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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례집의 간행
조선 시대 불교는 교학의 부진과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논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 불교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은 쇠퇴하였으나, 대중적ㆍ서민적 기반은 오히려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 외면당한 불교는 기복 신앙으로 일반 민중들에게 다가섰다. 김용태는 "조선 시대 불교신앙은 사대부 주류 계층이 아닌 여성, 일반 민인을 대상으로 한 기복신앙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이와 같은 이해는 신앙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한정하고 그 성격을 좁은 틀에서 단순화시키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 시대 불교가 억압을 받아 상층부가 아닌 대중들에게 집중된 것은 사실이지만 왕실에서 불교의식은 지속적으로 설행되었다. 이것은 대중뿐만 아니라 왕실에 있는 자들에게도 기복신앙이 종교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에 정비된 각종 의례집은 모두 신앙심의 고조를 진작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있다. 특히 다라니경·진언집·불교의식집·위경류불경(僞經類佛經) 등이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이러한 의례집 간행을 통해 불교가 민중화되고, 서민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자리를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변화되었고, 그에 따라 민중들의 생활도 바뀌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조선 시대를 지나 근대로 들어서면서 불교는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 안에 휘말리게 되었고, 밀려들어오는 외래의 타종교에 위축되어 설 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근대불교는 존립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일본 불교에 영향을 받은 개혁사상가들의 다양한 개혁론이 제기되었다. 그중 불교의식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개혁사상가들 중 한 명인 만해(萬海, 韓龍雲, 1879-1944)는 의례의 절차를 폐지 혹은 단순화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한상길은 "불교선각자로서 한용운이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의례 개혁을 포기한 것은 불교대중화의 가치를 중시했고, 의례의 간행에 재정적 후원을 한 배경에도 결국 불교대중화의 중요성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 고 주장하고 있다. 만해는 개혁을 통해 불교의례의 개선점을 찾아 이를 시행하려고 하였지만, 대중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례를 불교대중화의 하나로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의례집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고, 의례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더 강해졌다. 조선 시대의 『작법귀감』을 바탕으로 1930년대에 『불자필람』과 『석문의범』같은 의례집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개혁사상가들조차 이 작업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오랜 전통이 되어버린 의례를 짧은 시간 안에 혁파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불교 의례가 민심 안정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인정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불교의례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보면 일상신앙의례·사명일(四名日)의례·상장의례·영혼천도의례로 구분지을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1993년 박세민에 의해 수집 정리된 『한국불교의례자료총서』(전 4권)에는 불교의례서가 총망라되어 있는데, 먼저 고려 시대 양(梁) 제대법사 찬(撰),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10권)이 실려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을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간기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53종류로 조선 초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이 가운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것들도 있음을 알 수 있고, 목판본, 필사본, 연활자본 등 판본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음으로 간기 미상본은 다음과 같다.
『관세음보살예문』(1권), 성달생 서, 목판본.(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다비설』(1권), 백파 긍선 찬, 필사본.237)
『동음집』(1권), 목판본.
『미타예찬』(1권), 필사본.(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의해』(1권), 혜영 찬, 필사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수보살계법』1권), 송 연수 집술, 목판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승가상례의문』(1권), 필사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시다림작법문』(1권), 목판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예념왕생문』(2권), 목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요집문』(1권), 필사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일판집』(2권), 목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비도장참법집해』(2권), 조구 해.(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작법절차』(1권), 목판본.
『정토의범』(1권), 자운 찬, 필사본.(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증수선교시식의문』(1권), 원 덕이 찬, 목판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청문요집』(1권), 해운 서,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화엄예경문』(1권), 필사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이 중에는 찬자 등이 확인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자료로서 가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밀한 분석작업이 요구되는 부분이며, 본고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간략하게 제시하였다.
조선 시대에 의식집 간행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개별적인 의식집을 위해 수지(受持)와 집례(執禮)의 편리함을 고려한 통합의식집 간행이 요망되었다. 기존의 의식집을 편집하여 간행한 백파의 『작법귀감』이 대표적이며, 불교의례집에 주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작법귀감』은 백파가 순조 27년(1827) 전라도 장성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간행한 목판본 2권 2책으로 의식문 전반에 관한 작법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상권에 삼보통청(三寶通請) 등 21가지, 하권에 분수작법(焚修作法) 등 16가지 등 총 37가지 의식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상하권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권-三寶通請, 觀音請, 地藏請, 神衆略禮, 山神請, 對靈正義, 常用施食義, 常用靈飯, 通用進奠式, 宗師靈飯, 神衆大禮, 神衆朝暮作法, 神衆位目, 彌陀請, 獨聖請, 聖王請, 竈王請, 比丘十戒, 沙彌十戒, 居士五戒, 尼八敬戒.
하권-焚修作法, 祝上作法, 袈裟移運, 袈裟點眼, 袈裟通門佛, 佛像時唱佛, 略禮王供文, 下壇灌浴規, 十王幡式, 三壇合送規, 羅漢大禮, 七星請, 茶毗作法, 救病施食儀, 巡堂式, 十王各請."
그리고 부록으로 간당론(看堂論)을 싣고 있다. 백파가 의례집을 편집한 이유를 서문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법의 절차에 대한 책들이 비록 많지만, 서로 빠뜨린 부분이 있어 전체의 모양을 볼 수 없으며, 또한 경위와 높고 낮음을 모두 구분하여 말할 수 없다. 깊이 없는 학문이어서 대부분 잘못 거론한 것이 많으니, 부처님을 공양하는 경사스러운 일이 도리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큰 허물이 되는 줄 누가 알겠는가? 이에 문하생 중에 몇 명의 선납(禪衲0이 나에게 책 한 권을 만들어서 교정을 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재주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고집스럽게 사양하자, 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간청하였다. 나는 사양할 핑계가 없어, 여러 가지 문헌을 탐구하여 수록하고 그 중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요점을 간추리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일관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의례는 3단을 갖추어야 하고, 이치는 6도(육바라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리하여 네 모서리에 4성(聲)을 표시하고 또한 절구마다 구두점을 찍어서 책의 이름을 『작법귀감』이라고 붙인다. 그리하여 장차 문하생의 개인 참고서로 삼으려 하니, 부디 잘못 유출되어 추한 모습을 드날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처럼 재공(齋供)에 일정한 격식이 없고 완전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백파가 그의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 전에 있던 의식문의 착오와 결함을 교정, 보충하여 의식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저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작법귀감』은 불교의식집으로 불가에서 상용하는 제반의식문을 정리하여 모은 것으로 의식의 통일과 의식문의 착오와 결함을 교정하고 보충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백파는 범례(凡例)에서 조금 더 상술하여 설명하고 있다.
"글자 하나의 고저를 나눈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는 어찌 사람의 공력뿐이겠는가? 이 또한 하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글자는 다른데 같은 뜻으로 새기거나 글자는 같은데 다르게 풀이하는 경우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진실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점에 유의하여 권점(圈點)으로 사성을 표시해서 아는 것을 다 토로해 이 책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나의 학문이 정밀하고 박식하지 않아서 어그러진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이니 훗날 시문에 노련한 학자의 질정을 기다리는 바이다. 거성은 맑고 소리가 멀리 나가며, 상성은 매섭고 높아지고, 입성은 곧고 빠르며, 평성은 구슬프고 평안하다."
위 내용에서 볼 수 있듯 한자의 특성상 음과 훈이 있어 음은 다른데 훈이 같게 새기거나, 음은 같은데 훈이 다르거나 하는 것으로 인해 사성을 표기해 그 음과 뜻을 구별했던 것으로 사성의 의미가 표기되어 있다. 근세 불교의례 진행시 의례집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어지는 『석문의범』에도 이러한 사성 표기법은 전혀 살펴볼 수 없는 만큼 범패승에게 있어서 사성점이 표기된 의식집은 당시의 범패 시율 관계서 중요한 의례집으로 평가된다.
백파는 평소 염불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노년에 염불이 깨침의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고 염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또 당시의 배불 정책으로 인한 불교의례 및 의식문이 사라져가는 것을 우려하여 『작법귀감』의 편술에 관심을 갖고 당시에 잘못 행해지던 의식 및 의식문을 바로 잡고자 각종 염불집 등을 모아 소리의 높고 낮음을 사성점을 각 게송 옆에 점으로 표시하여 옳은 범음성을 내도록 표기한 것이다.
이는 백파가 단순히 대중들만을 위해 『작법귀감』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많은 유생들이 대중의 수가 적은 수행처 승려들을 핍박하고 불교 예식문을 비방할 때 백파는 의식작법에서 불교의 교학적 진리성, 삼계대도사에 대한 경의와 바른 신행활동으로 지(智)의 참구에 대한 학문적 도(道)를 수행하는 교단을 위해서나 수행납자들에 사위의에 걸림이 없는 수행의 법풍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작법귀감』의 필요성이 강구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으리라 본다. 이 또한 불교위상에서 다른 종교의 어떤 의식에서보다 불교예문 의식의 우월성을 보이기 위함이 제일 큰 의도였을 것이다.
백파의 『작법귀감』은 현존하는 의식집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례집으로 불교의 범패전승에서 음성으로 하는 어장(魚丈)이 아닌 의식집을 통한 어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백파의 『작법귀감』의 의식은 신앙화, 예경화를 의미하며 불교사상의 생활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1929년 『불자필람』이 나온 지 4년 후에 『석문의범』이 간행된다. 이 책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삶의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대중들에게 불교의례를 접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의례집 간행에 앞장선 안진호는 일제강점기 탄압으로 인해 사라질 수 있었던 의례를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안진호는 1929년에는 서울에 상경하여 서대문정(西大門町) 2정목(二丁目) 29번지에 '만상회(卍商會)'를 열어 불교서적의 번역과 출판, 그리고 보급에 힘썼으며, 이곳에서 8년 정도를 지내고 서대문구 1정목 30번지로 이주하였다. 만상회는 일제하의 불교서적 출판을 대표하는 출판사이다. 이 출판사는 불교서적뿐만 아니라 불구용품, 범종 등도 판매하는 일종의 불교서적상이면서 불교백화점이었다. 만상회의 설립자이자 운영자인 안진호는 서점에서 대부분 본인이 저술한 서적을 판매하였다.
간행한 책들을 살펴보면, 강원의 사미과 교재인 『초발심자경문』, 『치문』, 사집과 교재인 『서장』, 『선요』, 『도서』, 『절요』 등을 현토와 주해하여 간행하였다. 또한 『불자필람』, 『석문의범』, 『석문가곡』, 『다비문』 등의 의식집을 정리ㆍ편집하여 출판하였다. 그리고 『목련경』, 『지장경』, 『법화경』 등의 번역과 함께 『팔상록』, 『영험실록』 등을 출판하였다. 식민지 하의 언론 통제와 물자 공출로 인해 열악했던 시대적ㆍ경제적 여건 속에서, 책을 구입하여 보는 사람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책을 간행한 사실로 보아 안진호의 불교대중화를 위한 열정이 상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불교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안진호는 의례집 편찬, 간행에 현저한 성과를 내었다. 그는 의례문 집성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불자필람』을 수정ㆍ보강하여 분량이 세 배 정도 늘어난 『석문의범』을 펴냈는데, 당시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리 주문을 해야 책을 살 수 있다는 주의사항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本人이 年前에 慶北醴泉布敎所崔就墟和尙의 委託을 受하야 拂子必覽이란 冊子를 刊行케 되온바 겨우 二個年을 못다가서 品切되고 其後로 全鮮은 勿論內地又는 滿洲等各方面에서 注文이 沓至되야 書面取扱에 展眉無○일뿐 더욱 이 當局으로부터 心田開發을 目○삼아 吾敎宣布를 一層○○함에 따라 各地農村振興會로부터 ○○○○케 되온 즉 敎勢降興은 ○言을 不○ 일지라 於是平本人은 敎運의 勃興을 ○○하여 다시 書籍의 不備를 愛惜하야 曾前遺○된 것을 一一蒐集하야 吾敎儀式 進行에 集文成을 計하온즉 그 量이 前拂子必覽보다 三倍가량은 增補되온지라 名稱이 內容에 符合됨을 主로 하야 釋門儀範이라 改題하고 此을 印刷에 付하은 바 其目錄만을 左記豫告하오며 끝으로 注意 몇 가지를 添申하와 各地諸氏의 感懷萬一에 奉副코저하오니 字內僉位는 爭先注文하시와 品切追悔의 端이 無케 하심을 ○望하옵나이다."(○은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판독 불가)
이러한 예고문 내용에서 『석문의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으며, 대중들이 이 책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불교의례는 식민지 상황 속에서 억눌린 대중들의 심신을 위로하고 안정을 갈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책은 한문과 한글 표기를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 상ㆍ하의 두 단으로 나누어서 상단에는 한문으로, 하단에서는 한글로 정리하였다.
이처럼 현재 한국 불교계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불교의례집은 1931년 안진호가 편집한 『석문의범』이다. 1941년 태고사를 총본산으로 하여 출발한 조선불교조계종이 출현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교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의례집이 아닌 개인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그동안 전해져 오는 의례집과 사찰별로 시행해 오던 전통적인 의례를 종합하여 발간된 책이다. 여기에는 불교교단에서 사용하는 불교의식이 총 망라되어 정리되어 있어서 한국불교의례집의 저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석문의범』을 살펴보면 상하 2편과 격외염롱문(格外拈弄門),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상편은 서(序), 범례(凡例), 분과(分科), 목차(目次) 순으로 되어 있고 다음 순서인 황엽보도문(黃葉普渡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상권 서문의 다음 차례로 범례가 자리하고 있다. 범례에서는 본서에 대한 구성과 특징, 지향점, 그리고 독자들이 경을 읽는 도중에 혼돈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12가지로 나누어 기재하였다.
서문과 범례를 통한 『석문의범』의 편찬 취지는 의식문을 합리적으로 정비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중불교에서는 방편문으로 불교의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나, 그 의식의 절차나 내용은 합리성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권은 5장으로 예경편(禮敬篇), 축원편(祝願篇), 송주편(誦呪篇), 재공편(齋供篇), 각소편(各疏篇)이고, 하권은 13장으로 각청편(各請篇), 시식편(施食篇), 배송편(拜送篇), 점안편(點眼篇), 이운편(移運篇), 수계편(受戒篇), 다비편(茶毘篇), 제반편(諸般篇), 방생편(放生篇), 지송편(持誦篇), 간례편(簡禮篇), 가곡편(歌曲篇), 신비편(神秘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록은 조선사찰일람표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은 서와 목차,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는 권상로와 함께 교정을 맡은 김태흡이 글을 실었다. 담겨 있는 내용은 최취허가 안진호와 함께 아침과 저녁에 행하는 지송과 기타 의식을 편집하여 불자필람을 인쇄⋅발행하였고 주문이 쇄도하여 일찍이 매진ㆍ절품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다시 증보하고 책을 펴내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안진호는 이제야 마음을 일으켜 전에 있었던 자료를 모두 남김없이 수집하여 배열⋅부문하고, 제목을 고쳐 『석문의범』이라고 정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실려 있다.
『석문의범』의 상ㆍ하권을 통틀어 가장 특징적인 점은 하권 후반부의 간례편과 가곡편이다. 『불자필람』은 이것을 부록에 실어놓은 반면, 『석문의범』은 이 부분을 중요시 여겨 본론 부분에 옮겨놓았다. 이는 문명개화를 맞이한 근대의 시대상황에 맞추어 진행한 결과이고, 기독교의 의례문화 활동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돈구는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창설되었던 18세기 후반 이후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모든 종교운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크게 천주교와 개신교로 양분된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우리나라에서의 전개 과정도 많은 면에서 상이하였지만, 여기에서 동시에 취급하는 이유는 전개과정의 구체적 '내용'은 상이하나 '골격'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전통종교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종교였고, 또한 주요 선교국들이 모두 개항기를 전후해서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를 직접 지배하지는 못한 공통점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석문의범』은 『작법귀감』의 내용을 근대시기에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해주기 위해 내용을 축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석문의범』에 담겨 있는 관음청의 경우 거불후에 유치를 하고 향화청 가영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러나 『작법귀감』은 향화청 가영에 이어 관세음보살멸업장진언과 소원을 비는 탄백, 다음으로 축원을 실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석문의범』이 『작법귀감』의 내용을 축소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 죽음관과 상장례의 콘텐츠화 연구/ 한성열(탄탄) 원광대학교 대학원 한국문화학과 문학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