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쓴 日記
한 5, 6년쯤 지났을까? 날짜는 물론 계절도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밖에서 돌아와 보니 국민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제 엄마와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실랑이의 내용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한 쪽은 기를 쓰고 중국집에 가서 우동을 사 내라고 떼를 쓰는 편이고 다른 한 편은 못 간다고 버티는 쪽이었다.
준이는 며칠 전의 약속을 내세우고 있었다. 또 벌써 일기장에까지 적어 놓았다고 생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준이는 몇해째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있었다. 가끔 담임선생님의 검인을 받아다가 자랑하기도 했다. 끈기 있게 쓰는 것이 기특해서 몇 번 칭찬을 해주었더니 기분이 우쭐해지는 모양이었다. 그 뒤부터는 일기 쓰는 방법이 좀 지나치는 때가 있었다. 하루 이틀 분을 미리 써놓고는 도리어 부지런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 지켜만 나가면 된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일기라야 별 수 없이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학교 다녀오고 뛰어놀다 몇 시에 잔다는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래도 준이는 일기는 충실한 생활의 기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지 거기에 맞춰서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표적이 뚜렷하게 엿보였다. 젊어서 내가 일본 군대생활을 할 때에는 고병(古兵)들한테서 "발을 군화에 맞춰서 신으라." 는 억지소리를 자주 듣기는 했지만 일기를 미리 써놓고 거기에 맞춰나간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으로는 아마 우리 준이가 이 방면의 효시(嚆矢)가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준이는 그 알량한 일기를 내세워서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저께던가 그 전날이던가, 준이 녀석이 우동이 어쩌구 자장면이 어쩌구 하면서 옆에서 먹자타령을 하는 것을 귓전으로 흘리며 들었다. 흔히 있는 응석으로 생각하고 우리 내외는 그저 "흥, 흥" 대답만 했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된 것이다. 준이의 설명으로는 제가 한 말은 며칠 뒤(아마 3월 21일 저의 생일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하다)에 중국집에 가서 우동을 사달라는 것이었고 아빠 엄마가 분명히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흥, 흥, 해둔 것이 그 대답으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준이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놓칠세라 우동에 관한 건을 일기장에 고이 기록해 두었던 모양이다.
중국집에 안 가면 어른들이 아이를 속이는 것이 된다. 일기를 쓴 저는 또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준이의 주장이었다. 따지는 논조(論調)가 제법 정연했다.
일기를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엄마가 반격을 시도해보는 눈치였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다. 일기를 고쳐 쓰면 거짓말이 안 된다고 간곡하게 회유도 해보았지만 오늘의 준이에게는 역시 통하지가 않았다.
부모와의 약속이면 철석같이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준이. 또 일기의 전말이야 어떠하든 거짓말 일기가 선생님을 속이는 일이라고 걱정하고 있는 이 순진한 준이 녀석을 이 이상 더 다른 말로 설득하는 것이 부질없을 듯싶었다. 이번에는 어른들 편에서 깨끗하게 손을 들기로 한 것이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기는 인정을 안 한다는 조건을 단단히 붙여서.
준이는 누나와 언니보다 몇 걸음 앞서서 기활좋게 걸었다. 그날 저녁 우리 다섯 식구는 오랜만에 영빈관 특실에서 즐겁게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안면이 있는 고객에게는 마음씨 고운 이 집 주인은 살림방을 내주었던 것이다. 특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중화요리 몇 접시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먼 여행이나 떠나온 가족들처럼 두고 온 집이야기를 섞어가며 마냥 즐겁게 화제를 끌고 나갔다. 준이의 일기 덕분에 생각지 않게 큰 상을 받게 된 누나와 언니는 오늘은 준이 놈의 뻥뻥거리는 위세에 눌려서 시종 기를 못 펴고 앉아 있었다.
이 준이의 여세는 며칠간은 더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요리가 나왔을 때 세 아이들은 아빠의 호주머니 사정은 아랑곳없이 탕수육의 달콤한 맛과 해삼탕의 느긋한 맛을 즐기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의 주빈(主貧)은 아이들이었다.
준이 놈이 올 3월 모자에 '고(高)' 자를 달게 된 뒤부터는 키가 아버지를 5센티미터나 능가하기 시작했다. 합기도를 배웁네, 당수를 배웁네 하고 제 엄마를 조르는 것 같더니 별로 신통한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일기의 위력 가지고도 안 되겠던지 그대로 후퇴해 버렸다. 요새는 기타에 맞춰서 열심히 목청을 돋우며 "사랑해 당신을", "비가 오는데,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등등에 열중하고 있다.
가끔 월남문제, 남북 적십자회담, 미국 대통령선거 등에도 꽤 어른스러운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부모 입장으로서는 의과나 이과 계통을 종용하고 있지만 본인은 문과 계통을, 그것도 정치과나 외교과를 희망하고 있고 아니면 가수가 되어도 좋다는 계산인 것 같다. 딱딱하고 치밀한 직업보다는 화려하고 인기 있는 쪽으로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는 우리 준이를 그런 방면으로 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자칫 잘못하면 반 거충이가 되기 쉬울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가수나 다른 예능 쪽도 나로서는 선뜻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부모의 소질을 아주 안 닮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우리 준이도 예능 방면, 특히 음악 방면에는 큰 소질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준이에게는 역시 이공과나 의학 방면이 소질에 맞을 것 같고 취미로는 노래보다는 차라리 스포츠 쪽, 가령 씨름이나 유도 같은 방면으로 길러도 좋을 생각이다.
아이들을 아버지나 어머니의 소질 쪽으로 덮어놓고 끌어들이는 일이 잘 하는 일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 속에서 뚜렷한 소질이 발견되지 않을 때에는 부모의 소질 쪽으로 밀어주는 것도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소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하여간 나는 어릴 때부터 씨름에는 남다른 재간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이 된다. 집 뒤에 바로 펀펀한 잔디밭이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촌놈들 놀이가 그저 씨름 아니면 냇가의 물놀이밖에 더 무엇이 있을까?
중학교 1학년 첫 체육시간 때였다. 우리는 철봉 밑 모래밭에 모였다. 씨름판이 벌어질 참이었다. 체육선생님은 우리나라 역도의 창시자이며 동양 제일의 역사라고 하시던 서상천(徐相天)선생님이셨다. 그 장중하시던 기품이 지금도 눈앞에 역력하다. 나는 출석번호 3번의 작은 키였지만 혼자서 이십 몇 번까진가를 모조리 둘러메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선생님은 그 우람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나이와 고향을 물으셨다."너같이 씨름 잘 하는 아이는 평생에 처음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뒤 1년만에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시기까지 그렇게 나를 귀여워하실 수가 없으셨다. 나는 그때부터 중학 5년을 졸업할 때까지 '씨름꾼'으로 통했다. 동양 제일의 역사님께서 하사(下賜)하신 이 아호(雅號)를 나는 언제 어디서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그 뒤에 나는 일본에서 다니던 대학시절이나 또는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되던 시절이나 씨름판에서 숱하게 일본 녀석들을 메꽂고 다녔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크고 작은 씨름판에서 묘기를 발휘해서 갈채를 받았었다. 이제는 공개해도 무방할 만한 때가 온 것 같다. 이 나이에 누가 나하고 씨름을 겨루자고 나설 무례한 역사들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같은 무렵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별명을 물려받고 있었다. '음치'라는 달갑지 못한 별명에다가 그것도 "너처럼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다"라는 거창한 것이었다. 이 희귀한 음치의 노래를 지금이라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분위기만 마련해준다면 얼마든지 응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그 '음치' 의 유래는 대략 이러하다. 그것도 같은 중학교 1학년 때 일이었는데 씨름보다 조금 늦은 1학기 말이었다.
"잘 집의 서울을……." 하는 교가를 몇 시간 배우고 나서 그 교가로 음악 실기시험을 보던 때였다. 내 차례가 되어 일어서서 노래를 부를 참이었다. 멋있게 한 곡조 뺀다고 좀 무리하게 목청을 가다듬은 것이 도리어 탈이었다. 갑자기 소리가 이상해지더니 음성이 뒤죽박죽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열심히 다음을 계속했는데 그것이 더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을 비롯해서 학급아이들이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나는 무안해서 몸둘 곳을 모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선생님께서는 몇 번이나 재창을 종용하셨지만 끝내 나의 무안을 돌이킬 수는 없으셨다. 그때 음악 선생의 강평이 서서히 내 머리 위에 내려지고 있었다.
“너 같이 노래 못 부르는 학생은 우리 학교에서는 처음이다"라고,
물론 선생님은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지만 그 강평은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5년간, 정확히 따지면 4년 8개월간 짓궂게 나에게 붙어 다니며 그 효력을 발휘했다.
그때 연세가 높으셨던 음악 선생님은 역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오선사간(五線四間)의 양악의 음계를 도입하시고 보통악전대요(普通樂典大要)』라는 저술까지 하신 이상준(李尙俊) 악장(樂匠)님이셨다. 성품이 지극히 인자하셔서 꼭 집안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은 어른이었다. 점수도 어찌나 후하셨던지 일부 선생님들 사이에서 항의까지 하시더라는 말씀을 당신께서도 직접 우리에게 하시던 기억이 난다.
음악점수는 거개가 다 95점 이상 100점이 허다했다. 이 개교이래의 대음치 한 사람만 빼놓고는. 음치의 점수는 그때 80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중학 5년간 학교에서는 노래를 거의 안 불렀다. 안 부른 것보다는 못 불렀다는 표현이 더 옳은 말일 게다. 이런 우여곡절은 아랑곳없이 교직에 몸담은 동안 학생들과 어울리는 여흥시간에는 예외 없이 '교수님 차례‘ 때문에 고역을 치른다. 이 음치에 얽힌 촌극 하나를 더 털어 놓는다면 장세정(張世貞)의 ‘역마차(驛馬車)' 가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휩쓸 때였다. 나도 얻어들은 가락으로 하루는 숙직실 뒤뜰 으슥한 곳에 숨어서 한 곡조 뽑아보았다.
"초록포장 둘러치고 역마차는 달린다" 까지를 부르고 나서 살짝 뒤를 보니 마침 한 아이가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이 저도 노래 소질이 별수 없는 주제에 큰 사건이나 난 듯이 반 아이들 앞에서 주책없이 고성능 확성기 구실을 한 것이다. 한동안 또 화젯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뒤부터는 내 별명이 잠시 '음치'에서 '초록포장'으로 바뀐 때도 있었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우리 준이의 대학진학 문제로 되돌아가야 되겠다. 2년의 세월이면 그리 긴 것도 아니다. 그때에는 나는 눈앞에 닥친 준이의 학과선택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골몰하게 될 것이다.
본인 고집대로 문과나 정치 방면으로 보내느냐, 아니면 우리 내외의 뜻대로 이공과나 의과를 밀어보느냐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내가 양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끝내 준이가 제 고집을 안 굽힌다면 이번에는 춘부장 쪽에서 먼저 선수를 써서 미리 1974년 12월 어느 날의 일기를 써놓고 밀고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現代文學, 197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