것이고, 신념의 느낌이 나서서 갑자기 조용해진 낯섦과 친숙하지 않음을 대표하는 위원들을 제압할 것이다. 최종 결과로, 설명이 맞게 느껴질 것이다. 이 단락은 연을 가리킨다는 결론에 한 번 새겨진 맞다는 느낌은 의식적으로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반대 정보를 입 신경망의 숨겨진 층만이 그 값들의 비중을 다시 책정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심 메시지는 안다, 맞다, 확신한다, 확실하다는 느낌들이 신중한 결론도 아니며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신적 감각들이다. -관념이라고 다 같은 관념이 아니다- 아마도 가장 쉬운 해결책은 안다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로 교체하는 것일 게다. 실증 되지 않은 육감을 마주한 의사는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가 아니라 “증거는 없지만,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맞다, 과학자들은 “나는 압도작인 증거 때문에 진화가 틀림없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안다가 믿는다로 바뀐다고 해서 과학적 지식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힘들여 얻은 사실이 명료한 것에서 개연성 높은 것으로 이동할 뿐이다. 진화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하는 대신 지극히 개연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논지의 강도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근본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 예전 같았으면 “난 알아”라고 말했을 곳에서 “난 믿어”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지식과 객관성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관련해서 고려할 것은 느껴지는 지식인 직감이나 육감과 같은 것과 경험적 시험에서 생기는 지식의 구분이다. 독립적으로 시험되지 않았거나 시험될 수 없는 모든 발상은 개인적인 상상으로 여겨져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햄릿을 보편적 진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저글링- 스콧 피츠제럴드F는 붕괴the crack-up에서,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해결책을 묘사했다. “1급 지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두 가지 반대 개념을 동시에 마음에 담고서도 여전히 제 구실을 하는 능력이다.” 이 저글링이 인지 부조화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대안이다.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면, 한 묶음의 가치들이 다른 면에서는 설득력 있는 반대 증거를 타넘고 만다. 이 곡예를 하려면 우리는 과학이 우리 자신에 관해 알려주고 있는 내용을 염두에 두는 한편, 비과학적이거나 불합리한 믿음들의 긍정적인 이익들을 용인해야 한다. 각 입장에는 그 나름의 위험과 보상이 따른다. 둘 다 최우선의 지령, 다시 말해, 무엇보다도 해를 끼치지 말라는 지령 안에서 고려되고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생물학의 모순되는 측면들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그 나름의 의사일정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앎으로써, 주위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마음의 작동방식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갈등에 의해 제한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그 의사일정에 개입할 수 있다. 확실성은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개연성이라는 언어와 도구를 주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견이 맞을 가능성에 따라 그 의견을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방법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확실성에 대한 믿음에서 태어나는 재난이 필요하지 않고 그것을 감당할 이유도 없다. 물리학 박사이자 2004년 노벨 물리화학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그로스David Gross는 말했다. “지식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무지다.” 이 책이 당신을 들썩여 가장 기본적인 질문인 당신이 뭘 아는지를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묻게 했다면, 책은 목적을 이룬 것이리라. [Review] 아득히 먼 유년시절의 기억이 카드장의 그림처럼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감정도 함께 들어있다. 파란 가을 하는 마루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는 모습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바람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에서 어떤 벽에 부딪칠 때는 그 생각이 떠오른다. 기억은 좀 더 희미하지만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사물에서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단편적이며 가장자리가 두루뭉술하다. 반면 최근의 기억은 더 큰 그림 이고, 가장자리가 피오르드 해안처럼 복잡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은 선명하지 않고 누더기 옷처럼 너덜너덜 하다. 인간의 뇌세포는 약 일천억 개이며 유아시절 에 이미 성장을 완성된다고 한다. 한편 세포 간에 정보를 이어주는 뉴런은 계속해서 어느 정도 성장한다고 본다. 세포는 한 시간에 약 500개씩 사멸하는데, 그 숫자는 전체의 뇌세포에 비해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간혹 뇌의 충격이나 질병으로 인해 큰 부위가 한꺼번에 소실되기도 한다. 뇌는 마치 우리가 몸보신으로 먹는 사골처럼 처음에는 속이 꽉 차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골수가 빠져나가고, 결국에는 구멍이 숭숭 난 모양으로 변하는 것 같다. 뉴런을 통한 시냅스에서 어떻게 정보가 교환 되는지와, 다양한 기억이 뇌의 특정부위에 다르게 할당 된다는 사실은, 뇌 과학의 발달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실제로 뇌 세포의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에서 보면, 어떤 정보가 뇌에 입력 될 때 같은 부위라도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형태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 저장 되는지는 아직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다. 뇌세포가 무작위로 사멸하는지, 아니면 선택 적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평생에 잊지 못할 기억이 있는 것처럼 뇌는 놀고 있는 세포부터 먼저 사멸시키는가? 실제로 유아시절에 뇌는 이미 불필요한 세포를 일정부분 대량으로 속아낸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공통적인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기억의 형상과 느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억의 형상은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쉽다. 반면 감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가장자리가 새털구름처럼 불분명하기 때문에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속에 담겨진 감정은 더 더욱 불분명 하다. 우리가 어떤 논쟁에서 끝까지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기억은 같은 상황에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의 뉴런이 서로 이웃한 일 만개의 다른 뉴런과 정보를 교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뇌는 이미 입력된 정보에 따라 편향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나 느낌은 과거경험에 익숙한 유사한 세포를 활성화한다. 그러므로 소위 착각을 유발시킨다. 구불구불한 나뭇가지를 보고 밧줄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뱀으로 착각하여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은 단순 혼란에서 오는 결과 이지만 뇌의 특정부위에 이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각기 특성은 다르지만 맹시나 인지부조화 또는 공황장애, 공감각도 그 한 예이다. 이 책은 우리의 생각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 하는가?라는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뇌 과학뿐 아니라 쾌감이나 중독원리, 창조론과 진화론, 대체의학 등 다양한 주제를 안다고 확신 하는 신념, 종교인 이라면 믿음의 태도 등에 대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닌 뇌 과학 과 연결된 생물학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전개 시켰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신앙인이라면 아리송한 믿음의 본질을, 일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논쟁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부심 긍정 확신 등에 대해 좀 더 심도 깊게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어려운 과학서를 쉽게 기술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내용이 약간은 단편적인 면이 없지 않아서 한번 읽는 것으로 전체적인 주제를 이해하는데 는 약간 혼란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생각이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의 주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서 오는 한계라고 본다. 책의 후미에 전체적인 요약을 따로 넣은 것도 저자의 이러한 면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리뷰에는 책의 내용에 없는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뇌가 어떻게 앎이라는 불수의적인(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감각을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수많은 유전적 요인에서부터 신체감각의 착각에 이르기 까지 주변 모든 것들이 이 안다는 느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들을 보고나면 이 안다는 느낌이 결코 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헤어날 수 없는 수많은 딜레마의 중심에 바로 이 안다는 느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벨의 음악을 들었는데 그 곡의 한 부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에 따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음악을 들을 때면, 그 나무가 그냥 저절로 칠해집니다.」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확신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고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도 아니다. 확신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유사한 현상들은 마치 사랑이나 분노처럼, 이성과 무관한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 「성 테레사 : 어느 날 한 순간에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 어떻게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은혜를 받았다. 나는 사물을 그것의 고유한 형태로 지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고, 여전히 내 영혼에 생생한 감동을 주었다……. 그 광경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해서 이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인간의 뇌에서, 전형적인 뉴런은 대략 1만 개의 다른 뉴런들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 「확실성은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개연성이라는 언어와 도구를 주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견이 맞을 가능성에 따라 그 의견을 분석하고 순위를 매기는 방법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