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 한 바퀴
강 서 완
열한 살 아이가 볕에 타 죽는 아버지를 보았다
붉은 눈물이 목에 걸렸다 몇 갈래 터진 심장이 기도를 넘지 못해 울컥거렸다 망막에 맺힌 핏줄이 터지고 찢어진 햇살이 흘렀다 흩어진 빛을 쏟아 붓는 까마귀 떼
아이의 가위 눌린 소리에 베개가 뜨거웠다 땀으로 흥건한 이불 속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이 급기야 검 대신 벽돌을 들었다 69만 5천 장 벽돌로 아버지의 세계를 구축했다 아버지가 북쪽을 그리워하면 이따금 아들이 달려가곤 했다 그 하늘에 닿은 천륜의 벽돌 오륙 킬로 성벽…… 부자의 호흡 사이 걸러진 역사가 서걱댄다
선각先覺의 비飛는 비悲다
희다, 뜨거운 꽃이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강서완 경기 안성 출생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8년 『애지』로 등단.
유리족의 하루
김 성 애
유리를 통과한 빛은 엎드려 있다
시간이 옮겨 앉은 그림자 곁에서 납작해진 그를 본다
그림자가 발자국을 찍을 때마다
바람은 유리창에 지문을 남긴다
바람의 지문 뒤에 정물로 놓인 책상과 의자와
그 정물에 화석처럼 붙어있는 사내,
평면이다
그림이 되지 못한 그림자,
평면으로 일렁인다
전화벨 소리에 고인 공기가 출렁이고
컴퓨터에서 보고서로 보고서에서 계산기로
그림자를 옮기는 사내
과장된 목소리에서 식솔들이 딸려 나온다
그림자는 유목의 습성이 말라버린 자국일까
떠도는 바람의 종아리 주저앉힌,
파놉티콘의 눈이
사내를 종일 따라간다
투명 속에 감춰진 얼룩이나 우연이 피워낸 두께가
유리족으로 일생을 사느라 납작해진
그가 남긴 유일한 자취다
곡면 벽을 더듬거나
책상에 오르던 하루를 어둠으로 덮고
그가 유리문을 뚫고 사라진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김성애 2015년 『애지』로 등단.
마네킹
김 정 원
유리 피라미드 안에서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
말끔히 제모하고 신상품 옷 차려입고
붉게 염색한 가발 눌러쓰고
강요된 부활에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는
왕의 주검은 플라스틱,
썩을 줄 모른다
자연은 부족함 없는 천국인데
그 좋은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갑갑하고 밋밋한 매장에 갇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된 감옥살이,
속없는 혼은 구천을 떠돈다
머리, 팔, 다리, 몸통을 따로따로 빼내
멀쩡한 전인을 병신으로 만드는
댓글과 토막글 퍼 나르기,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떠돈다
아름답든 더럽든
잊힐 권리가 무참히 짓밟힌 채
개인 신상과 풍문이 떠돈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피처럼 흘러
탯줄 없는 서늘한 기계에서 기계로
버젓이 세계를 떠돈다
내 사랑이여
안녕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비틀거리는 검지로 가까스로 누른다
세상 떠난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지울 수 없어, 차마 지울 수 없어
그의 뜻도 묻지 않고 내 마음대로 간직해온
주인 잃은 전화번호도, 녹슨 사진도, 그리운 이름도
이젠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 [유리족의 하루]에서
김정원 전남 담양 출생 ─2006년 『애지』로 등단 ─시집 『줄탁』, 『거룩한 바보』 , 『환대』 등.
토마토 축제
김 지 요
방울토마토가 쏟아져 나오네
수돗물에 또렷이 현상되고 있네
짓무른 과육이 터져 나오네
씻어내며 골라내는 동안 생략되어지는 시간들
손에 잡히는 상처 욕설들
툭툭 뱉어지는 토마토의 언어
잘려나간 토씨들 도달하지 못한 조사들
수챗구멍에 굴러가 박히는 비문, 비명들
토마토는 구르네
썩어서도 토마토는 토마토
비문인 채로 열매인 말
뭉클뭉클 터져 쏟아지는
토마토의 심장
너는 내게 토마토를 던지네
찡그리는 나를 보며 자꾸만 웃음을 터트리네
당신의 문법이 나를 숨막히게 하네
치마 가득 토마토가 쏟아지네
솟구치는 울음으로 달아오른 뺨
갇혀있던 토마토가, 붉은 눈물이
터져 나오네
─ [유리족의 하루]에서
김지요 2008년 『애지』로 등단.
너섬의 까마귀들
류 현
너섬(여의도)의 양말산 한쪽에
까마귀 삼백 마리가 우글우글 모여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패거리로 나누어
대가리 털 다 빠지도록
사사건건 물고 뜯는 싸움질
고약한 냄새만 나고
대가리도 새 대가리니
검은 새 대가리에서
검은 것 이상 나오는 것이 없다
먹거리 찾는데만 이골이 나
황금빛 무궁화가 녹스는 줄도 모르고
금방 자기가 한 말도 잊어버리면서
듣기 싫은 괴성만 내지르고 있다
차라리 저것들을
철새로 바꿀 수만 있다면
저 멀리 동토의 땅으로
날려 보내버리고 싶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류 현 2015년 {애지}로 등단 ─현재 유리안 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북채
유 안 나
나 고창에 갔네
일가친척 한 사람 없지만
목줄기에 흐르는 강물 소리 있어 갔네
버드나무 가지 꺾어 피리 불면 어린 뱀이 따라오고
송아지 울음소리 그 뒤를 따라오네
산꿩 푸드덕 날아가고
산꿩의 울음소리 같은 붉은 동백꽃 송이째 떨어질 때
나는 그 울음을 던져
북채 하나를 얻었네
내 유년의 한때를 흠씬 두들기고 싶었네
나 고창에 갔네
북채 손에 쥐고
북 찾아갔네
손에 든 시뻘건 북채는
북을 찾아 두리번거렸네
신앙촌 호랑이 무늬 담요 덮고
낡은 북이 누워있있네
가만히 들여다보니
구름을 덮고 있는 달이었네
붉은 울음이 다 풀릴 때까지 두들기라고 둥그런 등을 내미네
달의 눈빛이 보낸
슬픔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며
등 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 들으며
내 등은 휘어 둥그러지고
북채를 들고 쫓아오는 손에 나도 등을 내미네
─ [유리족의 하루]에서
유안나 2012년 『애지』로 등단.
월식
이 희 은
엄마의 바다가 닫히면서
나의 물결은 시작되었네
오늘은 생일이면서 기일
빨간 장미와 흰 국화를 섞어 만든 꽃다발이
자정의 시간에 맞추어 배송되었네
알사탕을 굴려 녹일수록
입 속에는 검은 안개만 깔리네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는 밤
색이 다른 두 발은 자꾸 스텝이 엉키네
레퀴엠과 생일송이 교차하는 곳에서
나는 수런거리네
엄마가 미리 보낸 생일카드 안에는
압화처럼 유언만 말라붙어 있네
케이크에 촛불 대신 향을 꽂아놓고
나의 기도는 이미 오래 전에 늙었네
─ [유리족의 하루]에서
이희은 충북 청원 출생 ─2014년 애지로 등단.
버리는 법을 익히다
장 효 종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는 것은
목련의 생각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가지를
저 홀로 버리는 법을 익히지 못한
목련의 그림자가 짙다
목련에게 가지가 돋아나고
그것들이 가슴을 찌를 때
바람 속에 아픈 가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치도록 자란 것들이 이파리가 되어 울던 밤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나는 웅크리고 있었다
꽃이 피는 동안
너의 가슴에 돌기가 자라고 있음을 미처 알지 못한
사랑이여 그것은 꿈이라고 말할까
목련의 가지와 톱 사이에 머무는 잠깐 동안의 적요
잘라야 하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향해 톱질을 한다
떨어지는 가지가 나를 때릴 때 비명보다 기도를 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내 속의 어떤 가지를 도려내는 것일까
버려지는 것들의 소리를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외마디 절규를 토해내며
최후의 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순간
그녀의 잘린 가슴이 떠오른다
비로소 오늘에서야 내 안의 목련에게
예리한 톱날을 들이대는 소리
목련의 모습이 단단한 세포를 잘라내고 나온
수척한 아내 같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장효종 2015년 『애지』로 등단.
응급실
조 옥 엽
소리가 한방에 사방을 휘어잡자
보이지 않는 면도날이 미친 듯
허리를 비틀며 허공을 휘젓고 다닌다
속도가 생사를 가르는 곳
하얀 가운들이 바람의 머리칼 잡아타고 날아다니고
직립을 잃어버린 몸들이 눈을 감고 허공을 떠다닌다
문지방 넘는 순간
모두 같은 신분이 되고 마는 이상한 나라에서
달아나려는 넋과 그 손 놓지 않으려는 이들의
치열한 줄다리기에 팽팽해진 공기 주머니
언제 어느 구석에서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깨알처럼 박혔던 소망 일제히 꼬리를 감추고
오직 하나의 일념만이 하늘로 솟구친다
표정 없는 차깔한 백색의 벽면은
소박한 일상의 옷 다시 찾아 입고 싶은
간절함으로 북적대는 대기실
들썩이는 의사의 입술이 곧 신의 전언인 양
전신의 세포 곧추 서고
오랜 가뭄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 받아
꼭꼭 씹어 삼키듯 온몸으로 받아 적는 문장들
연타로 치고 드는 돌팔매질에 가슴팍 속속 패여 나가도
금세 수평을 되찾는 유려한 강물처럼
억장 천길 만길 무너져 내려도
터져 나오는 울음 꾸역꾸역 삼키며
내일의 끈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납빛 얼굴들
으스러진 알전구 움켜쥔 채 혼돈의 바다 문턱을 넘는다
지팡이 짚고 빛을 찾아 다시 절뚝절뚝 걸어 나간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조옥엽 2010년 {애지}로 등단.
소리의 정원
조 영 심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명주바람의 숨결로 너는 온다
비강과 공명강을 건너
솔 숲길 솔향을 담은 무용선으로
고요하게 흔들리며 한 올 한 올 한삼자락 타고 한 박에 한 걸음씩 온 박으로 두 박에 반박을 차고 덧걸음 사뿐 얹어서 까치채로 재금재금 나와 반박을 스쳐 멎숨 엇박으로 잘근잘근 끊어도 끊길 듯 이어지며 맺는 듯 푸는 듯 들숨 날숨 동글동글 이음매 동글리며 온다, 왔다, 끝 선에 잡아둔 숨결을 살짝 놓아 다시 먼곳으로 보낸다
목소리로 만든 악기, 아카펠라
공문空門을 오르내리는 소리의 춤사위 익히듯
열꽃 핀 이 호흡도 한자락 입춤이면 좋겠다
─ [유리족의 하루]에서
조영심 전북 전주 출생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담을 헐다}, {소리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