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하는 날
조계선
거울속의 흰 머리칼이 산등성이 위의 나무처럼 가지런히 솟아올랐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변화로 절실히 느낀다. 특히 자신의 몸에는 더 민감해진다.
머리가 자란 길이는 올라오는 흰 머리와 염색된 검은 머리의 경계로 더 명확해 진다. 한 달에 일 센티씩 자란다니 이 센티는 되는 것 같아 염색한지 두 달쯤 지난 것 같다.
며칠 전 핸드폰으로 방문할 때가 됐다는 친절한 문자가 온 기억이 났다.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미용실 방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속절없는 머리칼은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빠르게도 자랐다. 오전중의 할인을 받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이 귀찮은 행위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다 커서 손주들이 생기면 흰 머리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예순쯤의 나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위에서 말렸다. 이제 종심의 나이이니 내 뜻대로 하려고 해도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엄마의 모습이 변하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니, 생각하면 오랜만에 보는 언니들의 늘어난 주름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막내인 나를 보는 형제들은 항상 어렸던 시절을 보려고 한다. 열다섯 살 많은 큰 오빠 열둘이나 많아 엄마 같았던 언니 앞에서 내 흰머리는 아릿한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실 때가 지났는데 안오셔서 기다렸어요.”
붉은 빛깔 도는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미용실장의 상냥한 인사다.
“고마워요 기다려주셔서.”
무엇을 하든 어딜 가든 익숙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선 진실과 거짓은 마음속에 숨기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말을 나누고 웃고 반긴다.
미용 연습생의 금발이라기보다 흰 머리에 가까운 짧은 단발머리가 싱그럽다. 젊음은 모든걸 허용한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구에 눈에 가득 웃음을 머금은 희고 동그란 얼굴이 귀엽다. 끝말을 부자연스럽게 올리는 지나친 친절의 말투는 귀에 거슬렸다. 점주의 교육 탓일거라 생각이 든다.
머리칼 속으로 닳은 빗자루처럼 자란 흰머리에 진한갈색이 입혀져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낯설었다. 무료함에 말을 걸었다.
“몇살? 집이 어디에요?”
묻는 말에 웃음 띤 얼굴이 더 환해졌다.
“스무살이에요. 집은 영주에 있어요.”
어린 그녀의 말에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다.
“경상도 영주? 부석사가 있지, 아 참 소백산도 있구나.”
반갑게 아는 척 하는 내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치 봄을 맞아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명랑하다.
“네 소백산 잘 아세요? 저는 몇 번이나 철쭉제에 갔었어요.”
“그럼 참 좋은 산이지. 능선이 아름다워서 자주 갔었어.”
어찌 잊을까 능선에 펼쳐졌던 연분홍빛 철쭉의 장관과 여름 소백은 알프스 아랫자락의 초원을 닮아있다는 것을.
우린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로 친밀감을 느꼈다. 염색한 머리를 감기는 손놀림이 더 가볍고 정성스럽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은 서로 알고 있는 일에 공감을 나누는 것이다. 물이 잘 든 머리에 파마까지 한 후 롤을 풀어내고 머리를 감겨주기 위해 다른 연습생이 왔다. 뽀얀 얼굴에 까만 눈썹이 예쁘다. 뒤로 단정히 묶은 머리에서 몇 가닥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젊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들의 비음 섞인 끝 말 올림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영주에서 왔어요?”
미용실장의 영주에서 특성화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이 몇 명 왔다는 얘기를 들어 한 말이다.
“아니요, 저는 서울이에요.”
“서울 어디?”
“신림동 난곡이라는 곳이에요. 부모님 하고 같이 있어요.”
“나도 삼 십년 전에 그 근처에 살았어.”
그녀의 말에 그곳은 잘 알고 있는 터라 얼른 대꾸했다.
“그곳도 많이 변했어요. 주변이 모두 아파트가 들어섰어요.”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오랜 달동네였으나 삼 십년이면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고, 그녀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이었으니 부모님께 들은 말이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들의 힘든 노동 속에 머리를 맡기면서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일이 재밌어?”
“네, 재밌어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맞아, 대학가면 뭘해? 사람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한거야.”
흰 머리가 생긴 수만큼 지혜가 늘어난 것 같은 말로 위로하듯 말했다.
“네, 맞아요. 전 이일이 좋아요. 이다음에 이런 미용실을 갖는 게 꿈이에요.”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부디 힘들지만 지금의 밝은 모습과 자부심을 가진 어른이 되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저마다 어울리는 자리와 모습이 있다. 그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 젊은 날을 돌아보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정확히 떠오르는 게 없다. 옛날 흑백의 무성 영화 속에 흐릿한 내 모습이 서성이는 것만 같다.
머리 손질을 마친 모습에 십년은 젊어 보인단다. 곧 만날 형제들의 모임에서 흰 머리가 가려진 얼굴을 보여주게 됐다. 자신의 늙음을 알면서도 막내만은 늙지 말라던 언니 오빠의 무언의 부탁이다.
언제 이 염색에서 벗어날는지는 나도 모른다.
집으로 오는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맞은 화창한 봄 날씨처럼 생각과 웃음이 밝았던 미용실 젊음의 얼굴들이 떠올라 마음이 가벼워 졌다.
첫댓글 시루속 콩나물 같이 속절없이 자라는 흰머리, 정말 실감이 갑니다. 대화체가 들어가 염색하는 장면과 나이 듬의 무상 함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구성이 갈수록 짜임새 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흰 머리카락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일상을 그려가고 거기서 깊은 의미를 건져내는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생생합니다. 특히 대화가 들어가니 아주 구체적이고 현장감 있습니다. 계속 응원합니다.
미장원에 앉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요.
염색은 않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하고 나면 젊어진 기분이 즐거우리라 생각 됩니다.지루한 시간을 미장원 연습생들과
의 대화로 잘 이끌어 가는 모습이 상냥해 보여 좋습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체를 쓰는게 좋은 것인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글을 늘리는데는 효과적이네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