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10.26 궁정동 사람들
* 10.26 총격 직후, 10월 27일 새벽 5시에 처음 사건 현장에 도착
한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현장감식팀이 촬영한 현장 사진, 언론사
상 최초 공개
취재진은 연회장 내부, 대통령의 양복 상의와 구두 등 유류품,
차지철 손목 총상 사진 등 미공개 사진과 현장감식관들의
생생한 증언을 최초 발굴, 공개한다.
대통령의 최후를 목격한 심수봉은, 합수부에서 자신이 진술한 내
용은 없던 걸로 해야한다며, 사건 정황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들려
준다.
* 계속되는 논란... 계획적 거사냐, 우발적 범행이냐?
10.26에 대해, 주범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했다.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
은 김재규의 성격적인 결함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말했
고, 계엄 하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가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고, 권
력 찬탈을 기도한 패륜적 범죄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
리고, 논란은 김재규 사후 2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평행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당시 현장에는 현장
에서 즉사한 6인과, 김재규와 함께 형장에 오른 5인 외에 30여 명
의 궁정동 요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근접 거리에서 사건을 경험했
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총격 당시, “김신조 일당이 다시 쳐들어온 줄” 알았던 급작스러웠
던 상황에 대해, 연회상을 차렸던 대통령 요리사 김일선, 10년째
대통령 접객을 담당해왔던 사무관, 거사 실패 후 박흥주 대령과 절
망적 방황을 했던 중정부장 운전담당 유석문, 당일 김재규가 사용
한 총을 묻은 죄로 3년형을 구형 받은 경비원 유석술 등, 현장에 있
었거나, 10.26 근처에 근무했던 경비원들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
고, 이를 통해, 26일 오후 4시부터 27일 오전 7시까지, 10.26을 미
시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 궁정동 안가는 과연, 어떤 곳이었나?
당시, 궁정동 안가는 전부 5개 동으로 이뤄져 있었다. 본관은 중정
부장의 집무실로, 나머지 4동은 모두 대통령 연회장으로 사용되었
다. 취재진은 93년,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전부 철거된 것으로
알려진 안가(본관)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하고,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궁정동 안가 5개 동을 복원하여 미니어처
로 제작, 공개한다.
안가의 출입은 물론, 존재에 대한 사실도 철저한 보안사항이었다.
궁정동 안가의 경호와 관리는 중앙정보부에 일임되었고, 청와대
경호원들이 철통같은 무장이 해제되는 유일한 곳이 바로 궁정동
안가였다. 그곳의 책임자인 박선호 의전과장은 김재규의 거사통보
를 받은 지, 단 30분만에 거사에 합류할 경비원들을 조직한다. 삼
족을 신원 조회한다는 엄격한 기준을 거쳐 선발된 궁정동 경비원
들 사이에는 군대의 규율을 넘어선 절대적인 규율이 존재했다고,
유석술 등 많은 경비원들은 말한다.
* 김재규는 과연 권력 찬탈을 꿈꾸었나?
거사 후, “육본으로의 유턴”에 대해, 수사를 담당했던 합수부는 정
권찬탈의 목적의 방증이라고 했고, 사건 이후 지금까지 10.26이 사
전에 치밀한 계획이 없는 우발적인 거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
는 결정적인 증거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육본행이 정권찬탈 목
적이나, 우발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거사 직전, 궁정동 안가 본관에 정승화 총장이 와있다는 사실을
들은 박흥주와 박선호는, 사건이 총장과 사전에 모의된 조직적인
거사라고 생각했다. 김재규 역시 육사 후배이며 자신의 천거로 총장
의 자리에 오른 정승화가, 자기편에 서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
다.
육본으로 향하는 차를 몰았던 운전기사 유석문은, 대통령의 서
거 사실을 최초로 알게 된 정승화 총장이 북의 도발을 염려하는 대
화를 들은 박흥주가 “군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선 육본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합리적인 판단 하에 제안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맨발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육본에 도착한 김재규에게 거
사 이후의 계획은 없었고, 10.26은 박대통령의 저격에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