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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애의 수필세계
- 식물성의 푸른 서정과 열림의 견고한 자화상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
I. 로그인
이선애는 강마을 작가로 불린다. 그녀가 그려내는 서정수필의 출발점은 강마을에 있다. 그러니 제목을 <강마을 편지>라 해도 무리가 없다. 수필은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교실 창 너머 보이는 푸른 봄 햇살과 풀들의 싱그러운 모습을 자신의 세계관과 상관화시켜 시골학교 국어교사로서 느끼는 바를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 바로 이선애 수필의 특징이다. 한마디로 그녀의 수필은 자연과 같은 삶, 자연에 닮아가는 삶,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흔적 남기기다. 문학의 존재 가치는 삶의 흔적이고, 작가의 체온이 흔적으로 서려 있을 때 가치를 발한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수필집은 한 개인의 역사서요, 수필은 추억의 보고다. 잊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표백이다. 모든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러하듯 문학은 끊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 가고,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는 일이며, 그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을 접할 때, 감정이 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하는 것, 그것으로부터의 결과가 바로 수필집이다.
수필집을 묶어내는 것은 또 하나의 자기를 만나는 작업이다. 이선애는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수필가다. 가슴에 엽서를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이 갖는 서정성은 그 자체로서 흥건한 정을 자아내게 한다. 유네스코 우수잡지 계간 에세이문예 출신들로 이루어진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남부지부 지부장으로서 소임을 충실히 다할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끊임없이 독서에 열중하고,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게 쌓는 등 지성성의 측면도 나무랄 데가 없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우리의 주변은 많이 변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흔적이나 물증을 남겨 두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그 과거의 일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나면, 문자가 있는 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때마다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이선애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강마을 시골학교에서 푸른 서정을 만나며 그 흔적을 남기려 수필집을 낸다. 긍정의 세계관으로 희망이란 꽃을 키우고 있는 강마을 그녀의 삶터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 순리의 삶과 강마을 서정
이선애의 수필집 <강마을 편지>에는 저자가 강마을 삶터 모퉁이를 돌면서 얻은 비움의 사유가 도발적인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그녀는 꿈의 씨앗이기도 한 시골 ‘아이들’을 아스라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수한 여인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학의 ‘길’을 나선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주축이 되는 그림자 형상은 ‘강마을’이다. 이선애의 수필 속에서 무시로 발견되는 ‘강마을’은 이선애 수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초가 되는 핵심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강마을’은 원시적 자연의 서정을 품고 있는 순수의 본향을 의미한다. 자연과 같은 삶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선애에게 있어서 ‘강마을’은 작가가 직접 <꿈의 씨앗>이란 수필에서 표현했듯이,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으로, 열려진 ‘창’을 의미한다. 그녀의 찬란한 비상을 꿈꾸는 시선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봄’은 ‘보는 계절’이라 의미화하고 푸른 하늘 빛 같은 자신의 꿈을 꾼다. 작가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그 ‘강마을’은 평일에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위치는 ‘시골마을’이고,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구체화된다.
작가는 농촌 풍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자연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익숙한 이선애에게 ‘자성’은 사색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그녀는 ‘물푸레 나무 같은’, ‘국화차를 만들며’, ‘꿈의 씨앗’, ‘자작나무 편지’, ‘열매’, ‘봄눈’, ‘오리나무와 찔레꽃’, ‘여름화단에서’, ‘인동꽃을 닮은 앙’, ‘고들빼기를 깨며’, 도발적인 봄꽃‘, ’가을 들판에서‘, ’가을이 깊어져 있습니다‘, ’낙엽끼리 모여산다‘, ’익모초가 피었습니다‘, ’아, 무궁화‘, ’땡삐와 산딸기‘,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반가운 손님 같은 자귀나무꽃‘, ’눅눅한 바람 사이로 비냄새가 납니다‘, ’밤꽃 냄새가 무성합니다‘ 등의 제목에서 보듯 글의 제재가 거의 ’강마을‘에서 보고 느낀 자연물과 상관화된 것들이다. ’강마을‘은 그녀에게 사색의 시공으로 연결된 문학의 터전이요, 꿈의 삶터다. 이선애는 자연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풀향기에서 생명의 피솟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씨앗에서 풀로, 풀에서 꽃으로, 꽃에서 나무로, 흙에서 하늘로, 시선을 넓혀가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성스럽기조차 하다. 자연과 아이들에게서 순수를 배우고, 푸른 서정을 호흡하며 살았던 강마을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산다. 그리고 자연에 삶의 지혜를 묻는다. 자연 속 제물상에서 ‘인내’를 만나고 삶의 섭리를 발견하길 좋아한다. 이처럼 이선애의 수필에서 자연친화적인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누가 뭐래도 ‘강마을 작가’다. 인간은 결국 대자연이란 문학의 온상만은 끝내 일탈할 수 없었음을 이 수필집은 보여준다고 하겠다. 생의 참된 의미나 조화의 과정을 여유있게 관조하고 수필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구체적인 자연물 그 이상의 제재는 다시 없다.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으로서 자연은 이선애에게 토포필리아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모태로 해서 생명활동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것이며, 자연의 질서가 삶의 질서라는 것을 수필을 통해서 깨닫는다고 볼 때, 이선애에게 자연물은 순리의 삶을 가르치는 스승인 셈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하는 것이 자연이다. 이선애 수필의 가치는 자연 안에서 조화의 소중함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을 발견하는 데서 빛난다. 자연의 메시지는 절대자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이선애의 시선과 사유가 푸른 서정의 경계를 넘어 자연의 숨소리와 그 맥박, 그 의도를 점철해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음은 수필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는 작은 등불이 교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가슴 속에 품은 꿈의 씨앗이 상처받지 않도록, 교사인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학생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아이들이 가지고 싶은 것을 알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교사들의 의식이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아 때로 안타깝습니다. 여기 시골 강마을에서 자라는 꿈나무의 씨앗이 전국을 푸르게 녹화할 날을 꿈꿔봅니다.
- <꿈의 씨앗> 중에서 -
수필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이선애 수필의 발단은 거의 모든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연 풍경에서 출발해서 결말은 자기성찰로 마무리 되는 특성을 갖는다. 위에서 인용한 수필 <꿈의 씨앗>도 마찬가지다. 발단부 첫문장이 “제가 근무하고 있는 시골 중학교의 아침은 안개로 무성합니다. 어제 저녁에 비가 내린 모양입니다. 교문 앞이 촉촉하게 젖어있습니다. 비가 내리니 떨어진 낙엽도 젖어있습니다.”란 풍경 묘사로 되어 있다. 수필은 원래 ‘자기반성’을 통해 진실 추구로 나아갈 때, 가장 효과적이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꽃이 피어나는 데 비유하고, 교사로서의 사명이 아이들의 행복을 책임지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작가가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교사들의 의식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것은 그녀가 그동안 독서를 통해서 또는 인문학적 교양을 통해서 마음공부를 단단히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시선을 놓는 방법으로 타자-되기를 지향하는 그녀의 성숙한 작가의식은 자연에서 모성성을 발견한 까닭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골 강마을에서 자라는 씨앗이 전국을 푸르게 녹화할 날을 작가가 꿈꾼다는 것이다. 워드워즈에 따르면, 작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타자-되기가 교육의 열쇠다’라는 신념을 기반으로 해서 작가는 자신의 교육적 사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이는 그녀가 범상치 않은 교육자적 자질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교육적 마인드는 ‘강마을’이라는 자연 환경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점점 더 푸른 산과 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무수한 봄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히는 여름이 곧 다가오겠지요. 시어머니께서는 부추밭과 마늘밭으로 부단히 움직이면서 그 분의 팔과 무릎에서는 푸른 잎이 돋아 날 것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푸른 물결을 일으키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제 삶도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화사한 봄꽃도 아름답지만 그 꽃도 시간이 되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순리입니다.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열매> 중에서 -
이선애의 <열매>는 작가가 휴일을 맞아 시가의 농사일을 도와줌으로써, 농촌의 삶을 이해하는 작가의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 글에서 막내동서와 비교하여 자신을 낮춤으로써 참된 인간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과 어머니를 견줌으로서 며느리로서의 겸허함을 통해 윤리적 책무를 겨냥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인다. ‘그에 비하면 저는 일하다가도 보랏빛 자운영에 한눈을 팔고 하얀 조팝꽃을 꺾어 내려옵니다. 노오란 양지꽃을 보다가 남새밭 가는 길에 자꾸만 뒤처지는 그런 사람이지요. 토끼풀을 따서 책갈피에 넣었다가 누름꽃을 만들어 엽서를 쓰기를 좋아하는 철부지입니다.’라는 솔직한 진술은 작가의 청초하고 정결한 마음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을 읽고 인생을 생각하며 해석하기에 이른다.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시어머니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삶도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한다. 자연을 꿈꾸며, 그리고 자연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작가의 자연친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수필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자연과의 교감을 폭넓게 해서, 제재를 통해 주제를 문학적으로 구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필은 재생적 상상을 통해 체험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경험을 미학적 정서로 표현하는 데에서 그 맛이 우러나는 글이다. 열매는 결실의 상징이다. 농사일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자연을 닮은 삶을 살겠다는 야무진 자세나 순리를 좇아 살겠다는 자세에서 순수한 인간의 향기가 묻어난다.
요즘은 시골아이들도 먹는 풀과 나물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고사리와 냉이를 모릅니다. 아이들이 적어도 먹는 풀과 못 먹는 풀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지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교육은 생물 시간에 고사리의 생태는 배우지만, 산에 핀 고사리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고들빼기를 앞에 두고 생각 한 자락도 함께 캐고 있습니다.
- <고들빼기를 캐며> 중에서 -
위대한 철학은 호기심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수필 <고들빼기를 캐며>에서 작가는 살아있는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구체적 경험에 기대어 수놓는다. 물론 이 수필의 공간적 배경도 강마을이다. 작가는 학교 화단에 핀 잡초를 뽑고 고들빼기를 캐면서 ‘요즘은 시골아이들도 먹는 풀과 나물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고사리와 냉이를 모릅니다.’라는 대목에서 멈춰 생각 한 줄기를 캔다. 시골 아이들이 고사리와 냉이도 구별을 못한다는 진술 속에는 교육자로서 진지한 고민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연친화적 삶에 대해 성찰한 결과를 수필로 쓴 사람이기에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자기 반성을 통해 사물에 내재한 본질이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어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풀잎 같은 감성으로 시골생활을 수필 속에 용해하고자 한다. 내면을 숨기지 않는 데서 그녀의 솔직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진솔한 삶의 자세는 수필은 인간학이어야 한다는 대명제에 부합한다. 이 수필에도 강마을에서 살아오면서 얻은 인생의 지혜가 서려있다. 다시 다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면 자신을 향해 계속 생채기를 내고 오늘의 그림자인 어제를 향해 계속 자책하는 것은 무척 잘못된 일이란 반성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꾸었던 꿈을 잊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저 오늘의 그림자인 것을. 그리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인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이 꾸는 꿈입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 봅니다.
황사 섞인 바람이 요동치는 강마을에 어디선가 연분홍 꽃잎 하나 창문에 날아드는 봄날입니다.
- <오늘이 꾸는 꿈> 중에서 -
그녀의 수필은 전체적으로 차분하다. 잔잔하나 뜨겁다. 작품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 것은 '오늘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면, 자신을 향해 생채기를 내고, 어제에 기대어 과거를 현재화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제는 그저 오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현재를 중시하고자 한다. 이선애에게 있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인간이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할까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작가는 어제와 오늘, 양자 대비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연속선상에 놓고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개인의식에서 출발하여, 수필의 중간 어딘가에 꼭 사회의식을 노출시키는 그녀의 수필적 특성은 그래서 잔잔하기도 하면서 날카롭다는 것이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균형 잡힌 시각에서 나온다.
사람은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방황을 거듭하고 뒤척이며 산다. 그것은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일종의 순례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순례자의 꿈을 안고 산다. 작가에게 ‘꿈’은 앙금처럼 가라앉은 영혼을 일깨우는 질료다. ‘황사 섞인 바람이 요동치는 강마을에 어디선가 연분홍 꽃잎 하나 창문에 날아드는 봄날입니다.’라는 표현은 일상의 권태를 전지하고자하는 낯선 시각이다. 세상과의 소통을 예고하는 문학적 장치를 수필 창작에 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우리 수필의 기대주임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여기’와 ‘지금’을 중시하는 삶의 지향만으로도 이 수필은 즐거움을 준다.
누구나 아름다운 말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너 참 예쁘다."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의 씨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웃음이 빙글빙글 피어나니까요. 긴 시를 외운 아이에게 칭찬의 말을 하면서 작은 선물을 주었더니, 피시식 부끄러운 미소가 피어나더군요. 목소리가 예쁘다는 한 마디에 책읽기 할 때면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은 웃음의 꽃과 희망의 잎이 무성해지는 따뜻한 씨앗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실천을 잘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 <마음에 씨를 심으면> 중에서 -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사상은 긍정미학이다. 격려는 삶의 나침반이다. 수필은 한마디의 문학이다. 말을 씨앗으로 의미화해서 그녀는 언어의 동역학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 속의 중심 사상을 의미화하는 한 마디 문장이 생명적이다. '아름다운 말은 웃음의 꽃과 희망의 잎이 무성해지는 따뜻한 씨앗입니다‘라는 진술은 이 수필의 전모를 한 줄로 일반화시킨 대목이다. 칭찬을 하면 미소가 피어난다는 진술이 이 수필의 주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해 주기에, 이런 부분과 전체의 절묘한 조화가 문학 수필의 멋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봄눈>에서도 말의 힘을, 따뜻한 말, 칭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언어의 힘을 믿는 것 같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자아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실천을 잘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라는 대목은 자기 속에 채색되어 있는 가치를 다른 세계와 비교하고 견주는 행복한 발걸음이다. 무의식의 저편에 순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을 만나는 일은 어떠한 종교에 심취하는 일보다 의의가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우연은 없다>, <곡우 무렵> 등의 작품도 순리와 성찰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우연은 없다>라는 작품에는 세상을 보는 작가의 눈에 우주의 원리가 녹아 있다. “모든 일에는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 시절 철없던 자신을 반성합니다. 부끄럽게도 존경하지 못했던 많은 선생님들께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따금 버릇없이 구는 아이들을 보면서 낯설지 않게 느끼는 것은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교차되어서 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원리일 것입니다. 우주에는 공짜 점심이 없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귀에 쟁쟁한 초봄의 저녁시간입니다.”라는 진술로 그녀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의해 생겨난 무상파티 정책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 예산이 가지 못해 절름발이가 된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증언하고 있다.
III. 생태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
이선애 수필의 핵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 형상은 ‘생태적 상상력’이다. 생태 문제에 대한 접근 없이 지식인이란 소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생태에 대한 접근은 이선애의 주요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이선애 수필이 맛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포기하기 어려운 욕심과 욕망을 대담하게 비워내어 수필을 통해 무욕의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우렁각시>, <웅어>, <여름 화단에서>, <망종>, <밤꽃 내음이 무성합니다>, <그리운 것들>에 보여지는 풍경은 절경이 되어 우리의 인지시스템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녀는 계절과 계절이 교접하고 변하는 순간에 이전의 기억을 잊고 새로운 변화에 순순히 몸을 맡기는 가벼운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무욕의 삶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는 이선애의 글에서 우리는 조화와 양보로 특징지워지는 생태계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적절치 못한 동식물의 유입은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생태계가 파괴되기도 합니다.’라는 작가의 생태관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이역만리에서 우리 생태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지하게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동식물을 함부로 들여오는 것에 신중해야 하리라.’는 생명사랑에 대한 신념이 드러난 수필이 바로 <우렁각시>다. <웅어>에서도 역시 ‘누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개발의 논리에 밀려 버려 놓았던 우리의 환경은 어느새 우리에게 물고기가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되돌려준 것입니다.’라며, 작가는 무자비한 개발논리에 밀려 파괴되어가는 자연에 대해 안타까움을 놓는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발신음을 듣겠다는 자세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생태적 세계관이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차츰 깨닫게 되는 생명의 가치, 그것이 공감대를 획득하기에 그녀의 수필은 호소력을 갖는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자연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재개발은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이선애는 이런 현상을, ‘대부분의 강은 하구둑으로 막혀버렸거나 하천 정비 사업과 골재 채취, 수중보 설치 등으로 강 주변 환경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표현하였다. 본래의 목적이 변질되고 퇴색된 재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노출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강마을 작가답게 생태학에 관심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렁각시’나 ‘웅어’를 제재로 생태적 세계관을 피력한 수필은 제목에서 보더라도 그 힘이 느껴진다.
집에 도착해서도 우렁이가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우리의 자연은 각 지역의 환경과 서식 조건에 따라 동식물이 그에 맞게 진화 번성하였습니다. 인간의 적절치 못한 동식물의 유입은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생태계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대표적 생태교란 사례를 살펴보면 해충의 박멸을 위해 보급된 호주의 두꺼비로 인간의 오만한 편견은 곧 화를 불러 오게 되었습니다. 식성이 좋은 이 두꺼비 떼는 해충뿐만 아니라 자연의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합니다. 또한 두꺼비 본연의 독은 매우 강해서 자연 상태에서 천적이 거의 없어 지금은 정부 차원에서 이 두꺼비를 몰아내기 위해 해마다 두꺼비 잡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역시 생태계 교란에 대한 대책도 없이 들여온 수많은 외래종에 의해 우리의 토종 생물들이 그 존재가 위태롭습니다.
- <우렁각시> 중에서 -
오늘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환경문제는 단순히 자연세계 내에서의 문제로만 접근할 수 없다. 인문학 열풍으로 각지에서 토포필리아적 가치가 고양됨에 따라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생태의식이 일반대중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강마을 작가의 수필에서도 자연히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선애의 자연 생태 수필은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하나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연 속으로 침잠하여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전통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가 하면,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우렁각시>는 자연 그대로의 눈으로 자연을 관조하면서 현실을 비판하는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수필이다. 이 수필의 특이한 점은 ‘반전의 원리’에 의해 한 편의 수필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자연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이 이를 증명한다. 이선애의 수필은 결말부에 가서야 메시지의 색깔이 드러난다는 데서 또 하나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생태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여릿여릿 보이는 작은 풀꽃 하나도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전략을 세웁니다. 꽃다지와 봄까치 꽃과 광대나물들은 새봄이면 누구보다 먼저 손톱보다 작은 꽃을 피웁니다. 봄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살기등등하던 겨울이 기세를 꺾어 버릴 즈음이 되면 어느새 볕바른 양지에 노랗고 붉은 작은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키 큰 떨기나무는 그 큰 덩치 때문에 봄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하지만 몸 가볍고 부지런한 풀꽃들은 부지런함을 무기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이죠. 스스로 더 강하게 진화하여 키 큰 나무들이 본격적으로 성장을 시작하기 전, 하얀 봄눈 사이로 눈을 녹이며 피어나는 노란 복수초의 처절한 아름다움은 우리들을 언제나 감동시킵니다.
- <여름 화단에서> 중에서 -
이선애의 수필이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테마를 ‘에코와 바이오’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선애가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여름 화단에서>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생태의 법칙’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수필의 위상은 물론 수필가의 위상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태적 세계관 속에서 이선애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와 생명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이선애가 여성수필의 한계를 뛰어넘는 좋은 생태수필로 자연보전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것은 우리 수필가들이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한 겨울의 들판은 긴 침묵을 누리는 빈 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줄지어 선 비닐하우스가 숲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제는 ‘농한기’라는 말이 농촌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촌의 검고 붉은 흙과 마주하면 존경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수많은 곡식과 채소의 씨를 싹 틔우고 자라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릿어릿한 선생인 내가 그런 땅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씨앗들을 품어 키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올곧고 튼실한 씨앗도 품어서 키우고, 조금 비고 여린 씨알은 좀더 잘 자라게 실핏줄 같은 가는 뿌리에 힘을 돋우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흙의 가슴> 중에서 -
수필을 원숙한 인생의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위의 작품에서처럼 작가가 순간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각고의 노력을 해나가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활을 통해서 자아 심성을 드러내며 대상의 완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그 의미를 인생의 이해와 결부시켜냄은 곧 인생을 폭넓게 해석하려는 생활인의 몸짓이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씨앗을 품어 안는 땅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으면 하는 인간적인 소망을 흙을 보며 갖는다. 인생 저편에서 사물을 통해 사상을 관조하고 거기에서 지혜를 터득하는 이야기를 수필화하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선애의 글이 실존적이란 말이다. 교사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땅의 마음에 견주어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철학적 사유는 일상을 지나가는 관성이 아니라 창조적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의지의 확산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선애는 자기 삶을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향상시켜려 한다. 그런 고로 사물 속에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해 내려는 철학적 사유는 가장 뜻 깊은 삶의 창조적 기능이라고 하겠다.
IV. 일상성의 행복과 인연의 미학
크게 보면, 이선애 수필은 사람 사이의 ‘인연’이 중심이 된 일상을 그리는 글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을 발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생활인들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 구원'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협의로 보면, 문학은 미를 추구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데 있어 '미의 추구'는 첫 번째 본질로 중요시되고 있다. 일상성 또한 문학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인생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이 이선애의 주된 작업이다. 수필적 미학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고,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도 않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배어 있는 따스한 정이 독자의 누선을 자극할 때 완성되는 것이 수필미학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글에 공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수필이 <생성과 소멸의 경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면서 무욕의 삶을 추구하는 ‘비움’의 자세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매만지게 된다.
비어 있다는 것은 다시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 비어있는 마음, 비어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화장대에 바르지 않는 립스틱이 있고, 들지 않는 가방들이 있고, 쓰지 않은 수첩들이 몇 개나 있고, 보내지 않은 편지지 뭉치가 발견됩니다. 일 년에 몇 번 사용할지 모르지만 꼭 필요해 보여 샀던 전기오븐, 야쿠르트 만드는 것, 쥬스기, 커피를 내리는 기계, 작은 찜질기.... 옷장을 열어보면 더 많은 옷들이 걸려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도 입지 않는 코트, 스카프, 머플러. 그리고 서랍을 열어보면 옥색 개구리 모양의 반지, 팔찌, 목걸이가 수북합니다.
- <생성과 소멸의 경계> 중에서 -
이 수필은 인간의 끊임없는 탐심을 경계하는 수필이다. ‘비움’보다도 ‘채움’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을 말해준다. 그 비어 있음의 공간은 무욕을 나타내고 있으나, 불필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필요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공존할 수 있음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비움으로써 수용의 미학이 싹튼다는 진리는 누구나 안다. 이 수필의 매력은 비움의 가치를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옆에다 나를 가두어 두고 어리석게도 삶을 비워가리라 생각만하면서 ‘노자 도덕경’을 읽습니다. 이렇게 채우지 못해 안달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고 한심합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사유를 반성으로연결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 발견을 통한 상관화 그리고 성찰로 이어지는 창작 과정이 문학성을 구축해주기에 좋은 수필이라는 것이다. 삶의 질적 변화가 인간에게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부의 획득만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생성과 소멸의 경계>를 통해 말하려는 궁극적 가치는 과욕으로부터 바로 비극적 삶의 시초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이유다. 서랍 속에는 일 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보석이 수두룩하다는 작가의 고백은 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기억의 뿌리를 움켜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행복한 일이다. 수필은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추억을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의 저편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이선애 수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벌써 7년 전, 아버지를 보내고도 봄은 일 곱 번이나 되풀이 되었습니다. 친정아버지를 하얀 찔레꽃이 피는 언덕에 두고 내려올 때 생긴 제 울음의 강은 그 때부터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얀 찔레꽃만 보아도 내 마음에는 왜 그렇게 샘이 많은지 울음이 낮게 낮게 흘러갔습니다. 하얀 모시옷자락만 보여도 그 울음의 강은 마르지 않았고, 긴 슬픔도 더 세월이 흐르면 아득한 바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무거운 아픈 울음이 아직은 저기 아득한 들판을 달리고 있습니다. 안으로 다스려온 슬픔이 더 이상 차마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 <오리나무와 찔레꽃> 중에서 -
계절의 순환과 함께 찔레꽃 단상을 통해서 ‘친정아버지’의 모습을 반추하는 일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큰 기쁨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의 절대적 사랑을 주었거나 받은 것은 기쁨일 수 있지만, 그분에 대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아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선애의 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 안에 두 분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고, 헌신과 희생으로 자식으로 위해 살았기 때문에 지금와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더욱 눈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아이들의 웃음을 들으며 친정아버지 생각을 가슴 속에 채우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고, 자신도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준비이자 연습인 것이다. ‘순수를 머금은 아이들이 연출하는 웃음꽃 속에서 생명에의 순수를 배웁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고통 속에서 쓰러질 것 같을 때면 아이들이 주는 환한 웃음꽃 줄기 그 한 끄트머리를 붙잡고 견뎌온 나날이 아니었던가.’라는 대목에서 보여준 작가의 사부곡은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종전의 광경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그리워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당신 나이 이제 육십을 코앞에 둔 젊디젊은 아버지를 보내는 저는 슬프기보다 억울하였습니다. 저보다 더 일찍 더 아프게 부모님을 여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잃은 저는 무조건 분하고 억울하여 아버지 무덤 옆에 핀 하얀 찔레꽃만 노려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다른 이의 환갑잔치며 칠순잔치엔 가기 싫습니다. 괜한 시샘에 제 맘속에 또 하얗게 찔레꽃이 피워 올려서 마음 한 구석을 찔러 버립니다. 하지만 봄날이 가듯 세월이 흐르면 이 가시도 무뎌지고 제 마음에 핀 꽃도 시들겠지요.
- <마음보다 먼저 계절이 가버립니다> 중에서 -
이선애 수필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강한 색채를 가지는 것은 그리움의 서정성이다. <마음보다 계절이 먼저 가버립니다>는 작가가 산소 주변에 무수히 핀 찔레꽃을 보면서 너무 일찍 세상을 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글이다.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자연물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아버지를 보내는 길에 찔레꽃은 흰옷을 입고 처연하게 피어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이 그렇다. 그녀의 글에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정이 녹아 있고, 그 인정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는 작가의 인간적 체취가 드러난다. 한 마디로 그녀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흐르는 인정의 강물이다. 멋진 수필가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선애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멘트, ‘싱그러운 첫여름이 저 멀리서 다가서고 있습니다. 제 마음은 아직도 봄의 한 자락을 잡고 있는데 마음보다 계절이 먼저 가버립니다.’라는 표현은 ‘봄의 찔레꽃’으로 상징화된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진술을 보면, 금방이라도 어떤 내용인지 잘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상 글을 전체로 소화하고 나면, 제재란 하나의 비유나 상징으로써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수단이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늘을 뽑았습니다. 저는 오전에 뽑고 점심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힘이 덜 들었습니다만, 장정들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송장도 일어나 일을 거든다는 농사철입니다. 하지만 일손이 모자라 도시에 있는 아들, 며느리가 와서 돕지 않으면 그 일을 누가 할지 참 걱정스럽습니다. 두 노인네는 일을 하면서도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거드는 것이 좋으신가 봅니다. 흐뭇한 웃음이 흐릅니다. 맛난 점심상을 두고는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농사가 많지 않은 탓에 오후엔 잠시 달디 단 낮잠도 잠시 잤고요.
- <밤꽃 내음이 무성합니다> 중에서 -
자연으로부터 느낀 정서의 문학적 형상화가 빛나는 수필이다. 그녀는 자연을 끌어들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아련히 그리워하는 낭만적 분위기도 연출하면서, 자연 자체에 눈길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관조하고 거기서 깊은 명상의 세계를 얻는다. 사물을 포착하여 관조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것은 곧 현실의 삶에 투사된다. 이 수필의 제재인 ‘밤꽃 내음’은 시골이라는 공간과 시어른이라는 실체의 향기를 부여한다. 작가의 ‘송장도 일어나 일을 거든다는 농사철입니다.’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밤꽃 내음은 교무실 창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밤나무는 과실나무 중 가장 늦게 꽃 피우고 가장 먼저 수확을 하는 나무입니다.’라는 표현에는 농사지으며 사는 시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직한 땀의 가치를 믿고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시어른의 순박한 모습에 대한 찬사가 우리 삶을 살찌우게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자연의 대상 앞에 선 작가는 자연의 완상을 즐기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전혀 교시적인 분위기를 주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교시라는 문학적 기능을 손색없이 수행한다고 하겠다. ‘유월에 흰 먼지털이 같은, 농악대 상쇠의 부포상모 수술 같은 꽃이 지면 이내 추석 즈음 햇밤이 나올 것입니다. 꽃 피고 열매 맺는 기간이 참 짧습니다.’라는표현에서도 수필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밤꽃 내음‘은 작품 속 인물과 삶의 특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장치다. 정서의 물화를 통해 문학의 맛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V. 욕망하는 주체와 견고한 자화상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이선애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삶의 특성은 욕망하는 주체에 대한 관조에 있다. 수필은 응축된 정서와 사상의 지도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그 지도에는 작가가 거처하고 있는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바로 견고한 주체의 자화상이다. 이선애의 자화상은 <욕망의 주체>에서 ‘광대나물 꽃’과 <당혹스런 봄>에서 ‘나비춤’에 비유된다. 날카로운 작가의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 <나비를 보다>에서 작가는 ‘꽃’과 ‘나비’를 대조하면서 욕망의 근원으로 달려간다. 그 접근 과정에서 인용하고 있는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가 공감을 자아낸다. 꽃의 성장 과정과 나비의 진화 과정이 아픔을 동반하고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인식이 더욱 미덥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두 가지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그만치 고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나비를 보다>에서 이와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기심을 가지고 그대로 생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권을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식이 많고 능력이 불어나면 욕심이 불어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대된다. 이러한 욕망의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다.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민주 시민 나아가 세계시민으로서의 교양을 획득해가는 그녀에게 갈등이나 어두움은 없다. 공교롭게도 이선애의 수필은 이런 어둠의 그림자를 물리치려는 수필적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주목된다. <나비를 보다> 등의 수필에는 이런 작가의 애타사상이 녹아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큐피드가 사랑하는 소녀 프시케(psyche)는 나비란 뜻입니다. 영혼이 있는 나비로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프시케의 모습은 누에고치를 찢고 나와 기어 다니는 존재에서 날아다니는 찬란한 생명체로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치를 짓고 그 속에서 자아성찰과 고독의 과정을 겪어야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봄은 꽃의 계절이고 나비의 계절입니다. 꽃이 피려면 생살을 찢는 아픔을 동반하여야 하듯이 나비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날개를 얻기 위해 긴 침묵의 시간을 외롭게 혼자 견뎌야하니까요.
- <나비를 보다> 중에서 -
작가는 욕망의 주체로서 설 수밖에 없는 근거를 설정함에 있어 ‘생살의 아픔’과 ‘긴 침묵의 시간’을 활용한다. 자연 속의 미물도 이렇게 고통과 인내로 성장해가는데, 반대급부로 인간 세계는 자아성찰과 고독이 부족하다는 견해를 역설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재산은 인간적인 정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속에서 저 숲속의 나무들처럼 서로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야기된 조작된 행복관, 전도되고 도치된 가치관으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 아닌가. 그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성찰'요, '견딤'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면, 자연의 시간으로 가는 삶의 터전일 것이다. 삶의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향한 주체적 열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욕망의 주체는 처음부터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필요하다고 느끼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수필이 우리에게 기여하는 것은 ‘인생은 어쩌면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르침이다. 욕망으로 주체가 되는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작가는 나비의 꿈을 통해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지만 그래도 늘 새롭고 반갑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 봄이 와서 참으로 고맙고 고맙습니다. 봄 하늘을 선회하는 새 한 마리 날갯짓이 이리도 고와 보이는 건 아마도 봄은 보는 계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찬란한 비상을 꿈꾸는 나의 시선이 높은 하늘에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겨우내 바람에 떨던 나무의 꿈을 알기 때문에 이 봄을 한껏 보듬고 싶어집니다.
- <당혹스러운 봄> 중에서 -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란 걸 보여주는 수필이다. 작가는 ‘겨우내 바람에 떨던 나무의 꿈을 알기 때문에 찬란한 비상을 꿈꾼다’고 한다. ‘봄 하늘을 선회하는 새 한 마리 날갯짓이 이리도 고와 보이는 건 아마도 봄은 보는 계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는 물음은 마음의 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걸 말해준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꿈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이선애는 일상의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출가외인으로서의 방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무관심하고, 외면함으로써 홀가분하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는 그녀가 남달리 주체적인 사람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긍정적 세계관이며, 고통에 대한 인식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작가는 나무의 꿈을 알기 때문에 애써 지난 과거를 합리화한다. 과거의 고통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현실의 처지나 입장을 자기의 것과 함께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기운도 움트지 않는다. 오직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뿐이다.
‘강’이라는 말은 봄 강의 수면 위로 동그란 파문들이 파르르 흩어지는 것 같습니다. ‘상’이란 말 속에는 벌써 동그란 황금빛 메달들이 둥글게 나타납니다. ‘장’은 시골장터의 부산하고 요란한 소리와 모양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립니다. 쟁그랑쟁그랑 엿장수의 가위소리며 뻥하고 터지는 뻥튀기 장수의 요란한 폭발음이며 고소한 강냉이의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중’이란 말에는 파르라니 깎은 스님의 뒷모습과 면벽한 자태 위로 그윽한 향내가 생각납니다. ‘궁’이란 말에는 경복궁, 창경궁의 장엄한 기와선이 눈앞에 황망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ㅇ’이 갖는 둥근 느낌과 음표를 연상시키는 음률감은 우리말을 아름답고 향기롭고 상쾌하게 합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매화가 한창입니다. 나비는 팔랑팔랑 ‘ㅇ’음 처럼 그렇게 우리 곁을 날아다닐 것입니다.
-<‘0’음에 대한 고찰> 중에서 -
‘ㅇ’음에 대한 넘치는 작가의 개성적 인식이 차가운 겨울바람도 녹일 정도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직시하는 건강한 사유가 아름답다. 수필은 이렇듯 대상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돋보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운명지워진 모든 것을 갈등 없이 수용하는 삶의 태도가 더없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이 수필은 ‘ㅇ’음에 대한 메타포를 풀어내는 데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한글 모음 중에서도 가장 원만한 이응에 대한 응시를 통해 조화와 원만, 밝음과 활력의 가치를 예찬하는 이 글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남다른 인식 때문이라 하겠다. “‘궁’이란 말에는 경복궁, 창경궁의 장엄한 기와선이 눈앞에 황망히 모습을 드러냅니다.”라거나, “봄이 오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매화가 한창입니다. 나비는 팔랑팔랑 ‘ㅇ’음 처럼 그렇게 우리 곁을 날아다닐 것입니다.”라는 주제의미화 진술에서 그녀의 운명론적 사상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수필이라면, 이런 유형의 글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다. 우리의 삶은 많은 시련을 통해 완성된다. 생의 완성을 기대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도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ㅇ’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하고 자신의 꿈과 욕망으로 연결시키는 기법을 아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학적 역량을 갖춘 작가다. 이런 문학적 재능의 바탕에는 독서력과 인문학적 관심이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대의 여인들도 비슷합니다. 봄이면 꽃구경과 축제를 핑계로 바다로 산으로 꽃 같은 옷을 입고 나서는 것이죠. 그 향기를 따라 젊은이들이 이리저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아 봄에 눈이 맞은 처녀총각이 가을에 혼례를 올리는 어여쁜 일이 생겨야 될 것입니다. 봄에는 가슴이 뛰고 가을이 그 뛰는 가슴으로 내 사랑을 거두어 들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삶은 찬란한 봄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봄꽃은 도발적입니다. 그 봄꽃의 도발에 동참하고 싶은 봄입니다.
- <도발적인 봄꽃> 중에서 -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찰은 이선애 수필의 깊이를 알게 한다. 그녀는 마음이 넓은 만큼 자상하고 세심하게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한 눈에 그들의 심중으로 들어간다. 하버드대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수필가란 방랑자요, 구경꾼이요, 게으름뱅이라고 한 바 있다. 강마을에서 ‘봄꽃’을 바라보는 눈길과 그 의미화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이선애는 훌륭한 수필가의 자질을 이미 가졌다. “봄꽃은 도발적입니다. 그 봄꽃의 도발에 동참하고 싶은 봄입니다.” 이 부분은 ‘욕망 주체’의 진정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봄꽃’에 빗대어 욕망의 의미를 멋지게 형상화하는 작가의 기량이 이 수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참신한 비유와 암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 작품은 미학적 형상화가 잘 되었다. ‘봄에는 가슴이 뛰고 가을이 그 뛰는 가슴으로 내 사랑을 거두어 들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삶은 찬란한 봄꽃처럼 아름답습니다.’이라는 말도 욕망을 구체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표현이라 하겠다.
강마을의 하늘은 춘향의 쪽빛 치맛자락처럼 푸릅니다. 춘향을 생각하며 서성이는 내게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옵니다. 어디서 풍기는 향기인지 꽃송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푸른 잎을 자랑하는 은목서 나무입니다. 푸른 잎 뒤로 자잘한 꽃송이가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그 향기는 온 학교를 감쌀 듯 풍겨옵니다. 소슬한 가을화단에서 그 향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은목서 나무가 춘향을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슬 퍼런 계급 사회에서 정절과 사랑이 한낱 관념이 아닌 삶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그녀가 그리운 날입니다.
- <춘향, 그 자유로운 영혼> 중에서 -
여성적 섬세함과 남성적인 강인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녀의 수필 앞에 서면, 문체에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춘향 다시보기를 통해 당당한 주체로의 삶을 ‘은목서’에 견주어 표현한다. 이는 ‘주체’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건져올렸다는 데서 그 가치가 크다. '도피'가 아닌 '도발'를 외치는 작가의 견고한 욕망은 근대적 성찰의 결과로 나온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수용임과 동시에 해체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듯하다. 조선이라는 가부장적 현실 속에서 춘향의 당대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이것이 주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도리와 규범을 새롭게 설정하려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주체의 전제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다. 자신의 향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은목서에 춘향을 빗댐으로써, 그녀는 복잡한 우리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실체를 파헤친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욕망을 펼치되 세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으면 그것으로 자랑스러울 수 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이 글이 갖는 매력은 ‘욕망’이란 단어가 부끄럽지 않게 느껴지게 하는 데 있다. ‘그녀가 그리운 날입니다.’라는 결말부 문장이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분위기를 잡는다. 이런 춘향의 도발적인 성질에서 인간 본성을 찾아내려고 하는 그녀의 과감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부드러운 외면에 강한 내면이 있어 더욱 믿음직스럽다.
VI. 로그아웃
이선애의 수필세계는 확실히 열려 있다. 거창한 주제나 독특한 제재의 발견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관조된 사물의 해석이 참신하고, 그것을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연결시키는 발상의 신선함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한층 더 끌어 올린다. 힘들거나 마음이 할퀴어져 있을 때면, <이것도 지나가리라>는 구절을 생각하며 어떤 난관도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이선애의 인생길은 밝을 것이다. ‘비움’, ‘도발’, ‘순리’, ‘필연’의 가치로 버물어진 그녀의 수필은 견고한 자화상을 구축하면서, 미적 형상화는 물론 사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안도감을 갖게 하는 것은 생태적 세계관과 언어의 힘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긍정적 세계관이 지극히 한국적인 강마을 정서를 미적으로 잘 승화시켜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선애 수필의 강점은 접근성에 있다. 지금이 수필의 시대라 하지만, 수필에 대한 세인의 평판은 썩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우리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선애 수필과 같이 인간적인 향기와 잘 발효된 맛이 있어야 하고, 새롭고 참신한 인식의 세계를 독자에게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녀의 수필세계는 서정이 물결치는 식물성 축제의 장이다. 싱그러운 감성과 순수 서정이 조화를 이룬 자유로운 영혼의 샘터다. 물푸레 나무 같은 푸른 삶과 강마을의 안개로 열리는 아침 풍경 같은 포근한 세계를 표방한다고 하겠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어체 스타일인, ‘-습니다’체도 읽는 맛을 주는 데 기여한 바 크다. 그녀의 문학적 바탕이 견고한 강마을 작가인 만큼 그녀가 보여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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