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我의 生 요한一章一-四節, 又 빌三章九-十六節 淸朝
人欲知我之外 而不欲知自己. 欲知美國英國 而不欲知朝鮮. 我所知者 我之內也 何也? 我之生在我內 不在他.
我之生 果何在? 緫不在他 卽在我, 務他非生命. 心之所在 卽利所在也. 我欲取諸位之金 則諸位之心 皆在我. 我欲取諸位之血 則諸位之心 亦在我. 此時聽講亦然, 欲聽我 卽心在我 是生故也. 聽而不聞 是死也.
人或以物造人 無動作 無生故也. 我之生在前 不在後. 我欲生 則前進可也. 吾信主 何与主聯絡? 信而不聯死. 禮拜與聖餐 皆然. 心不在卽死, 信內宝血循環是主也. 我對食思主 是聖餐, 凡事思主 是禮拜也. 故保羅曰 活祭. 我之信与血循環 是活祭也.
人欲大金, 大學, 大位 而反不如一息之小 何也? 是生在小息 是生也. 自生民至天子 皆然. 食於方丈 反不如一器之食 何也? 生是一器已足. 大宛馬一頭價 至三十万 反不如一小兒 生故也.
肉生有限. 地球百回 則吾等不復坐此地, 不能加長 不能加短 何也? 神所定故也. 然則我之生 光于何處? 卽此處也. 是生在此 光于何時? 卽此時也. 此處此時 卽生命, 他處他時 無生命. 故忠于現實爲生命.
看彼花木 百習仿者乎? 人欲延生卽壽也. 何法可延? 老子釋迦 以此爲聖人 不能永生者 無神故也. 生自取業 和爲眞生 人与眞生 絶已久. 而以主之寶血 更續神之眞生, 主無始無終 永生常存. 人欲永生 卽信主之血滌我之罪, 寶血循環我內 其生滿足. 肉体血液停止 卽生病, 主血停止 則信必有病.
我之信仰生活 爲主之現實. 非神不言, 非神不動, 非神不行. 雖一秒 未嘗忘神 其生活常常滿足矣.
008. 나의 삶 / 요한복음 1:1-4, 빌립보서 3:9-16. 삼청교회 주일 아침
사람은 자신의 밖을 알려 하면서도 자기는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미국, 영국을 알고자 하나 조선(朝鮮)은 알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작 아는 것은 나의 속내라 함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내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디에 있나요? 모두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곧 나에게 있습니다, 다른 데에 힘쓰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는 곳은 곧 이득이 있는 곳입니다. 제가 만일 여러분의 돈을 취한다고 하면 곧 여러분의 마음은 모두 저에게 있게 됩니다. 제가 바로 여러분의 피를 취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역시 제게 있습니다. 이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도 그러합니다. 저를 듣고자 한다면 곧 여러분의 마음은 제게 있게 되니 이는 살아있는 연고입니다. 들으면서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혹 물질로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합시다, 동작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연고입니다. 내 삶은 앞에 있지 뒤에 있지 아니합니다. 내가 살고자 한다면 곧 전진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과 어떻게 연락합니까? 믿으면서 주님과 통하지 아니하면 죽은 것입니다. 예배와 성찬식도 모두 그러합니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죽은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보혈이 순환하니 이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음식을 대할 때 주님을 생각하면 이는 성찬이 되며, 범사에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산 제사’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믿음에 주의 피가 순환하면 이것이 산 제사입니다.
사람은 큰돈을 벌고, 공부 많이 하고, 큰 지위 얻기를 바라지만 도리어 한 순간의 작은 숨 쉬기 만큼도 귀하지 못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생명은 작은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일반 백성으로부터 임금[天子]에게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맹자가 말했던 진수성찬을 화려하게 벌려놓고 먹어도 도리어 한 그릇의 밥만 같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는 데는 한 그릇이면 충분한 까닭입니다. 예전의 대완(大宛)이라는 말이30만량이었다고 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한 어린 아기만 같지 못한 것은 아기는 지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은 유한합니다. 지구가 백번을 돌 때에 우리는 같은 이 위치에 다시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짧게 할 수도 없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이 어디에 빛이 납니까? 곧 이곳입니다. 이생은 여기에 있으면 어느 때에 빛이 납니까? 곧 이 시간입니다. 이곳과 이때가 곧 생명이며, 다른 곳과 다른 시간은 무생명(無生命)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충실한 것이 생명이 됩니다.
저 꽃나무를 보십시오, 백번을 연습한다고 해서 모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이 삶을 연장하기를 원하는 것은 수명입니다. 무슨 방법으로 연장할 수 있습니까? 노자(老子)와 석가(釋迦)가 이로서 성인이 되었지만 영생할 수는 없었으니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은 스스로의 업보(業報)에 조화하므로 진생(眞生)이 된다하였으나 인간 세상에 진생이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로서 하나님의 진생(眞生)인 참된 삶을 다시 잇게 되었으니, 주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생이 항상 있습니다. 사람이 영생을 원하면 주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줌을 믿어야 합니다, 보혈이 내 속에서 순환하니 그 삶은 만족합니다. 육체의 혈액이 정지하면 병이 생기고, 주님의 피가 정지하면 믿음에 반드시 병이 생깁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내 삶의 실재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아니면 움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아니면 행동하지 아니합니다.일초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한다면 그 생활은 항상 만족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