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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문화대혁명 - 3
1976년 1월 8일 주은래의 사망은 정치우위를 강조하는 문혁파(홍)와 기술*능률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실무파(전) 사이에 새로은 전기를 마련하였다. 주은래의 사망으로 공석인 국무원총리에 예상을 뒤업고 화국봉이 대리로 임명되자 실무파의 실용주의 노선을 공격하는 문혁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혁파의 공격에 대한 실무파와 그 지지세력의 반발과 저력은 마침내 천안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천안문 사건은 1976년 4월5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이 그 전날 청명절에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하여 인민 영웅기념비에 헌화한 花輪이 철거된 것에 분노하여 시공안국의 선전차를 부수는 등 폭력행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사태가 확대되어 대규모의 폭동으로 진전하였으며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쌍방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 중앙의 공식발표는 [......그들은 반혁명적인 언사로 ‘진시황제의 시대는 지나갔다’를 외치며, 공공연히 등소평 옹호의 깃발을 올리고 창끝을 모택동 주석에게 돌리고, 당 중앙을 분열시키며 등소평 비판의 대방향을 왜곡할 것을 꾀하는 반혁명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천안문 사건에 등소평이 어느 정도 연관되었는지 밝혀진 바 없고, 등소평 자신도 일체 그것을 부정하였으나 당의 입장은 등소평과 그를 추종하는 ‘회개할 줄 모르는 走資派’가 그 진원이 되어 일어난 반혁명적 폭동으로 공식화되었다. 결국, 중앙정치국고 모택동은 천안문 사건의 성격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려, 등소평의 당 내외에서의 지위를 박탈해 버렸다. 얼마후인 1976년 9월에 모택동이 사망하자 강청 반혁명 집단은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활동을 더욱 가속화했다. 모택동의 사망 후 불과 한달도 못되어 10월7일 강청, 제1부수상 장춘교, 제2부주석 왕홍문,당 중앙위정치국원인 요문원 등 소위 상해그룹이 사인방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사인방은 모택동이 사망하기 6개월 전부터 다른 간부들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모택동의 지시와 유언을 날조, 모택동 사후 극좌세력의 집권을 획책하였고, 화국봉 지도체제에 불만을 품고 당과 국가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쿠테타를 기도하려 했다는 것이 숙청의 이유였다. 사인방 숙청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인민일보, 흥기 등 중국의 유력한 보도에는 등소평에 대한 비난논설이 이어졌으나 10월 25일 경제정책에 관한 인민일보의 논조는 급격히 실용주의적인 생산력중시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제1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977.7.16-21)에서 등소평은 지난날의 당직을 회복하였고, 제10기 3중전회가 폐막한지 불과 20일이 지난1977년 8월 12일 제11기 전국대표대회에서 화국봉은 [사인방을 타도한 현재 우리는 모택동 주석의 지시에 입각하여 안정*단결을 실현하여 천하대치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11년에 걸친 중국의 제 1차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은 사인방의 분쇄를 표식으로 하여 승리 속에 종료하였다.]라고 말하면서 문화대혁명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문혁의 평가에 대한 평가를 해보기로 하자. 문혁의 역사는 모택동이 발동한 문혁의 주요논점이 막스레닌 사상에 부합되지 않으며 중국의 실제에도 부합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첫째, 문혁은 수정주의 노선이나 자본주의 노선과의 투쟁으로 불려진다. 이는 모택동이 중국사회의 모순을 수정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의 양자택일로 인식한 데에 있는데 이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중국 사회 현실의 모순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빈곤이었으며 그 속에서도 관료특권계층의 존재, 즉, 관료주의에 있었다. 또한 방법적 한계로 모택동의 카리스마적 권위와 해방군의 무력을 이용한 점을 들 수 있다. 문혁은 이념으로써 자기 해방운동을 제창하였지만, 실제로는 실권파의 ‘추방극’으로 끝났을 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수정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에의 혼동은 필연적으로 적과 아군을 혼동하게 하였다. 이념에 대한 공명과 관료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궐기한 것은 학생과 홍위병이었지만 그들 자신이 특권층 예비군으로 종파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채 자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혁이념의 허위성을 공격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 또한 바로 그들이었다. 셋째, 문혁은 명분상으로는 군중에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의 조직과 분리되고 광대조직과 괴리되어 당에 장기간 의지했던 수많은 지식 분자와 근간 군중은 배척을 받게 되었다. 문혁을 거치면서 수많은 지도세력과 인민은 억압과 두려움을 당했고. 결국 그들은 지금까지 따랐던 모든 것의 결과가 문혁인 것에 회의를 느껴 지금까지의 그들의 사상․행동의 지침에 대한 신념을 상실하게 되었다. 넷째, 문혁은 어떠한 의의상의 혁명이나 사회진보를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이 기간동안에 중국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상실하게 되는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근 10년간에 걸쳐 진행이 된 문혁은 모든 활동에 제약을 가하였는데 극 좌경 사상에 충실하기 위하여 전통적 문화 역시 포기해야만 했다. 전통문화 역시 비탄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혁은 정치적*사상적 재개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견제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분야에 투입되어 전문지식을 사용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압력을 피하고,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었다. 그 결과, 그 시기의 경제 또한 낙후될 수 밖에 없었다. 문혁이 중국의 근대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처절한 과정을 통해 중국공산당은 무엇을 해야될 것인가에 대해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얻게 되었다. 바로 문혁 기간중에 강조한 “사상적 투철”만을 강조해서는 사회주의를 결코 성공시킬 수 없고, 기본적으로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 인민적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등소평의 개방개혁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게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