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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섬기자
성경본문:아가서 4: 1-15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아멘
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품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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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순 목사
2004년도의 교회표어는 “사랑으로 섬기자” 이다. 그것을 위해서 관심과 접근, 이해와 관용, 필요를 채움 이라는 실천사항을 제시하려 한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상대가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왜 그렇게 할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하려고 해보고, 그리고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것을 채워주는 일을 하자 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우리가 사랑을 해야만 하는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 사랑만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 내가 평안히 살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는 죄가 점점 더 심각해져간다. 연말의 퍽치기, 자녀버린 비정의 애비, 오늘의 사회현상을 보라. 뉴스와 활자들을 보라, 모두가 죄로 도배되고 있다. 음란, 사기, 횡령, 착취, 차별, 모함, 살인, 전쟁, 왜? 사람의 마음이 악해서 그렇다. 시기적으로 볼 때, 창조시는 성선설을 말할만하나, 타락 후에는 성악설이 현실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모두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사람이 지은 죄는 필경 형벌을 불러온다. 용서를 받아 없애거나, 형벌을 받아 지우거나 하지 않고는, 지은 죄는 언제라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죄는 죄를 낳고 점점 더 큰 죄로 커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고 세상을 파괴해 간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쇠창살을 덧댈 것인가? 총을 한 자루 사놓을 것인가? 딸을 집 밖에 안 내보내고 기를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더 사나워지면 누가 감히 덤비지 못할까? 무장을 하면 될까? 창과방패는 누가 이길까? 방패가 강해질수록 창은 더 강해지는 법이다.
군비경쟁으로 세계가 평화를 얻지 못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지만 평화를 얻지 못하였고 전 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요즘 더 큰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아무리 보복을 해도 공포 속에서 살아갈 뿐이지 평화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평화에 갈급하여 인사도 샬롬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을 세우고 사는 삶에서 얻는 것은 피곤과 낙심과 파괴뿐이다. 그것 때문에 상대가 물러서지도 않고, 상대가 부드러워지지도 않는다. 내가 총을 쏘면 이웃들이 모두 긴장하고 내게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그렇게 하고서야 평안한 생활을 할 길이 없게 된다. 차라리 내가 이웃에게 떡 한 접시 돌리고 나야 평안한 잠을 잘 수가 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고 하셨다.
죄악 세상에 대한 대안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남의 죄를 평가하는 집안에 있는 나는 선한 사람인가? 나는 이웃에게 악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웃 또한 나 때문에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을까?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내 입에서 더러운 것이 뛰쳐나온다. 말씀을 상고하는 내 마음속에 사악한 생각이 들랑거린다. 이 일을 어찌할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온유함, 겸손함, 사랑, 봉사, 이것은 적의 예봉을 꺾는 아주 부드럽지만 훌륭한 무기이다. 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허리를 풀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바람은 햇볕을 이기지 못했다.
사랑이면 빈자도 부자도, 유식자도 무식자도,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녹고 만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되자.
오늘날 사람들이 사나워진 것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렇다. 컴퓨터에 빠지고 TV에 빠져서 가족간에도 대화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따스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 못해서 그렇다. 그러니 사랑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자.
2.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장)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당신의 생명을 내버린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본문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겉으로 볼 때,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이다. 검은 피부의 술람미 여인, 햇빛에 그을려 거무틱틱하고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6)
그럼에도 솔로몬왕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기만 한지, 끝없는 예찬이 이어진다. 성경중에서 이처럼 닭살스러운 곳이 없다. 요즘말로 말하면 아가서는 닭살성경이다. 그런데 사실은 솔로몬은 예수님, 술람미 여인은 우리 성도를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 속에 애정행각을 그린 듯한 아가서가 있는 것이다.
닭살이란, 남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제 눈에 안경이라고 서로 너무 좋아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닭살스럽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하나님 가족이고, 그리스도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
행17:에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으시고 그 많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서 사람들을 거기 보내어 살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시간이 날줄이라면 공간은 씨줄이다.
그런데 영원한 시간 중에서 2000년대라는 같은 시간과 이 넓은 지구공간 속에서 한국이라는 공간에 우리들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셨기 때문에 한정하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신앙, 같은 목사 아래서 산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 우선 어설픈 객관성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이 같다고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했고, 어느 지역이나 학력이나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며, 우리 애들을 볼 때도 나는 남의 입장에서 보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나는 정말로 객관적인 사람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객관성이란, 타인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이는 이렇고 저는 저렇다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
객관성을 가지면 그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따지게 되고 그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드러나게 되어있고 사람은 평가에 의해서는 그 누구라도 사랑할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요즈음 깨달았다. 어떻게 애비가 자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자식을 남과 비교하고 장단점과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참 아비가 아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부모답다.나는 몇 주일 전부터 성가대가 찬양하는 시간에 성도여러분을 둘러보면서 여러분의 얼굴을 내 마음의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워서 그렇다. 나이가 많건 적건, 여러분은 나의 영적인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셔서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이다. 그래서 난 여러분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난 늘 마음으로 여러분을 내 손으로 쓰다듬기를 원한다.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은 칭찬하고 여러분이 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제 책망할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들으라. 사랑이란 객관성을 버리고 주관성을 갖는 것이다.내가 딸을 낳았을 때, 객관성이 가득한 내가 볼 때는 별로 예쁘지 않은데 우리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내 손녀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예쁜 것이지 얼굴이 예뻐서, 머리가 좋아서, 예쁜 짓을 해서 예쁜 것이 아니다. 무조건 내 손녀니까 예쁜 것이다. 우리 장로님들 체신 머리 없이 손자 예뻐하는 것을 보았다. 길 장로님 승훈이 얻고 기뻐하는 것 보았고 전 장로님 승신이 얻고 체신 머리 없이 기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본 증인이 아닌가?시어머니는 - 왜 네 발은 계란 같으냐? 네 버선은 왜 오이씨 같으냐? 고 밉게만 보지만,친정어머니는 - 딸의 잘못하는 것조차도 장점으로만 보는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은 서로 시각만 바꾸면 된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관성이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으셨다. 사43:에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때에 너를 건져낼 것이고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나게 되었을 때, 내가 너를 보호하겠는데, 너를 건지기 위해서 내가 애굽을 희생하고 구스와 스바를 내어던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착하고 가치가 있어서인가?
거기 너희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라고 하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면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셨다. 너는 내 꺼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관성이다. 이제 주관적인 사람이 되자. 비교하여 선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서로를 가까이 가자. 서로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주며 발을 주물러주는 사랑을 실천하자. 사랑으로 섬기자. 자기 가족을 섬기고, 우리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가자.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거칠고 무서운 사회를 아름답게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방식이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