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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6952]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
양사언楊士彦
양사언의 필적
양사언(楊士彦, 1517년 ~ 1584년) 조선의 문신·서예가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용(海容).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초서체 제일이었다 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 대동승(大同升)을 거쳐 삼등(三登) 현감·평양 군수·강릉 부사·함흥 부윤 등을
역임한 후 회양(淮陽) 군수, 이어서 철원 군수를 지냈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어서 안변(安邊) 군수로 나가 일을 잘하여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關係)를 받았다.
그 후 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다.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가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니 그 책임 때문에 해서(海西)에 귀양 갔다.
2년 후 풀려 돌아오는 길에 병사했다.
양사언은 비상한 천재인 데다가 노력을 거듭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 과거에 급제하여 40년, 다스린 고을은 8군데나 되었으며 단 한 가지의 부정이 없었고,
처자를 위해서 재산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남사고(南師古)한테 배워
점도 잘 쳐 임진왜란을 예견하였고, 시(詩)는 작위(作爲)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하고 기발하였다.
시조 태산가(泰山歌)-泰山雖高是亦山 태산수고시역산
登登不已有何難 등등불이유하난 世人不肯勞身力
세인부긍노신력 只道山高不可攀 지도산고불가반 -
는 간결하면서도 많은 교훈을 주는 시조 중에 하나로 꽤 유명하다.
글씨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 다 같이 명필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명필)로 불렸다.
양사언이 애용한 거문고를 더러 봉래금(蓬萊琴)이라 했는데,
이를 허엽(허난설헌 남매의 아버지)의 외손자 박종현(朴宗賢)에게 선물로 주었다.
박종현의 손녀 박씨는 남양 홍씨 문중에 시집가니
박씨부인의 고손자가 영정조 시기의 실학자 홍대용이다.
홍대용의 《담헌서》 중 〈봉래금사적〉에 천안 본가에 봉래금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자(字)는 응빙(應聘)이고 호는 봉래(蓬萊)ㆍ완구(完邱)ㆍ창해(滄海) 등이다. 중종(中宗) 12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기지리(機池里)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 전기의 이름난 문인이자 서예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음관(蔭官)01으로 영암군수를 지냈으나 양사언은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였다. 그러나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름)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02에 견주어졌고 아들 만고(萬古) 또한 문장과 서예로 이름을 날렸다.
양사언의 어머니는 본시 한미한 역리(驛吏)의 딸이었다. 그녀가 12살 때 부모들이 일을 나가고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영암군수가 들러 점심을 먹었다. 군수는 자기의 점심 시중을 잘 들어준 아리따운 소녀가 마음에 들어서 떠날 때 농담 삼아 결혼 예장이라 하며 청색과 홍색의 부채를 한 개씩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몇 해 후 영암군수는 소녀를 첩으로 데려갔다. 얼마 후 상처(喪妻)한 그는 그녀를 본처가 있던 방에 들게 하고 집안 살림을 주관토록 하였다.
어느덧 그들 사이에 세 아들이 생겼는데 이들 중 둘째가 바로 양사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용모와 풍채도 좋아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풍채, 도인의 기골”이라 칭하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였다. 그의 모친은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에 힘입어 양사언은 공부와 글씨 쓰기에 전념하며 자신의 기량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첩의 자식으로서 적서의 차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일생을 헛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와 그의 자손이 문장과 서예로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양사언의 어머니가 남편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본처의 자식들 앞에서 자결하면서 자기 아들들이 첩의 자식인 사실을 숨겨달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양사언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때의 충격 탓인지 스스로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산수경관을 즐기며 시를 짓고 글씨 쓰는 것을 한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한 양사언은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ㆍ평창군수(平昌郡守)ㆍ강릉부사(江陵府使)ㆍ안변군수(安邊郡守)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교화에 힘을 기울여 풍속을 바로잡고 널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자 함경도 감사가 도내(道內)의 군수 중 그가 제일이라 상주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이때 그는 북방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馬草)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서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어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조선시대 글씨가 특출했던 삼대명필(三大名筆)로 일컬어지는 양사언은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그의 한시(漢詩)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03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로는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격암 남사고, 토정 이지함, 북창 정염과도 교분이 있었고 점복(占卜)에 능통하여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한 이인(異人)이기도 하였다.
금강산 하면 양봉래(楊蓬萊)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금강산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고 명소들에 적지 않은 글을 새겨 놓았다. 양사언이 자신의 호(號)를 봉래산(蓬萊山: 여름에 부르는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도 그가 남달리 금강산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당시 만폭동 바위에 새겨 놓은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04의 여덟 글자와 “만폭동(萬瀑洞)” 세 글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만폭동 골짜기 안의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양봉래가 써 놓은 글씨를 바라보면 세계의 명산을 가진 긍지와 자부심에 금강산의 절경을 노래했던 그의 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산위에 산 솟으니 하늘위에 땅 생기고
물가에 물 흐르니 물 가운데 하늘일세.
아득해라 이내 몸 텅빈 하늘 속에 있으니
노을도 아니거니 신선도 아니여라.
세상사람 이르는 말 내 들었노라
고려국에 태어나기 소원이라고.
금강산 좋은 경치 바라다보니
만이천 봉이마다 백옥이로세.
어느 날 금강산 절승의 하나인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십이폭포(十二瀑布)의 장쾌한 전경(全景)을 바라보던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뫼부리로 안주삼고 동해물로 술빚어라.
삐죽한 봉우리들 하늘 높이 솟았으니
취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날리는 폭포수는 바람 앞의 물이고
높이 솟은 불정대는 하늘 밖의 산이라네.
만폭동 명승지의 하나로 법기봉 허리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매달린
보덕암(普德庵)을 보고서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보덕암 구리기둥과 구슬 햇빛가에 있고
눈처럼 수많은 봉우리 하늘에 기대었네.
신선은 천길 되는 굴 속에 머물면서
나를 수레에 태워 구름 속으로 달리겠지.
이처럼 금강산에 온 넋을 빼앗겼던 양봉래는 끝없는 희열 속에서 명승들을
빠짐없이 찾아다녔고 이르는 곳마다 주옥 같은 시들을 남겼다.
그가 스스로 외직을 자청했던 것도 관동지방의 산수경관을 즐기며 소요하기 위해서였다.
48세 때는 아예 관동(關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가 거주한 곳은
구선봉(九仙峰) 아래의 아담한 호수인 감호(鑑湖) 옆이었다.
양사언은 이 집 뒤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아
금강산을 노래하는 시를 읊고 글씨도 쓰면서 지냈다.
금강산을 사랑했던 양봉래는 시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일화들도 남겨놓았다.
<다음 호에 계속〉
01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02 송(宋)나라 때 미산(眉山) 지역에 살았던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까지 삼부자(三父子)의 대 문장가를 일컫던 말.
03 선녀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
04 ‘봉래ㆍ풍악’은 다 금강산을 의미하며 만폭동의 다른 이름인
‘원화동천’은 금강산의 기묘하고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란 뜻이다.
1564년, 양봉래(楊蓬萊)는 조정 관료들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세상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껏 시를 읊고 글씨도 남기려는 생각에서 금강산으로 갔다. 그는 아홉 명의 신선(神仙)이 경치 좋은 산천을 유람하며 수양했다는 구선봉(九仙峰) 아래의 감호(鑑湖) 부근에 집 한 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집 뒤편에 정자(亭子)를 짓고,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란 뜻의 비래정(飛來亭)이란 이름을 지었다. 여기에는 세속을 벗어나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곳에서 양사언은 맑게 출렁이는 감호와 하늘 높이 솟은 구선봉,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시상(詩想)들을 모아 시를 읊고 글씨도 쓰면서 지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감호’는 거울 속에 있는 연꽃 같고, ‘구선봉’은 소라고둥이나 틀어 올린 상투 같다고 하였다. 또한 감호와 구선봉은 자기 집 주위에 둘러 친 병풍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 한적한 곳에 사는가.
온 천하 명소를 다 보았어도, 이만한 곳 없다네.
모래는 희고 바다는 푸른데 소나무 또한 울창하여,
연꽃 같은 봉우리 아래 지은 내 집은 그림과 같다네.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양사언은 이날따라 새로 지은 정자에 ‘飛來亭’이라는 편액(扁額)01을 써서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연마해 온 실력을 모두 쏟아 부어 편액을 잘 써보리라 마음먹고 정성껏 붓을 준비하였다. 그런 다음 혼신의 힘을 다해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 비(飛) 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글자의 한 획 한 획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꿈틀거리는 용의 기상이 완연하였다. 양사언은 스스로도 대견하고 만족스러워 ‘비’ 자에 이어 ‘래(來)’ 자와 ‘정(亭)’ 자를 내리썼는데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두 글자를 써보았으나 여전히 ‘날 비’ 자만 못하였다. 안타까운 심정을 억제하며 몇 번이고 고쳐 썼으나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양사언은 그만 화가 치밀어 붓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먼저 써놓은 ‘날 비’ 자를 새겨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글자만은 살아 움직이는 듯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날 비’ 자만으로 족자를 만들어서 자기가 공부하는 서재에 걸어 놓았다.
세월이 흘러 양사언은 안변(安邊)군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게 되었고 떠나면서 사람을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안변군수로 있으면서 그는 효제(孝悌)로 교화하고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또 큰 못을 파고 마초를 많이 쌓아놓아 뒷날 군마의 주둔에 대비했는데, 과연 다음해에 난리가 일어나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지릉[智陵: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翼祖)의 능]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낯선 땅에서 2년 넘게 귀양살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그가 한때 신선처럼 살리라 꿈꾸며 지어 놓았던 비래정에 고성지방 특유의 드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쳤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고 나가 공중으로 흩날려 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 모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양사언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족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부리나케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바닷가까지 뛰어가며 샅샅이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양사언과 가깝게 지내던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돌아오던 길에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에 그 벗은 사언의 죽음을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비래정에 「비자기(飛字記)」를 기록한 유근(柳根, 1549~1627)은 양사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봉래 선생은 비록 속세에 살았지만 인간 세상 밖으로 벗어나 수려하기는 왕희지(王羲之)02의 풍류와 하계진(賀季眞)03의 필법과 같았다.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지만 마침내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안타깝도다. 선생의 비범한 능력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이 일이 있기 전에 비래정을 찾았던 한 진사(進士)는 ‘날 비’ 자가 하도 마음에 들어 모사해 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난리 통에도 그 글자만은 불에 태우지 않고 잘 보관해 두었다. 사언의 맏아들인 양만고가 이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가 모사한 ‘날 비’ 자를 보면서 파란만장했던 부친의 삶을 되새겨보았다고 한다.
그의 사승(師承)관계를 알 수 있는 『인물고(人物考)』에 따르면 “(양사언은) 점치는 일에 정통하였는데 남사고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 데서 그의 이인(異人)적인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그와 교유한 사람으로 『봉래시집』에도 언급된 허엽(許曄), 이달(李達)과는 금강산 일대를 함께 유람하기도 하였다. 양사언은 스스로 ‘봉래산인(蓬萊山人)’이라 하면서 이달을 가리켜 이적선(李謫仙)04이라 부르곤 하였다. 또 어느 시에서 양사언은 “지금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 적은데 누가 종자기(鍾子期)를 보내 백아(伯牙)의 짝이 되게 하였나!”라고 하면서 이달과의 교분을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05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런 양사언의 부음(訃音)을 접한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인 줄 본래 알았으니
슬퍼하며 부질없이 수건을 적실 필요가 없네.
그대 동녘 바다의 봉래로 돌아가는 길에는
벽도화 수천 그루가 활짝 핀 봄이리라.
- 『蓀谷詩集』 「哭楊蓬萊」
01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02 왕희지(307~365)는 동진(東晉)시대의 서예가로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03 하지장(賀知章, 659~744)의 자는 계진(季眞)이며 중국 당나라의 현종(玄宗)을 섬겼던 시인이다. 하지장이 이백(李白)을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한 뒤 이백의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詩壇)에 퍼졌다. 그 자신도 풍류인으로서 이름이 높아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04 적선(謫仙)은 벌을 받아 인간 세계로 쫓겨 내려온 선인(仙人)을 뜻한다.
05 춘추전국시대 때 진(晉)나라에 거문고의 달인 백아가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해주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가 있었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고사가 말해주듯,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자기를 알아주는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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