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다. 발아래의 세상이 깜깜하다. 먼 곳에 희뿌연 선이 가늘게 그어진다. 산봉우리가 희미하게 드러나고 그 너머 바다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먹물 같은 어둠을 지나 일출이 시작된다. 붉은 선이 양쪽 끝에서 가운데로 들어오며 노랗게 변하더니 분홍과 남색을 약하게 덧입는다. 오묘한 색의 선, 그것뿐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잠에서 깬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두꺼운 옷을 챙겼다. 몽롱한 상태의 일행이 두 대의 렌터카에 나눠 타고, 새벽 세 시의 적막 속으로 출발했다. 나무까지 잠든 숲속 도로는 가로등 하나 없어 사방이 칠흑 같다. 초행길의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에 의지한 채 바쁘게 달린다. 한참 가다 뒤돌아보니 따라오던 일행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저승 같은 어둠 속에 오직 우리뿐이다. 조마조마했지만 산 입구에 이르자 하나둘 자동차가 나타나더니 꽤 많아졌다. 높이 오를수록 기온이 내려가 창에 서리가 낀다. 정상 주차장에 도착하니 다섯 시. 산 아래보다 십여 도나 낮은 공기가 몸을 감싸 안는다. 눈을 크게 떠 어둠을 익혔다. 길을 더듬어 올라가 가까스로 앞자리를 잡았다.
할레아칼라는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섬 동쪽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높이가 태백산의 두 배나 되고 길이는 백 리가 넘으며 반대쪽 능선까지 가려면 산길이 능한 사람도 열 시간이 나 걸린다는 큰 산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서쪽 능선에는 간헐천이 있고, 침식이 심한 동쪽에는 깊은 계곡과 협곡이 많다. 크고 작은 분화구가 바람이 장난친 듯 변화무쌍하다. 광대한 사구는 움푹 파이고 둥그런 곡선으로 쌓여 노을이 꺼지는 찰나의 몽환적 분위기를 만든다. 화산 폭발로 올라온 산의 허리와 꼭대기에 구름이 연기처럼 걸려 있다. 가장자리에는 천체물리학 연구 단지인 ‘사이언스 시티’가 있고, 깊고 넓게 파인 여러 분화구가 달의 표면과 흡사해 우주 탐험가들의 훈련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산의 이름이 하와이말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마우이가 옷이 젖은 어머니에게 말릴 시간을 주기 위해, 그물로 해를 잡아 이곳에 가두었다고 하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일출 때 드러나는 산의 모습이 장관이지만 변덕 심한 날씨 때문에 힘들게 올라와서도 못 보는 경우가 많다.
여명이 밝자마자 수평선이 물들고 하늘이 환해지며 해가 둥실 올라오는 일출을 봐 왔던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바다같이 넓게 펼쳐져 있던 것이 뭉실뭉실한 구름이라 올라오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더디기만 하다. 이러다가 날씨가 나빠져서 해 뜨는 것을 못 보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어제의 강행군으로 어깨 위에 얹혀 있던 피로가 한층 무거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할레이칼라 일출이 어서어서 구름 위로 드러나기를…. 제법 오래 정지된 여명 속에서 애를 태우고 보채 보지만 깜깜 오리무중이다.
붉은 구름 위로 태양이 솟았다. 새까맣던 산봉우리가 흑갈색으로 드러난다. 햇살이 중심부 핵에서 나와 조금씩 굵어지고 광채를 내면서 사방으로 뻗는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구름이 희한한 물체를 만든다. 공룡과 바위 모양이던 것이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매끄러운 봉우리로 드러난다. 흑색 덩어리가 분화구로 부드럽게 흐르다가 갑자기 힘차게 뻗어 나간다. 매끄러운 삼각뿔, 부드러운 감람석의 결정체가 덮인 각양각색의 산봉우리들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면면히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모습에, 마치 화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깊은 심호흡을 한 후 숨을 멈췄다. 햇빛이 온몸을 어루만진다. 꽉 차 있던 피로가 스르르 발밑으로 빠져나간다.
할레아칼라의 태양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햇살이 천천히 올라오며 귀할수록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니 모든 것을 좀 더 여유롭게 대하라 이른다. 일출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낸 사실이 부끄럽다. 앞뒤 좌우를 살피고 생각해 가며 자유롭게 살겠다고 태양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몇 년 전이다. 분만실의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됐다. 밖에 있던 사부인과 나는 손을 꼭 잡았다. 급하게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잡느라 침을 꿀꺽 삼켰다. 초록 강보 위에 아기가 누워 있었다. 첫 손자다. 옆의 며느리도 건강해 보여 나도 모르게 높은 곳을 향해 ‘고맙습니다!’ 인사를 올렸다. 손자는 처음으로 세상을 대하면서 어색해하거나 힘든 기색 없이 또랑또랑 야무졌다. “안녕 얘야, 환영한다.” 할머니의 첫인사에 예쁜 웃음으로 화답했다. 분홍빛 웃음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에 넘쳤다. 얼굴은 아들을 빼닮았고 팔다리가 쭉쭉 긴 걸 보니 키는 며느리를 닮았는가 보다. 제 아빠와 엄마의 장점을 골라 닮았으니 재주도 좋은 놈이다. 자신 있게 세상으로 나온 손자는 가족을 기쁘게 하며 따뜻한 햇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출이라는 찰나의 순간은 항상 새롭고 경건하다. 할레아칼라 일출은 평안한 하루를 예고하고, 옳게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를 결심하며 천천히 산길을 내려온다. 햇살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내일은 또 다른 일출이 나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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