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욥기 10장 “하늘 향해 토해놓는 절규”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욥기 10:1)
욥이 곤란 중에 입을 엽니다. 그의 말을 하나님을 향한 넋두리나 세상사를 향한 불평으로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 해야 할 말을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어리석음을 범치 않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달려가 하소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의혹의 소지만 불거질 뿐입니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서만 당신의 마음을 토해 놓으십시오. 그분은 꾸짖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기 10:2)
그리스도인은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실을 초월한 듯 히죽거리는 삶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성도의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나의 신음과 아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곤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달려가 그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무지하고 오류가 많은 인생이 연약함 가운데 부르짖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한계 속에 사는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 복된 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욥은 아직 소망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앞서간 성도들이 욥과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1-2)
원통함 중에 우리의 기도는 빛을 발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시련 중에서야 비로소 진정성 있는 기도를 드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악인의 핍박,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절박함이 없다면 자발적으로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시련 중에 주를 찾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침묵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사랑의 발현(發現)이었습니다. 여기, 완전한 욥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입시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버림을 받은 어린양이 하나님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영원한 고통을 대신 당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영원하고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외치시는 그분은 원통함으로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외침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인 구원하시려 하늘 향해 토해놓는 절규였던 것입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