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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백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항암제 투여投與도, 방사선 치료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동종 골수 이식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어려웠습니다. 골수를 채취할 형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뛰쳐나왔습니다.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이끌려 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산과 산이 흘러내리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듯 구릉을 이루는 첩첩 산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회복을 꿈꾸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행복한 날은 마치 신기루蜃氣樓 같았습니다. 고작 36일 동안만 이어지다 사라졌습니다.
아들은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고통으로 신음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는 찾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던 병원에 그것도 응급실을 거쳐서 중환자실에 아들을 입원시켰습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서 굳게 잠긴 중환자실 철문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던 후배에게 연락하여 치료비를 빌렸습니다. 가난이 지긋지긋하다며 자신을 떠났던 전 아내가 아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아내는 일본에서 골수 이식자를 찾았다며 아들을 포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밀린 병원비와 함께 엄청난 수술비를 감당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내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서 자신의 장기臟器를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실시하다가 자신이 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습니다. 장기를 팔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돈이 너무 급했습니다. 이번에는 각막을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관계자는 각막 대신 임상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 곁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후배가 말려봤지만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임상실험에 참여했습니다. 수술비를 마련했습니다. 아들의 수술이 끝났습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할 테니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병색이 짙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어두운 밤을 선택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마주했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날, 아들과 함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과의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오래전에 그야말로 펑펑 울면서 읽었던 소설의 내용입니다. 한편,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며 펼쳐든 과학백과 민물고기 편에는 혼자 남아서 다른 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며 끝까지 새끼고기들을 지켜내는 가시고기에 대한 글이 있었습니다. 가시고기는 민물고기입니다. 암컷은 알을 낳은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립니다. 알들은 수컷 혼자 돌봅니다. 둥지 청소는 기본입니다. 알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가슴지느러미로 쉬지 않고 부채질합니다. 알들을 통째로 먹으려고 달려드는 물고기들이 나타날 때마다 등에 가시를 곤두세웁니다.
사생결단으로 맞서 싸웁니다. 그렇게 알들을 지키는 보름동안 먹지도 못합니다. 자지도 못합니다. 알들이 부화할 때까지 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다 투자해서 뒷바라지할 뿐입니다. 드디어 부화한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쯤이면 죽음을 맞습니다. 흩어지는 자신의 몸까지 새끼들의 영양분으로 공급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마치 가시고기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도 모른 채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 프랑스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웠지만 마음껏 그리워할 수 없었습니다. 사무치듯 밀려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분노로 변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자신의 기억 밖으로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아니 몰아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삭제시켰습니다. 순간, 아버지와 함께 감정도 종료되었습니다. 10년은 아버지를 기독하게도 미워하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10년은 어머니를 떠나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혼자 남겨진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그리움은 밀어냈습니다. 외로움은 무심한 척 넘겼습니다. 아버지의 땅인 조국과도 완벽하게 등을 진 채 살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명 및 전기에 관련된 일들을 관리하는 책임자Gaffer가 되었습니다. 한 영화감독으로부터 등지고 살아왔던 한국으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자신을 치료해주던 담당의사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이 촬영장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그동안 목마르게 그리워했었지만 애써 외면했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들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아니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프랑스로 보내던 날,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아버지가 왜 그렇게도 단호했었는지 냉정했었는지 매몰차게 몰아붙였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시했었고, 때로는 거부했었고, 심지어 왜곡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살점마저 내주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가시고기가 되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워하는 것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한결 쉬울 거라는 생각에 애써 밀어냈던 아버지를 그제 서야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 있었습니다. 오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지낼 때 사랑하셨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원수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의 경향성이 농후하며, “죄 곧 나, 나 곧 죄”이고, 지극히 작은 죄 앞에서도 여지없이 흔들리고,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는커녕 오히려 질펀하게 앉아서 즐기고, 전적으로 타락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부패했을 때 그렇기 때문에 가치와 의미가 전혀 없는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약속대로, 가장 적당한 때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거룩한 몸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절대적이고 영원무궁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고생도, 난관도, 증오도, 배고픔도, 노숙도, 위협도, 협박도,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최악의 죄들도,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천사적인 것이든 악마적인 것이든, 현재 것이든 장래 것이든, 높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든 끊어놓을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배워서하는 저와 여러분의 제한된 사랑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확고하고 구체적이며 영원하고 본질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15:34b)라는 증거에 따르면, 영원 전부터 완벽하게 하나였던 하나님과 철저하게 단절되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장이 터져서 물과 피가 분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확증하셨다συνιστησιν.”(롬5:8b)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이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현재 진행 되고 있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고 부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건방진 행각이 들어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남몰래 가슴이 메어 울 것이다. 여호와의 양떼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통곡하며) 눈물을 쏟을 것이다.”(렘13:17) / “너희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제책이 없다. 그리고 파멸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제 나(여호와)에게는 너희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은밀하게 슬퍼하고 통곡하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보며 슬퍼하십니다.
통곡하십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부어주십니다. 아니 당신 자신을 내놓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었는지 몰랐습니다. 오해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마음에서 아주 지워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진실을 알았을 때 오열했습니다. 비로소 사무칠 정도로 그리웠지만 애써 외면했던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아닙니까?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분노하는 것은 아닙니까? 마음에서 아예 강제로 지워버린 것은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외면한다 할지라도, 당신 여호와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사63:16a)라는 선지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저와 여러분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성민 이스라엘이 모르는 척 외면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혹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나의 눈앞에 있다.”(사49:15-16)라는 선포대로, 어미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일은 혹시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잊어버리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들여다볼 수 있도록 가까이 계십니다. 시선을 떼지 않으십니다.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주십니다.
하는 일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실패를 거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피고석에 앉으셨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이나 저와 여러분 안에서는 눈을 씻고 찾고 또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크고 놀라우며 기상천외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애써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마음의 중심에 온전히 모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마치 가시고기처럼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