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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이 보게 된 것
본문<요9:13~34>
지난주에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다른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는 그냥 말씀으로만 고치셨는데, 이번은 주님이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여 소경을 치료 하십니다.
이 표적에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지요? 주님의 침은 궁창 위의 물인 진리의 말씀, 즉 생명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흙은 죄로 죽어있는 인간의 실존을 비유하고 있구요. ㅎ님의 신이 떠난 인간은 그냥 흙이지요. 따라서 죄로 죽은 인간은 자신이 죄악 중에 태어난 저주와 심판의 존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에게 ㅎ님의 생기로 비유된 주님의 침이 역사될 때, 비로소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된다는 비유였던 것이지요.
실로암은 무엇을 말합니까? 실로암(보내심을 받은 자) 즉 ㅎ님께 보내심을 받은 IX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실로암에 가서 눈이 떠지게 되는 것인가요? 다시 말해서 누가 예수를 믿게 되는 걸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침인 ㅎ님의 영(성령)을 받아야 자신이 소경됨, 즉 죄인임을 깨닫고 죄사함을 주시는 IX께 나아가 주님을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ㅎ님의 간섭이 있어야 눈이 떠져 예수를 믿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앞서 공부했던 요6:4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즉 ㅎ님 아버지가 찜한 자가 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찜한 자란 창세전 ㅎ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내 의지 때문이 아니라, ㅎ님의 일하심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빌2장을 보면 ㅎ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ㅎ님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ㅎ님의 간섭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일요일에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도 교회 예배에 나와서 말씀 듣는 게 더 마음에 기쁘고 가치가 있어서 나오는 것이지요. 교회 나오는 것을 억지춘향으로 생각지 말고, ㅎ님의 간섭이라는 복으로 여겨야 하겠지요.
엊그제 동네 탁구 동호회의 몇 사람들과 차를 마시면서 ㅎ님과 천국, 지옥에 대해서 대화를 좀 했었는데, 영적인 면에 전혀 무감각 하더군요. 생명의 기원은 어떻게 되는지, 사람이 진화 되었는지, 아니면 창조 되었는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말해 줘도 눈빛이 멍하니 딴 생각들만 하고들 있어요. 똑같이 하루 세끼 밥 먹고 옷 입고 말을 하지만,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닫혀 있는 자들, 성경을 이들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합니다(짐승처럼 생존에만 매여 사는 존재들, 사망의 냄새만, 날 불러주신 ㅎ님께 감사했지요.)
(다시 말) 예수 믿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진리의 중심에 있기 때문 이지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생명임을 알고 다른 여타 인간의 행함이 구원에 단 1도 가미되지 않는다는 순수한 복음을 믿고 있으니 얼마나 기적 입니까? 기독교의 범주가 얼마나 큰 카테고리를 갖고 있어요. 천주교가 50%?(이것도 기독교지요, 그러나 완전 이단임). 공식적 이단은 또 얼마나 많아요(신천지, 통일교, ㅎ님의 교회, 박태선 신앙촌, ..무수함), 가장 큰 위험(정통교단 안의 비진리 이단들.. 기복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 사회참여주의 등등)
사도바울이 갈1장에서 단호히 외쳤던 게 다른 복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지어다..위에 열거한 자들이 모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부정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왜 십자가를 붙잡으라고 하는 거지요? 우리 인간은 모태로부터 죄를 안고 태어나기 때문에 도저히 ㅎ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죄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예수 십자가는 필요 없는 것이 되겠지요. 인간의 전적 타락..이것에 대해 누가 알겠습니까? ㅎ님의 간섭으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게 아니라는 분명한 반증입니다. 주님이 마13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잖아요.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희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했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허락되었으니 복이 있도다..(하심). 닫혀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생명에 대해 우리에게 열려져 있고 선물로 주어져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고귀한 일입니까? ㅎ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억지로 됩니까?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역시 ㅎ님의 택하신 자입니다. ㅎ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태어나서 살다가 지금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의 경륜을 깨닫게 하시려고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3절 끝에, ㅎ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이 사람이 안배된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지금까지 소경으로 살아온 것은 아주 불우한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만나 눈도 뜨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 되었으니 가장 복 받은 사람인 것이지요..끝이 좋아야 진정 좋은 게 아닙니까? 성도는 모두 끝이 찬란한 자들이니 복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게 된 일을 가지고 바리새인과 눈을 뜬소경 간의 신앙 논쟁이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 날이 또 안식이었기 때문에 시비가 생긴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예수님이 일부러 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깊은 내막을 모르고 예수가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단정하여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요9:13~24> 13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으면 신비하고 놀라운 사건이잖아요. 경사중의 경사요 해외토픽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가 이런 놀라운 일을 하셨는지 수소문해서 그 분을 높이고 감사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가 밉고 싫은 겁니다. 왜지요? 자기들이 가르치는 율법신앙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가 ㅎ님께 인정받아 구원받고 복도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예수는 율법행함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믿어야 구원이라고 하니까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예수가 많은 이적과 표적을 행함으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바리새인들의 교훈이 힘을 잃게 되고 이제 급기야는 백성들이 자기네들을 다 떠나가게 생겼잖아요? 밥그릇을 뺏기게 생겼으니 이제는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바리새인과 예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주님은 일부러 율법의 가장 핵심이 되는 안식일 규례를 건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칠 때도 꼭 안식일에 고치시잖아요. 38년 된 병자를 고칠 때도 그리했구요. 38년 동안 누워있던 자에게 대뜸 네 침상(돗자리)을 들고 가라고 하셨는데, 그 날도 안식일이었지요.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그를 보고 뭐라고 해요? ‘야, 이놈이 오늘이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가다니 너는 안식일을 어겼다’고 소리칩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발상입니까?(축하해, 누가, 어떻게? 실종) 이게 율법신앙의 정체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고들 있었지요. 수ㅡ천년간..
이 밖에도 주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제자들을 이끌고 밭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 먹는 퍼포먼스까지 연출을 했어요. 바리새인들을 약 올리는 거지요. ‘너희들이 알고 있는 안식일 개념은 아주 잘못된 것이야. 내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야. 내게로 와서 나를 믿는 게 참된 안식이란다.’를 가르치고 싶으셨던 거지요.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가 ㅎ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어데 있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구원은 어떻게 받지요? 단순하게 말해서 예수 믿으면 구원입니다. 다른 무슨 종교적 행함이나 헌금, 십일조 등을 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이 네 가지가 종교개혁의 모토였고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가 변질되어서 다시 율법으로 회귀 했어요. 주일 성수니 뭐니..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만일 안 지키면 취소된다는 협박인가요? 물론 성도가 일요일에 교회 모임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선순위로 살아야하는 것은 맞지만 이게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삶의 가치와 의미를 IX께 두고 있기에 성도에게 베푸신 ㅎ님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더 깊게 높게 넓게 알아가는 것을 행복과 기쁨으로 여기는 고백이 주일 예배 참석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구원 받기 위한 게 아니라, 받은 구원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느냐 아니면 안식일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깨닫고 안식의 실체이신 IX를 믿느냐가 주요한 관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고장관념을 깨뜨리고 진리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식일 준수 개념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갇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은 주님의 이러한 의도를 모르기에,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야단입니다. ㅎ님의 뜻을 모르는 이런 자들이 바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라는 고발을 성경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소경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철저히 율법 지킴을 생명으로 여기며 살아왔었지요. 그러다보니 예수야말로 이단의 괴수였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마귀새끼들이라 여겨서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 아닙니까? 이처럼 ㅎ님의 일하심에 대해 백치상태에 있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은 목숨을 걸고 율법지킴을 고수하는 자들이니 지금 안식일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고치신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율법을 왜 어겼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사망에 관심두고 사는 자들- 이게 이방인과 무엇이 다릅니까? 아니 오히려 이방인 보다 더 예수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니 이들이야말로 구제불능인 셈이지요.
위의 대화를 보면 가관입니다.
16절을 보니, 예수가 안식일을 안 지키는데, 그는 ㅎ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 죄인임에 틀림없다.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말하면서 17절에 소경의 생각을 물어 봅니다.
-그가 눈을 뜨게 했지만, 그는 안식일을 어겼다. 그러니 너도 율법적 신앙을 따라 말해야겠지? 자 말해봐, 그를 어떻게 생각하지?(죄인 맞지? 안그래?..억지로 협박하고 있음)
그런데 소경은 그 협박에 안 넘어 갑니다. 그 분은 선지자라고 답해 버립니다.
그것이 예수를 진짜로 만난 사람의 태도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는 지금까지 큰 불편이 없이 살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상인으로 살다가 사고나 병으로 실명된 자와는 조건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어떤 사고로 실명이 되면 ..상상을 해 보세요. 저도 가끔 불현 듯 스치는 생각이 만일 어떤 일로 실명을 하게 되면 과연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만큼 본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일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면서부터 소경은 세상을 본 적이 없이 처음부터 어둠이니까 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도 자기만의 빛의 세계가 있어요. 상상 속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을 갖고 나름대로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진짜로 눈을 떠보니 어떻겠습니까? 휘황찬란한 세상에 펼쳐져 있는 만물과 만상들..푸르른 창공, 해. 달, 별들,,강, 바다, 온갖 나무와 꽃들, 새며 짐승들..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의 모습들, 그 웃고 우는 표정들.. 입이 다물어 지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안겨주신 예수님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 어떤 협박이나 위험이나 고난 앞에서도 절대로 예수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 분이 자신의 전부로 자리 잡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자는 IX를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을 떠서 사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수십 년이면 끝장납니다. 인생이 이것으로 마감됩니까? 히9.27절을 보면, ‘한 번 죽은 것은 ㅎ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백보좌 심판이후에는 영생이냐? 영벌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로 갈라집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잠시잠깐의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한 게 아니라 영의 눈을 뜨게 한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겁입니다.
어쨓든, 바리새인들이 소경을 회유해서 예수가 죄인이니 그를 추종하지 말라는 말에도 그가 따르지 않자 그의 부모를 찾아 협박을 합니다. 19절..네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이 말은 당신 똑바로 말해라, 만일 예수가 낫게 했다고 하면 너희는 출교야, 그러니 어디 가서 떠들지 말고 함구하고 있어..(이런 의도인 셈). 유대 사회에서 출교 당하면 완전히 사회에서 격리됩니다(사망선고나 다름없음, 고립됨, 사고팔고, 시집장가 불가능)
부모는 이런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답을 회피 합니다. 우리는 모르니까 장성한 그에게 물어 보시오.. 이 말은 입을 다물고 있으테니 안심하시오. 그나 잘 단속하세요 라는 말입니다.
아니 부모가 되가지고, 이게 말이나 되는 태도인가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식을 고쳐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라고 결국은 고치지 못해서 항상 미안하고 안타까웠는데, 어느 날 예수를 만나 눈이 떠졌다니 믿기지 않는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뻐해야 하는데, 눈앞의 현실에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출교가 무서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어요(22절, 출교가 무서워서..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게 예수를 직접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의 신앙입니다. 아무리 기도 응답이 이루어 졌다고 해도, 그것이 신앙이 될 수가 없어요. 기도 응답이나 문제 해결은 그 때뿐입니다. 약발이 오래가지 못해요. 사람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ㅎ님을 배신합니다. 내가 언제 ㅎ님을 믿었더라? 할 정도로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의 정체성을 ㅎ님은 너무도 잘 아시기에 성도들에게 육신의 형통함을 허락하시지를 않습니다.
(실화 하나) 어떤 불신자가 교회를 찾아왔더랍니다. 암에 걸려서 ㅎ님께 도움을 받으러 온 것이지요. 목사님이 어찌하든 신자로 만들려고 열심히 기도를 해 주었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교회도 열심히 다녔고, 병원 치료도 잘 받았지요. 시간이 흘렀고 다행히 암이 치료 되었습니다. 한 4년 정도 교회를 잘 다니더니 어느 날 부턴가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더니만 하는 말이..그동안 다녀주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라십니까? 하더랍니다(기절초풍할 말?)
한 4~5년 교회 다니면서 헌금 내주었으면 할만큼 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목사도 본전 챙겼으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겁니다. 좀 극단적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게 ㅎ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의 본심이기도 합니다. 어떤 아쉬운 일이 있어서 ㅎ님을 찾는 자들..돈, 건강, 자녀, 사업장 등등.. 기복주의 신앙이 그래서 거짓이라는 거지요. 아무리 교회 건물이 크고, 사람들이 많아도 거기에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자 얼마나 있나요? 즉 십자가 복음, 은혜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눅13:23~30>
‘23절~구원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원문: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습니까?..혹자/주님이 유도함)
‘24절~좁은 문으로..힘쓰라.. 이 부분을 많이 오해 합니다. 좁은 문으로 ..힘쓰라(마치 죄를 안 짓고, 말씀 잘 지키고, 반듯하게 살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윤리 도덕적? 전혀 아니지요)
인간에게 있어 힘든 일이 자기 부인입니다. 오늘 서두에 자기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시작이라고 했지요. 자기부인은 자기가 죄로 태어난 존재이기에 ㅎ님이 원하시는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다는 무능과 무가치함을 자인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게 쉽지 않은 것은 이런 상태에 이르는 것은 자기 의지나 지혜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 되는 차원이지요.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즉 자기부인을 하고 복음을 믿으려고 한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럼 누가 하나요? ㅎ님이 택한 자들을 간섭하셔서 그리 몰고 가는 겁니다. 그런 자들의 대표가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날 때부터 소경된 자도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알고들 있었으니까요.
반대로 잘나가는 자들, 성공출세 가도를 달리는 자들, 돈 많고 건강해서 눈 밑이 기름기로 번지르르한 자들은 십중팔구는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 속하겠지요. 재벌총수를 부러워 마세요. 일취월장 승승장구를 달리는 자들을 부러워 마세요. 25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심판 날에 역사의 문이 닫히면 끝이라고 경고 합니다.
아무리 성공한 자라 할지라도 성경은 ‘인생은 한 낱 풀과 같으며,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합니다. 있는 듯 하다가 안개처럼 사그러지는 하루살이라는 말이지요. 주지육림에 빠져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더니만 어느 날 눈 떠 보면 심판이라는 말이지요. 수십 년 금방입니다. 영생을 위해 사느냐 현실에 매여 사느냐? 내세를 모르고 현실에 베팅하는 자는 불나방 같은 자입니다. 죽는 줄도 모르고 육적 욕망이라는 뜨거운 불속으로 뛰어드는 인생들, 불나방 운명일 뿐입니다.
‘26~28절: 예수를 만나지 못했으면서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열심과 업적을 마치 좋은 신앙으로 착각을 한 자들이 심판 날에 주님께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26절).
그랬더니 주님은 뭐라고 하지요? 이 행악하는 자들아(마7:불법한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너희는 밖에 쫒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지옥의 영벌 속으로 처해진다는..)
(질문) 여기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모든 선지자는 왜 천국에 갔을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언약백성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무엇을 잘 했기에 구원을 받지요? 형 에서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라반 삼촌도 속이고, 그야말로 사기꾼의 달인 야곱인데요. 이처럼 야곱은 정말 깜도 안되는 인물이지만, 에서와는 성품이나 능력 면에서도 훨씬 모자라지만, 한 가지 특징은, 야곱은 장자권에 목숨을 건 자입니다. 장자권이란 상속권을 말하며 이걸 풀어 말한다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원은 누가 일으키는 것이라구요? 야곱 자신에게 지혜가 있서서가 아니라 ㅎ님이 그의 마음에 천국에 대한 소원을 두셨기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장자권을 손에 넣게 되자 무슨 일들이 벌어집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유리 방랑하는 삶이 시작되지요. 그가 노년에 토로 하였듯이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냅니다. 이게 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광야 길입니다.
과연 구원은 공짜 맞습니까? 맞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니라구요. 참으로 좁고 협착한 길이라구요. 나는 원치 않지만 ㅎ님이 그리로 안배하시는데 배겨날 자 있습니까? 공짜 같은데, 육신이 후패되는 댓가가 있는 길, 그래서 육신은 도망가고 싶은 좁은 길, 아무나 못가는 그 길, ㅎ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ㅎ님의 사랑이고 전능성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ㅎ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니까요.
다시 <요9:24~25>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단속한 후에 다시 소경되었다가 눈뜬 자를 찾습니다. 2번째 회유를 하려고 하는 거지요. 너는 ㅎ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냐하면 안식일을 어기는 저 자는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네가 눈뜬 것은 ㅎ님이 하신 거지 저 예수가 한 게 아니라고 몰아 부칩니다. 노골적인 협박이지요. 이런 협박에 지금까지 안 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출교를 당하면 사망선고나 다름없으니, 이제 눈을 뜬 것은 과거 일이고, 너도 살려면 우리말을 듣고 타협하라는 취지로 강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 갑시다. 신앙은 ㅎ님을 믿는 건가요?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아니면 성령님을 믿는 건가요? 무엇이지요? 셋 다 믿나요? 혹자는 그럽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이니까 성령님과 친해져야 한다나요? 그래서 ‘성령님 안녕하세요?’라는 책도 있어요. 거기 보면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하래요..친밀하게 성령님과 교제를 터야 한다나요?(감성팔이 신앙..참 한심)
성경의 주제,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IX가 주인공입니다(요5.39절). 요6장 27절에서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말씀을 하시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ㅎ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되묻자, 주님이 뭐라고 해요? ㅎ님이 보내신 자(나를) 믿는 것이 ㅎ님의 일이야(하심). 왜일까요? ㅎ님의 사랑이 IX의 십자가로 나타났으니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ㅎ님은 100% 거짓 ㅎ님 입니다.
ㅎ님 자신도 ㅎ님의 백성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게 곧 ㅎ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요5:23절도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면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는 거야(하심). 우리의 죄를 누가 사해 줍니까? IX의 십자가 보혈로 사하시지요. 예수님은 안보이는 ㅎ님의 형사이세요. 예수를 통해 ㅎ님을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ㅎ님을 사랑하는 거구요. 이것에 대한 바른 관점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리새인들이 ㅎ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틀린 말이지요.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게 ㅎ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없는 ㅎ님, 그것도 십자가 달린 예수 없는 ㅎ님은 가짜입니다. 그럼 무수한 종교인들이 찾는 보편적 신을 ㅎ님이라고 부르는 그 ㅎ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그 ㅎ님은 마귀). 인간이 열심을 내어 섬겨주면 복주는 신을 ㅎ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예수가 개입되면 무엇을 사사합니까? 인간 나는 저주와 심판의 대상임을 발견케 됩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면 나라는 존재는 구원은 고사하고 결단코 지옥이 마땅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 나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사 IX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은 망극하신 ㅎ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ㅎ님 앞에서 돈 주세요, 건강 주세요, 자식 잘되게 해주세요(다고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다 거짓 ㅎ님을 섬기는 자들의 우상숭배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자는, ㅎ님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군요. 예수님 감사합니다만 찬송하게 되는 겁니다. 어딜 육신의 것을 달라고 떼를 씁니까?
<요9:28~34>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모세의 제자인데 너는 예수의 제자냐? 합니다.
분명히 ㅎ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지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이 그들은 무엇인지 모르지요. 율법은 죄인이 지킬 수 없음을 알라고 주어진 겁니다. 즉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ㅎ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한 것이지요.(일종의 배달사고? 목적상실)
따라서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설계변경을 했으니 불법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마7장을 보면 그날에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선지자, 축사, 많은 권능).. 자랑하니까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외면하심) 이게 산상수훈 마7장의 결론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면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께 나아와 용서를 받아야하는데, 율법으로 자기 의를 챙기고 있느니 예수가 필요 없는 자들이 된 겁니다. (영원히 저주를 해결하지 못함)
3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계속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자 소경이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한 분이 있었더냐’고 반문 하면서, 내가 눈을 떳으니 예수님은 분명히 ㅎ님께로서 온 분이 맞다고 확증을 해 줍니다. 예수를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의 싸움이 여기서 결판납니다. 예수 없는 ㅎ님을 섬기던 바리새인들은 관념적 ㅎ님을 알 뿐이지 진짜 ㅎ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는 ㅎ님을 알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소경을 출교시키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고 맙니다.
그러나 차주에 보겠습니다만, 율법 종교의 세계에서 쫓겨나야만 진짜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18.4절에서도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고 권고 하고 있습니다. 큰 성 바벨론 음녀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거기서 나온 자들이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감사만 있을 뿐이지요(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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