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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6-8절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공생애 사역은 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있었는데,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자신에 대하여 알리시고 나타내셨습니다. 단지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계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까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요19:30),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모든 일에 순종하는 것,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모든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주목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6절 이하 19절을 통해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어지는 20절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특별히 그들을 복음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부르신 자들, 다시 말해 사도라는 직분으로 부르신 자들, 그들이 지금 6절 이하 19절의 기도 내용의 직접적인 대상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기록된 말씀으로 있다고 할 때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먼 6절에 보시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이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은 결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 안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때 자기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누군가 할 때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믿는 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그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칭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까지 말하는가? 단순히 믿는 자로만 말하지 않고, 누가 믿는 자냐고 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믿는다고 말합니다(행13:48).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은 정확하게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롬11:7). 혹은 ‘긍휼의 그릇’이라고도 말하는 대상입니다(롬9:23).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할 때 자기 백성은 누군가? 믿는 자이지만 누가 믿느냐고 할 때 택하신 자들, 그들이 믿는다는 점에서 자기 백성은 오직 택자 외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거절하든가, 아니면 묵살하는 형태로 있습니다. 심지어 구원의 대상이 모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까 구원의 대상은 모두이지만, 결국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 믿는 자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를 앞세운다는 의미에서 강조를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의해야 될 가르침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들은 ‘누구든지’ 안에 모든 사람을 넣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지만 그중에 스스로 믿기로 한 자가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누구든지’는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과 같은 이방인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롬10:12).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냐?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에서 ‘누구든지’인가? 이때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든지’이지만,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남녀노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 택자와 유기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이 로마서 9장에 있는데, 1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3-16) 즉 사랑하시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미워하시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지만 그것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21절 이하에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1-23) 모든 인류는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한 부류는 긍휼의 그릇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로 따지지만, 방금 전에도 말한 것처럼 거기에는 불의함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도 진흙으로 귀히 쓸 것과 천하게 쓸 것을 만드는데,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선택과 유기, 특별히 유기에 대하여 불의하다는 입장으로 접근하지만, 마지막 심판 자리에 가면 하나님께 불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 될 것입니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도 불의하고 저것도 불의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마지막 심판 때는 그 모든 것이 결코 불의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하심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성경이 택자와 유기자에 대하여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거절한다든가, 묵살한다든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더하는 식으로 있는 것은 결코 가벼운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물론 성경은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택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택자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기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택자인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택자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기도 내용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도, 또한 사도의 표인 표적과 기사와 능력까지 행하면서도 유가자인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강도 두 사람이 예수님 양편에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죽기에 앞에 천국 백성으로서의 약속을 받습니다. 평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생애는 사람들조차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열매를 맺었고, 그 결과 사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긍휼을 얻습니다.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외형은 유기자의 표로 가득한데, 결국 택자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또 알려주지 않은 만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택자와 유기자에 대하여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6절 이하가 제자들, 사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할 때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이 표현은 단순히 세상 중에서 내게 제자로 주신 사람들, 혹은 세상 중에서 내게 사도로 주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자와 비교되는 택자의 의미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일단 9절에 보시면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12절에도 보시면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보존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멸망하게 되는 자도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소위 고별강화가 시작되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은 단순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자 혹은 사도로 세워 나에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2절 내용에 속하는 자,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제자 혹은 사도로 부르신 자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아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다시 6절을 보시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다시 말해 제자요 사도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할 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사역을 통해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으로, 표적과 기적과 같은 능력을 행하심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며, 또 어떠한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는지 가르침과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적으로는 가룟 유다에게도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도 천국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 받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제자들만 듣고 보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듣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듣고 보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것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것만을 아들에게 주신다고 할 때 아들에게 주시지 않는 자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보존과 같은 견인의 은총은 구원 받는 자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것인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참되게 고백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할 때 영원 전부터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유로 정하신 자들, 바로 그들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구분하자면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할 때 유효적 소명을 받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택자라고 할 때 결국에는 유효적 소명을 받겠지만 유효적 소명을 아직까지 받지 않은 상태에 있을지라도 택자는 택자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를 뿐입니다. 그런 대상이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유효적 소명과 참된 믿음이 있게 됩니다. 지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는 내용은 택자이지만 때가 되어 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들,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이 말씀을 가룟 유다와 관련해 대입해 보면 가룟 유다에게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천국 복음을 함께 전파 했지만, 또한 때를 따라서는 표적과 기적을 나타내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마태복음 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지만(롬10:13), 여기서는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등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어떤 면에서 사도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저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할 때 저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어떤 능력을 행함에 있어서 주의 이름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에 대한 내용은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7:15)는 말씀 안에서 설명하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실은 거짓 선지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참되게, 올바르게, 믿음으로 부르고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여 주여 부르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도 행하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열매는 21절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는 것, 단지 외적으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거기에 진정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를 누구에게 주시는가? 반드시 택자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택자라 할지라도 때가 되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을 때 주시지,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도 않았는데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이 그것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있고, 특별히 제자로, 사도로 부른 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그들을 내게 주셨는데, 주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많은 부분 열매와 관련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선택은 반드시 유효적 소명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열매 있는 자가 되도록 한다는 게 신앙의 과정으로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에베소서 1장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선택의 시기는 창세전입니다. 모든 것이 창조되기 이전, 그래서 영원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선택이 시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게 하신다는 내용인데, 구원의 서정으로 말하면 유효적 소명 이후 결과 되는 내용입니다. 그럼 양자가 된 것으로 끝나는가? 선택과 선택에 따른 유효적 소명, 그리고 양자가 되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과도 직결됩니다. 즉 열매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17절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가 그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뻐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화평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오래 참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비를 나타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충성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온유함을 갖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절제하는 것, 이것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으로 가기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7장을 보겠는데, 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 어떤 실천적인 내용이 연결되어 나와야 합니다. 방금 언급한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여기서 비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초입니다. 반석 위에 짓느냐? 아니면 모래 위에 짓느냐?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하면 무엇을 비교해야 합니까? 기초가 아니라 기초 위에 지은 건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은 건물이 아니라 기초를 비교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건물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건물의 화려함이라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시점에서 제자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게 됩니다. 건물의 화려함으로만 비교하면 그들은 그렇게 볼품 있는 그런 건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내용으로 하자면 그들은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가 그리스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무너집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만 주의 이름이 형식적으로만 있을 뿐 그가 기초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 열한 명의 제자와 가룟 유다, 외적으로만 보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이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똑같이 기적을 행했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똑같은 건물입니다. 그러나 기초가 다릅니다. 열한 명의 제자는 그 기초가 그리스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참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참되게 고백한 자가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참되게 고백한 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두고 있지 않은 자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그래서 열매가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누구를 기초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은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행함 이전에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것이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출처가 누구냐?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아버지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도 아버지의 능력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는 이 말씀과 상관없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다른 것을 기초로 하고 출처로 한다면 그 기초와 출처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기초로 하고 출처로 하게 되면 그런 구원관은 사람의 속성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구원의 불변성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알미니안주의 쪽에서는 구원도 실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초요 출처로 하게 되면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불변하시기 때문에 구원 또한 변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언급했지만 요한복음 17장은 보존에 대해서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심으로 구원의 완성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의 비유로 하자면 이것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6절에서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보이는 열매라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아는 것, 이것이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8절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출처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것,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달리 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임을 알고 믿은 것, 이것이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정확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분명 열매를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열매에 앞서 무엇이 기초가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믿음에 근거한 열매인가를 확인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가시면 오병이어 사건 이후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26절부터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26-35)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려 하라고 하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묻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이라고 하면 뭔가를 행하는 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이 시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같은 그런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모세의 표적이 모세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떡은 먹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떡이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표적을 보여준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만 믿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6장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6:36)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리고 그런 기적은 어떤 면에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것을 나타낸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믿느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 그들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말씀을 지키었다는 것은 순종과 열매라는 차원에서도 말씀하시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것,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참된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도 말씀을 지키었다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따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신자라면 마땅히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시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열매에 앞서 그 모든 열매의 기초와 출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을 예비하셨다고 할 때 예수님 시대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의 서정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지키는 데 힘쓴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그들은 때가 되면 유효적 부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게 됩니다. 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셔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종, 열매라는 차원으로 나타나겠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분이심을 아는 것,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임을 알고 믿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이 제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열매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건물의 화려함은 많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에 따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지식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자라남을 요구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계속해서 알아감으로 열매 있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은 그런 뜻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확인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기초가 누구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반석 위냐? 모래 위냐? 아무리 화려한 건물일지라도 모래 위라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석 위에 있는 건물만이 안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만이 출처가 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도 허울 좋은 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이 기초요 반석이 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고, 주의 이름으로 전하고 행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울 좋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출처가 되신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위에 세워 가신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그 앎이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요 기본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화라는,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쌓아 가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