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신 ‘대산 종사’ 12-- 김상수 병원장
-스승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선물이요 법문이다
원광 2011년(원기96년) 12월호 취재- 강법진 기자
그는 7년 동안 대산 종사(당시 종법사)의 곁을 지켰다.
매일 아침, 스승님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원광대학교 교수 겸 의사로서 매일 그렇게 하기란 힘들었을 터.
그러나 오히려 그 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고 말하는 김상수 병원장(서울마이크로병원).
정성으로 모시면 되지
대산 종사와 그와의 인연은 매우 흥미롭다.
김 병원장은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집을 대전으로 옮겨야 했고,
그는 병원일 때문에 홀로 익산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선(禪)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총부 인근 지역을 찾다가 총부 남자원로원에 방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렇게 그의 총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죠.
아침이면 원로 스승님들을 따라 대각전에서 좌선을 했고, 함께 식사도 했으니까요.”
그것도 잠시, 그는 방을 비워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던 중 “중앙중도훈련원에 방이 있으니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절묘한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가 신기했다고.
중도훈련원의 생활에 적응되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훈련원 원장으로 있던 김이현 원로교무가
“대산 종사의 몸이 좋지 않으니 가서 살펴 드리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전공이 내과가 아니었기에 거절하려 했다.
그러자 “정성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다시 권했고,
‘그래, 정성이면 얼마든지 하겠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대산 종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그에게 변화가 생겼다.
“대산 종사에게 직접 받든 법문은 없었어요.” 하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고.
그 이유는 스승을 뵈면 뵐수록 그의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차 온통 빛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산 종사를 모시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며 법문이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 아침이었다.
김이현 원로교무가 대산 종사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 놓은 교단의 계획이라고 하면서
서류 몇 장을 보여주었다.
그 서류는 대산 종사가 볼펜으로 힘 있게 눌러 쓴 메모장이었다.
그의 눈길은 ‘서울에 大병원(안양)’이라는 문구에서 멈췄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증이 일어났다.
바로 조실(왕궁)로 발길을 돌린 김 박사,
대산 종사가 병상에 누운 채 그를 맞이했다.
“(대산 종사님의)서울 大병원에 관련된 메모를 보았는데요.”라고 했다.
그러자 대산 종사는 아픈 몸을 일으 세우더니,
그에게 병원을 왜 서울에 만들어야 하는지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김 박사는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이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참이 지난 뒤 군포(현 원광대 산본병원)에 병원이 세워졌고,
그는 그곳의 초대병원장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열정으로 교화하다
대산 종사를 뵙기 전에는
‘앞을 내다보는 어른이고, 신비한 분이며, 이적을 나타내는 분이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신비한 일을 많이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옆에서 지켜본 대산 종사는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었고,
적재적소에 맞는 법문을 했으며, 이적은 없었다.
오히려 인간적인 스승의 모습이 그가 생각하고 있던 성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진짜 이적은 따로 있었다.
대산 종사가 하와이국제훈련원 봉불식에 간 것이라는데.
그 당시 대산 종사는 고열로 인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하와이를 간다니 의사로서 만류했다.
그러나 대산 종사가 그토록 오매불망 염원하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뜻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도 스승을 따라가 묵묵히 도왔다.
하와이에서 지내는 동안 대산 종사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든 일들을 처결해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김 박사는
‘대산 종사님은 교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도 기꺼이 불태우는 그런 분이시구나.’라는 생각과 ‘대산 종사님은 당신을 통해 나를 교화시키고자한 것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오히려 스승에게 무엇을 해드린 것 보다 많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다.
항상 내 곁에 계시는 스승님
산본병원에 있을 때였다.
대산 종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급히 총부로 내려갔다.
그는 의학자로서 최선을 다해 보고 싶은 마음에
대산 종사를 서울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스승을 서울로 모실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대산 종사는 조금 호전되었다.
병문안을 온 교무들이 성가를 부르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을 들어 일원상을 그려주었다.
그것도 잠시 뿐, 다시 건강이 악화되면서 익산으로 모셔야 했다.
김 박사는 종법실(구조실)에서 의식이 없는 대산 종사의 마지막을 마음 졸이며 지켜봤다.
“그때 제가 해야 할 일은 없었어요. 그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뿐이었죠.
그런데 내가 왜 그쪽으로 갔는지….” 잠시 그때를 회상하며 이어지는 말,
“제가 스승님의 발을 무심코 잡았어요.
그런데 발이 움직이는 거예요. 너무 깜짝 놀랐죠.
꼭 스승님이 저에게 마지막으로 괜찮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때 알았다. 이적이 진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며칠 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산 종사는 거연히 대열반의 길을 떠났다.
김상수 병원장은 요즘도 제일 먼저 병원에 출근한다.
그리고 자신의 옥탑 방으로 향한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선을 한다.
한동안 ‘스승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라고 화두를 걸어두면
그를 찾아와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말하는 그.
“이젠 알죠. 스승님은 늘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요.”
그리곤 환히 웃어보이는데, 그 미소 속에 대산 종사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