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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 장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헬라 원문에는 이 귀
절 초두에 "또한"(* )이란 말이 있어서 2장의 말씀이 1장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사도들의 복음 운동을 성럽시킨 두 기둥들이다
(Grosheide).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였는데, 그 날수
계산은 유월절 이후 안식일 이튿날부터 세었다. 안식일 이튿날에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드리고 그 후 50일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 시작이었
다(레 33:5-21). 이 날에 떡 두 개를 바치는 "새 소제"가 거행되었다. 이와 같은 구
약의 제도를 생각해 볼 때에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의미 심장하다. "유월
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고난을 예언하고(고전 5:7), 그 후에 바친 "요제"는 예수
님의 부활을 상징하고(고전 15:20), 오순절에 바친 "새 소제", 곧 두 떡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설립된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그 "두 떡"은 두 증
인과 같은 교회를 예표한다.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
며 - "홀연히"란 말(* )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케 한다. 곧, 성령을 주시
마 하신 약속을 믿고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리던 그들이었으나 그들이 그 날과 그 때는
몰랐으며, 또 성령의 임하시는 방법도 그들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
령 강림은 그들에게 돌연한 사태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홀연히 된 것은 객관적 사
건인 것이 틀림 없다. 여기 "집"이라고 한 것은 성전이겠고 사가(私家)는 아닌 듯하
다. 그 이유는 그 때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신자들이 성전에 모였을 것으로 생각
되고, 또한 그들이 습관적으로 성전에 모이는 규례도 있었기 때문이다(눅 24:53).
성령께서 "바람 같은 소리"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일찌기 약속하신 것 같이 그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비유한다(욕 3:3,8). 겔 37:1-10참조. 이것은 다
음 귀절에 나오는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과 구별된다. 불은 전파하며 정복하는
그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은 것)가 동
시에 나타난 사실은, 사람이 거듭남과 함께 복음을 증거(혹은 전파)해야 될 것을 보여
준다.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그들에게 보이며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라고. 이 말씀은, 그 때에 각 사람에게 그 혀가 하나씩 분배
되어 있던 광경을 보여준다. 여기 나타난 "불의 혀"는 성화(聖火)된 혀와 정복력 있
는 혀를 비유한다. 이사야의 혀가 숯불로 깨끗해졌다는 비유의 말씀도 구약에 있다
(사 6:1-8). 구약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선지자에게 먼저 혀의 성화가
필요하였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만한 혀이며, 모든 민족을 복음으로 정
복하는(눅 12:49) 혀이다.
이렇게 기독신자들(교회)은 중생함("바람"으로 비유된 성령의 역사-2절)과 동시에 모
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생 운동과 증거 운동(선교 운
동)은 동시적 사태(同時的事態)로 함께 움직여야 한다. 중생한 자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영적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 본문에 "바람"으로 비유된 중생 운동
과 "불"로 비유된 선교 운동이 병행적(竝行的)으로 기록된 것은 의미 심장하다.
헨켄(Haenchen)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도 사도 행전의 저자 누가가 신학적으로
(사실과 역사에 구애되지 않고 사색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Man darf also, um
lukanische liste zu verstehen, sich nicht bloss auf Tradition berufen, sondern
muss auch den Anteil des theologischen Schriftstellers, seine Komposition, mit
berucksichtigen.-Apostelgeschichte, 1965,s.134). 곧, 그의 설명에 의하면,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구약에 있는 시내산 율법 선포 사건의 전설 (전설은, 후에
사람들이 첨부해 말한 것을 의미함)과 관련시켰다고 한다. 그 전설은 시내산에서 모
세가 율법을 선포할 때에 그의 혀가 불의 혀같이 되었다는 것이다(같은 책, p. 138).
헨켄이 염두에 둔 것은 이러하니, 누가는 성령이 각 개인에게 임하셨다는 사건을 역사
적으로 기록함보다 신학적으로 논술하기 위하여 시내산 율법 선포와 연결시켰다는 것
이다. 그는 말하기를, 오순절 성령 강림은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신약적인 율법 선포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동기를 무시한 헨켄의 해석을 받을 수 없다.
2절의 "있어"란 말의 헬라어(* )는 역사적 기록에 흔히 나오는
문제이다. 그리고 9-11절에 지방의 이름들이 길게 또는 자세히 기록된 것은 신학적이
라기보다 역사적인 것이 분명하다. 누구든지 행 2:1-13에 있는 문제와 요 1:1-18의
그것을 비교하여 보면, 역사적 기록과 신학적 기록과의 차이점을 잘 볼 수 있다. 행
2:1-13은 사건 중심인데 반하여 요 1:1-18은 진리 중심이다.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를 시작하니라 - 이렇게 그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다른 나라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은,
인류가 복음에 의하여 장차 진정으로 연합할 수 있게 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고
대(古代)에 인류가 바벧탑을 쌓다가 방언이 혼잡되어 서로 의사(意思)가 통하지 않음
므로 모두 흩어졌던 것(창 11:1-9)과 정반대의 의의(意義)를 가진다. 신약 시대의 이
때에 된 일은, 물론 이적(異蹟)으로 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하나
의 경이(驚異)를 나타낸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의 의미도 가
지고 있다. 곧, (1)기독자들이 어떤 나라 사람에게든지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의 역
사로 듣는 자들의 심령을 깨뜨리고 그 복음이 들어가게 됨을 비유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기독자들이 복음을 만국 만민에게 전파하게 될 예조(豫兆)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2)그 때에 신자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성령의 신약적인 강림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을 찬양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빙크(H. Bavinck)에 의하면 천지 창조의
때에 천사들이 찬송하였고(욥 38:7),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천국 천사들이 찬송했고
(눅 2:13-14), 오순절 성령 강림이 큰 일인 고로(2-11) 역시 찬송의 목적으로 기적적
인 방언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Geref. Dog., III, 1910, p.10). 바빙크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이라(geboortetag der gemeente)고 말하였다. 나의 성
경 신학 제 3부 제 6장을 참조하라.
행 2:5,6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
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
"경건한 유대인"은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그 때에 "예루살렘"에
거주한 목적은 오순절만 지키려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도시에 있으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려 함이었다(Schlatter).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전도를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 듣고" 깨닫도록 하
신 것이다.
"이 소리"는 2절에 관설된 "바람 같은 소리"를 이름이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곧, 여러 나라에서 돌아온 그들 각자가 그 속하여 있는
나라의 말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행 2:7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이것은 주로 사도들을 염두에 둔 말
인 듯하다. 그러나 거기 모인 120명을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해도 틀릴 것은 없다. 그
들 중 대부분이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경우에 이렇게 말
할 수도 있다.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제자들은 한 개의 방언으로 말했으나 청중에게 들리기는 그들의
살던 각국 방언으로 들렸다는 해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 때에 제자들이 거기 모인
청중들이 대표한 각국 방언으로 말했다는 해석이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그들이 기
적으로 말한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중 첫째 해석이 옳다고 생각된다.
여기 "우리가"란 말(* )은 문법상으로 역설체(力說體)니 그들이 각기 소속
국가의 말을 아는 자들임을 역설한다.
행 2:9-13
이 귀절들은 거기 모였던 모든 유대인들을 국가별, 혹은 지방별로 분류하여 말한
다. 이 분류에 의하면 그 때에 15개국(혹은 15개 지방)에서 살던 이방인들과 유대인
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복음을 들었던 것이다. 그 지방들은 그 때까지 알려진 세계,
곧 세 대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을 대표한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특수한
섭리였다. 복음의 세계적 전파의 출발점인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 곧 천재일우(千載
一遇)의 기회에 저렇게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와서 유하였
던 것이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
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12-13) - 여기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두 가지 현상이 대조적으로 나타났다. 그 일에 대하여 일부 인사들은 그저 놀라며 이
상히 여겼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조롱하였다. "새 술"(* )은 포
도에서 자연히 흘러나온 즙이 발효된 것을 가리키는데, 그 속에 취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Hesychius).
행 2: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 베드로가 여
기서 지도적 입장을 취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찌기 예언해 두셨던 대
로(마 16:18)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된 일이다. 그가 "소리를 높여" 말한 것이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다 그의 지도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행 2:15,16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 "제 삼시"는 우
리 시간으로 오전 아홉시를 말한다. 유대인은 오전에는 술을 마시는 법이 없다. 전
10:16 참조.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16절) -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
로 믿는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성령의 강림이 구약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된 것
이라고 증거한 것은, 그것(구약 예언)을 가장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것으로 내세우는
것임에 틀림 없다.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
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
- 이 귀절부터 21절까지에 소개된 요엘서의 예언은 70인역(LXX)을 인용한 것이다.
"말세"란 말(* )은 구약 시대에 예언자
들이 내다보던 신약 시대를 말한다. 히 1:2 참조. "모든 육체"란 말(*
)은 민족이나 인종의 차별 없이 보편적 인류(普遍的人類)를 가리킨다. "부어
주리니"라는 말(* )이 역시 풍성히 주실 뜻을 표시한다. "예언", "환상",
"꿈"은 주로 구약 시대의 계시 방법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신약 시대
에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성령의 은혜에 참여할 것을 말한다.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처럼 어떤 특수한 사람들만이 계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사 66:21 참조. 신약
시대에는 특수한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없다. 이 시대에 데제사장(혹은 제사장)은 예
수님 뿐이시니만큼 신자들은 교역자와 마찬가지로 모두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제사장들이다(벧전 2:9). 신약 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제사
장격은 무시하고 교역자만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교훈은 성경에 위배된다. 크로솨이
데(Grosheide)도 말하기를,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최후적 부
분이며, 모든 시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은혜에 참여한다."고 하였다(Handelingen 1-14, p.70). 이 귀절의
뜻은, 신약 시대의 일반 신자들이 모두 다 직접 계시를 본다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
를 말미암은 구원 계시와 말씀이 신자들에게 섭취되는 것을 가리킨다.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 할 것이요
- 이 말씀은 윗절의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런 은혜를 주심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종들(신자들)
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기 위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들"은 하나님을 섬
기는 모든 참된 신자들을 가리킨다.
행 2:19-21
이 귀절들은 신약 시대의 말기(末期)에 많은 전쟁("피와 불과 연기"로 비유됨)이
있을 것과 그 밖에 여러가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 표현으로 환란들("해의 변함과 달
의 변함"으로 비유됨)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이런 환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에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 때에 환란이 사람들에게 멸망으로 협
박하는 반면에,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도록 되어 있다(Calvin,
Acts of the Apostles, I, P.8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절) - "주의 이름을 부른다"함은 하나
님께 기도하거나(시 3:4, 6:2), 혹은 그를 경배함을 가리킨다(창 4:;26, 12:8; 왕하
5:17). 이 말씀이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의뢰함을 의미한다. 롬 10:13 참조.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 예수
님께서 행하신 권능은 그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
시기를,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요 14:11). 그의 행하신 이적
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시는 언약 성취의 성격을 띤 것
이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마 11:2-3)자신이 바로 "오실
그 이"(* )라는 의미로 대답하셨다. "오실 그 이"가 행하시는
역사의 표적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
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다(마 11:5).
곧, 사 29:18, 35:5,6,42:7,61:1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
님이 행하신 이적을 가리켜 "표적"(* )(그것을 행하시는 이가 메시야이
신 표적)이라고도 불렀다(22절 하반).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바빙크(H. Bavinck)는
말하기를, "주 예수의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표적이며, 메시야 시대의 증거이
며, 그의 메시야 역사의 일부이다. ...그의 화육(化肉)과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적 행동이다. 그 사건들은 천국 영광의 회복 원리이다. 그것
들은 무엇을 나타내는 방편이 될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현(啓現)이다.
그것들이 나타난 결과로 이적은 역사(歷史)가 되고, 역사는 이적이 되었다."라고 하였
다(Gereformeerde Dogmatiek, Vol. I, p.310, Uitgave van J.H. Kok Te
Kanpen...1958).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
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고(事故)가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었던 사실이라
고 말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어디서나 지적하는 사실이다. 인류를 사죄하시고 영
생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렇게 천정(天定)의 법칙이고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베드로의 논조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게 죄 없다고는 하지 않
는다. 3:19 참조. 이런 논조는 우리 인간의 이성에는 모순된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
의 지혜에 있어서는 모순이 아니다. "법 없는 자들"이라는 말(* )은 이
방인들을 가리킨다(롬 2:14).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
음이라 - 여기 언급된 "고통"이란 말(* )은 해산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
이다. "풀어"란 말(* )은 여기서는 해산의 고통(예수님의 죽음을 비유함)
에서 풀어줌이니, 곧 해산시킴을 가리킨다(Zann, Grosheide).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
망을 통하여 부활하셨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셨다(Grosheide,
Handelingen, 1-14, p.7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으나(23 절) 하나님은 그를 다
시 살리셨다. 인간이 진리의 극치, 의(義)의 극치에 대항하면, 그것과 반대로 나타나
는 하나님의 간섭도 특별히 현저한 법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극치, 곧 생명 자체이
시니(요 14:6)그가 죽음에 매여 계시기는 불가능하다.
행 2:25,26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름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 이 귀절부터 28절까지는 시 16:8
이하를 인용한 것이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기에게 관하여 말했지만,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가리켜 예언한 것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만큼 그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더욱 그러하셨다(요 8:29, 16:32).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6절) -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마음은 기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절대적 주재
자(主宰者)이신 하나님께서 그의(다윗의) 편에 계시는 것은 그에게 무상(無上)한 축복
인 까닭이며, 또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시 43:4참조.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실때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기쁠 뿐 아니라 그 육신도 영원한
소망, 곧 썩어지지 않을 것을 믿었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
실 것임이로다 - 이 시편에서 다윗은 신자들의 영육(靈肉)이 아울러 구원 얻을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같은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이었
다. 여기 이른 바 "거룩한 자"란 말(* )은 시 16편의 원어로 카시드(*
)인데 사랑하심을 입은자를 가리킨다. 이는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
자에게 해당된다. 이 귀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는 동시에, 거기 포함하
여 신자들의 구원도 예언하였다.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
다 하였으니 - "생명의 길"은 앞절에 말한 대로 영육이 아울러 구원 얻음을 말한다.
경건한 자에게는 죽음이 최후가 아니다. 욥 19:26; 시 17:15; 잠 14:32 하반 참조.
다윗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
리로다"라고 한 말은, 신자가 영육 간 아울러 구원 얻어 하나님 앞에 있게 될 때에 행
복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담대히 말할 수 있다"고 함은, 다윗 자신은 아
직도 부활하지 못한 것이 확실한 고로 위의 시귀(26-27절에 인용한 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언인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이 확실성은 그의 신앙에 담력을
준다. 베드로는 여기서 다윗의 무덤이 비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었다
고 하며 담대히 말한다. 그 때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이 말을 반대할 수 없었다.
행 2:30-32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
리라 하심을 알고(30절) - 하나님의 이 "맹세"는 삼상 7:12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나실 것을 예언한 맹세이다. "맹세 하사"
란 말의 헬라어(* )는 "맹세로 맹세하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렇게 맹세란 말이 거듭된 것은, 힘있게 말하여 그 맹세한 내용의 중대성을 지적하려
는 것이다(Calvin).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32절 상반) - 베드로는 위의 시 16편의 말씀이 예
수님에게 응한 사실을 여기서 지적한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절 하반) - "증인"은 언제나 사실에 입각하여 증
거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일반 역사상 사실로서도 확중되는 것임을 29절에
서 지적한 바 있다. 곧, 다윗의 무덤이 베드로 당시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아서 시
16편의 예언이 원천적(源泉的)으로 다윗 자신에게서 성취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도적 전도는 역사적 사실에 생명을 걸었다. 현대에
위기 신탁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무시하고, 기독교는 계시관(啓示觀)에 있어서 역사
적 사실주의보다 초절주의(超絶主義)인 듯이 잘못 가르친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 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늘로 올려가셨다는 뜻이다. 빌 2:9 참조. "그가"란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
킨다. 그가 성령을 주시마고 "약속하신"일에 대하여는 요 14:16,26,15:26,16:7을 참
조하라. 그는 승천하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약속을 성취하셨다. 만일 그가 하늘에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약속하셨던 대로 성령을 보내지 못하셨을 것이다(Grosheide).
행 2:34,35
다윗은 하늘에 올라기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 즉 다윗 자신은 시
110:1의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윗 자신은 하늘에 높임이 된 일이 자기 당시에
없었으니, 이런 승천 관계의 말씀이 그를 가리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 앞에 있는 "주"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뒤에 있는
"내 주"란 말은 메시야(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시 110:1의 인용이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함"은, 그리스도의 원수가 완전히 정복되고 그의 최후적 승리
가 오게 됨을 이름인데(고전 15:25), 이것은 재림의 때에 될 일이다. "내 우편에 앉
았으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증거는 그가 이 세상에 성령을 보
내신 사실이다. 막 16:19; 행 7:56; 롬 8:34; 엡 1:20; 히 10:12 참조.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
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베드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여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이란 문구와, "이 예수"란 말은 상세하게도 역사상(歷史上) 예수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땅에 미천하게 계셨을 때에도 "주"(*
)란 칭호와 "그리스도"란 칭호를 받으심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이제 부활 승천
하신 뒤에는 그 칭호를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시다. "주"란 칭호는 시 110:1 의
"주"란 칭호와 같은 뜻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용을 가진다. 부셋트(Boussett)
는, 바울 서신에 많이 나오는 "주"란 말이 이교(異敎)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나, 그것
은 억설이다. 바울 뿐 아니라 베드로도 여기서 "주"란 말을 예수님에게 사용하되, 구
약 70인역(LXX)에서 하나님을 "주"라고 한 데서 채용한 것이 분명하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마음에 찔려"란 말은 양심에 가책을 받음이니, 이는 그들
이 예수님 죽인 죄를 깨닫게 된 까닭이다. 그들이 그 죄를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 성
령의 은혜로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양심에 가책을 받음은 그들의 영혼(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 증표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혼이 허물과 죄를 깨
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회개"(* )는 마음
을 변함인데,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에게 대한 악한 마음의 태도를 이제는 변해야
될 것을 강조한다. 곧, 이제는 그런 악한 마음을 고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공고백
(公告白)하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다. 그들이 이렇게 신앙하면 예수님의 의
(義)를 받고 그들의 죄는 사함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구원 완성을 위하여 계
속적으로 역사하실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된다. 회개한 자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함은, 사람이 회개할 때에는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가 회개한 후에야 처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의 은혜로만 되어진다(고후 7:10; 영후
2:25). 여기 이른 바 "성령의 선물"은 성령에 의하여 회개한 자가 생활의 성화(聖化)
를 위하여 더 받게 되는 성령의 능력을 가리킨다.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
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 "너희"란 말은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모든 먼
데 사람"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베드로의 이말은 복음의 보편성(普遍性)을 나타낸
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란 말 역시 그러하다. 복음은 사람 차별을 하지 않
고 누구에게나 믿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 그릇된 사상을 가진 자들을 이끌어 진리로 돌아오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대로 증거하여 그들의 이지(理智)를 설복시켜야 하고, 또한 옳은 교훈을 거역함이
얼마나 위험함을 경고하여 그들의 감정과 의지를 변동시켜야 한다. 베드로는 이런 방
식으로 청중을 취급하였다. 그는 또한 그들의 시대가 어떻게 위험스러운 시대임을 경
고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처한 그 시대의 잘못된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 시대와 타협
하기를 예사로이 하며, 그 시대의 그릇된 정신과 맞서는 용단을 취할 줄 모른다. 베
드로는 그 시대의 소위 종교 지도자들의 패역성을 잘 알기 때문에 여기서 그 청중을
경고하여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다.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복음의 말씀을 받은 뒤에 세례를 받게 됨은 정당한 순서이다. "세례"는 인간 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공적 고백을 성립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그 고백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진리 지식을 가진 자라야 받게 된다. 진리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는 신앙을 공고 백
할 자격이 없다. 복음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라도 그저 세례만 받음으로 구원
의 은혜를 받을 줄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세례가 마술적으로, 혹은 기
계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가져올 줄 생각하는 착각이다.
베드로의 설교에 3000명이 회개하였으니, 그 설교의 능력이 어떠함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점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어떤 교과에서는 설교의
중요성을 모르고 학구적(學究的)인 사업에만 치중하는데, 그것은 사람을 낚는 귀한 일
을 한 방면으로만 기울이는 폐단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한 증거(testimony)를 이용
하셔서 그의 교회를 확장하신다. 그것이 초대 교회에서부터 있어오는 하나님의 전도
방법이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 믿는 자들의 신앙이 보수(保守)되고
또 장성하기 위한 사역이 이 때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사도들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며, 또 그들은 사랑스러운 교제를 가졌으며, 또한 기도
를 힘썼다는 사실이다. (1)사도의 전도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니(살전 2:13), 무엇보
다도 그것을 받지 않고는 신앙 생활이 장성할 수 없다. (2)또한 신자들끼리의 사랑의
교제가 없어도 그들 자신의 신앙이 자라나지 못한다. (3)그 뿐 아니라 기도를 힘쓰지
않으면 신앙을 생명 있게 보존할 수 없다.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여기 "사
람마다"란 말은 신자만 가리킨 것이 아니고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로 가리켰을 것이
다. 사도 시대의 기사(奇事)와 표적(이적)은 이렇게 엄위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하
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땅 위에 세우시는 초기에 필요하였고, 또 그가 그런 일들을 행
하시기로 경륜하셨기 때문에 있은 것이다. 그것은 사도 시대에 특수하게 있었던 현상
이다. 사도 시대 이후에도 교회가 복음에 충성하면 하나님의 특수 간섭으로 말미암아
불신 사회 앞에 권위 있게 나타나는 법이다.
행 2:44-47
여기에는 초대 교회의 유무 상통(有無相通)한 생활이 기록되었다. 성경을 모르는
이들은 초대 교회의 이 현상을 가리켜 공산주의와 공통되는 점이라고 잘못 지적한다.
이것은 결코 공산주의의 사유(私有) 재산 폐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도
시대의 교회가 물질을 유무 상통한 것은, 공산주의에서처럼 정치와 폭력으로 시행하는
제도 아래서 강행된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결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이런 분배 행위가 신자 개인의 자유라는 점을 역설(力說)하
였다(5:4). 그러면 이 부분에 기록된 바 성도들의 유무 상통한 것은 은혜로 되어진
성도들의 교통(Communion of the saints)의 일면이다. 이 교통은 모든 다른 방면으로
도 나타나는 것이다. 곧, 그들은 영적 은혜로 서로 나누며 지내는 것이 그 특징이었
다. 그들이 물질로 서로 돕는 것도 영적 은혜로 된 것이었다(고후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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