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울리는 음악영화, [더 콘서트]를 보고
1. 들어가며
<더 콘서트>는 한 때, 러시아를 대표하는 ‘볼쇼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천재 마에스트로 '안드레이 필리포프'의 이루어지지 않은 꿈을 이루어주는 영화이다. 꿈은 음악을 통해서 이루었는데, 그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다. 또 다른 등장인물 샤샤가 한 말, "말이란 더러운 반역자요. 음악만이 아름답죠."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
가끔은 우연찮게 본 영화에서 재미와 감동을 얻을 때가 있다. <더 콘서트> 란 영화가 그랬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 나는 이 영화의 존재를 몰랐다. 영화는 보고 싶은데 딱히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게 이 영화였다. 포스트에 나와 있는 주인공 남자의 포즈에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보였고, 클래식음악 영화이면서도 슬라브 계통의 유럽영화라는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슬라브인들이 배경이고 차이코프스키 음악,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 협주곡이 영화의 중심이라는 것에 관심이 끌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것은 내 취향의 문제이고 실제로 재미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2. 가치에의 집착과 완벽에의 추구
볼쇼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안드레이'와 바이올린 솔로 연주자 '레아'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통해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미친 듯이 노력한다. 오케스트라 단원 중 대부분이 유대계였던 당시 볼쇼이 오케스트라는 역시 유대계 바이올린 솔로 연주자였던 레아를 통해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공산주의의 탄압으로 유대계 음악가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와 같은 위험을 알면서도 안드레이의 오케스트라와 레아는 완벽한 조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볼쇼이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완벽한 조화에 도달하는 듯했다. "레아는 바이올린으로 마술을 부려 나와 오케스트라를 하늘로 날아오르게 했다"는 안드레이의 회상은 그들의 협연이 완벽한 조화에 이를 수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공연은 브레즈네프의 지시를 받은 오케스트라 매니저 이반에 의해 중단되고 안드레이를 포함한 유대계 연주자들은 모두 오케스트라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 그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완벽한 조화는 미완에 그치게 되었다. 안드레이는 빈곤한 청소부의 삶을 살면서도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완벽한 조화에의 욕망을 버리지 않게 된다.
한편, 완벽에의 광적인 집착은 레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레아는 자유유럽 연합과의 인터뷰에서 브레즈네프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KGB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되는데 레아는 유배지에서 허기와 추위로 죽을 때까지 암송으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과거 회상이어서 흑백으로 처리된 이 장면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 감동으로 다가왔다.
안드레이의 최측근인 첼로 연주자 사샤는 "우리는 모두 음악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완벽한 조화에 대한 그들의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들의 완벽한 조화에의 광기어린 욕망은 그들의 공연이 중단된 지 30년이 지난,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레아의 친딸로 밝혀지는 바이올린 스타 안느 마리를 통해 완성되게 된다.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특정 가치에 집착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문학작품들에서도 드러나듯, 무엇인가 특정 가치에 대해 한 번 열정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비록 비합리적이어도 가치를 순수하고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러시아인들의 민족성을 이해하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이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콘서트>에 등장하는 안드레이, 사샤, 이반, 레아, 안느 마리는 모두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특징을 대변한다. 그들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속에서 '완벽한 조화'라는 가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데 집착하는 인물들이다. 파리로 공연을 떠나기 3일 전, 안드레이는 샤샤에게 "못할 것 같아. 30년이나 지났어. 자신이 없어."
라며 불안해한다. 그때 샤샤가 안드레이를 달래면서한 말, "차이코프스키는 자네 안에 살아 있어. 그 귀신을 우리 목구멍에 매일 쑤셔 넣었잖아. 30년 동안 몇 번이나 내면의 연주를 했지? 우린 충분히 들었어. 진저리 칠 만큼! 파리에서 그 귀신을 떼어버리고 오란 말이야." 은 특정 가치에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준다.
3. 예술 속에 드러난 삶의 진실
마지막 안드레이의 오케스트라와 안느 마리의 바이올린 협연은 이 영화의 백미이며, 단지 연주만으로도 서사적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구나 라는 감동을 가져다준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많은 편이지만, 영화는 30년 전 안느 마리의 출생배경이 밝혀지는 부분과 교차 편집함으로써 비록 음악에 문외한 이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안드레이는 협주곡이 연주되는 동안 독백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려고 한다. 이것은 독백임에도 불구하고 안느 마리는 음악을 통해 안드레이의 마음을 읽고 협연을 하는 동안 마치 바이올린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 전체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 안드레이의 독백을 모두 이해하며 눈물을 흘린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연주자는 완벽한 조화에 도달하는 순간 그 음악 속에서 완벽한 교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예술은 일상과 유리된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일상이며 예술을 통해서 삶의 진실을 교감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쫓겨난 단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막노동의 현장, 성인영화 촬영현장, 복잡한 시장, 택시운전석 등에서도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클라리넷, 바순, 트렘펫 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콘서트 마스터인 제1바이올린주자 바실리는 불법여권위조, 각종 밀수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항상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유쾌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바실리는 리허설을 위해 극장을 방문한 안느 마리와 만났을 때, 유명 바이올린 스타인 안느 마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앞에서 평상시 즐겨 연주하던 주법을 선보인다. 이 때 안느 마리는 그런 주법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마지막 공연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이 주법으로 바이올린 독주 부분을 연주한다. 안드레이의 오케스트라는 심지어 공연 당일까지 리허설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안느 마리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한 번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적이 없다. 30년 전 해체된 오케스트라가 리허설 한 번 없이 어떻게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것인지, 또한 30년간 한 번도 협연한 적이 없는 곡을 안느 마리가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궁금해하게 된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 삶의 현장과 예술을 분리한 적이 없기에 30년간 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기에 그들은 마지막 공연에서 안느 마리의 바이올린 연주를 통해서 완벽한 조화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4. 차이코프스키적인, 차이코프이고 싶은
영화를 주의 깊게 보면 이 영화가 매우 차이코프스키적인 영화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계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화에서 안느 마리는 안드레이와 사샤 등에 의해 프랑스로 비밀리에 보내지는데, 안느 마리의 엄마 레아의 고향이 바로 프랑스이다. 또한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로 유명했는데, 마지막 바이올린 협주곡이 공연되는 동안 음악에 감동을 받아 옆에 서 있던 남자 직원과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은 의도였든 그렇지 않든 묘한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 받고 있는 협주곡이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솔로의 밀고 당기는 조화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곡이어서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러시아 반유토피아 소설을 이끌었던 예브게니 자먀찐은 "만일 세계인들이 바보스럽다고 여긴 생각에 대해 합리적이라고 여긴 생각에 쏟은 것만큼의 관심을 쏟았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합리성과 실용성을 최우선시하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처럼......
5. 나오기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진정한 가치에의 집착이 부러웠다. 한때 가졌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래서 가슴 깊은 곳에서 아쉬움을 느끼던 것들을 그들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치를 향한 미친듯한 집착, 그건 힘겨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행복한 것이기도 하다. 상영관을 나서는 내게 다가온 건 역시 집착과 광기였다. 나는 무엇을 향해 집착해야 하나?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광기어린 열정을 쏟을 데는 어디인가? 나는 지금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나? <더 콘서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을수록 괜찮은 느낌이 드는 영화였다.
[더 콘서트]이 가을에 한번쯤 더 보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 속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들이 새벽을 향해서 달리는 이 시간의 나에게 덧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