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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산 운주사
이후 역사도 자세하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능주 지역이 피해를 입었던 대략 정유재란 즈음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80년 전후의 상황을 적은 『범우고(梵宇考)』에도 폐사되었다고 하고 있어 이때까지 절의 법등은 끊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설담 자우의 『설담집(雪潭集)』에 묻힌 불상, 기울어진 탑을 바로 세웠으며 약사전을 세웠다고 적고 있어 1800~1830년 무렵 운주사는 새롭게 단장을 마친 듯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사역의 변화이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사역의 중심지가 용강리였으나 이때 재건되면서 대초리 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대초리사지 발굴조사 때 2개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서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출토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리로 사역을 옮긴 것은 19세기~20세기로 보인다. 그렇다면 운주사는 언제, 누가 창건하였을까. 최근 전남대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성과를 토대로 절은 고려 초기에 창건되고, 석탑은 고려 중·후기에 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운주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이후 고려 중·후기에 이르러서 이른바 천불천탑 불사를 일으킨 것으로 짐작된다. 천불천탑 조성 시기와 주동세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중생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안겨주는 천불천탑
‘누워계신 부처님이 과연 일어날까. 누워계신 부처님이 일어나면 무엇을 하실 것인가,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변화될까’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를 대표하는 와불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창건연대도 정확하지 않은 운주사에는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천불천탑과 와불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기존의 사찰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사찰에 대한 고정관념이 운주사에서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전통기법에 따라 사찰들은 불보살과 석탑들이 존엄성을 갖추어 조성되어, 정숙한 질서에 따라 전각과 석조물이 순서대로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운주사 부처님과 석탑들은 인간의 바람에 따라 자유스럽게 조성되었으며, 자연에 순응하듯 자기가 있고 싶은 자리에 정좌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것은 자기와 같은 수많은 부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엄을 갖추지도 않고, 근엄함도 찾아볼 수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며 가족 같은 분위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부처님, 작은 부처님, 엄마 부처님, 아빠 부처님, 애기 부처님, 촌부 같은 부처님, 못생긴 부처님, 집안에 계신 부처님, 눈비나 피할 수 있도록 바위에 숨은 부처님들이 자유롭게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와불을 보면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입니다. 누어있는 부처님이 일어날 수 없지만, 언제 가는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꿈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꿈은 바로 미완의 운주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주사는 우리들도 노력하면 우리들의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의 사찰이기 때문입니다. 100여분의 부처님과 21기의 석탑이 사찰 전체를 장엄해 놓은 운주사에서 자기의 부처님을 찾아 자기의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관람포인트
1) 부처님과 불상이 몇 개일까요. 운주사를 장엄하고 있는 부처님과 석탑의 숫자를 세워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2)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부처님 중에서 자기와 닮은 부처님을 찾아보세요.
도선국사
운주사의 창건주로 거론되는 도선 국사(道詵 國師827~898)는 여러 전기가 전하는데, 전남 영암 도갑사의 비석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낭주(朗州, 지금의 전남 영암) 구림촌(鳩林村) 사람으로 법명은 도선이고, 자는 옥룡(玉龍), 호는 연기(烟起)이며, 성은 최씨이다. 13세의 나이에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비보설과 풍수지리설의 술법을 배우고 신라 헌강왕 1년(875) 49세의 나이에 돌아왔다. 귀국한 후 그는 비보설에 따라 병든 국토를 다스리기 위해 먼저 조정에 아뢰어 500여 선종사찰을 건립하고, 신라 효공왕 2년(898) 세수 72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
①도선은 누구인가
1,100여년전에 살다간 도선의 삶과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선승·술승·신승·국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도선을 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말해 역사는 그에 대한 평가를 온당치 않게 내리고 있다. 도선에 대한 연구도 그동안 선승 도선에 대한 연구보다는 풍수지리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를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로 받든 이후 선승 도선의 모습은 감추어지고 말았다. 그는 분명 신라말 형성된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도 도선을 보는 시각은 풍수승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몇년사이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암군은 지난 88년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라는 책을 간행한데 이어 97년 7월에는 도선학술강연회를 가졌고 정부에서는 같은해 도선사후 1,100년만에 도선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이와함께 도갑사에서 그의 탄생지 구림 일대를 ``도선로``로 조성하고 명명식을 가진데 이어 오는 10월께 기념관을 개관할 예정으로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1천년 이상을 민초들 가슴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도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는 민족통일을 이룩하여 문화의 절정기를 누렸던 신라가 차츰 침체의 늪에 잠겨가고 있던 제42대 흥덕왕 2년(827)에 영암의 김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집안의 윗대 계보와 부조에 관해서는 그 내력을 자세히 전하는 바가 없다. 단지 일설에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이라고도 전해져 있다. 그의 어머니 되는 강(姜)씨 부인이 어느 날 밤에 어떤 사람에게서 한 알의 밝은 구슬을 받아 삼킨 꿈을 꾸었다. 그후로 부터 임신을 하게 됐는데 달이 차서 해산할 때까지 맵고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 음식을 싫어하고 오직 경전과 염불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그는 젖먹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남다른 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출생에 관해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또 있다.
그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성이 강씨가 아니고 최씨로 되어 있다. ``도선국사실록``에 있는 이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도선과 영암-
그러나 사람의 도리(남녀의 결혼절차)가 없이 (처녀가 참외를 먹고) 애기를 낳았으므로(괴상한 일이어서)숲속의 반석위에 갖다 버렸다. 여러 날이 지나서 그곳에 가보았더니 비둘기떼들이 모여와서 날개로 애기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으며 애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안고 가서 키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을 구림(鳩林,비둘기 숲)이라 하고 그 반석 이름을 국사암(국사바위)이라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 기술한 이야기는 물론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이므로 그 사실성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같은 이야기는 전혀 터무니 없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을 것이므로 거기에는 그 나름의 역사 및 진실성이 잠재돼 있으리라 본다. 그의 생애가 남달랐기 때문에 그 출생의 이야기도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전해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선 그 지명(聖基洞)의 성기는 글자 그대로 하면 성스러운 터(聖基)가 되지만 이 글자를 뒤에서부터 새기면 터(基)의 성자(聖者)가 태어난 곳을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둘기 숲(鳩林)이라든가 국사바위(國師巖) 등의 명칭도 아무 까닭없이 붙여지지 않았을 것이며 겨울철의 청참외가 뜻하는 상징성도 그의 출생과 반드시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태어난 시기를 진덕왕 때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덕왕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647∼654)이 되므로 그의 실제 출생년(흥덕왕 2년·827)보다 170여 년이나 앞서게 되는 셈인데 아마도 전설이기 때문에 흥덕왕이 진덕왕으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출가의 삶-
도선은 15세를 전후해 출가하여 이른바 9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 혜철선사(785∼861)의 문하에서 선지를 얻어 그 법을 계승했다. 고려 왕조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선을 앞세웠다. 실제 도선의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대부분 풍수지리설에 관련된 자료들이며 그에 대한 어록이나 말씀은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신비스런 일화만큼이나 도선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다. 하지만 그나마 도선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동문선`` 27권에 실린 ``백계산옥룡사비``와 ``도갑사 도선국사수비왕사비``이고 그다음 자료는 풍수관련 자료들이다.
943년 태조가 자손에게 내린 ``훈요 10조`` 1,123년 고려 인종때 왕명에 의해 찬술한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 1,314년 민지가 찬술한 ``본조편년강목`` 그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사찰자료집`` ``세종실록지리지`` 등이다. 그러면 자료적 가치가 뛰어난 ``옥룡사비``를 중심으로 도선의 생애를 더듬어 보자.
최응청이 쓴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옥룡사 왕사 도선은 때에 응하여 세상에 나왔고 <하늘을>을 순하게 하는 자를 돕는 착한 마음을 지녔다.
그는 드디어 고향을 떠나 15살 나이에 월유산 화엄사로 입산을 단행했다. 최응청의 ``교서``에는 도선의 입산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불조의 유풍을 발휘하여 종교를 주장하였고 제왕의 법을 불교에 세워 먼저 안 것(先知)에 부합되었다고 말했다. ``옥룡사도선비``에는 도선의 입산 동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나이 15세가 되자 월유산 화엄사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한해도 채 못되어 대의를 통달했고 문수와 보현을 깊이 깨달았다.
그때 같이 공부한 도반들도 모두 놀랐다. 850년에는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운봉산에 들어가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후 이미 진리를 통달하여 깨우쳤기 때문에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그를 따르는 이가 적지 않았으나 그는 광양의 백계산에 이르렀다가 한 옛절에 마음이 끌려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이 옥룡사였다. 새로 법당과 요사체를 고치고 늘려서 그는 이 옥룡사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가 그곳에 자리를 잡자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옥룡사에는 수백명의 제자가 늘 머물면서 그에게 일깨움을 받았다.
설잠자우
운주사 창건설화
신라 52대 효공왕 때 영암구림 출신으로 일찍이 큰 지혜로써 도를 깨쳐 그 높은 도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대선사인 도선국사는 당나라에 들어가 풍수지리학을 배워 처음으로 신라에 전파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형세가 행주형국(行舟形局-태평향을 행해 가는 배의 모양)인데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 무거운데 반해 호서, 호남지방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항상 변란이 많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산세를 관찰한 도선국사는 여기에 높은 탑을 많이 세워 돗대로 삼고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어 놓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생각에서 도선국사는 이곳에 절을 세워 나라를 편안케 하기위하여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 터를 다듬고, 도력(道力)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 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천상으로 가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도선 국사는 혹시 시간이 부족해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모르게 절의 서쪽에 있는 일괘봉(日掛峯)에 해를 잡아 매 놓았다고 한다. 석공들이 열심히 탑과 부처를 만드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동(使童) 녀석은 공사바위(절 뒤에 있음)에서 돌을 날라다 주다가 그만 짜증이 났다. 그때 도선 국사는 일이 거의 되어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해를 풀어 주었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는 일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석공들은 와불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서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때 꾀 많은 사동은 일에 지치자 그만 닭 우는 소리를 내 지르고 말았다. 석공들은 와불을 다 세우고 절에서 6㎞ 떨어진 하수락 일대의 돌들을 끌어 모아 놓고 일을 마칠 계획이었는데 닭소리가 나자 일손을 멈추고 창고바위에 도구를 모두 넣은 다음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석공들이 모두 천상으로 가버린 뒤에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던 도선 국사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 중국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왔는데, 옥룡(玉龍 - 도선 국사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 깨끗한 옷 한 벌을 준비해 주십시오. 이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그는 중국의 일행 선사(一行 禪師)로부터 음양술수와 풍수지리설을 배우는데, 일문천오(一聞千悟)라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우치는 능력을 보여 더 이상 일행 선사로부터 배울 것이 없어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길에 일행 선사는 도선 국사에게 “그대도 알다시피, 세계에서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에서 시작한 정기는 곤륜산에 뭉쳤다가 다시 조선의 백두대간을 타고 한반도 전역에 미치는데, 그래서 조선의 지혈 몇 개를 끊지 않으면 조선의 기운이 너무 높아져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는다. 그러니 조선에 가거든 몇 개의 지혈을 끊어 달라”고 부탁했다. 도선은 조선에 와서 스승의 말대로 지혈 몇 개를 끊어 놓으니 능주 지방에서 땅이 피를 토했다. 이런 참상을 목격하고 잘못을 깨달은 그는 중국에 보복을 하려는 결심을 하고 천태산에 올라 돌방아를 만들어 방아고(머리)에 철마를 붙여 철마방아를 만들었다.
이 방아를 당나라를 향해 설치한 다음 도선은 매일 산에 올라 방아를 한번씩 찧으니, 중국의 황실에 국가의 큰 인물들이 매일 한명씩 죽는 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괴변에 황제는 급히 일행 선사와 상의하여 그 연유를 알아내고 급히 사자를 보내 도선 국사를 만나게 했다. 사자는 황제의 명임과 동시에 일행 선사의 부탁이라면서 “제발 이 일만은 중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국사의 그 어떤 청이라도 다 들어주겠습니다.”라고 하자, 도선 국사는 “이곳 운주사는 땅기운이 약한 곳이어서 일본의 침입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니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워 일본의 기운이 승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중국이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워주었는데, 산 정상에 있는 와불 만큼은 못 일어나도록 조성하였다. 왜냐하면 이 와불이 일어나면 그 방향이 정면으로 중국의 곤륜산을 향하게 되어 있어 중국의 정기를 전부 흡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석불군"가"
합장 수인의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배치된 형식이다. 바위너설 안에 모셔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풍우를 피할수 있게 바위 너설 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낸 흔적을 엿볼수 있다. 바위너설이 실내의 법당 역할을 훌륭히 해낼수 있도록 조성한 듯 싶다. 다른 곳의 불상 보다도 그 생긴 모양이 특이하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가 인상적이다. 그저 우리 이웃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마치 천불천탑을 세웠던 듯 이런식으로 불상이 배치된 것을 보면 마치 천불이 이곳에 실재했는 듯 싶다.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는 8-9세기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 되었다. 특이하게도 중성불의 개념을 깨뜨려 아버지부처 어머니부처 아들 딸 부처로 부르고 있는데 운주사 불상을 바위너설 야지에 집단적으로 배치한 모습과 더불어 이 또한 운주사만이 가지는 특이한 개성이라 할만하다.
9층석탑(보물 제 796호)
2층 탑신 이상은 모두 한 돌로 탑신석을 만들었고 표면에 동일한 무늬를 새겼다. 무늬는 마름모를 2중으로 한 곽을 만들고 그 안에 4엽의 꽃을 양각으로 새겼다. 옥개석은 9층 모두 네 귀퉁이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한 형태이며, 지붕돌 하부에 추녀와 방사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 무늬를 새겼다. 양식적으로는 백제계 석탑과 상통하는 탑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에 새긴 문양은 물론 비례감 등에서도 유례가 드문 탑형이다. 운주사에 있는 각 골짜기의 부처님이 비로나자불(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만큼, 이처럼 환한 빛살이 중앙에서 하늘로 퍼져오르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비로자나탑이라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아래 거대한 기단석도 잘라서 운반하였고, 일설에는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한다.
7층석탑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석불군"나"
7층석탑2
석불군"다"
광배를 갖춘 불상
석조불감(보물 제 797호)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그 안에 두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두분의 석불은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불우조에 이 상배불이 언급되어 있다.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 천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이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돌문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앞바다에 내다버렸다한다. 두분의 불상이 거대한 돌집 안에서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는 채로 조성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마애여래 좌상을 협시불로 보필하고 있는 불상같다. 주불인 마애여래 좌상 아래에 지금은 두분의 불상이 있으나 남아있는 기단으로 보아 여러분의 불상이 이곳에 모셔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불동 각 골짜기마다 이렇게 비로자나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진 곳에는 여러 크고 작은 불상을 함께 조성하여 불상군을 형성하였다.
원형다층석탑(보물 제 798호)
7층석탑3
너른 바위를 온통 기단석으로 해서 서있다.
시위불
와불아래 시위불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있는데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와불을 중심으로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좌협시불이 석가모니불, 우협시불이 노사나불이다
와불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칠성바위
4층석탑
명당탑
원형구형탑
석불군"마"
마애여래좌상
거대한 바위벼랑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불상이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으나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귀는 양각되었으며 귓바퀴까지 음각되었다. 타원형으로 부드럽게 부조된 상호는 눈과 입이 희미하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을 조형한 이는 이름도 없이 이미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겠으나 그가 추구한 이상은 오늘도 희미하게 남아 우리를 반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이곳에 이 바위 한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주변관광지
도갑사
도갑사는 신라 문무왕 1년(661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로 그후 조선 초 1456년 수미대사가 중건하였다,
도갑사에는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해탈문이 있으며 대웅보전,석조여래좌상, 도선국사비, 명부전, 팔각석등대석, 3층석탑, 5층석탑, 석제구유 등이 있다. 국보 50호인 해탈문은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건물로 건축양식이 대단히 독특하다.
경내에는 해탈문을 비롯하여 고려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3미터 높이의 하나의 돌로만들어진 불상인 석조여래좌상(보물89호), 대웅전등 볼거리가 많다. 절 마당을 벗어나 대웅전 왼편 뒤로 들어가면 대나무밭을 지나 곧장 월출산으로 오르는 산길이다.
계곡을 따라 표지판대로 오르면 미륵전이 나오며 미륵전 안에는 고려말의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모셔져 있다. 월출산 - 도선국사 - 도갑사는 땔수없는 단어들이다. 1996년 가을 도갑사 주지소임을 맡게된 범각스님의 대원력으로 영암을 대표할 수 있는 도갑사가 다시한번 태어나는 대작 불사가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만연사
고려시대 희종4년(1208)에 만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무등의 주봉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다가 만연사 중턱에 이르러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가고자 앉은 사이 언뜻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이었다. 잠을 깨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백색인데 신기하게도 선사가 누운자리 주변만 녹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그 길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를 하다가 만연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6.25 이전까지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승당, 선당, 동상실. 서상실. 동병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등 3전 8방과 대웅전 앞의 큰 설루, 설루 아래 사천왕문과 삼청각이 있던 대찰이었다.
또 부속암자로는 학당암, 침계암, 동림암, 연혈암이 있었는데 6.25로 전소되었다가 1978년 이후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가 복원되었고 암자로는 선정암과 성주암이 있다. 경내에는 1783년에 제작된 도지정 문화재 제185로 괘불이 있다.
유마사
유마사는 소리내어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과 울창한 수림이 있고 무엇보다도 찾아오는 이가 많지 않아 한적한 산사의 적막을 즐길수 있는 곳이다. 유마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흐른다. 하나는 유마운이 당나라에서 딸 보안의 현명함에 놀라고 부녀가 함께 이곳 모후산으로 오게된 동기가 전해지고 또하나는 보안 처녀와 그를 겁탈하려는 젊은승과의 한판 승부에서 제월천에 잠긴 달을 건져 젊은승을 굴복케 한 이야기, 그리고 보안 처녀가 치마로 싸다가 놓았다는 보안교의 전설은 지금도 이곳을 들르는 이들에게 예 사람의 정취를 묻어나게 하고 있다. 홍건적 의 침입을 피해 숨어들었다는 공민왕의 이야기와 임진왜란때 김성원이 자신의 가족을보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빨지산의 거점지로 이용되던 곳이 모후산이다.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속에 발 담그고 옛 사람들이 즐기던 탁족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곳이 모후산이다.
불회사
운흥 사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불회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후 도선국사가 중창, 조선태종 2년인 1402년에는 원진국사가 삼창하였다.
정조 22년인 1789년에는 큰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불타, 180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원래는 '불호사(佛護寺)' 라 불렀지만, 중건 이후 '불회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래된 도량인 불회사에는 지방유형문화재 3호인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나한전, 요사채가 동백나무 숲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 중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유명하다.
불회사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의 석장승이 서 있다.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 장승,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담은 할머니 장승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친근감이 넘친다.불회사는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자나무 등의 숲으로 호젓하고 아늑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아름다운 단풍은 불회사를 온통 가을의 정취로 물들이고, 오래된 동백나무 숲은 정겨운 겨울정취를 한껏 맛볼 수 있게 한다.
개천사
화순군 춘양면 가동리 천태산 중턱에 있다. 통일신라 현덕왕 말기(809∼825년) 도의선사가 보림사를 창건하고 이어 개천사를 창건했다 전하고 통일신라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용화사(龍華寺)로 불리웠다.
천불전이 있었는데 여순사건으로 1948년 소실되었다
1963년에 주지 김태봉이 주민들의 협조로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사찰입구에는 나무벅수가 무심히 서있고 주변 산에는 비자나무숲(도지정 기념물 65호)이 우거져 사철 푸르고 부도와 대웅전, 요사가 한적한 적막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개천사에는 5개의 부도가 있는데 석종형 또는 팔각원당식 변형의 모습이다.
도곡온천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 원화리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도곡온천은 그 면적 이 18만5천평으로 지난 1988년에 개발이 시작된 이후 1995년 2월 11일에 개장되었는데 온천의 불모지로 남아있던 이 지역에 온천이 개발됨으로써 외지인들이 남도를 관광하면서 한번쯤 들러 심신의 피로를 씻고 가기에 좋 은 곳이다.
온천이용량은 일일 3500톤으로 수온은 섭씨 25도에서 27.5도이 며 전국의 온천중에서 유황이 가장 많이 함유된 유황온천이며 중탄산천으 로 신경통, 관절염, 만성습진, 피부병등에 특효가 있다.
도곡온천지구는 상업시설로 종합온천장, 상가, 유희시설, 숙박시설 등이 속속 들어설 예정 이다.
도곡온천은 화순에서 12km, 광주에서 23km, 나주에서20Km,남평에서 9km, 능주에서 9km거리에 위치한다.
교통편은 광주종합터미널 앞에서 도곡온천행 화순군 내버스(200번)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약 1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