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할 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에스더 7: 1-10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아가니라
2. 왕이 이 둘째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5. 아하수에로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일러 가로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6.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
오늘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성공은 자기 삶을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실패는 자기 삶을 스스로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해 냈습니다.
그것이 에스더의 승리이고 성공입니다.
우리도 에스더와 같이, 모르드개와 같이 승리하고 성공할 소망으로 오늘 말씀에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에스더에서 깨닫는 것은 전력을 다할 때 특별한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나 올인 한다는 것은 조심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명이 걸렸다거나 인생이 걸렸다고 판단이 될 때는,올인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올인하지 않으면 자꾸 피할 길을 찾게 되고,또 아니면 요행수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다 걸어야 할 때 다 거는 것, 전력을 다하는 것은 인생에서 참 중요합니다.
에스더에서는 그런 전형을 봅니다.
에스더와 그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자신과 민족을 위해 모두를 걸었습니다.
하만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가로막던 아말렉 후손에다, 사무엘이 사울 앞에서 죽였던 아각의 후손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의 딸인데다 사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와 하만의 싸움은 과거 전쟁의 재판 같았습니다.
그 때에 에스더는 그 사촌 오빠에게 기도를 부탁하고,자신에 대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스스로도 영광을 얻고 민족도 살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더는 특별한 책입니다.
사실 에스더는 신학자들에게 많이 논란이 된 성경입니다.
쿰란 공동체의 정통성 있는 구약 본문에는 에스더가 빠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한 번도 에스더를 인용한 적이 없습니다.
또 에스더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사울의 후손이었습니다.
루터는 구약 정경에서 에스더가 없었으면 더 좋겠다고 했고,칼빈은 에스더 본문으로 설교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더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에스더라는 왕비에 대한 역사성 조차도 의심받습니다.
1:3을 보면 에스더의 사건이 아하수에로 왕 제3년이라고 하니까,주전 483년으로 계산까지 분명한데,당시에 왕비는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어 있습니다.
이런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정경의 자리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그 이후로도 늘 있어 왔던 하나님 백성 박해의 시대에,늘 돌아볼 만한 좋은 성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안이숙이라는 목사님 사모님이 많은 박해를 견뎌내고,자신의 자서전을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제목으로 펴냈습니다.
1938년 일본 중의원에 신사참배 반대 전단을 뿌리고 체포됐다가 달아나서,은신하며 신사참배 반대를 했던 분입니다.
특히 에스더는 바벨론 포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그냥 이방 땅에 남겨진 사람들에게,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그리고 그 본인들은 어떤 각오로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책으로서,기독교 교회에 꾸준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하나님께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박해 받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늘 새로운 시대를 맞을 때마다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에스더는 그런 일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중심으로 담대히 나가라고 길을 일러 줍니다.
왜 그런 사역을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북한 선교를 위해 60회 이상 북한을 들락날락한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들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자신의 사역을 하는데,하여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북녘 사람들을 어루만지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북한 기독교인에 대하여 들은 것 중에 놀라운 것은,그들은 남한처럼 훈련을 받을 수 없는지라 이렇다할 신앙적 지식도 별로 없지만,그래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지키며 살고,거기에 의미를 두고 목숨도 건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온 시대 이해와 함께 본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는 히브리어 이름이고, 헬라어로는 크세륵세스라 불리는 왕입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주전486-465년입니다.
페르시아는 고레스 왕 때에 당시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했습니다.
고레스 왕을 이은 왕은 캄비세스이고 다시 다리오 1세 왕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다리오 왕은 이 왕입니다.
다리오를 이은 왕이 바로 이 크세륵세스입니다.
희랍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전쟁사의 약 삼분의 일을 크세륵세스 시대 기록에 썼습니다.
그러나 헤로도투스가 크세륵세스를 좋아했을 리는 없습니다.
크세륵세스는 결국 페르시아가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고,유럽에서 완전히 물러난 시대의 왕입니다.
그는 희랍의 아테네를 정복했고, 헬라 시대 유럽 최강 스파르타를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유명한 마라톤-테르모필레 전쟁에서 영향력을 잃었고,살라미스 해전에서 모든 군사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정하게 말하면,그는 역사 속 페르시아의 왕 가운데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왕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과 관련해서 더 문제는 그가 매우 독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사건은 상당 부분 이 왕의 독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고,하만을 제거하게 되었지만,하만은 그 왕의 독선적인 성향을 이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독선을 부추겨서 유다 사람들을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크세륵세스의 독선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우선 에스더를 왕비로 간택하기 전, 그 전 왕비 와스디의 잘못이 왕비를 폐할 정도의 일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문화 영향도 있지만, 크세륵세스의 독선 영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왕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흥이 나서 왕비의 미모를 만인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왕비는 윤리적이고 단정한 사람이어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에스더에서 제 정신 가진 사람은 죽은 왕비 와스디 뿐이라는 비평도 합니다.
그리고는 크세륵세스가 내세운 원칙은 모든 집안에서 남편이 자기의 말로 주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1:22)
남편이 주관한다고 자기 아내를 불러내서 남들 앞에 춤추라 하면,그런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오히려 현숙한 아내 아니겠습니까?
물론 성경을 잘 들여다 보면 왕비 와스디가 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왕의 독선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와스디는 왕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현숙함은 없었고,그보다는 왕의 말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따르지 않고 버텼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이래 저래 온전한 사람이 없는 것이 그 시대였습니다.
결코 와스디의 폐위가 그렇게 합당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에스더는 그런 혼란 중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비 간택은 매우 비윤리적이었습니다.
제국 전 지역에서 손 꼽히는 여자들을 모아 와서,왕과 동침한 후에 왕이 다시 그를 찾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2:14)
후궁이 되어서 평생 독신처럼 살아가는 것이죠.
고대에는 많은 나라들이 그랬지만, 이것은 참 비윤리적이었습니다.
에스더도 그런 운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비 간택의 대열에 섰습니다.
2:8을 보면 에스더는 자의보다는 국가적 명령으로 인해 이 대열에 선 것 같습니다.
흔들리는 유다인의 운명은 에스더의 오빠 모르드개에게도 덮쳤습니다.
그는 아각 사람 하만에게 고개숙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좋게 보더라도 개인적인 의분 이상이 못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만의 미움을 샀습니다.
하만은 왕에게 애매하게 말하고는 전권을 위임 받았습니다.
3:9을 보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드리겠다면서 뇌물까지 제시하는데, 주경학자들은 그는 아마 그 일만 달란트를 유다인에게서 얻으려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을 완전히 결단을 내고,거기서 얻은 재산으로 왕에게 선심까지 쓰려고 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급박하게 여러 지역에서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보면 절박성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왕궁 문 앞에서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통곡하였습니다.
강력한 1인 시위였습니다.
에스더는 그 소문을 듣고 모르드개로부터 자기 민족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보낸 전갈이 이 책에서 가장 극적입니다.
4:16입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왕비가 왕에게 나아가는 데에도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것은 당시 페르시아의 권위주의와 아하수에로의 독선이 겹쳐서 그럴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미 왕후가 되었어도, 그 신분은 그다지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와스디가 폐위된 경험마저 있어, 에스더는 일거에 떨려날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올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도 죽으면 죽겠습니다.
그러니 당신과 온 민족도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에스더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에스더는 기도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이미 하나의 지혜를 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왕이 자기에게 나아와 잔치하도록 하고,잔치의 흥이 극에 다다를 때,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상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유효했고,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건의 전모가 오늘 본문입니다.
에스더가 유다인인지도 모르고 설치던 하만은 불의의 일격을 당했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이 자신과 자신의 민족을 말살할 계책을 꾸민다고 폭로했습니다.
왕은 현숙하고 어여쁜 왕후 에스더의 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반대로 하만을 높은 곳에 매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 됩니다.
본문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약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가지에 충실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 자각을 따라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둘째로는 함께 하는 공동체에 충실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어려움과 위험을 왕비인 동생에게 알리기 위해 성문 앞에서 시위 하였습니다.
이 때 에스더는 혼자의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를 구하였습니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안일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함께 기도해야 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구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에스더는 하나님께 충실했습니다.
에스더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잘못하면 온 민족이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기게 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고, 또 공동체가 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이 일을 대할 때 제각각 중요성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각각의 중요성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세 가지 중요성이 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백성으로 잘 서 있는가?
또 정말 내게는 함께 의논하고 기도할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 뜻에 맞는가,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위해 충분히 기도하고 있는가?
늘 이 사실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은 무엇에 달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와 나의 공동체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그 중요성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에스더의 승리 요인은 그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좀더 급박할 수도 있고 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인되어야 할 것은 나, 공동체, 하나님.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늘 다시 확인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미국과 영국 이야기는 참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한 마디,죠지 워싱턴의 비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새벽 4시 성경이 펴져 있는 작은 탁자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였다.
이런 습관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대단히 자신감은 없지만 저도 한 번 해 볼 생각입니다.
내가 이제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새벽 4시의 기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것을 원하기도 했습니다.
쫓기다 보니 하지 못한 것이고, 불필요한 욕심이 우리를 넘어뜨려서 못하기도 한 것입니다.
9시에는 자야 될 것 같은데, 정말 그런 삶이 될까?
그래도 오늘 새벽에는 5시가 되기 전에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단 한 가지라도 정말 나와 공동체와 하나님을 생각하는 가운데,결심하면 그것이 무엇인가 결과를 몰고 온다는 것입니다.
죠지 워싱턴이 제 뇌리에서 빨리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는 급박하게 어려운 시점에서 길을 찾았고,워싱턴 또한 전쟁과 통치의 어려운 시간 속에서 길을 찾았는데,이들은 기도에서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중요한 것은 에스더는 짧은 시간이지만 금식 기도의 방법을 가졌고,워싱턴은 혼자이지만 꾸준히 일찍 기도하는 구체적 습관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그것을 잘 하면 틀림없이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잘 알지만, 우리가 제도로 습관으로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올해는 매일의 훈련을 우리가 제도화 시켰습니다.
제가 정말 4시 새벽기도 한 번 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꾸고 여러분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는 기회를 얻기 원합니다.
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언가 간단하지만 꼭 한 번 해보아야 할 기독교인의 삶.그런 것이 찾아진다면, 그렇게 살아갑시다.
바로 그것이 약할 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하고 별로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는데,여기에는 꽃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람 생사가 걸렸으니, 그런 이야기 안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는 그런 심각함이 좀 덜하다고 보면,별을 이야기하고 바람을 이야기하고 꽃을 이야기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일개미가 나뭇잎을 잘라서 입에 물고 이동하는 장면을 보면서,저 개미들의 한살이란 어떤 것일까?
저들에게는 무슨 의미라는 것이 있을까?
제 결론은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개미 마저 사랑해야 되는 거구나.그리고 개미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냥 저 나름대로 살게 두고 보고 있는 것.여러분 세상 만물을 다 사랑해 주고 마음에 품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품었습니다만,자꾸 우리도 큰 꿈만 너무 따라가면 공연히 허무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미도 사랑하고 꽃도 사랑하고 풀도 사랑하고 그러시길 권고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승리일 것 같습니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있는데,이런 생각이 척 떠올라 온 것을 보면,계시가 다시 우리 안에서 굴러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추석이 만물과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아버지 산소에를 가야 되는데 못가봤습니다.
가서 아버지도 느끼고, 그 산소에 자라난 풀도 느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 입김으로 느끼고 잘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