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김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김제>
해방 직후 김제지역에서도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진입한 뒤 오랜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탄압에 의해 와해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경찰력을 동원해 군청을 점거했으나 여전히 통치는 안정되지 못했으며, 1946년 1월 미 전술부대의 지원 아래 면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간부들을 체포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김제에서는 전북도경의 명령을 받은 김제경찰서에 의해 주민들이 연행되어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다. 이중 10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7월 16일부터 19일까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동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은 7월 20일에 김제에 진입했는데, 직후인 같은 날 미 전투기가 김제역 인근지역을 폭격했다. 이로 인해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김제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인 1950년 9월 27~28일 김제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인근 야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 김제지역에서는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한 사건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별적인 피해사실은 확인되었다.
금산면 금산리 광동호는 아들 곽삼주를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다. 이 때문에 좌익집안으로 낙인 찍혀 경찰과 대한청년단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곽동호는 1950년 11월 11일 원평리에 쌀을 얻으러 갔다가 금산지서로 잡혀갔다. 이후 가족들이 지서로 밥을 날랐는데 일주 일 후 밥을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지서에 갇혔던 주민들이 금산면사무소 뒤 자갈밭에서 집단살해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조사가 부족하지면 현재까지 김제지역에서 확인된 집단희생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