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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사상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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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스크랩 유관순 열사 시신을 여섯 토막내 석유통 보관한 일제 만행의 현장
무위 추천 1 조회 108 16.02.29 21:44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유관순 열사 시신을 여섯 토막내 석유통 보관한 일제 만행의 현장, 사적 제324호 구 서울구치소   

   


 


사적 제324호 舊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박물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6천여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호국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목슴을 잃은 400여 순국선열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있다. 

 

<서대문 형무소 명칭의 역사>

1908년 경성감옥 신축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 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1987 구치소 의왕시로 이전

1990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 기슭에 일본인이 설계하여 건립한 근대적인 감옥이다.

약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불렀다. 종로의 감옥에서 500여 명을 데려와 수용하고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과 박해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은 곳이다. 애국인사들이 늘어나자 1912년 일제는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또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이라 불렀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었다. 18세 미만의 소녀들과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까지 수용하였으며,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946년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로 바뀌고,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수용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8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일제시대엔 민족독립의 역사를 지니며 그후로는 민주화와 정치적 변화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서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매우 뜻깊은 곳이다.

옛 서대문 형무소 최초 건축도면 발견

 
 


 


  


    
    이강연 의병장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승아에게 유언하며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층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탄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國恥民辱(국치민욕)/나라의 수치, 백성의 치욕
       乃至於此(내지어차)/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불사하위)/죽지 않고 어찌 하리오.  
       父葬未成(부장미성)/아버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國權未後(국권미후)/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였어니
       不忠不孝(불충불효)/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死何暝且(사하명차)/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랴.
             

 


 

 


                                                              벽에 새겨진 순국열사들
 


 


 


 


                                                              


 

 


지하 고문실에서는 악독하기로 이름난 일본경찰들이 애국지사들을

갖은 방법으로 고문했다.

전기고문/성고문/물고문/고춧가루물 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2월30일에 태형집행심득(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준칙을 제정하고

합법적으로 극형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형직전 사형수가 앉아 있던 의자


 


사형수의 시신을 몰래 밖으로 내보낸 시구문



 

                                                        민족의 魂 그릇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작품입니다. 내부에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 모아 절하며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기원했다.

     운영자는,

    일제하. 해방. 6.25. 4.19. 5.16. 10.26. 12.12. 광주시민항쟁. 민주화의 물결 등

역사의 굴곡을

함께 하며 살아 왔기에 순국선열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추모비 앞에 서 있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순국선열들의 애국혼이 넘치는 피로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보라 !

북한을 보라 !

일본을 보라 !

하늘에 계신 순국선열들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남북한 7천만 국민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간절히 기원했다.

순국선열들의 명복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운 융성을 위해 정치인들이 각성해 주기를!

 

아 ! 유관순 열사 !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음력 3.1)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지하 감방에 특별 수감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日帝 유관순열사 순국뒤 시신토막, 옥중 여성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서울신문 | 입력 2006.11.02 09:00

[서울신문]일제가 강점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토막내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힌 여성 열사들을 성고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연 학술심포지엄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밝혀졌다.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여성 열사들의 옥중투쟁과 일제의 잔인한 고문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를 발표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 여성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고, 그해 10월 순국하게 된다.

이틀 뒤에야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가 형무소장에게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일제는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붙여 마지못해 석유상자에 넣은 시신을 넘겨줬다. 김 관장은 발표문 중 '고문방에서 토막살해 설도'라는 소주제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머리와 몸통, 사지 등 여섯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간수들은 유관순이 고문에 못이겨, 아니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살해 가능성을 언급하는 문헌도 인용했다.

일제의 만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중략-기사 내용이 너무 참담하여 여성 인권  보호차원에서-운영자>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대동단 단원이었던 이신애 열사는 서간문과 구술자료에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경사가 면상을 세게 내리치자 아래턱이 퍽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돌아가 붙어버렸다. 아이쿠 하려 애를 써도 그때부터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신애 열사는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아 손목이 다 타버렸고, 끝내 임신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061102090016778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여섯 토막내 보관한 석유상자


 

-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이곳이 유관순열사의 초혼묘이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자,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을 비롯해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그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시도록 초혼묘를 매봉산 중턱에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비문이 적혀 있다.
 
 
2014년 3월 1일 대대적 기념행사 열린다. 


 
 

찾아오시는 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 현저동 101번지

지하철 이용시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독립공원 방향, 1분 소요)

버스 이용시
현저동 또는 독립문정류장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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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2.29 22:00

    첫댓글 2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내일의 "3.1절을 맞아 잊고 지내던 애국심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대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단군조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우기를 소망합니다.

  • 16.03.01 09:33

    삼일절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어요. 우리 모두 이 날을 기억하고 일본의 침략야욕 분쇄합시다.

  • 16.03.03 09:13

    97주년 3·1절 풍경,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와 2016총선시민네트워크는 1일 낮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역사를 오염시키는 데 앞장 선 정치인들을 4·13 총선에서 투표로 퇴출시켜달라”며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 이정현 최고위원, 김을동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 나경원 의원을 ‘퇴출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나경원 의원은 지난해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외교적으로 잘한 협상”이라고 두둔한 사실 탓에 선정됐다. 나머지 4명은 ‘좌파’ 또는 ‘친북’이라는 색깔론을 앞세워 국정화를 주도했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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