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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 쉼과 참 활동은 꼭 병행한다>의 줄거리:
내 활동이 진정성을 띠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되는대로 그냥 막 활동하시는 상태로 만족하십니까? 진정한 활동이 아니면 진정한 결과도 진정한 삶도 없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공허한 시간으로만 내 인생을 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정한 활동은 진정한 쉼이 유지되는 가운데에서만 가능합니다. 진정한 쉼과 진정한 활동은 병행합니다.
참 쉼과 참 활동은 꼭 병행한다
(누가복음 13:10~17)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참 쉼과 참 활동은 꼭 병행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참 쉼과 참 활동은 꼭 병행한다’
진정한 쉼은 이 세상에서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가보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영면에 드셨다고 하거나 안식에 들어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정한 쉼이란 세상을 떠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몸이 죽지 않았어도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백으로부터 채움을 위한 흡입력이 발동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이 흡입력으로 빨아들이고자 하는 대상이 세상에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고 세상을 떠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세상을 떠난 쉼의 상태에서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만이 진정한 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이 이 땅에 머물면서 땅의 것들을 소원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전부 진정성이 없는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과 진정한 활동은 반드시 병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진정한 활동을 하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마음에는 진정한 쉼이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쉼이 있어야만 공허하지 않고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진정한 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언가를 소원하는 마음의 공백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은 새 힘을 얻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활동의 모습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이 활발한 기운이 넘쳐날 것이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쉼과 진정한 활동이 병행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진정한 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향하여 앙망하고 소원하는 상태가 진정한 쉼이고 안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쉬는 상태가 되면 육체를 통해서는 진정한 활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일을 하다가 활동을 멈추는 것만을 쉼이라 생각했습니다. 쉬면서 육체도 마음도 새 힘을 얻어서 또다시 세상의 소원을 품고 달려가는 것을 활동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쉼도 진정한 활동도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지도자들 간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도자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예수님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시고 이들을 향하여 위선자들이라 공개적으로 비판하십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치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 중에 의도적으로 언급하신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과 그에 동조하는 지도자 계층의 사람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 즉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자타가 인정하는 정통파 유대인으로써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자들을 위선자라 부르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척추가 꼬부라져 펴지를 못하는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된 여인을 향해서는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으로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딸의 상태가 끔찍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신체적인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처지에 있는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셨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 자타가 인정하던 지도자 계층에 대해서는 위선자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선민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것은 선택받음의 유전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민다움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듯이 나도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일방적인 요구를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선택하는 쌍방향 선택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타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채움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소원하게 됩니다. 소원은 곧 흡입력의 표현입니다. 어제 소원에 대해 정의하기를 “실재하는 것 중에 없는 것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그것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마음 채움을 위한 유일한 대상으로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에 있었던 여인을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 여인이 하나님 한 분만을 소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여인이 건강을 소원하고 있었다면 불쌍한 환자로는 여기셨을지언정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의도적인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열여덟 해 동안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을 결코 가볍게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9~40절을 보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41~4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혈육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마귀의 자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나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았다는 것에서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지 상상이 됩니다. 아마 1~2년 정도는 주변의 배려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을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자 세상에서는 용도 제로인 인간으로 여겨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배려와 관심도 한계가 있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문지방 넘어갈 때 조심하라는 의례적인 배려 정도가 이 여인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관심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인은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본래 성정이 그랬는지 본의 아니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을 소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 여인의 상태가 진정한 안식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이란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무리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진정으로 안식을 지키는 사람은 이 여인뿐이었음을 보셨습니다.
안식일의 근본 취지는 태초의 안식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처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의 의식이 깨어서 맞이한 첫 번째 날이 하나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담에게는 아직 아내도 없었고 자녀도 없었으며 해야 할 일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첫 번째 대상으로 마주한 존재가 하나님이셨습니다.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이 깨어난 첫 번째 날에 첫 번째로 의식한 대상이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상태입니다. 아담은 인간으로서 마음에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음 공백의 흡입력은 첫 번째 대상인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소원이 작용하고 발사되고 있는 상태가 안식일에 가졌던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안식일 규정을 정해주시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엿새 동안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일곱째 날에는 이 상태를 멈추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영영히 하나님을 소원해야 하는 사람의 본분은 망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곧 하나님이 선민을 선택하신 것처럼 선민들도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쌍방향 선택을 위한 규정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정조차 없었다면 선민들이라고 하여도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되어 하나님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쉼으로써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 몰입하도록 안식일을 정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아담 생애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아담은 이제부터 삶을 살아가고 활동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 활동으로써 안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를 삶의 모든 활동에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소원하는 상태를 잃지 말라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장치가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삶에서 활동을 하려면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것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을 시작하기 전에 첫째 날로서의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럴 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힘과 생각과 판단이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님의 생각이 입으시고 하나님의 판단이 입으시고 하나님의 기운이 입으시고 활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참 활동이고 진정한 활동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쉼으로써의 안식의 근본 취지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면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활동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짓되고 마귀가 좋아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안식은 인간의 활동이 참 활동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 활동을 멈추기 위해 안식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참 활동을 위해 안식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마음의 공백을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앙망하며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소원은 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나에게 쉼을 줍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소원하는 동안 삶은 피곤하지 않고 곤비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을 소원하는 동안 삶은 지치고 피곤해집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돈맛 좀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가난이 아닌 돈에 대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소원을 하나님에 대한 소원으로 바꾼다면 이와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는 이 상태가 너무 속상하고 괴롭고 견딜 수가 없다. 언제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을까?”라는 소원은 아무리 하여도 지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세상을 소원하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만큼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원할 때에는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고 있을 뿐인데 독수리의 날개 치는 것과 같은 새 힘이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생애 첫째 날을 내 것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라고 원하는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없지만 하나님 대신 돈을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가 건강이 좋지 않지만 하나님 대신 건강을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을 통해서 쌍방향 선택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에 나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바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회사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세상을 소원하는 나를 부인할 때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를 통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면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만이 진정한 안식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은 끝나게 됩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길을 따라 마음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앙망하고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이 상태가 삶의 현장에서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써 첫째 날을 안식일로 맞이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선악과나무 대신에 십자가나무가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한 소원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원이 죽었기에 판단이 죽었고 생각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통해 세상을 볼 때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게 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함을 통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소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안식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담의 자손인 우리에게 선악과나무 대신에 십자가나무가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서 아담의 유전 죄를 물려받아 세상을 소원하는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확인할 때에 부활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소원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만 소원하는 중에 회사에 나가면 회사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진정한 말과 진정한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판단으로 나에게서 활동해나가실 것입니다.
안식은 십자가나무를 바라보며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머무는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머물면서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소원하라는 뜻입니다. 계속 세상의 일을 하다 보면 세상 소망하는 것을 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일이 참 일이 되고 활동이 진정한 활동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안식의 근본 취지를 받아들여서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밖에 계시는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를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기운과 생각과 판단이 내려오셔서 나를 통해 당신의 활동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안식은 참 활동을 위한 진정한 쉼입니다. 진정한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쉼이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이 병행은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향해 가시는 여정 중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취지를 따라 오늘도 진정한 쉼을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루게 하여 주심으로써 나를 통해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진정한 활동으로 하루의 시간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