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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대왕세종 시절 과학자들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28 14.02.16 1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로 가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죠.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지만 어느 한 시기

강대국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 최고 지도자는 늘 무능하고, 

이 나라 과학은 늘 큰 나라 뒤꽁무니만 ?을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어떤 리더십이 서느냐에 따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대왕 세종과 과학자 장영실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1. 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강국'

 지금의 과학강국은 유럽과 미국, 중국, 일본...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세가 끝나고 근대과학의 여명이 밝아오던 15세기 무렵

가장 많은 성과를 낸 과학강국은 의외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조선시대 과학사 연구발표로 국제 학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과학사학자 전상운(전 성신여대 총장) 교수는 세종 시대 과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도오(伊東) · 야마다(山田) 등의 『과학기술사사전』은

  세계 과학기술사 속에 세종 시대의 창조적 성과를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는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작성한 연표에 따르면, 1400년에서 1450년까지 주요 업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29건, 중국이 5건, 일본이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정리되어 있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이 15세기에 이루어진 다른 모든 나라의 성과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선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 전상운, '15세기 과학사의 중심_세종 임금', 한국과학기술인물12인 중 77쪽, 2005

 

세종 시대 최고의 발명품은 '한글'로 꼽힙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첨단기술의 표준화와 규격화로 요약됩니다.

요즘 말로 '스탠다드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산업공학 차원에서 엄청난 말이죠.

 

15세기의 첨단기술은 단연 인쇄술이었습니다.

세종 시대 조선은 금속활자 기술로 중국을 넘어섰고,

청동활자 인쇄술은 아름다운 글자꼴을 그대로 살린 정밀한 규격화를 이뤄 

일본에 전수됩니다.

1445년(세종27년) 표준화에 성공한 조선식 화포 제조술은

15세기 최대의 기술성과로 평가됩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황제만이 연구할 수 있었던 '제왕의 학' 천문역산학을

감히 조선에서 하겠다며 조선의 수도 한양의 북극고도를 표준으로

천문관측과 역법계산을 시작합니다.

경복궁에 천문대를 세우고 여러 관측기기의 제작, 관측기법 확립,

그리고 자주적인 역법서 편찬등,

한편 측우기의 발명 등 정확한 통계에 의한 농업기상학에 의해 

조선의 농업은 중국의 농서를 번역해 옮기는 수준을 벗어나 우리 실정에 맞는

실용적 농사이론을 정립합니다. 그게 '농사직설'입니다.

 

생명과학분야에서도 조선의 풍토와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의약학이 전개되었는데

세종 15년에 '향약집성방'이 나오고 세종 27년에 '의방유취'가 나옵니다.

특히 동아시아 의약학을 집대성한 30질 분량의 '의방유취'는 15세기 최대 의서로서

이를 계기로 우리는 중국 한의학에서 벗어나 허준의 동의학으로 발전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까지...

이게 모두 대왕세종과 그 시대 과학자들이 거둔 성과입니다.

 

 2. 신분을 초월한 세종의 '적재적소' 인재등용

 세종 시절을 빛낸 전문가 집단의 구성을 보면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팀이 떠오릅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장영실,

 그는 기생의 아들이자 맨 밑바닥에 있던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물론 그를 처음 발탁한 것은 선왕인 태종이었으나

 세종은 장영실을 국책프로젝트에 중용하고 

 사대부의 극렬 반대에도 불구 종6품(천문학교수, 현감벼슬과 동급)이라는

 파격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무당의 아들이었던 김문은 간신히 과거에 급제했으나 출신성분 상

 출세길이 요원했던 인물,

 세종은 그의 정보정리 능력을 보고 의학서 '의방유취'와

 역사서 '자치통감훈의' 편찬을 맡깁니다.

 

 박연은 별볼일 없는 그저 그런 관료였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세종의 배려로 음악에 전념하게 됐고,

 중국을 능가할 아악의 체계를 갖췄다는 '악성(樂聖) 박연'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면 세종 시대 집안좋고 머리좋은 '주류 엘리트'는 역차별을 받았는가?

 아닙니다. 세종은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되,

 그들이 얄팍한 학문으로 큰 권력을 휘두르는 '폴리페서'가 아닌

 특화된 분야에서 진짜 경쟁력을 갖춘 '전문 관료'로서의 길을 걷도록 독려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종이 집현전에서 웃옷을 벗어 덮어줬다는 신숙주의 사례.

 신숙주는 집안좋고 머리좋아 그 시대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대로라면

 지금의 사법부나 감사원 격인 '언관'(言官)이나

 행정부서인 육조(六曺) 쪽으로 빠질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학술기관인 집현전으로 끌어들인 세종은

 신숙주의 '언어 분야' 재능을 주목했고,

 신숙주는 결국 한글 창제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이후에는 외국어 실력을 활용, 세조에 걸친 시대까지

 당대 최고의 외교 전문가로 활약했습니다. 

 

 이순지는 원래 뼈대있는 양반가문의 엘리트였습니다. 

 행정관료로 앞길이 훤히 뚫려있던 이순지가 

 세종의 지시로 천문대로 들어갔고, 당시 중인계층이 하던 산학(算學)을 담당했죠.

 그러나 역사는 이순지를 '15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거정은 박연과 장영실을 예로 들며

  '이들은 모두 우리 세종의 거룩하신 제작을 위하여 시기를 맞추어 태어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때맞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종이 때맞춰

  그들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이었다."  - 함규진, '왕의 투쟁', 48쪽, 페이퍼로드, 2007.

 

 3. 국책프로젝트는 학제간 공동연구를 통해

 대왕 세종의 과학기술 정책 또 하나의 특징은

 대형 국책사업에 대한 공동연구 장려입니다.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도감'이라는 위원회를 조직,

 토목건축사업 등의 과제가 수행됐고

 천문기기 제작과 천문대 건립 역시 공동연구와 협동조직 체제를 위한

 임시기구가 구성됐습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356권에 달하는 의서 '의방유취' 편찬사업의 경우도

 대표 인물의 이름만 14명에 이르는 학자와 의사간의 조직적 협력으로 이뤄졌습니다.

 

 "김예몽, 유성원, 민보화 등이

  1차 기초자료 수집 및 부문별 정리요약에 관한 일을 맡아 수행했고,

  그 업적을 토대로 김민, 신석조, 이예, 김수온 등이 주역을 맡았으며

  의관(醫官) 김순의, 최윤, 김유지 등이 실무자로 편집에 종사했다.

  또 안평대군 용, 이사철, 이사순 등을 감독관으로,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의학자인 노중례가 총책임자로 참가하고 있다."

            - 전상운, '15세기 과학사의 중심_세종 임금', 한국과학기술인물12인 중 94쪽,2005

 

 4. 장영실 논란, 그는 과학자가 아닌 기술자였을 뿐?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를 3명 들라면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꼽고 싶다"

 "장영실은 일반인들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이지 학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과학자는 아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이천 밑에서 과학기구 제작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일간지에 소개된 한 과학사학자의 말입니다.(동아일보, '장영실만 있나?...' 2008.1.11)

 그의 논리는,

 사료를 보면 세종 시대 탁월한 과학성과는 대부분 공동연구를 통해 이뤄졌으며

 공동연구 책임자는 다른 과학자들의 몫일 뿐 장영실의 몫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측우기 개발에 참여한 적도 없는 장영실이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했다고 알려지는 등

 장영실의 과학성과가 그의 극적인 삶과 함께 과대포장된 채 전달, 

 대중이 영웅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중심의 해석'과는 달리

 '현대의 재연과학'은 장영실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지난 2007년 11월,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 '자격루'를 현대 공학기술로

 재연하는데 성공한 공학자 남문현 교수는

 '현대기술로 복원하는데 23년이 걸렸다'며 놀라움을 금치못했습니다.

 

 "이 자격루를 복원하는 데

  유기장 목수 옻칠장 등 장인과 기계공학자 3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15세기 당시에는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겠습니까.

  이는 그만큼 자격루가 위대한 과학적 성취였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남문현 건국대 교수의 말, 동아일보 '자격루 복원하는데 꼬박 23년, 조선 과학기술 새삼 놀라워' 2007.11.23

 

 우리 전통의 자동제어 시스템을 연구하던 중 '자격루를 연구해보라'는

 미국인 지도교수의 조언을 듣고 자격루 복원에 뛰어들었다는 남교수는

 자격루가 중국과 아랍, 비잔틴 지역의 시계제작술을 폭넓게 적용해 만든

 탁월한 시계였다고 평가합니다.

 

 자격루에 이어 옥루라는 또 다른 자동 물시계까지 거의 전적으로 만들어낸

 장영실은 그렇다면 과학자였을까,

 아니면 사대부 연구책임자 밑에서 잔심부름 하던 기술자였을까?

 아무리 세종이라 해도 장영실을 사대부 양반 과학자 위에 연구책임자로 올리는

 모험을 감수했을까?

 

 장영실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지금도 이러한데 500여년전 양반 사대부들의 왕국에서 노비출신 장영실은

 어떤 평가와 대접을 받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5. 장영실의 퇴장은 조선시대판 '바꿔치기'?

 과학자 장영실은 임금의 가마가 고장난 사건으로 곤장 80대를 맞은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대호군 장영실이 임금의 수레 제작을 책임졌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권95, 24년(1442) 3월16일(정축)조.

 

 부실 수레 사건으로 곤장형, 그리고 삭탈관직, 더이상의 기록 전무.

 이에 대해 과학사학자 문중양(서울대) 교수는 장영실에 대한 문책은

 당시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전문직 관료들의 책임행정 관행에 비춰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작은 사건에 불과하며 

 그 뒤 장영실이라는 이름이 더이상 실록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문책 때문이 아니라 더이상 그의 역할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문중양, '조선시대 최고의 기계기술자 장영실' 한국과학기술인물12인 중 116~117쪽, 2005 참조)

 

 그러나 역사기술가 김형광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장영실의 갑작스러운 퇴장에는 몇가지 의문이남는다며

 가마 사건이 장영실의 신분상승으로 인한 기존 질서파괴에 위협을 느끼던

 반대파가 기획한 흔들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레 제기합니다.

 

 "장영실이 바로 전해까지 정교한 과학 기구를 직접 발명했던 인물로서

  1년 사이에 갑자기 (신분상승으로 나태해져) 변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 장영실이 실제로 가마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의 감독관이었을 뿐이라는 점도 그렇다.

  물론 책임자였기 때문에 사고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이지만,

  장영실이 감독을 맡았던 가마만 부실하여 사고가 났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그동안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던 기술자들이

  임금이 탈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 리도 없다.

  따라서 그 사고는 이미 제작된 가마를

  누군가가 고의로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80쪽, 시아출판사, 2002.

 

 6. 말년의 세종은 과학자를 지켜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면 장영실을 그렇게 아꼈던 세종은 뭘했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가들은 왕의 권위가 하늘이었던 조선시대 상황속에

 왕의 가마를 부실로 만든 책임자를 죽이지 않고 곤장 80대로

 파직시킨 것만으로도 관대한 처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더구나 그 시절의 세종은 불행하게도 강력한 힘을 지닌 '대왕 세종'이 아니었습니다.

 '노인 세종'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고,

 관료집단의 조직적 반발이 극에 달하는 '레임덕'에 시달렸죠.

 

 "내 처음 즉위했을 때는 나라 사람들이 나를 현군(賢君)이라고 하고(중략)

  이즈음에 와서는 내가 하는 정사에 대해 다 이치에 당치 않다하고

  옳다고 하는 것이 한 가지도 없으니,

  불법(佛法)에 대해 나 혼자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불법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선왕을 위하여 불당 한 채를 세우는 일이 어찌 옳지 못한 일인가!" 

       - 전상운, '15세기 과학사의 중심_세종 임금', 한국과학기술인물12인 중 101~102쪽,2005.

 

 세종30년(1448년) 7월, 노인 세종은

 평생의 반려자였던 중전 심씨가 승하하자 마음의 상처를 입고

 궁궐 내부에 왕실 가족이 사용하는 전용사찰인 '내불당'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관료들이 '유교질서를 왕이 파괴하려 한다'며 들고 일어나

 꼬박 1개월동안 '동맹파업' 수준의 업무마비와 반대 상소에 휩싸이니

 이것이 바로 '내불당 논쟁'입니다.

 

 관료들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대간이 일제히 사직했고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고

 성균관을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천하의 세종 역시 이에 맞서 '일인 시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동맹시위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자신도 시위에 들어갔다. 먼저 수라 들기를 거부하는 단식 투쟁,

  다음은 "내가 부덕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위협.

  그래도 신하들이 물러서지 않자 마침내 궁궐을 나와

  임영대군의 집에 틀어박히기까지 했다.

  상상해보라. 역사상 최대의 성군, 당대 최고의 정치가 세종대왕이

  집에서 ?겨나듯 궁궐 문을 나와 아들 집으로 가는 모습을....."

          - 함규진, '왕의 투쟁', 72~73쪽, 페이퍼로드, 2007.

 

 세종 시절 마저도 이처럼 숨막히는 관료집단과의 힘겨루기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 32년(1450년) 2월14일, 결국 대왕 세종이 승하합니다.

 그 뒤 신분질서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료집단의 목소리는

 다시 왕실을 뒤덮었고 불과 5년 만에 왕실과 학문기관 집현전까지

 피로 물드는 참극(수양대군과 단종)이 빚어지게 되면서 15세기 과학강국은

 혼돈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7. 너희가 과학을 아느냐?

 천민 장영실이 이룬 과학성과를 직접 둘러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를 치하하시던 대왕 세종의 모습,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 - '세종실록', 세종15년(1433)9월16일(을미)조, 위 문중양의 글  

 

 만일 대왕 세종께서 오늘의 과학현실을 보신다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나는 천민의 자식에게도 기회를 주어 나라의 과학을 장려했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3년째 백의종군하는 과학자에게 기회조차 주려하지 않느냐?

  나라의 자랑이던 과학부총리를 없애고 연구기관을 통폐합시킴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더냐?"

 

 세종의 리더십이 가슴시리게 절실해지는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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