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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키
10월 30일 저녁 7시 한강 성당에서 구약 특강을 해주셨는데, 구약 텍스트 중에서 소예언서 부분이었습니다.
소예언서는 호세아서, 아모스를 시작으로 해서 말라키로 끝이 나는데, 시작 부분인 호세아, 아모스서가 아니라 말라키 예언서를 함께 보기로 하였고, 그 이유는 마지막 후반부에 가서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약의 마지막 책이 말라키서에요.
성서는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문학, 예언문학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언서는 큰 묶음으로 보자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12 소예언서인데 그 12 소예언서 중에 마지막 권이 말라키서에요.
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을 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말라키는 우리말이고
히브리말로 말앜은 "사자(사신), 천사"라는 의미, 키는 나의,라는 소유격으로 말라키는 나의 사자(使者)입니다.
엘은 하느님, 리는 나의로 "엘리"는 "나의 하느님"과 비슷해요. 또 "압" 그러면 아버지라는 의미고 나의 아버지는 "아비"라고 하는 것처럼 히브리어도 우리말과 유사합니다.
말라키는 그리스어로 말라키아스, 유럽어로 사용할 때는 Malachi로 쓴다고 해요.
그렇다면 말라키라는 것은 사람의 이름일까요? 아니면 보통 명사일까요?
나의 사자?라는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 신부님의 이름이 승정인데,
서양분들이 가끔 신부님에게 "동양 사람들 이름에는 뜻이 있다고 하던데, 너의 이름은 어떤 뜻이야?"
신부님의 이름은 오를 "승", 수정 "정"으로 쓰셔서
"응, 내 이름은 라이징 크리스탈, 올라가는 수정이야."
"우와!! 대개 멋지다."
"음, 그렇지?! 발음하기는 좀 힘들지만.." 그런 설명을 해주신 적도 있다고 해요.
부모님이 지어주신 우리들 이름에 대한 의미도 다시금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자는 일반명사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이름일까? 이것을 가지고 성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토론을 하는데,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서 "하느님(야훼)은 자비로우시다"로 하나의 고백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문장입니까? 사람이름입니까? 이름이에요. 적어도 신약 성서에서 사용될 때는 이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요수아"도 누군가의 이름이지만 뜻을 갖고 있어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여호수아"
하지만 그와 같은 뜻보다는 누군가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백이 사용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죠.
즈카르야와 말라키
º 제2 즈카르야와 말라키 : 익명?
전반부 + 후반부(나중에 쓰여진 것은 익명)
말라키가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라는 주장이 강했는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렇지 않다.라는 주장이 생겨났어요.
특히나 12 소예언서는 말라키서도 있지만 즈카르야 예언서도 있는데, 즈카르야 예언서는 전반부와 후반부 중 전반부는 좀 더 일찍 쓰여졌고, 후반부는 좀 나중에 쓰여졌는데,
나중에 쓰인 후반부는 저자가 자신을 밝히지 않아요.
그냥 자기가 본래의 즈카르야 저자인 것처럼 뒷부분에 이어서 씁니다.
옛날의 고대의 작품들은 익명으로 쓰인 것들이 많은데 그 이유로는
첫째, 내 이름으로 썼다가 잘못하면 잡혀갈까 봐.
둘째, 내가 이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우리 스승님의 영향을 받았어(스승의 이름으로 출판)라는 의미로 익명성.
그래서 영문학 하는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셰익스피어가 한 사람이 아닐 것이야~~~"
그렇게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흉내 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즈카르야서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즈카르야와 함께 말라키서도 어떤 익명의 작품이 아닐까?라는 설도 있고,
조금 더 중요한 내용도 차차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말라키서가 쓰인 때?
언제?
º 혼인에 관한 말라키와 에즈라의 관점 - 주전 5세기
º 말라키는 12 소예언서 중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인가?
요엘이 더 나중에 쓰인 것으로 보임(제2 즈카르야?)
다니엘(주전 2세기?)
º 말라 3,22-24는 12 소예언서 전체의 에필로그!
말라키와 에즈라는 혼인에 관해서 공통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혼인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스라엘 여자와 혼인하고서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말라키와 에즈라에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에즈라서가 주전 5세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와 비슷한 테마인 말라키도 주전 5세기 경에 쓰였을 것이다.라는 설과,
12 소예언서 중에서 꼴찌에 해당하는 말라키서니까, 가장 나중에 쓰인 책일까?라고 했는데, 요즘 연구가들은 요엘서가 더 나중에 쓰인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5세기나, 12 소예언서 중에 가장 나중에 쓰인 책이 말라키서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왜 맨 끝에 위치해 있을까? 이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아무튼 제2 즈카르야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고, 분명한 것은 구약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책은 오늘날 구약 성서 연구가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다니엘서일 거야!"하고 말합니다(다니엘서 주전 2세기? 니까 다니엘서가 12 소예언서보다 더 나중에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부분은
말라키 에필로그라고 부르는 3,22-24 맨 마지막 부분인데, 이 내용은 12 소예언서 전체의 에필로그다! 하고 말하고,
12 소예언서는 12권의 책을 한꺼번에 묶어서 12 소예언서가 아니라 어떤 편집자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12권의 소예언서를 하나로 묶은 한 권의 책으로 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는 네 권의 예언서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해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그다음에 12 소예언서라고.
12 소예언서는 어떤 편집자가 하나로 자신의 계획 아래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한권의 책이라고 했을 때 말라키 3,22-24절은 단지 말라키의 결말이 아니라 12소예언서 전체의 에필로그다.라고 볼 수 있겠다. 하는 것이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성경 번역본 중에서 예로니모 성인이 번역한 불가타라는 번역본이 있는데 사실은 가톨릭 교회에 공인 성서예요.
오늘날 우리 신앙을 묶어 주는 가톨릭 교회는 굉장히 성경 번역이 많이 있는데, 가톨릭 교회의 성서는 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 성서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말라키서가 우리말 번역도 히브리말 번역도 모두 3장으로 되어있는데 불가타 성서에서는 4장으로 되어있습니다.
3장 또는 4장?
VUL과 NRSV
3,19-24 => 4장
따라서 말라키 3,19-24절이 불가타 성경을 이어받고 있는 영어 번역본이 있는데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은 4장으로 나뉘어 있더라.
어디서 장을 끝내느냐에 따라서 모든 성경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 정도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경에 관한 어떤 책을 읽었는데 말라키서 4장 1절에 관해서 이야기되고 우리 구약 성경에는 4장 1절이 없고...
"아하! 예전에 한강성당에서 최신부님이 4,1절이 없을 때는 말라키서 3,19절을 찾아보라고 하셨지!"라고 찾으시면 나올 것이라고 하셨어요.
말라 1,1 신탁. 말라키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내리신 주님의 말씀(dabar)
[신탁 /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말씀/ 말라키의 손으로]
신탁을 영어에서는 oracle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제나 예언자에게 "이것을 사람들에게 내려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요나에게 "너는 니네베로 가서 며칠이 지나면 니네베는 망한다.라고 전해줘."라는 것도 하나의 신탁입니다.
신탁을 히브리말로 직역하면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말씀", "말라키의 손으로"
구약성경에서 손가락, 손, 팔, 이런 표현이 나오면 누군가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말라키의 능력으로, 말라키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는데, 그것이 신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 dabar는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어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영어에서 말하다고 쓰이는 말에는 say, tell, speak, 등이 있는데, 히브리어에는 대표적인 두 단어로 dabar, amar가 있습니다.
amar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dabar는 그 말과 함께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dabar는 사건, 이벤트가 묶여 있어요.
오늘날 번역할 때에도 성서신학하시는 분들은 "예수의 언사"라고 쓰는데, 그때는 dabar의 개념입니다.
예수의 언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사건이라는 의미.
마르 8장에 나오는 예수의 언사에 따르면도 사실은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라는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 그 표현으로 '언사'라는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그 사건을 따르면' 또는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건에 따르면' 이런 식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dabar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넘어서는 표현으로 말씀 자체가 실현되는 사건이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신탁인데,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언사가 말라키의 손으로, 말라키의 능력을 통해서, 예언자적인 능력 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이스라엘에 전한 야훼의 언사다.라고 알 수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좀 특별한 표현인데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제키엘을 읽어보면 예언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있어요. 대개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야기 한 다음에 "주님의 말씀이다." 하고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시작과 끝에 하나의 예언양식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사 때 독서를 읽고 나서 독서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독서자는 일종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에요. 왕직, 사제직, 예언직 중에서.
하지만 말라키에서는 이런 일반적인 양식이 아니라,
"신탁"이라는 양식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이 즈카르야서 9장에서 발견됩니다.
즈카 9,1 신탁
주님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고 다마스쿠스에 머무른다.
즈카 12,1 신탁
이스라엘에 관한 주님의 말씀.
따라서 즈카르야서 1장~8장은 제1 즈카르야이고, 그다음에 9장, 10장, 11장이 제2 즈카르야이고,
12장, 13장, 14장이 제3 즈카르야입니다. 이것이 즈카르야서 전체입니다.
그리고 말라키서 1장, 2장, 3장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많은 학자들이 [신탁- 신탁- 신탁]이라는 양식이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에서만 발견되는 거니까, 말라키서가 본래 즈카르야서에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모두 3장씩 되어있으니까,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그리고 말라키 1장, 2장, 3장 이므로 모두 한 권의 책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말라키서를 나눴을까? 이건 우리들도 생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본래 한 권이었던 즈카르야서를 왜 마지막 3장을 따로 떼어내서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 두 권으로 만들었을까? 12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이 12라는 숫자가 굉장히 중요한가 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에서 레위 지파를 하나 떼어냈는데, 그래서 12라는 숫자가 맞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요셉 지파를 둘로 나눕니다. 므나쎄와 에프라임으로, 그렇게 꼭 12라는 숫자로 맞추고 싶은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유다 이스카리옷이 배반해서 열두 사도을 맞추려고 주사위를 굴려 마티아를 뽑습니다.
신부님도 이 부분을 보면서 왜? 이렇게 12에 집착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한강 성당도 14 구역으로 있는데, 본당 신부님이 성경에 집착하는 분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12 구역으로 조절하셨을 겁니다. 아무튼 여기서 9장 12장, 그다음에 말라키 1장 1절에 모두 같은 양식이 발견됩니다. 일반적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에 나오는 그런 예언 양식이 아니라 "신탁" 그러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런 양식들이 발견되더라, 이런 것들에 관해서 학자들이 재밌어한다. 정도로 생각을 해주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말라키라는 말이 또 말라키 예언서 안에서 등장하는데요,
말라 3,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ㅡ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ㅡ
히브리 말에서 직역을 하셨는데
보라/ (내가?) 말라키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길을 닦으리라. / 나의 면전에서
그리고 홀연히 / 그의 성전으로 올 것이다. / (그) ADON
너희들이 찾는
그리고 계약의 말앜 / 너희들이 좋아하는 / 보라 / 그가 온다
야훼 쩌바옽의 말씀(amar)
여기서는 dabar가 아니라 amar가 쓰였습니다. 신부님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보라/ 말라키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길을 닦으리라. / 나의 면전에서
그리고 홀연히 / 그의 성전으로 올 것이다./ (그) ADON
너희들이 찾는
부분이신데, 말라키를 보낸다에서 말라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닐 겁니다. (나의 사자를) 보낸다 일 것이에요.
그리고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리고 홀연히 그의 성전으로 올 것이다.
(그) ADON은? 말라키라는 말이 사자(누군가가 보내는 사람)라는 뜻으로, ADON은 그 보내는 주인을 의미. 로서
성경에서도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성경에서는 '주님'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어쨌든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뜻은?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고 그가 길을 닦고, 그리고 그 사자를 보낸 주인이 성전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이 유배를 끝나고 먼저 일부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의 거처인 성전을 짓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전으로 야훼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와 같은 그림.(이것을 첫 번째 세줄에서 읽을 수 있음)
네 번째 줄에서는 그 앞선 내용을 다시 한번 축약해서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찾는
그리고 계약의 말앜 / 너희들이 좋아하는 / 보라 / 그가 온다
야훼 쩌바옽의 말씀( amar)
여기서 말하는 계약의 말앜은? 그렇게 새로운 성전을 짓고 너희는 새로운 계약의 백성이 되는데, 그 계약을 맺을 때, 내가 먼저 보낸 사자가 그 계약의 중개자가 되는 그런 어떤 모습으로, 그 계약의 말앜 너희들이 좋아하는 보라 그가 온다.
따라서 말앜이 오는 이유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건데, 그게 바로 하느님보다 앞서서 와서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계약을 준비하는 그 계약의 말앜을 말한다. 고
신부님은 3,1절의 텍스트를 설명하셨어요.
쉽게 이해하셨나요? 어렵죠? 이 한 절만 가지고 두 시간을 설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2분 만에 설명하시려니 어려움이 있으시다고 ,,
아무튼, 하느님께서 사자를 보내는데 그 사자가 원하는 목적은? 하느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맺을 계약을 준비하는 것이 사자의 역할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말라 2,7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말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많은 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데, 신명 17,8-13절을 보게 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신명 17,8-13은 너희들 가운데 송사할 것이 생기면 너희들끼리 싸우지 말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장소, 그러니까 성소에 가라.
성소에 가면 사제나 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판결을 하면 그 판결에 따라라.
따라서 너희들이 서로 다툴일이 있을 때, 사제에게 가서 물어보면, 그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이기 때문이다.(만군의 주님의 말앜)
오늘날에는 그런 문제가 많이 없습니다만, 신부님보다 앞세대의 신부님들 내지는 서양에서 보면은 공동체 안에서 다툼이 있을 때, 최종적인 판결을 본당 신부님들이 하셨다고 합니다. 굳이 법원으로 가지 않고, (기록들 안에서 확인)
요즘에 사제들에게 그것까지 하라고 했으면? 무지하게 힘들었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당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면, 우리는 본당 신부님과 상의해야 합니다. 신부님들도 여러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주교님들에게 말씀하신다고...
주교님들은 더 큰 그림을 가지고서 보시니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라키라는 나의 사자라는 인물은?
아마도 사제일 수도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말라키서의 내용이 제의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12 소예언서에 형성과정을 어떻게 볼까요?
12 소예언서의 형성과 편집
º 12소예언서의 형성과정?
ㅡ 유배 전후 : 호세 + 아모 + 미카 + 스바
유다의 멸망과 유배
ㅡ 유배 직후 : 하까 + 즈카(1-8)
성전재건과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
ㅡ 점진적 통합:
Ι+ΙΙ+요엘 오바 요나 나홈 하바
즈카의 확장 : (1-8장) +(9-11장) +(12-14장)
말라키의 종말론적 결론
유배를 전후해서 호세아서, 아모스서, 미카서, 스바니야서가 쓰였다. 그리고 유배 직후에 하까이와 즈카르야서(1-8장)가 쓰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성전 재건과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각각의 책들이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점진적 통합이 일어나면서 먼저 1(호세아 아모스 스바니야와) 2(하까이와 즈카르야서가 하나로 묶여서 편집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때 요엘, 오바드야서, 요나서, 나훔서, 하바꾹서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제 한권의 책으로 편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즈카르야서가 확장이 일어났는데 (1-8장)의 본래의 내용에 (9-11장)에 (12-14장)이 합쳐졌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말라키서가 맨 마지막으로 들어오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12 소예언서가 종합적으로 갖추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12 소예언서의 형성과정입니다.
지금까지 말라키 예언서의 개괄적인 내용을 봤다면, 이제부터는 그 구조를 보려 합니다.
구조 : (법정의?) 논쟁
말라키서 1,1은 제목이고, 3,21-24는 에필로그인데, 중간에 몸통만 갖고 보면 모두 여섯 개의 구조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라키 예언서는 예언서인데도 특별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서는 일반적으로 "어느 날 하느님의 영이 이사야 예언자에게 내렸더라.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너, 아하즈 임금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를 전해." 하니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 임금에게 가서 "임금님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는데,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을 임금이 듣던지, 듣지 않던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서의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말라키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말라키서는 대화적이고 때론 논쟁적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듯이~ 따라서 말라키서에서는 굉장히 많은 질문이 나옵니다.
º 1, 2-5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에 관해서 하는 질문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 질문과 함께 예언자가 답변하는 것이 말라키서 형식
º 1,6-2,9 "저희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까?"
1,7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더럽혔습니까?
º 2,10-16
2,14 "어찌 이러십니까?"
º 2,17-3,5
2,17 "저희가 어떻게 싫증 나게 해 드렸습니까?"
º 3,6-12
3,7 "어떻게 하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3,8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º 3,13-21
3,13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좀 대드는 듯 한, 이와 같은 태도를 이런 질문들 안에서 보이는 거죠. 이런 질문들과 함께 말라키 예언서는 질문들에 관해서 대화하면서 예언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지혜문학에서도 나오는데,
집회 15,11 "주님 때문에 잘못에 떨어졌다."라고 하지 마라
집회 15,12 "그분께서 나를 빗나가게 만드셨다."라고 하지 마라
집회 16,17 "내가 주님을 떠나 숨어 있으니 저 높은 곳에서 누가 나를 기억하리오?" 내가 수많은 군중 속에 있으니 무수한 피조물 가운데 나는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하지 마라
집회 16,22 "누가 의로운 위업을 선포하리오? 누가 참고 기다리리오? 그분의 계약은 멀리 있고 모든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마지막에야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이 하느님한테 대드는 혹은 하느님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집회서에서도 지적이 되면서, 거기에 대한 반론을 펼치면서 참다운 지혜란 무엇인가? 에 관해 집회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비슷한 논쟁적인 모습이 복음서 안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루카 4장에서
루카 4,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 하는 속담을 들며 내가 카파르 나움에서 하였다고 하여, 여기 내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대화식으로, 논쟁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와 같은 모습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말라키 예언자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1,2-5
º 1,2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
에돔의 심판 - 주전 550년경 바빌로니아 제국
유배 후 예언에서 자주 등장하는 테마: 오바드야!
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유다와 에돔을 구별합니다. 유다는 587년에 망했습니다. 에돔은 주전 550년에 망했어요. 둘 다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서 망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바빌로니아가 망하면서 유다는 돌아왔죠.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에 성전을 세우고 그리고 다시 나라를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돔은? 돌아오지 못한 채 망했어요.
유다와 에돔을 비교하면서 "봐라, 하느님이 너희를 특별히 사랑하시니까, 너희가 이렇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새로 재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특별한 축복이었는데 너희는 그것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 옆나라 에돔을 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 이게 말라키 예언서의 하나의 답변의 모습
비슷한 테마가 오바드야서에서도 등장해요.
이웃 민족에게 일어난 일과 유다에 일어난 일을 비교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이신다는 것을 예언자가 백성들에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숙한 태도는 아닙니다. 타인에 불행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은,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영화 중에서 지진과 같은, 그런 영화를 보는 심리 중에는 '저런 일이 나한테는 안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는 안도에 마음으로 대부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전쟁에 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심한 트라우마를 겪는데, 그때 그들을 치료한 정신과 의사들이 말했는데, 그들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유가 전쟁 중에 옆에 있는 전우가 총을 맞아 죽을 때 드는 첫 번째 생각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가 그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를 의사들은 말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부님이 예전에 본당 신부를 하실 때, 신자들과 함께 등산을 가셨는데 설악산에 새벽 2시쯤에 도착을 해서 밤새고 산을 타요. 산정상에 올라가서 일출을 보고 설악산 동쪽으로 내려와서 아침밥 먹고 다시 버스 타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데 버스 안에서 신부님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착한 마음으로 '주님, 이번 우리들의 산행 중에 나쁜 일이 생겨야 한다면 저에게 생기게 해 주시고 우리 신자들은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셨는데, 하느님이 그런 기도는 꼭 들어주신다고...
그때 산에 올라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발톱이 빠지셔서 걷는데 참 어려움을 느끼고 돌아오시고 기도를 하면서 '주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는데 이런 기도는 꼭 들어주시네요?!'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나신다고....
우리가 뜻밖에 선해질 때가 있죠, 하지만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게 되는 것 같다고.. 몇 년 전에 일본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지진에 관한 방송을 보시다가 거기에 있는 티브이를 던져버릴 뻔한 일이 있으셨는데 일본에서 지진이 난 방송을 15분가량하다가, 뒤이어 뒤따르는 방송의 내용이 '일본 대지진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방송을 보고서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나? 옆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리 일본과 우리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지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텐데.... 그것에 대한 연민과 도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 밥그릇에 미치는 영향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시고 슬프셨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둠을 사회적 현상 안에서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밝은 모습으로 착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도 또한 많다고....
이어서 1,2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로 이어지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렇지 않으셨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도움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가 분명히 봤잖아. 옆나라 에돔을 한번 봐.
1,6-9
º 사제들과 제사에 대한 비판
1,8 "총독" : 페르시아 시대를 전제로 함
1,10 "성전" : 주전 515년에 지어진 것으로.
2,4 : 그러면 너희는 레위가 맺은 나의 계약이 살아 있도록 내가 이 계명을 내렸음을 알게 되리라.
=> 말라키서는 페르시아 시대에 성전이 지어진 후에 쓰였을 것이다.
1,11 : 그러나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내 이름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다.
내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기에, 곳곳에서 내 이름에 향과 정결한 제물이 바쳐진다.
ㅡ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ㅡ
º 유다 밖에 있던 성전? 예를 들어 Elephantine, Leontapolis!
º 야훼 신앙의 보편적 재해석? 에즈 1,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이것은 사제들과 제사에 대한 비판입니다. 따라서 말라키 예언서는 제의적이 관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제들과 정성스럽지 않는 그와 같은 제사에 대해서 말라키 예언서는 굉장히 슬퍼합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신자분들이 신부님께 와 말씀하시는 것 중에 "신부님 저희 본당 신부님이 새로 오셨는데, 미사 준비를 잘 안 해주시는 것 같아요. 강론 말씀이 좀 그래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실 때마다 신부님도 함께 반성을 하시는데, 사제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 제의 자체가 정성스럽지 않은 모습은, 이미 구약 성경 안에서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데, 많은 사제들이 경고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제들만 그 말을 들어야 할까요? 신자들도 함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 미사 때에 강론이나 공지 사항이 조금만 길어지면 굉장히 분해하시면서, '오늘 12시 10분까지 했어요....' 그런 우리가 미사에 올 때 또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기쁜 마음과 설렘을 가지고,
여기서 '총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는 페르시아 시대를 전제로, 페르시아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이 총독이 있었어요. 그리고 성전이라는 단어도 5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오늘날 구약 성경 연구가들은 생각합니다. 따라서 말라키서는 적어도 페르시아 시대에 성전이 지어지고 난 후에 작성되었을 것입니다.
2,4절은 이스라엘에 사제직에 관한 것에 대해서.
그다음에 1,11절에 나오는 부분이 조금은 난해한데, 원칙대로 얘기하자면 제물과 향이 바쳐지는 곳은, 예루살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곳곳에서 그런 제물과 향이 바쳐진다고 말라키 예언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유배를 전후해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있는 작은 도시들인 엘레판틴과 레오톤폴리스 안에 성전이 지어져요. 따라서 그런 유다 밖에 지어진 유다인들의 성전, 아니면 그들이 성전이라고 불렀던 그곳까지를 포함해서 1,11절이 그렇게 얘기했다.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조금 극단적인데요.
유다의 신학이 유일신관으로 넘어왔는데, 그래서 유다사람들이 "저 페르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 나라 신들에게 제사는 지내는데, 그게 다 사실은 하느님한테 제사를 드리는 거야." 하고 그것에 관해서 보편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라고 이 구절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견 중에 어떤 것이 맞을까? 하고서 학자들이 토론하는데 신부님은 첫 번째 엘레판틴이나 레오톤폴리스에 사는 성전에 지어진 제사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어제저녁까지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낼 저녁까지 생각은 아직은 모르시겠다고....^^
재밌는 것은, 저 엘레판틴이라는 도시인데 이집트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유다인 공동체가 있어요. 그리고 그곳에 어떤 건물 같은 게 하나 있는데 그 건물 안에 그들은 계약 궤가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학자들이 그곳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데 아무도 못 들어가게 쇠창살로 막아놨습니다. 그리고 유다인 중에서 한 명씩만 뽑혀서 거기에 들어가고, 죽을 때까지 못 나옵니다. 그곳을 지켜야 해서. 2024년 현재까지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여기에 계약 궤가 있고 메시아가 올 때까지는 계약궤를 지킨다. 그러면서 마치 수도자들처럼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씩 그곳을 들어갑니다. 거기서 죽을 때까지 지키는,
그다음에는, 2,10-16절입니다.
2,10-16
º 혼혈혼과 이혼
º 이스라엘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 : 1 열왕 11,1-8(솔로몬과 그의 아내들)
대표적인 예로, 솔로몬이 임금이 되고 나서 세력을 넓히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넓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래서 이방민족의 공주들과 결혼을 했다. 그렇게 솔로몬에게 시집온 이방여인들이 자신의 신을 섬길 때 솔로몬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내용.
구약에서 보면 혼혈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구절로 이사악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야곱과 에사우.
에사우가 이사악의 속을 썩이는데, 야곱과 장자권 이외에도 그에 앞서서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속상한 이사악과 레베카는 야곱만큼은 꼭 이방여자가 아닌 이스라엘 여자와 결혼시키려고 했고 후에 레아와 라헬과 혼인을 합니다.
반면에 그와는 다르게 혼혈혼이 문제가 안 되는 경우도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 모세를 보면 이방 여자들과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비난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비난하는 미르얌이 벌을 받는 장면이 민수기에 나옵니다.
더군다나 룻기의 경우에는 이방여자인 룻의 모습을 찬양하는? 칭찬하는? 내용이 성경 안에서 한 권의 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도 여러 가지로 그것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있지 않는지, 하지만 이스라엘에도 중요한 것은,
그가 설혹 이방인이라도 야훼를 섬긴다면, 그가 혹 이스라엘인이라도 야훼를 섬기지 않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우리 식구다.라는 논리가 구약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는?
당시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스라엘 여자들과 결혼하고 이혼한 후 이방인 여자들과 결혼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말라키 예언서나 에즈라에 기록들을 보면 그것에 대해 옳지 못함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문제가 별로 없는데, 신부님이 20대 때만 해도 가톨릭 교회에 영세받겠다고 오시는 여성분들이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금지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될래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그 당시 1980년대에만 해도 여성들이 이혼하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 되는 시대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혼한 여성들이 보호받지 못하였던 부분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위자료도 받고, 양육비도 받고 그러하는데...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 이혼에 대한 생각들도 바뀌는 시대적 상황이지만, 1980년대 즈음에는 결혼하고 나서 이혼당하는 게 두려워서 '가톨릭 교회는 그렇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그 자체를 여성을 보호해 주는 시스템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2,17-3,5절
º 2,17 : "공정의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그 질문에 대한 대답 : 말라키를 보냄!
이사 40장; 탈출 23,2
공정의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에 대답은? "아 여기 있어, 내가 말라키(나의 사자)를 보냈어."라는 대답을 의미
이렇게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파견하시는 대답은 이사 40장, 탈출 23,2으로 그가 바로 계약의 천사(말앜)야.라고 하면서 최종적인 정화와 심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날, 즉 "야훼의 날이 등장" 합니다. 종말론적인 시간에 관해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3,6-12절
º 십일조(tithe)
오늘에 대한 관심으로 현재,
사제적인 관심으로 십일조와 예물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십일조와 예물을 드려야 하는지에 관해 말라키 예언자는 이야기합니다.
3,13-21절
º 17절 +21절 : "내가 나서는 날" / 19절 : "화덕처럼 불붙는 날"
종말론적인 최후의 날을 이야기하면서 신정론적인 신학을 펼친다.
º theodicy : 신정론(神正論)
"아, 우리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부당하다고 여겨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최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다 잘될 거야.(동양식 표현으론: 모두 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어)"
신정론을 굉장히 높은 신학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정론에는 위험이 있는데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정론 안에서 지나치게 축소될 수 있다는 것.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많이 축소될 수 있다는 거로,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테니까, 나는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네???? 그렇게 되면 신정론이 잘못해석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예를 들어, 누가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데 위로의 말을 건넨다는 것이 "야, 하느님이 도와주실 거야."
그런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더 아픈 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º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 : sectarianism?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종말의 날에 구원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나누신다는 것, 그들이 갖고 있는 힘든 환경 내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우리들에게는 자주 이런 생각이 듭니다. sectarianism, 가톨릭 교회는 구원받을 거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회가 갖고 있는 교회의 이미지는 구원의 방주였습니다.(여기 타면 살고, 여기 살지 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교회관이 바뀝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다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만 구원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이루면서 기도하되,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 온 우주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
그와 같은 보편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라키 예언자의 시대에서 예언자(저자)는 거기까지 신학적 지평을 확장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구원받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은 말라키 예언자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제3 이사야 56장, 성경 안에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해에서 발견된 쿰란, 사해문서 안에서의 경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에 그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을 지키는 것이 녹록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편적인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많은 문턱들이 낮아져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누가 성당을 간다고 때리거나 잡아가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잖아요. 옛날에 그렇지 않았던 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나가고, 잘 지켜나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 두렵지 않아." 하는 사고방식이..
3,22-24절
2 epilogues
22절 : torah 여러분 토라를 잊지 마십시오. 토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23절 :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
말라키 = 엘리야?
º 23절~ 24절 : 22절은 토라
23~24절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
º 제3 이사야 또는 사해문서 ㅡ 제2성전 시대의 경향
에필로그가 둘로 나뉩니다. 말라키 예언서는 예언서이면서도 좀 특별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예언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영감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환시나 꿈을 통해서, 또는 환청을 통해서 받고 그것을 백성에게 전하는데(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런데 말라키는 자신의 영감을 토라에서 받아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예언자적인 영감의 출발점이 토라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22절 : 토라를 잊지 마십시오, 토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유배에서 돌아와서 앞선 세대가 토라를 잊어버려서 땅을 잃어버리게 된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신부님이 말라키 예언서를 고르신 이유? 바로 23~24절인 두절 때문에
23~24절에서는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날이 오기전에 내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엘리야가 와서 어버이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어버이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파멸을 당하지 않도록, 내가 엘리야를 보내겠다!
종말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부분이 12 소예언서에 마지막 구절의 이야기예요.
"엘리야를 보낼 테니까,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까지도 종말에 휩쓸릴 거야."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12 소예언서가 마무리됩니다.
이 구절이 왜 중요할까요?
이 구절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조차도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면 그에 앞서 온 메시아는 누굴까?"라고 생각하다가 세례자 요한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언급이 신약 성경에 무지하게 많이 나옵니다. 앞에서 말한 말라 3,1과 말라 3,23-24절은 빼고
마르 1,2-4절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마르코 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글이라고 했는데요, 저 내용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지 않아요. 저 내용은 말라키 3장에 있는 내용과 탈출기에 있는 내용을 조합해 놓은 것이에요. 물론 뒤따르는 것은 이사야 40장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이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말라키 예언자가 예언했던 종말의 시간에 메시아에 앞서서 오게 될 그 엘리야야!라고 직접적으로는 얘기하지 않지만, 여기서 '나의 사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렇지 않을까? 이런 식의 것을 암시하는 태도가 마르코 1장에서 발견이 됩니다.
더 노골적인 것은 마태오 11장입니다.
마태 11,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바로 말라키 예언서를 인용하고 있어요.
루카 7,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마태 11,13-14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마태 11,7-9/ 루카 7,24-35에서도 발견됩니다.
마태 17,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하고 물었다.
신부님이 만약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자들에게 "말라키서 3장 읽어봐, 거기에 나와있어."라고 대답을 하셨을 텐데, 예수님의 대답은 조금 다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재밌는 것은 똑같은 내용이 마르코 복음 9장에서 나오는데, 13절인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나오지 않아요.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과 말라키 예언자가 예언한 그 엘리야가 동일할 거다.라고 못 박아서 이야기하고,
마르코 복음서에 저자는 그것을 암시하듯이 감추면서 노골적으로 얘기하지는 않는데, 톤이 조금 낮아요.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나 보다." 하는 장면에서도 엘리야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그리고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현성용(顯聖容) 사건에서도, 예수님이 타볼산에 올라가서 모습이 변하면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납니다. 모세는 율법전통을 엘리야는 예언자 전통을 대표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루카 복음서는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보다 더 톤이 낮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서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얘기합니다.
루카 1,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 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는 아닌데,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녔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아,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데, 문제는 요한 복음서예요.
요한 1,19-28
요한 복음서 1장에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물어요. "당신이 그리스도요?"
"그러면 당신이 엘리야요?" 그랬더니 요한이 "아니요."
"당신은 누구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공관복음서에서는 엘리야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라키 예언자가 예언한 "그 엘리야였어."라는 중복적인 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그것을 수정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다릅니다. 자기가 엘리야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리고 요한 복음서에서의 예수도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아요.
따라서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은 공관 복음서에 세례자 요한과 다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감옥에 갇히자, 그다음부터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하는 그와 같은 이야기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다 수정해요.
요한복음서 1장에서 예수님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보다 나중에 왔지만,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앞서 계셨어요.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지혜로서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아요. 예수에게 세례를 주는 인물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증언하는 인물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자,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때 복음을 시작하셨는데 그때에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공관복음서에 세례자 요한과 요한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런 점에서 많은 것이 다른데, 요한복음서에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에게 새로운 위상을 주려고 한 것 같아요. 단지 예수에 앞서 있었던, 단지 감옥에 갇히자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던 인물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했다.
어떤 일이냐? 예수에 의해서 증언하는 일.
오늘 이런 내용에 관해서 강의하신 이유는, 강의 시작하기 전에 본당신부님과도 이야기하셨는데, 벌써 10월에 마지막이죠?
실감 나십니까? 2024년에 10월이 되었다는 게?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닐까요?
이제 몇 주만 지나면 대림이 시작됩니다. 대림을 시작하면서 대림의 가장 중요한 일은?
대림에 우리 그리스도 공동체가 할 일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해야 할 일이죠.
성경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관해서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서에서 많이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예수의 길을 준비했던 그 세례자 요한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리고 성경에 했던 그 고민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 동전의 뒷면에는 지금 예수님의 성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 공동체, 거기에 속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지....
오늘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질문이 우리의 질문이 되는 것이 말라키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묵상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하셨다고.....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다음 강의를 기대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