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
진주성의 출입문입니다.
진주 시내에 출입하는 북쪽방향의 문입니다.
지금은 촉석루가 있는 쪽이 정문처럼 쓰이지만 경상감영이 가까운 이 문이 정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진왜란의 격전지이며 서부경남의 중심도시 진주성입니다.
남강을 끼고 있는 산성형태로서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의 공산성과 유사함.
진주성은 타지역과는 달리 읍성이 아니고 관찰사 감영 주위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진주성에서 남강은 진주성의 천연 해자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비상시 식수원이 되며 수로를 통해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수원화성은 비상시 수로를 활용할 수 없기때문에
공산성이나 진주성, 평양성에 비해 견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원화성 축성시기에는 화포가 발달하여 해자가 큰 의미를 가지기는 좀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진주성은 관찰사가 머물기에 상당이 좋은 구조로 되어 있고,
촉석루에서 지역유지와 많은 연회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절벽위로 보이는 진주성의 성벽입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이 성벽을 넘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주성에는 임란시 사용된 화포의 복제모형이 있습니다
진주성 성안 높은 곳인 관찰사 감영 옆으로 지휘를 위한 누각이 있습니다.
전투가 발생하면 적의 공격은 대부분 이쪽 방면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진주성은 남강위 절벽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적이 공격할 방향은 많지 않은데 비해 성을 수비하는 쪽은 강이 있기때문에
퇴로와 보급이 매우 용이한 구조입니다.
아마 이런 지형때문에 진주가 서부경남의 중심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과 관계가 깊다.
진주성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높이는 약5m~8m(15척)이며,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한다.
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河崙)(1347~1416년)의 성문기(城門記)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쌓은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는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쪽)이 있고,성밖은 서쪽으로 청천(靑川)이 남쪽에는 긴강 (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것은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수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는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12만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곳이기도 하다.
<출처: 진주성 관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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